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완성했을 때 나는 스물네다섯 살이었다. 풋내기로 보일 수 있는 하지만 대학 학비를 감당할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열일고여덟 살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제법 풍부한 경험이 쌓여 있었다. 낮에는 대학교에서 ‘정의’의 정신을 공부했는데, 이는 ‘제도적으로 약자를 더 많이 배려한다’는 뜻이다. 밤에는 과외를 하면서 성적 때문에 야단맞아 기가 팍 죽은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 이 아이들은 밀크티 한 캔을 사 먹고 싶어도 부모님께 동전을 구걸하다시피 해야 했다. 나는 가정 안의 ‘정의’를 탐색하게 되었고, 그 무렵 타이완에서는 ‘세상에 잘못된 부모는 없다’는 말이 대세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때 느낀 알 수 없는 분노가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쓴 글은 하룻강아지처럼 무모한 면이 있었다. 깊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마음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마구 토해냈다. 하지만 이 사실만큼은 분명히 안다. 그때 내가 덜 무모했더라면, 나는 내가 간직한 아이의 마음에서 하루하루 멀어지며 주류에 순응하고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했을 거다.
세상에 나온 이 책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왜 효孝를 파괴하려 드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한동안 수많은 자리에서 ‘아이가 부모 소유가 아니라면 누구의 소유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상처도 많이 받았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내준 편지가 ‘모든 사람은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내 믿음을 지탱해주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성적 때문에 부모님에게 얻어맞는 일은 계속되겠지만 적어도 가장 큰 잘못을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그리고 이 깨달음이 미래로 나아갈 자신감을 주었다고.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는 게 맞다.
몇 년 뒤, 영광스럽게도 타이완 공영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다. 드라마의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여론의 중심에 섰지만 그즈음에는 타이완의 교육관이 좀 달라져 있었다. 많은 부모가 드라마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무엇보다도 감독, 극작가, 배우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천후이링陳慧翎 감독은 2023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이링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나는 그녀와 함께 아름답고 평온한 오후를 보냈다. 후이링은 어머니에게서 약간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고자 어릴 적부터 얼마나 애써야 했는지 털어놓았다. 그 말에 나는 후이링이 왜 이 드라마를 맡겠다고 자원했는지 퍼뜩 깨달았다. 또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한 사람에게 그토록 사무치는 아픔을 남긴다는 걸 알고 몹시 슬퍼졌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사적인 부분이라 타이완에서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내 글이 한국어로 번역된다고 생각하니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듯했다.
나는 서른여섯 살이 되었고, 어느덧 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 내 생각도 나도 모르게 ‘급진적’인 것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육적 학대’와 ‘체벌’에 훨씬 더 민감해졌고, 아이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며 함부로 때리고 꾸짖는 부모에게는 지지 대신 비난이 쏟아진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이에게 가하는 갖가지 벌을 정당화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뜻하지 않게 사회적 인식 전환의 목격자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최근 타이완에서는 ‘집중교육’이 유행이다. 나는 학원이 밀집된 동네에 사는데, 주말이면 여덟아홉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몰려온다. 몇 년 뒤에 명문 사립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 아이들은 종일 학원에 앉아 끝도 없이 문제를 푼다.
요즘 나는 한국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에 나온 대사를 즐겨 인용한다. “한국 아이들의 적은 학교, 학원, 그리고 부모다.” 한국을 타이완으로 바꿔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창작자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큰 힘을 얻었다. 이 기회를 빌려 언제나 사고의 밑거름이 되어준 한국 문화에, 그리고 내 마음을 토로할 기회를 준 마르코폴로 출판사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25년 봄 - 한국어판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