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 출생, 1964년 춘천고등학교 졸업,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1년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
1969년 월간스포츠 기자
1971~1981년 대한석탄공사 홍보실 사보담당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3년 신동아 복간기념 논픽션 당선
1981~1985년 한국일보 기자
1985~2002년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대한언론인회 회원
나당전쟁은 어찌하여 일어났는가. 당나라의 야욕 때문에 일어났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의 지배를 노리는 음흉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망국 백제에는 웅진도독부를, 망국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그리고 멀쩡한 독립국인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라는 허울 좋은 통치기구를 만들어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들었던 것이다. 이에 참지 못한 신라가 당군을 향해 선제공격을 가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669년부터 676년까지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가 국가 존립을 걸고 전면전을 각오한 비장한 생존투쟁이었다. 따라서 나당전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광복전쟁부터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이 소설 <나당전쟁의 승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이었다. 사료를 확인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찾아보다가 ‘신라본기’ 문무왕 16년(676년)조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았다. ‘겨울 11월에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우다가 패했으나 다시 진군하여 크고 작은 스물두 번의 싸움에서 이기고 4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사찬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8위 벼슬이다. 시득이란 인물은 <삼국사기> 전체를 통해 이 문무왕조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무왕 16년이면 나당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해이다. 기벌포는 오늘의 금강 하구, 군산과 장항 앞바다이다. 나당전쟁에 관해서 사료를 찾아보고 취재를 시작했다. 시득이란 인물은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으므로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나당전쟁을 소설화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처음에는 <기벌포의 승리>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써서 2019년 1월호 <한국소설>에 발표했다. <한국소설>은 한국소설가협회가 펴내는 소설 전문지이다. 그러나 나당전쟁이란 주제가 단편이나 중편소설로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은 그 규모도 크거니와 우리 역사에 미친 의미도 매우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만일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가 패망했다면 우리나라는 그때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패망했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그때부터 당나라의 영토가 되어 그 뒤의 남북국시대니, 후삼국이니, 고려니, 조선왕조는 있지도 않았고, 지금은 중국 변방의 한 성(省)이나 자치주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규모와 역사적 의미를 고려하여 나당전쟁의 전말을 장편소설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도 자연히 커져 나당전쟁의 원인이 된 신라의 통일전쟁까지 범위가 늘어났고, 주인공 김시득에 관한 내용도 크게 늘릴 수밖에 없었다. 김시득을 화랑 출신으로 설정하고, 나당전쟁 전 과정과 마지막 승리인 기벌포해전까지 그의 활약상을 묘사했다.
사실 김시득의 공로는 그 역사적 의미가 우리 역사를 빛낸 그 어떤 영웅호걸에 못지않게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없는 까닭에 지금까지 역사에서 무시당해온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마도 같은 시대의 김유신의 명성에 가려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신라의 이른바 ‘삼한통일’로 천손족(天孫族) 한민족이 고조선 붕괴 이후 700년간 분열된 열국시대에서 같은 언어, 같은 관습, 같은 종교의 같은 민족이라는 역사적 통일을 이루었다면, 나당전쟁은 그 민족적 합일성의 통일을 마무리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나당전쟁의 승리 이후 신라는 230년의 발해와 남북국시대를 거쳐 천년 사직을 이어갔으며, 그 뒤 고려왕조 500년, 조선왕조 500년, 대한민국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당전쟁은 그렇게 매소성전투와 기벌포해전을 끝으로 신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끝은 아니었다. 중국이 지금도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삼는 역사 왜곡과 날조와 탈취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거기에 더해서 이제는 고조선의 역사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시키는 황당무계한 작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고조선까지 빼앗기면 한국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사를 당나라 변방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던 나라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거란족의 요나라도, 여진족의 금나라도, 몽골족의 원나라도, 여진족의 청나라의 역사도 모두 중국사가 되고, 징기즈칸과 누르하치칸도 모두 중국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칭기즈칸을 몽골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해서 온 세상이 비웃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낯 두꺼운 민족이 한족(漢族)이다.
또 중국의 탐원공정·단대공정이란 것도 중국사의 상한선을 더 올려 잡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동이족 오랑캐의 역사라고 멸시하던 동이족의 유적, 고조선의 유적이 중국보다 훨씬 오래 전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중국사의 기원을 이제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하지 않고 요하문명을 중국사의 시원으로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이족도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이제는 단군왕검(檀君王儉)과 웅녀(熊女)도 저희 중국의 조상이라고 우기고 나서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무계하다. 단군 할아버지까지 중국인의 조상으로 빼앗기면 한국사는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5년간의 진통 끝에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20대부터 80대까지 누구나 재미있고 읽기 쉽게 쓰려고 애썼지만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부디 많은 독자가 읽고 우리 역사에 더욱 크고 많은 관심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출판을 맡아주신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와 훌륭하게 편집을 해주신 권보송, 서보미 님 등 편집진의 노고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