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村 上 春 樹
HARUKIMURAKAMI ⓒIvánGiménez_TusquetsEditores
1949년 교토 출생. 1968년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해 전공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1982년 첫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노마문예신인상을,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해 하루키 신드롬을 낳았다. 1994년 《태엽 감는 새》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고, 2005년 《해변의 카프카》가 아시아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2006년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상’을, 2009년 이스라엘 최고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수상했다. 전세계 사십 개 이상의 언어로 오십 편 이상의 작품이 번역 출간된 명실상부한 세계적 작가이다.
제2의 하루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1Q84》를 비롯한 장편소설 《애프터 다크》 《댄스 댄스 댄스》, 단편소설 《빵가게 재습격》 《도쿄기담집》 외에 《후와후와》 《시드니!》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등 개성적인 문체가 살아 있는 에세이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밖에, 평소 좋아하던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작가 특유의 언어로 일본 독자에게 소개하는 등 번역가 하루키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COVER ILLUSTRATION_MAKOTO WADA X MIZUMARU ANZAI
디자인 정지현 ⓒ김영사 디자인실
머리말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
서문
해설
등
자기란 무엇인가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같은 공기를 마시는구나, 라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난처한 세상
안자이 미즈마루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인사말
메시지
등
마흔 살이 되면 군조신인문학상 수상소감
앞으로 아직 한참이니까 노마문예신인상 수상소감
까맣게 잊어버려도 괜찮아 다니자키상을 받은 무렵
신기하면서 신기하지 않다 아사히상 수상 인사말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고 할까 와세다 대학 쓰보우치 소요 대상 수상 인사말
아직 주위에 많이 있을 터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수상 인사말
제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 신부상 수상 인사말
내 안의 미지의 장소를 탐색할 수 있었다
도넛을 베어먹으며
좋을 때는 아주 좋다
벽과 알 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
음악에
관하여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
짐 모리슨의 소울 키친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고
일본사람이 재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빌 크로와의 대화
뉴욕의 가을
모두가 바다를 가질 수 있다면
연기가 눈에 스며들어
한결같은 피아니스트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해
노웨어 맨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사람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
《언더그라운드》에
관하여
도쿄 지하의 흑마술
공생을 원하는 사람들, 원치 않는 사람들
피와 살이 담긴 말을 찾아서
번역하는 것,
번역되는 것
번역하는 것과 번역되는 것
내 안의 《파수꾼》
준 고전소설로서의 《롱 굿바이》
말코손바닥사슴(무스)을 쫓아서
스티븐 킹의 절망과 사랑 양질의 공포 표현
팀 오브라이언이 프린스턴 대학을 찾은 날
바흐와 오스터의 효용
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
레이먼드 카버의 세계
스콧 피츠제럴드 재즈 시대의 기수
소설보다 재미있다?
단 한 번의 만남이 남긴 것
기량 있는 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같은 동시대 작가가 있다는 것
번역의 신
인물에
관하여
안자이 미즈마루는 칭찬할 수밖에 없다
동물원통
쓰즈키 교이치적 세계의 내력
수집하는 눈과 설득하는 말
칩 키드의 작업
‘가와이 선생님’과 ‘가와이 하야오’
눈으로 본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
데이브 힐튼의 시즌
올바른 다림질 법
청어 이야기
잭 런던의 틀니
바람을 생각하자
토니 타키타니를 위한 코멘트
다른 울림을 찾아서
질문과
그 대답
폼나게 나이 들기는 어렵다
포스트코뮤니즘 세계로부터의 질문
짧은
픽션 《밤의 거미원숭이》 아웃테이크
사랑 없는 세계
가라타니 고진
덤불 속 들쥐
소설을
쓴다는 것
유연한 영혼
멀리까지 여행하는 방
나의 이야기와 나의 문체
온기를 자아내는 소설을
얼어붙은 바다와 도끼
이야기의 선순환
해설
대담 안자이 미즈마루×와다 마코토
회색 쥐와 깜장 토끼
작가로 데뷔한 지 삼십 년 남짓, 이런저런 목적으로 이런저런 지면에 글을 써왔는데 아직 단행본으로 발표하지 않은 글들을 여기에 모았습니다. 에세이를 비롯해 여러 책들의 서문·해설 그리고 질문과 그 대답은 물론 각종 인사말, 짧은 픽션에 이르기까지 실로 ‘잡다’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 되었습니다. 미발표작들도 꽤 있습니다. 좀더 평범한 제목을 붙여도 좋았을 테지만, 편집자와 협의하는 자리에서 줄곧 ‘잡문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뭐, 그대로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라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잡다한 글들이니 철저하게 잡다하게 가도 괜찮을 거라고.
일단은 프로 작가로서 삼십 년 넘게 글을 써왔기 때문인지 이렇게 묶고도 이보다 많은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집 창고(비슷한 곳)에 가면, 옛날에 글을 게재했던 신문이나 잡지들이 종이상자로 몇 상자나—산더미 같다는 표현까지는 안 쓰겠지만— 쌓여 있습니다. 그밖에 이사하는 중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도 상당히 많을 겁니다. 그런데 작정하고 앉아 다시 읽어보니, 젊은 시절에 쓴 에세이류는 ‘지금은 좀 그런걸’ 싶은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이런 글도 썼나’ 하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거나 한숨이 나올 때가 많아서 결국 살아남은 글은 그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열심히 쓴 글이지만…….
내가 의뢰를 받아 조금씩 일을 시작했을 무렵, 어느 편집자에게서 “무라카미 씨, 처음에는 어느 정도 대충 써나가는 느낌으로 일하는 편이 좋아요. 작가란 원고료를 받으면서 성장해가는 존재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과연 그럴까’라며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옛날 원고들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이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하고 납득이 갔습니다. 수업료를 내는 게 아니라 원고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더 나은 글을 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왠지 좀 뻔뻔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리 미덥지 않은 나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내는 의미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예전에 쓴 잡문들을 모아 다시 읽는 일은 일단(절대로) 없었을 테니까.
책에 실을 글을 선택하는 일도 고생스러웠지만, 구성 면에서도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전체를 열 개의 범주로 나누고, 각각에 글을 배분했습니다. 완벽하게 학술적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냥 왠지’라는 느낌상의 구분입니다. 인사말 항목은 거의 연대순(시계열적)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딱히 명확한 순서 없이 배열했습니다. 이쪽에 넣었다 저쪽에 넣었다 차례 정하기도 꽤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단순히 연대순으로 묶으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읽을 때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매체에 실을 목적으로 쓴 글들이다보니 같은 내용이 부분적으로 겹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걷어낼 수 있는 부분은 걷어냈지만, 걷어내버리면 글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경우도 있어서 그럴 때에는 중복된 부분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 이 얘기는 아까도 읽었는데’라는 내용도 있을지 모르지만, 책의 성격상 그런 부분은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다 마코토 씨와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연합 전시회 비슷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그림들을 보던 중에 두 분의 그림으로 표지를 멋지게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산만한 구성의 책이니 비주얼적인 요소로 그것을 한데 모아주는 기둥 같은 역할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하는 김에 두 분에게 나에 관한 대담을 부탁드리고, 그것을 후기로 붙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와다 씨와 미즈마루 씨에게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써온 잡문을 슬슬 책으로 꼴을 갖추어보자는 계획은 칠팔 년 전부터 있었지만, 줄곧 소설을 쓰는 데 바빠서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침 소설과 소설 사이, 이를테면 ‘농한기’라서 비교적 느긋하게 편집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씩이나 미뤄온 덕분에 내용은 맨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얼마간 풍부해진 책이—바라건대 더 충실한 책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의 정신은 온갖 잡다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이란 정합적이고 계통적이면서 설명 가능한 성분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러한 내 정신 안에 있는 세세한, 때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긁어모으고, 그것들을 쏟아부어 픽션=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시 보강해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날것인 형태로 그것들을 아웃풋하는 일도 가끔은 필요합니다. 픽션이라는 형식으로는 다 주워담을 수 없는 자잘한 세상사도 조금씩 찌꺼기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재를 에세이(잡문) 형식으로 조금씩 주워담게 됩니다. 혹은 또한 현실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느 정도 날것인 형태로 스스로를 표현할 필요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인사말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설날 ‘복주머니’* 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입니다. 복주머니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복주머니니까요. 그렇지만 이런저런 참작 끝에, 내 안에 있는 ‘잡다한 심경’의 전체상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느껴주신다면, 한 사람의 작가로서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 일본에서 설에 여러 가지 물건을 담고 봉해서 값싸게 파는 것으로 사고 난 후에야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주머니.
끝으로 원고료까지 지불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엿한 작가(에 가까운 존재)로 키워주신 각 출판사 및 편집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11년 1월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오바 다케시의 저서 《나라는 미궁》(센슈다이가쿠슛판코쿠, 2001년 4월 출간)의 ‘해설 비슷한 글’로 쓴 글입니다. 오바 씨는 철학자라고 할까 사색가로(말하자면 매우 어려운 것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 같은 사람이 넉살 좋게 나설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뭐든 좋으니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런 내용을 썼습니다. 오바 씨는 프린스턴 대학에 있을 때 알게 된 지인입니다.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령 아마미의 검정 토끼 관찰* 을 통해 볼링공을 묘사하는 경우라도.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 가고시마 현에 위치하는 아마미 시에 사는 특별 천연 기념물 아마미 검정 토끼를 사진가 하마다 후토시가 진행하는 관찰기록하는 프로젝트.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 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
독자는 그 가설의 집적을—물론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을 때 얘기지만— 일단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질서에 따라 다시 한번 개인적으로 알기 쉬운 형태로 배열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작업은 거의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행해진다. 내가 말하는 ‘판단’이란 결국은 그 개인적인 배열 작업을 가리킨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 조성의 패턴을 재조합하는 샘플이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는 그런 샘플링 작업을 통해서 살아가는 행위에 포함된 운동성=다이너미즘을 내 일처럼 리얼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일을 해야만 할까? ‘정신 조성의 패턴’을 실제로 다시 짜는 일은 인생에서 몇 번이고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픽션을 통해 일단 시험적으로나 가상적으로 그러한 샘플링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이란 사용된 소재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허구=의사疑似지만, 그에 뒤따르는 개인적 질서와 배열 작업의 과정을 보면, 명백하게 실제적인 것이다(그래야만 한다). 우리 소설가가 철저하게 허구에 구애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 허구 속에서만 가설을 유효하고 콤팩트하게 쌓아올릴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픽션이라는 장치에 정통해야만 고양이들이 곤히 잘 수 있는 것이다.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소설가에게는—아니, 그렇다기보다 적어도 나에게는—거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소설가에게 너무도 자명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른 종합적 형태로(즉, 이야기의 형태로) 치환해나가는 일을 일상적 업으로 삼고 있다. 그 작업은 지극히 자연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질문 자체를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한다 해도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오히려 방해가 된다. 혹시 ‘자기란 무엇인가?’를 장기간에 걸쳐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그녀는 본래적인 작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그녀가 뛰어난 소설을 몇 권쯤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의 소설가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이메일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으니 대략적인 내용만 쓴다.
며칠 전에 취직 시험을 봤는데, 그때 ‘원고지* 4매 이내(무라카미 주 : 였던 것 같다)로 자기 자신에 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원고지 4매로 저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프로작가는 그런 글도 술술 쓰시나요?
* 일본에서는 400자 원고지가 기본형.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그건 굳이 따지자면 의미 없는 설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하면, 시험 삼아 굴튀김에 관해 써보십시오.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상관없습니다. 토요타코롤라든 아오야마 거리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든 뭐든 좋습니다. 내가 굴튀김을 좋아해서 일단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렇다, 소설가란 이 세상의 굴튀김에 관해 어디까지나 상세하게 써나가는 인간을 가리킨다. 자기란 뭘까? 하고 생각하자마자(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우리는 굴튀김이나 민스 커틀릿이나 새우 크로켓에 관한 글을 써나간다. 그리고 그런 사상事象·사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방향을 데이터로 축적해간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린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가설’의 대략적인 의미다. 그렇게 해서 그 가설들이—층층이 쌓인 고양이들이— 열기를 띠고, 그렇게 하면 이야기라는 비히클(탈것)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 논리적인 왜곡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젊은이들을 옴진리교(또는 다른 컬트 종교)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오바 다케시 씨가 이 책에서도 자주 지적하고 있다. 나는 《약속된 장소에서》라는 책을 쓰면서 옴진리교 신자 몇 사람과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대체로 그 지적이 옳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라는 존재의 ‘본래적 실체’란 무엇인가 하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고의 트랙에 깊숙이 빠져들어 현실세계(임시로 ‘현실A’라고 하자)와의 물리적인 접촉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인간은 자기를 상대화하기 위해 피와 살을 가진 몇 가지 가설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치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가 물과 불의 시련을 헤쳐나가면서(은유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사랑과 정의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에 해당하는 포지션의 실상을 인식해가듯이.
그러나 실제로 지금 우리를 에워싼 현실은 각종 정보와 선택지로 넘쳐나 그 가운데 자기에게 유효한 가설을 적절히 골라내어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들을 무제한으로 무질서하게 체내에 받아들여 자가중독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그녀를 이끌어줄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현실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선행한 세대가 축적한 경험이 샘플로서 유효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따금 강력한 외부자가 나타난다. 그 외부자는 몇 가지 가설을 알기 쉬운 세트메뉴로 만들어 그들에게 건네준다.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깔끔한 패키지로 완비되어 있다. 지금까지 혼란스럽던 ‘현실A’는 온갖 제약과 부대조건과 모순을 떨쳐버리고 더 단순하고 ‘클린’한 다른 ‘현실B’로 바뀐다. 그곳에는 선택지의 수가 한정되고, 모든 질문에 논리 정연한 해답이 마련된다. 상대성은 밀려나고 절대성이 그 자리를 꿰찬다. 그 새로운 현실에서는 그/그녀가 맡을 역할이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해야 할 일이 상세한 일정표로 준비된다.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 달성 수준은 숫자로 계측되고 도표로 그려진다. ‘현실B’에 있는 자기는, ‘프리pre 자기’와 ‘포스트post 자기’ 사이에 끼어버리기 때문에 정당한 존재 의미와 전후성을 획득한 자기이며,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매우 이해하기 쉽다. 그 이상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을 손에 넣기 위해 그/그녀가 상대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은 과거의 현실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진부한 현실 속에서 늘 허둥대며 고투했던 볼썽사나운 자아뿐이다.
“달려나가요”라고 외부자는 말한다.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오래된 대지에서 뛰어나와 새로운 대지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거래 자체는,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소설가는 때에 따라 그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 “뛰어요”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독자를 이야기라는 현실 밖의 시스템으로 끌어들인다. 환상을 강요한다. 떨쳐 일어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새로운 숲속으로 몰아넣는다. 단단한 벽을 빠져나가게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한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을 일어났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고, 포개어 있던 고양이들은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펴며 꿈에서 깨어난다. 독자는 그 기억을 부분적으로만 간직할 뿐 원래 있던 현실로 되돌아간다. 경우에 따라 예전과 얼마간 빛깔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변함없이 낯익은 현실이다. 그 계속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는 열려있다. 최면술사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손뼉을 쳐서 피험자의 잠을 깨운다.
그러나 개인으로 아사하라 쇼코* 가, 조직으로 옴진리교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 일은 그들의 이야기의 테두리를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다. 두툼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초래하는 폐쇄성을 한층 더 큰, 더 견고한 폐쇄성으로 바꿔놓았을 뿐이다.
* 본명은 마쓰모토 지즈오, 종교단체 옴진리교(현재는 알레프)의 옛 대표이자 교주.
계속성의 단절—그것이 분명 키포인트다. 계속성을 끊어내는 것으로(혹은 계속성으로 무기한 위장해놓는 것으로) 현실은 언뜻 제대로 정합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성이라는 조금은 비루하지만 필요 불가결한 공기구멍이 인위적으로 막혀버리면 좋든 싫든 내부는 산소 부족 상태로 치닫는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고, 실제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옴진리교는 아니지만, 예전에 어느 유명한 컬트 종교에 빠진 경험이 있는 남자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컬트 수행장(같은 곳)으로 들어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생활을 했다. 경전 이외의 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그들은 신자가 픽션을 접하는 것을 일절 허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허락되는 허구의 채널은 단 하나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내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을 짐 꾸러미 바닥에 몰래 숨기고 들어가서 남의 눈을 피해 날마다 조금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이런저런 힘든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그 컬트의 정신적 속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현실로 복귀해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다. 왜 매일같이 매달리듯 그 소설을 읽었는지, 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그 책을 버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그도 잘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혹시 그 책을 계속 읽지 않았다면, 과연 그곳에서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 어땠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편지였다. 나의 고양이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쓴 소설이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그것이 어떤 특정한 유효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소설가로서 그 사실이 기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둘러싼, 지난하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컬트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명쾌한 형식을 가진 강력한 이야기를 마련하고, 그 서킷으로 사람들을 꾀어들이고 끌어넣으려 한다. 그것은 유효성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효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불순물이 거의 끼어들지 않는다.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요인은 조개를 해감하듯 애초부터 말끔하고 교묘하게 배제되었다. 논리는 나름대로 일관되게 통한다. 망설일 것도 고민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혹시 풀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해소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자, 좀더 노력하십시오, 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노력은 정당하게 보상받는다. 닫힌 테두리는 닫힌 채로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했기 때문에 강력한 즉효를 보인다.
그에 비해 우리 소설가들이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시간이 걸리고 품이 든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끝까지 못 찾을 수도 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유효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성가신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명쾌한 대답은 없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드는데”라고 우물우물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다.
무언가.
그러나 그들에게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것도 있다. 많지는 않아도 조금은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계속성이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실증된 영역에서 일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문학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무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사적인 즉효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은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런 것들에 대항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물론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있고, 자기모순이 있고, 내분이 있고, 이단이나 탈선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학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해왔다. 문학이라는 것 안에는 그렇게 계속성 안에서(그 안에서만) 언급되어야 할 강력한 특질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강력함은 예컨대 발자크의 강인함이며, 톨스토이의 광대함이며, 도스토옙스키의 심오함이며, 호메로스의 풍부한 비전이며, 우에다 아키나리의 투철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쓰는 픽션은—번번이 호메로스를 언급하자니 면목이 없지만— 그때부터 끊임없이 계속해서 흘러온 전통 위에 성립한다. 나는 소설가로서 주위가 고요히 가라앉은 시각에 그 흐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때가 있다. 나는 물론 이렇다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해나가는 것은 예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더없이 소중한 무엇이며, 틀림없이 앞으로도 이어져나가리라고 나는 느낀다.
이야기는 마술이다. 판타지 소설풍으로 말하자면, 소설가는 그것을 이를테면 ‘백白마술’로 사용한다. 일부 컬트는 그것을 ‘흑마술’로 사용한다. 우리는 깊은 숲속에서 격렬하게 칼날을 부딪치며 남몰래 겨룬다. 흡사 스티븐 킹이 쓴 청소년 소설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이미지는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을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가지는 큰 힘과 그 이면에 감춰진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계속성이란 도의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의성이란 공정한 정신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얘기해보자. 아래의 글은 이야기의 본래 줄거리와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굴튀김이라는 것을 잘 풀어서, 나 자신을 얘기하고 싶다. 데카르트나 파스칼이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 망막한 길을 헤쳐나가다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나 나름의 계속성이나 도의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까지 든다. 아니, 그런 것을 실제로 찾으려 들지는 않는다. 찾는다고 해도 내게는 거의 쓸모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싶다.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간단히 말해 이렇다. 나의 테두리는 열려 있다. 뻐끔 열려 있다. 나는 그곳으로 세상의 굴튀김과 민스 커틀릿과 새우 크로켓과 지하철 긴자선과 미쓰비시 볼펜을 잇달아 받아들인다. 물질로, 피와 살로, 개념으로, 가설로.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활용해 개인적인 통신장치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마치 ‘E.T.’가 주변에 널린 잡동사니를 조립해서 행성 간의 통신장치를 만들어낸 것처럼. 뭐든 좋다. 뭐든 좋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내게는. 진정한 내게는.
‘굴튀김 이야기’
추운 겨울날의 해질녘에 나는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삿포로 중간 병)와 굴튀김을 주문한다. 그 가게에는 다섯 개짜리 굴튀김과 여덟 개짜리 굴튀김, 이렇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정말 친절하다. 굴튀김을 많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는 굴튀김 큰 접시를 내어준다.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에게는 굴튀김 작은 접시를 내어준다. 나는 물론 여덟 개짜리 굴튀김을 주문한다. 오늘 나는 굴튀김을 배불리 먹고 싶으니까.
굴튀김에는 잘게 채 썬 양배추가 푸짐하게 곁들여나온다. 달착지근하고 신선한 양배추다. 원하면 추가로 주문할 수도 있다. 추가 요금은 오십 엔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로 굴튀김 그것이 먹고 싶어서이지 곁들여나오는 양배추를 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 처음에 수북이 담아준 양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접시 위의 튀김옷에서 아직도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다. 내가 보는 앞에서 주방장이 막 튀겨냈다. 큼지막한 기름 냄비에서 내가 앉은 카운터 자리까지 옮기는 데 불과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예를 들어 싸늘한 해질녘에 갓 튀긴 굴튀김을 먹는 경우에는— 속도는 큰 의미를 가진다.
젓가락으로 그 튀김옷을 둘로 툭 자르면, 그 안에 굴이 여전히 굴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굴이고, 굴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빛깔도 굴이요, 형태도 굴이다. 그것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밤낮도 없이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굴다운 것을 (아마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접시 위에 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굴이 아니고 소설가라는 사실이 기쁘다. 기름에 튀겨 양배추 옆에 누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일단 윤회전생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다음 생에 굴이 될지도 모른다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을 차분하게 입으로 가져간다. 튀김옷* 과 굴이 내 입 안으로 들어간다. 바삭한 튀김옷을 씹을 때의 감촉과 부드러운 굴을 씹을 때의 감촉이 당연히 공존해야 할 식감으로 동시에 감지된다. 미묘하게 뒤섞인 향이 축복처럼 입 안에서 퍼져간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굴튀김이 먹고 싶었고, 그리고 이렇게 여덟 개짜리 굴튀김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짬짬이 맥주까지 마실 수 있다. 그런 것은 한정된 행복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내가 한정되지 않은 행복을 맛본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었을까?
* 일본어로 튀김옷[고로모]은 승려의 ‘법의’와 동음이의어.
나는 생각해본다. 그러나 결론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얽혀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히 결론지을 수는 없다. 굴튀김 안에서 무슨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한동안 남은 굴튀김 세 개를 골똘히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나는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역을 향해 걸어갈 때, 나는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그것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굴튀김은 일종의 소중한 개인적 반영이니까. 그리고 숲속 저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가 싸우고 있으니까.
와다 마코토 씨와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공저 《노 아이디어》(긴노호시샤, 2002년 10월 출간)의 서문으로 쓴 글입니다. 나는 두 사람과 가깝게 지내며 책 표지 같은 것을 부탁하기 때문에 “글 좀 써줘”라는 부탁을 받으면 “좋습니다”라고 부담없이 받아들이고 부담없이 술술 쓰게 됩니다. 잘 아는 사람(들)에 관해 쓰기는 쉽습니다. 두 사람 다 문장력이 뛰어난 그림꾼이지만, 소설가인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립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군요.
와다 마코토 씨와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는 책 표지나 삽화 건으로 자주 함께 일해서(라기보다 일해주셔서) 꽤 오래전부터 친분을 맺어왔다. 그러나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두 사람 다 옛날부터 아오야마 부근에 살았고, 또 일하는 곳도 그 근처라 밤이 되면 대개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거나—뭘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바에서 한잔하기도 한다. 개인전 같은 전시회도, 그리 큰 규모가 아닐 때는 아오야마의 아담한 화랑에서 열 때가 많다.
나 역시 줄곧 아오야마 생활권에 살고 있어서 그 결과 빈번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나는 밤에 상당히 일찍 자기 때문에— 어쩌다 이따금씩 얼굴을 마주친다. 직접 만나지는 않아도 근처 바에 가면, “조금 전까지 와다 씨가 계셨어요”라거나 “어제 미즈마루 씨가 다녀가셨는데, 요즘은 통 무라카미 씨를 못 만났다고 하시던데”라고 바텐더에게 듣기도 한다. 도쿄는 큰 도시지만, 오랫동안 한곳에 살다보면 사람의 활동반경이란 의외로 한정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한정된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앞에서도 썼듯이 나는 자주 와다 씨나 미즈마루 씨와 같이 일한다. 그럼 지금까지 같이 일한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누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예를 들어 사사키 마키 씨) 다른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 그만큼 두 사람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뜻이겠지.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고 맡겨두면, 상황에 딱 들어맞는 멋진 그림이 완성되어온다. 그런 부분의 일처리에는 전혀 삐걱거리지 않고, 늘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다. 좌우간 노련한 전문가들이다.
물론 가까이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그런 요인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두 사람 다 화풍이 매우 도회적이랄까, 디테일 하나하나가 세련되었다. 문장으로 비유하자면, 문체가 탄탄하면서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느낌이 없다. 소탈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이런 성향은 어쩌면 아오야마의 바에서 오랜 세월 술을 마시는 사이에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면이 조금은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좀 덜 마셨는지 좀처럼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지만.
문체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의 문체의 멘탤리티는 매우 비슷하기도 하고 또한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대략적으로 말해—물론 내 개인적인 인상일 뿐이지만— 와다 씨의 그림은 단정하고 지적이며 철저하게 취미가 고상하고, 매사를 살짝 초서처럼 흘리는 미즈마루 씨 쪽은 생동감과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종이에 연필로 동그라미 하나를 쓱 그려도 미즈마루 씨가 그리는 동그라미와 와다 씨가 그리는 동그라미는 미묘하게(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를 것이며, 나는 분명 그 차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콜먼 호킨스와 레스터 영의 테너 색소폰 소리를 네 마디만 듣고도 금방 알아맞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 줄만 읽으면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상의 차이를 알아맞힐 수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런 예처럼 두 사람이 그리는 그림에는 각각, 가령 무엇을 그리든, 헷갈리지 않는 또렷하고 독자적인 서명이 들어 있다. 물론 앞의 두 가지 예와 마찬가지로 어느 쪽 그림이 더 뛰어나느냐 하는 비교는 아니다. 어느 쪽도 다 좋다, 정말로.
이 책에 실린 와다 씨와 미즈마루 씨의 연합 전시회가 열린 아오야마의 작은 화랑에서는 각각의 그림에 화가의 이름을 붙여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관람객은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물론, 와인잔을 한 손에 든 채로 어떤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맞힐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떠신지? 물론 미즈마루 씨나 와다 씨처럼 여유 있는 대인배들이라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이런 놀이가 내재된 기획은 상당히 유쾌하다. 특히 아주 가까운 이웃에서 기분 좋게 펼쳐진다면.
2002년 6월에 《요지경 민주주의》(소시샤, 신초분코에서 개정판)의 해설로 쓴 글입니다. 다카하시 씨는 이 책의 해설을 누구에게 부탁할지 몰라 늘 그렇듯 울적한 기분으로 턱수염만 쓰다듬고 있다가, 아내에게 “무라카미 씨한테 찾아가서 단단히 부탁하고 오세요”라고 야단을 맞고야 마음을 정하고 나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워 말고 빨리 말하면 좋았을걸. 교정지 상태였을 때 제목은 《민주주의의 요지경》이었습니다. 지금 제목이 훨씬 좋군요.
다카하시 히데미네 씨는 조금 독특한 사람으로 만날 때마다 늘 “야아, 곤란합니다. 난처해요”라고 말한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대체로 햇볕에 그을려 있고(취재 나가느라 그을렸는지 모른다), 새카만 수염까지 길러서 옛날 같으면 그야말로 ‘대장부’라 할 만했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심복에 어울릴 법한 사람이다. 대학 시절에는 유도를 했고 물론 유단자다. 그런 사람이 나를 만날 때마다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머리를 긁적이며 “야아, 무라카미 씨, 곤란하게 됐습니다. 난처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뭐가 그렇게 난처한데?”라고 물으면, “저어, 실은 이런 일이 있는데……” 하고 커피를 리필받으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생긴 것과 달리 술은 거의 안 마신다). 얘기를 들어보면, 분명 다카하시 씨가 말하는 대로다. 난처해하는 문제가 업무적인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그는 대체로 굉장히 ‘일관성 있는’ 방식으로 난처해하고 곤란해한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푸념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비관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무력함을 자학하며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단순히 긍정적으로, 열심히 난처해한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 “그래, 그건 분명히 난처하겠어”라고 대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죠? 누구라도 난처하겠죠” 하고 그는 팔짱을 끼며 동의를 구한다(팔짱 낀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그래서 말인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흐음, 글쎄, 그건 어쩔 도리가 없겠는데”라고 대꾸한다.
“그런가요. 역시 어쩔 수 없는 걸까요.”
만나면 대체로 이런 이야기가 전개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것이 웃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고민이라도) “하하하” 소리내어 웃어버릴 때도 있다. 이런 면이 다카하시 씨의 개성이다.
다카하시 씨는 이 책에 실은 몇몇 글을 취재하고 집필하던 시기에도 몇 번인가 만났고, 그때마다 관여하고 있는 대상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때 역시 대개는 “야아, 무라카미 씨, 정말 난처해요”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결론이 안 난다는 것이 그의 주요한 고민이었다. 성실하게 발로 뛰면서 취재하면 할수록, 실제로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결론은 점점 더 멀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처한 각각의 상황도 알게 된다.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생기는 경위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 요소요소를 흑 혹은 백으로 후다닥 나누어, “여러분, 이것이 올바른 결론입니다!”라고 그리 쉽게 제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업잡지가 논픽션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런 식의 “야아, 난처하군요, 어떡해야 좋을지”라는 내용이 아니다. 편집부에서는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잔뜩 힘주어 말한 결론이 도출된 읽을거리를 요구한다. 읽는 쪽도 십 분 만에 휙 읽히고, 깔끔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정보를 기대한다. 견해나 시점이 뚜렷한 글이 비교적 호평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하시 씨가 진지하게 곤혹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쾌한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라는 게 그가 끌어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카하시 씨가 느끼는 바와 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뼈저리게 공감했다. 내가 사린 가스 사건* 을 다룬 《언더그라운드》(고단샤)를 썼을 때도 절실하게 깨달았지만, 우리네 세상사의 대부분에는 결론 따위가 없다. 특히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직접 발로 뛰면서 1차 정보를 많이 수집할수록, 취재에 시간을 더 투자할수록 매사의 진상은 혼탁해지고 방향을 잃은 채 어지러이 내달린다. 결론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시점은 이리저리 갈린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
* 주로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키는 맹독성 화합물.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혼탁을 헤쳐나가지 않고는 결코 보이지 않는 정경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 정경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설령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말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글이 나올 리 없다. 왜냐하면 글 쓰는 이의 역할은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원칙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전달하기보다는 총체적인 정경을 전달하는 데 있으니까.
물론 “다카하시 씨도 프로작가고 생활도 해야 할 테니, 일은 일로 깨끗이 받아들이고 이 지점에서 적당하게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하면 되잖아. 그러면 편집자도 독자도 납득할 테니”라고 현실적인 충고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고, 다카하시 씨도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카하시 씨는 부지런히 발로 뛰며 현장을 조사하고, 그곳에서 눈에 들어온 정경을 가능한 한 친절한 문장으로 성실하게(라는 표현을 그는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겠지만, 달리 적당한 말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쓰지만) 묘사해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결국은 “흐음, 글쎄, 그건 어쩔 도리가 없겠는데”라고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둘 다 팔짱을 끼고는 흐지부지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이 책을 일독한 뒤, 내가 맨 처음 느낀 것은 ‘이 책은 분명 백 퍼센트 다카하시 히데미네의 책이다’라는 점이었다.
① 면밀하게 조사한다.
② 정당하게 난처해한다(가 아닐 수 없다).
③ 그것을 최대한 친절하게 글로 옮긴다.
이런 점들이 (내 생각에 그렇다는 얘기지만) 다카하시 히데미네가 논픽션 작가로서 갖춘 세 가지 요소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은—변함없다고 할까— 종국에는 결론이 없다. 매 장마다 읽는 사람은 희미한 빛으로 약간은 온화하지만 대부분은 곤혹스러운 어느 황야에 방치된다. 텔레비전 뉴스 앵커는 “네, 이건 이런 얘기로군요. A를 하는 것이 B에게 강력히 요구됩니다. 자, 다음 뉴스입니다”라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 결론없는상황을 확실하게 그와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이 공유된다는 든든한 실감이 거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매 장마다 그와 함께 난처해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이것이 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야아, 곤란하군요” “좀 난처한걸요”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네요” 하고 머리를 긁적이거나 수염을 만지작거리거나 팔짱을 끼는 것.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유머라는 게 있다.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웃어넘기는 것. 웃어선 안 되는 일이라도(아니, 웃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무심코 웃어버리는 것. 하지만 다카하시 씨가 풀어놓는 유머는 시니컬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다. ‘허어, 얘기를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네’ 하는, 저 아래에서부터 우러나는 재미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다카하시 씨에게는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재미는 이야기의 결론을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왜냐하면 재미라는 것은 표층적인 논리를, 안이한 판단을, 그 상황에서 조용히 배제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리도 곤혹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을까, 라고. 그러고는 팔짱을 끼거나 머리를 긁적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무리하게 벗어나려 들면, 우리는 ‘진짜가 아닌 장소’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그것이 결국 이 책의 결론이 아닐까(아마도).
화가 안자이 미즈마루의 불후의 명작만화 《헤이세이* 판 보통 사람》(난푸샤, 1993년 4월 출간)에 붙인 해설. 나는 이 책이 정말 좋아서 가는 곳마다 여러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이만큼 철저하게 안자이 미즈마루의 특성이 전면에 드러난 작품은 다시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미즈마루 씨의 배려로 만화의 일부를 싣습니다.
‘극북極北(교쿠호쿠)’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 그에 대비되는 ‘극남’이라는 말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마 없는 것 같다. 그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확인 삼아 산세이도에서 나온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을 뒤적여보니 ‘극북’은 “북극에 가까운·것(곳). ‘—의 땅’”이라고 나와 있다. ‘극남’은 역시나 실려 있지 않고, ‘교쿠도메* 다음은 ‘교쿠노미’* * 가 등재되어 있었다. 사전에 있는 ‘극북’의 의미가 틀림없고 흠 잡을 데 없지만, 일상적으로는 ‘더 갈 수 없을 만큼 극한까지 다다른 지점(에 있는 것의 상태)’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드라이 마티니는 그야말로 극북의 드라이군요” 같은 느낌으로.
* 우체국 유치, 즉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고 발신인이 지정한 우체국에 두는 일.
* * 술 같은 것을 곡예를 하면서 마시거나 희한한 방식으로 마시는 행위.
내가 미즈마루 씨와 같이 일한 지도 어느덧 십이삼 년이 흘렀지만, ‘안자이 미즈마루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라는 규정(데피니션)이 최근 몇 년간 점점 더 불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고, 어떤 때는 작가이자 문장가 안자이 미즈마루고, 또 어떤 때는 그저 해질녘의 평범한 술꾼 안자이 미즈마루다. 엉겹결에 감탄하게 만드는가 하면, 남들 앞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할 몇 가지 특이한 기질도 있다. 애당초 이런 다면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측면이나 역할로 무리하게 규정하려 들면, 이 사람의 본질은 장어처럼 쏜살같이 어딘가로 스르륵 내빼고 만다.
이처럼 규정하기 어렵고, 정확한 항해도도 없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세계’ 속에서 어느 쪽이 북이고 어느 쪽이 남이냐 하는 방향성을 결정하는 일은 더없이 어렵지만, 나는 그래도 이 《보통 사람》 시리즈가 보여주는 안자이 미즈마루야말로 극북의 안자이 미즈마루라고 단정하고 싶다. 마티니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에 깃들어 있는 황홀한 드라이함은 다른 데서는 여간해서 접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아침 풍경에서 시작된다. 날이 밝고 사람들이 눈을 뜬다. 몸을 뒤척이며 비몽사몽 잠에서 깬다.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도입부는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내 생각이지만, 아침에 막 잠에서 깨어난 인간은 가장 무방비하며 가장 부주의한 존재다.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처음 그림 네 컷으로 주인공에 관해 알 수 있는 사항은 성별과 대략적인 나이와 잠옷과 이불의 무늬뿐이다. 그 인물이 과연 어떻게 사는지 독자는 거의 알 수 없다. 그는 종이접기 선생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하이쿠* 를 좋아하는 택시 기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인기 많은 유흥업소 접대부 아가씨일지도 모르고, 욕구불만 낌새가 보이는 병원의 접수원일지도 모른다. 그/그녀가 어떠한 인간인지 판명되는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이다. 그때까지 그/그녀는 ‘역할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까운, 밋밋한 달걀귀신 같은 존재다.
* 5·7·5의 3구 17음절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
나는 잠에서 깨어 이따금 내가 누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매우 난처하다. 난처하다고 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 제로다. 어떡하면 좋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몇 초 지나면야 당연히 의식이 돌아 ‘아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요, 지금은 아침이며,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지지만, 그 몇 초 동안의 공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두렵다. 부조리하고 미스터리하며 고독하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머지않아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긴 뭐, 그것 이외에 받아들여야 할 것도 없으니. 그럴 때는 이 만화의 등장인물처럼 의미도 없이 ‘으아, 큰일이네’ ‘그래, 역시’라고 혼잣말을 내뱉어 아내가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라며 어처구니없어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감히 말하자면, 아침에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들은 벌레로 거의 변할 뻔하다가 종국에는 변신하지 못한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인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벌레가 될 수 없는 존재로서, ‘보통’의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또다시 재생산하여 되풀이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이다. 벌레가 될 수 없었던 우리에게 그대로 계속 밋밋한 달걀귀신으로 남아 있을 사치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가면을 쓰고 옷도 갖춰입어야 한다.
여하튼 사람들은 그러한 밋밋한 달걀귀신의 상태에서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자기 위치와 이름을 되찾고, 옷을 차려입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혹은 화장을 하고), 아침을 먹고, 배변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각자 일상의 얼굴을 되찾아간다. 제로에 가까운 존재에서 자기 위치와 이름과 역할을 가진 ‘보통 사람’으로 변신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풍경을 표현할 때 안자이 미즈마루의 사실성은 실로 엄청나다. 그의 탐미적인 소설이나 단정한 미인도와 비교해보면, 이것은 그야말로 극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만화를 보고 웃지만(적어도 나는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늘 ‘그래 맞아, 이런 사람도 있지’라는 재미가 함께한다.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 여기에 묘사된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발언이나 사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일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은(즉, 그 행위의 당사자들은) 자신의 언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지한 것이므로 딱히 재미있어할 이유는 무엇도 없다. 그러나 타인의 눈에는 그러한 무자각한 지점이 오히려 재미를 선사한다.
예를 들어 17화의 ⑮컷에서 ⑰컷까지 보기 바란다. 이것은 아가씨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자 옆에 낯선 남자가 자고 있는 설정이다. 술에 취해서 어떤 남자와 하룻밤 정사를 치러버린 것이다. 남자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고, 그녀의 독백이 흐른다.
⑮ 난 이런 친절함이 문제인 걸까.(우유를 마신다)
⑯ 괴로워. 너무 싫다 정말. 난 형편없는 여자야.(눈물을 흘린다)
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싫어, 나란 여자, 나란 여자.(눈물을 닦는다)
본인은 굉장히 진지한 상황이지만, 읽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이 웃음을 유발하는 까닭은 결국 이 여성이 세간에서 유형화된 사고의 영역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 컷의 대사는 이른바 하우투—여성잡지의 발상(특집 ‘당신의 친절함이 당신을 망친다’ 같은 꼭지)의 테두리 안에 있다. 혹은 트렌디 드라마* 의 여주인공이 흔히하는 독백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기를 드라마 속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그 역할에 취해버린 것이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그런 정경을 어디에선가 살짝 몰래카메라로 촬영해서 모두에게 보여주고, 싱글벙글하며 “자 어때, 재밌지? 이런 사람 있잖아? 사실 이런 걸 남한테 보여주면 안 되지만, 워낙 재미있어서 살짝만 보여주는 거야”라고 말한다(나쁜 사람이다). 그래도 역시 재미나다.
* 일본식 조어로, 깊은 사색이나 심각한 정치적인 내용보다는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이나 내용을 담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지칭하는 용어.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냉철하고 적확한 관찰자인 안자이 미즈마루의 독무대라고 부를 만한 대목은, 다시 말해 가장 알싸한 곳은 실은 그뒤에 이어지는 세 컷이다. 그러니까 ⑱컷부터 ⑳컷이다.
⑱ 어릴 때는 크리스천이었는데(가슴에 손을 얹는다).
⑲ 백화점에서 일한 엄마의 피가 안 좋은 게 틀림없어(더 운다).
⑳ 안 돼, 이런 사고방식은 차별이야(더 많이 운다).
이런 엄청난 대사는 마음먹는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이 여자는 그 전까지의 스테레오타입 같은 독백에서 벗어나 더없이 기발하고 독창적인, 피와 살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크리스천’
‘백화점에서 일한 엄마’
‘차별’
산다이바나시* 같은 급격한 전개는 실로 독창적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독창적이라 한들, 피와 살이 느껴진다 한들, 대사가 제시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당돌하고, 너무나도 개인적이며, 너무나도 초현실적이다. 백화점에서 근무한 어머니의 피가 왜, 어떻게 나쁘다는 거지? 그에 관해 전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건 대관절 무슨 뜻이지?’하며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그 다음 컷에서는 남자가 이제 일어나 바지를 입으면서 “아, 미안, 미안”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서로 통하지 않은 채로 그냥—피와 살의 예감을 머금은 채— 깨끗이 방치되어버린다. 독백이 후반으로 흘러가는 가운데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