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으로는 치명상을 입을 것 같긴 한데 나의 경우, 삶을 둘러싼 조건이 답답할수록 그것을 묘사하는 목소리가 잡답해진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울 것이다. 화농이 익어가는 자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딱지가 앉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기대.
소설집에 수록된 「어디까지를 묻다」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제목은 물론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2001년도 애니메이션 「탑블레이드」를 염두에 둔 것이어서 패러디의 고의성을 드러내기 위해 제목을 가능한 한 경박하게 붙여보았다. 해당 애니메이션 내용에 대해서는 직접 본 적 없어 알지 못하며 다만 팽이와 성수(聖獸)라는 소재를 빌려 왔다.
거칠고 분방한 글들에 세심하고 꼼꼼하며 아름다운 한 획을 그어주신 윤경희 선생님과 문학과지성사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2015년 봄
라스트
shoe last는 구두 골 또는 화형靴型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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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리는 cobbler plier 또는 lasting pincer라고 하는데 일반 직선형 펜치가 아니라 가죽을 잡고 구부리기 쉽도록 집게의 모양이 새의 부리처럼 휘어진 물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왜 고소리라고 불리는지 어원을 알아내지 못했고, 발음으로 보건대 일본어에서 변형된 게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만 한다.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소리そり’는 칼과 같은 연장이 휘어진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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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선인장, 버섯 균사체, 파인애플 잎사귀, 포도 찌꺼기 등을 이용한 친환경 가죽이 생산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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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다만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나마 전해졌다면 그것은 최정우 님의 해설과 편집부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아픈 손가락이 될 것 같다. 그 통증이, 어쩌다 보니 좀더 있는 힘껏 물어뜯어 유혈 사태를 내지 못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그러니까 실은 미처 돌아봐주지 못해 안쓰러운 손가락일지도.
매번 비슷한 농도의 아쉬움을 남기고 가면서도, 당신들 덕분에 다음번 폭탄을 꽂을 지점을 찾아낸다. 조금도 서두를 필요 없다. 삶은 점화, 이 순간은 연소. 언젠가 다 타올라버리고 재가 되는 그날까지 가능한 유일한 행위는 투척.
첨언하자면 이 이야기는 미래가 아닌 현재의 가정법이다. 소설에 어떠한 연도도 기입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이며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2012년 1월
어떤 소설은 생물과 같아, 독자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변화합니다. 한편으로 어떤 소설은 화석과 같아, 고생대의 잔혹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하여 오래도록 꾸준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화석과 생물의 중간노선을 타는 개정판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책을 펴내고 지켜 주신 출판사 분들께 송구한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문을 열어 놓을 수 있었던 힘은, 적지 않은 의구심과 부족함 속에서도 독자님들이 그침 없이 보내 주신 성원에 있습니다. - 개정판 작가의 말 중에서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그러다 보니 귀향이나 회복, 치유와 화해를 넘어 미래에의 전망에 이르는 성장의 문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만 8년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니 처음엔 조금 당황했습니다. 성탄의 몰약과 유황에, 캐럴과 트리 장식에, 하얗고 포슬포슬한 눈송이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사회인 또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해 주곤 하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하는 힘은 표면보다는 이면에, 난롯가의 붉게 타오르는 불꽃보다는 남겨져 식은 잿더미에 더 많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이후로 쓴 모든 소설은 마법 빵집의 오븐에서 탈출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제 인생에서 영구 결번과도 같은 최초의 글자, 알파입니다.
- 2017년 12월 - 『위저드 베이커리』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출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