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詩集의 詩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神, 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계속 읽다가 마주치게 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 그렇긴 하지만 神, 神할애비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神마저) 빠져나갈 수가 없는 초거대물리학, 초거대집단심리학이다.
*쓸쓸한 날에는 장자를 읽는다. 쓸쓸한 날에는 노자보다 장자가 더 살갑다. 그러나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하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장자의 없음으로서 있는 그림 떡이 있을 뿐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금상첨화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삶은 쓸쓸해진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은 기쁨이므로) 그렇게 쓸쓸해할 때의 나는 始源病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이라는 또 다른 증세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술을 천천히 마신다. 始源을 그리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꽃들이 어제 생겨난 듯하고 동시에 천만년 전부터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는 듯한 순수와 환희를 가득 풀어줄 어떤 始源性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다.
(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詩人이 아니더냐)
1. 이 詩集의 詩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2.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神, 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따라가다가 맞부딪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 그렇긴 하지만 神, 神할애비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神)마저 빠져 나갈 수가 없는 초거대물리학, 초거대집단심리학이다.
3. 쓸쓸한 날에는 장자를 읽는다. 쓸쓸한 날에는 노자보다 장자가 더 살갑다. 그러나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하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장자의 그림 떡이 있을 뿐 그것을 능가하는 금상첨화적인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쓸쓸해진다) 그렇게 쓸쓸해 할 때의 나는 始源病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이라는 또 다른 증상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술을 천천히 마신다. 始源을 그리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꽃들이 어제 생겨난 듯하고 동시에 천만년 전부터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는 듯한 순수와 환희를 가득 풀어줄 어떤 始源性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다.
(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詩人이 아니더냐)
2011년 4월
초판 시인의 말
여기 실린 시들은 한 권의 시집으로 묶기에는 좀 적은 분량인 마흔 편이다. 마지막 시집을 낸 것이 1993년이니까, 이제 그동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새삼’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5 년의 시간이란 한 권의 시집을 묶기에는 길다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참 많이 길었던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 5년이란 모든 것들, 나 자신, 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 세계에 너무 지쳤다고 이제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서 한 여행을 시작하여 그 여행을 마치고서 이제 비로소 한 입구, 다른 한 출발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 5년 동안, 시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씌어진 시들이 이 시집에 실린 것들이다.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그 시들 하나하나가 어떤 생각, 어떤 길,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가를 나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맨 처음 다섯 편의 시는 1993 년 부근의 나, 그러니까 깡깡하게 굳어져왔던 나의 흔적, 그 이전의 내 시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정서를 갖고 있다. 그리고 「우라노스를 위하여」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이어지는 시들은 내가 공부랍시고 한 여러 가지 상징체계들, 말하자면 음양오행론, 서양 점성술,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타로 카드 등을 거치면서 거기서 얻은 생각들을 내 생각들로 바꾸어 나를 바꿔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상황과 조건이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들이 나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시들인데, 물론 그것을 알아보는 것 또한 나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시들 하나하나에서 5년 동안 나 자신이 걸었던 짧거나 긴, 그리고 돌고 도는 여행들 중에서 어떤 때에 씌었던가를 아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세 편의 시, 「연인들」 1, 2, 3은 그 5년 과정을 마무리해주는,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한 출발점에 내가 서 있음을 보여주는 시들이기도 하다. 그 5년은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어느 한 수필에서 썼듯이, ‘죽음’의 죽음, 즉 ‘죽음’이라는 의식이 죽는 과정이도 했다. 이전의 내 의식이 얼마나 많은 죽음의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던가, 고통 외로움 불행감 등 온갖 형태의 죽음의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던가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주 긴긴 시간 체험, 먼 공간 체험, 깊은 의식의 체험이기도 했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나오는 연작시의 제목이며 이 시집의 제목인 ‘연인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제목은 여러 상징체계 중의 하나인 타로 대비밀 카드 중 6 번 카드, Lovers 에서 나온 것이다. 이 카드의 그림을 보면 우리가 흔히 천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어떤 천상적인 존재가 두 팔을 벌리고 있고, 그 아래 오른쪽에는 한 남자가 있고, 왼쪽에는 한 여자가 서 있다. 머리를 위로 들어올린 여자의 눈에는 그 천상적인 존재가 비쳐 담겨 있고, 남자는 그 여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고 그리고 거기 비친 그 천상적 존재, 그러니까 인간에게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어떤 천상적인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융식으로 보자면, 이 남자와 여자는 아니무스, 아니마의 개념이기도 하다. 융은 성(聖)의 3대 요소에 제 4의 요소인 페미닌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한적이 있다. 이때의 페미닌적 요소는 남성, 여성을 구분할 것 없이, 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페미닌적 요소이다. 이것은 다시 우리의 단군신화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거친 성격을 가진 호족을 이겨낸 웅족의 따님이 환인을 거쳐 내려온 환웅과 결혼하여 낳은 단군, 그러니까 하늘과 땅의 결합체이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페미닌적 요소이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을 구분
할 것 없이 이 지상 사람들 모두가 천상적 존재를 껴입은 땅님, 즉 따님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쓰인 시가 연작시 「연인들」이고, 그중에서도 「연인들 1—빛의 혼인」이 그런 생각에 가장 가까운 시이다.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수천 길 땅속에서 끌어낸
나의 신부, 그 몸에 빛이, 생기가 돌고,
나의 잠자는 미녀,
이제 그 눈을 떠라,
나의 페르세포네, 나의 에우리디케,
오 나의 신부, 나의 누이여,
나의 말쿠스,
나의 웅녀, 나의 따님.
1999년 1월
최승자
개정판 시인의 말
절판되었던 시집을 다시 펴본다.
절단되었던 다리가 새로 생겨나오는 것 같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달려왔던 시간,
무지막지한 고통 속을 헤매었던 시간,
그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는 이 시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가히 참, 아름답다.
2022년 1월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