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과 같이 단순치 않은 시인의 상(像)을 그려낸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시인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저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떤 표정과 말씨로 대했을까, 묻고 또 물어야 했다. 그런 물음과 회의를 거쳐 구한 상(像)이라고 하는 것도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회의에 잠기곤 했다.
시를 위한 에피소드는 시보다도 즐겁고 시인보다도 광휘롭다. 그런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살 만한 곳이 되고 과거와 현재가 혼융하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킬킬거리며 골목을 거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시인들이 저마다 저 거리와 골목에서 우리를 향하여 웃고 북 치고 장구 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통의 시대를 관통해 갈 수 있겠는가.
역사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공식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밤새워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우리 역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꼭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한 편의 동화처럼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감동의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와 그 사건 주인공들의 이름을 머리를 싸매며 외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상들이 왜 만주 벌판으로 말을 타고 달렸으며, 어떻게 남해 바다에서 일본 군선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렀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공식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밤새워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우리 역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꼭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한 편의 동화처럼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감동의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와 그 사건 주인공들의 이름을 머리를 싸매며 외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상들이 왜 만주 벌판으로 말을 타고 달렸으며, 어떻게 남해 바다에서 일본 군선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렀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공식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밤새워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우리 역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꼭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한 편의 동화처럼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감동의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와 그 사건 주인공들의 이름을 머리를 싸매며 외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상들이 왜 만주 벌판으로 말을 타고 달렸으며, 어떻게 남해 바다에서 일본 군선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렀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공식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밤새워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우리 역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꼭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한 편의 동화처럼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감동의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와 그 사건 주인공들의 이름을 머리를 싸매며 외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상들이 왜 만주 벌판으로 말을 타고 달렸으며, 어떻게 남해 바다에서 일본 군선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렀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공식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호롱불 아래서 밤새워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우리 역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꼭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한 편의 동화처럼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감동의 역사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와 그 사건 주인공들의 이름을 머리를 싸매며 외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상들이 왜 만주 벌판으로 말을 타고 달렸으며, 어떻게 남해 바다에서 일본 군선들을 파죽지세로 무찔렀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이지 않게 흐르는……
1990년대 중엽, 한 친구에게 근황을 적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일어나, 건넛산에서 나무들이 기지개 켜고 일어나고, 골물이 졸졸졸 흘러내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풍경을 본다고. 때로는 비행기 같은 이물질이 지나는 것을 볼 때도 있다고. 그 같은 정경이 날마다 계속되는 가운데 서서히 여름이 가고, 나뭇잎들이 져 내리고, 흰 눈이 내린다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배후 없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현재가 과거라는 시간의 그림자를 끌고 이동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나 자신도 그런 그림자를 끌고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를 끌고 산을 넘고 넘어 어머니의 둥근 무덤으로, 어머니의 바다로 가고자 합니다. 나의 ‘창밖으로 세상 보기’는 어머니의 무덤과 바다를 보고자 한 여행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사람들은 시나 그림은 ‘和’를 근본으로 한다(聲音以和爲體)고 했습니다. ‘和’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평화이고, 그것들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로서의 ‘和’를 구하면서도, 그것들이 내면화되는 과정에서 솟구쳐 오르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울림 같은 화가가 그 예에 속합니다. 예울림의 나무와 돌, 무인성자에는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화가는 고향을 버릴 수 없습니다. 신생은 고향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향에서밖에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신생도 부활도 이 지구 위에서는 다 재현될 수 없습니다. 詩에서는 있을 수 있으되 현실에서는 없다는 것을 나는 침묵에서 봅니다. 있고/없음을 침묵은 껴안을 수 있습니다. 침묵은 고여 있지 않습니다. 침묵은 흘러갑니다. 그것은 그려져 있지 않는 빈 공간이라 해도 됩니다. 그려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없고 ‘有’의 세계를 감싸고 있으므로 그것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없음’ 혹은 침묵을 나는 쓰기가 어렵습니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을 나는 포기하고 줄글을 씁니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 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나는 바위에 앉습니다. 비린 내음을 풍기며 강물이 철철철 흘러갑니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세상 흐름을 얼마쯤 내다볼 줄 아는,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 꿈을 쓸 수 있도록 보이게, 보이지 않게 도와준 여러 친구들에게 감사드리며, 또한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꿈을 기록한 나의 시들을 아름다운 책으로 엮어주신 문학과지성사에 머리 숙여 깊이 인사드립니다.
2010년 2월
말들이 순하게 흘러가기 바라면서 반반세기하고도 또 반반세기를 시 써왔다.
이 시선집에 수록된 시들은 그런 바람을 폐부 깊숙이 담고 있으면서도 다시 보니
순하지 못하고 거칠고 조잡하다. 부끄럽다고 아니할 수 없지만,
그 부끄러움과 거침이 내 시의 거죽이 되고 있으니,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