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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의 일이다. 잘못 짠 시간표 때문에 학교에서 시간 죽이기를 할 때면 늘 도서관 800번대 서가에서 서성였다. 한국 소설이 연대별로 꽂혀 있는 서가에서 한 칸만 걸어도 최윤과 배수아의 거리만큼 시차가 생겼다. 20여 년 전 내가 읽던 그 소설들은 이미 2020년대에 일부 소실되었다. 언급되지 않는 문학은 사라진다. (고정희의 시집조차 절판의 운명을 맞았는데, 다행히 일부 작품은 시간을 이겨내고 문학동네포에지로 재출간되었다.) 1권의 김명순부터 7권의 한강까지 그 이름들이 놓인 시대와 자리를 눈여겨 보게 되는 이유다.
알라딘 북펀드로 먼저 독자를 만나 펀딩 목표치의 9배 이상 선판매되며 이런 기획을 기다려온 '우리'의 존재를 가시화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정식 출간되었다.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된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의 첫 번째 연구 성과를 일곱 권의 책으로 엮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출현한 조선시대 말, 여성문학의 탄생기를 서술한 1권을 시작으로 최승자와 허수경, 김혜순과 이수명의 거리만큼이나 성차화된 개인이 출현한 1990년대를 엮은 7권까지, 한국 여성문학을 읽는 최초의 기준점을 세운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만든 너른 운동장엔 시, 소설 등 기존에 문학으로 인정받던 작품 말고도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등도 나란히 서 있다. 멋지지 않은 여성, 위대하지 않은 여성, 잘못한 여성의 문학도 함께 서서 다음 세기의 여성문학이 놓일 자리를 닦는다. 함께 걷는 길은 이제 외롭지 않다. 김초엽, 정세랑, 최은영 등 이 이름들 뒤에 올 여성들의 이름을 상상하며 글 쓰는 여자가 지나온 길을 따라 함께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