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실제하는 듯한 리얼한 스토리. 드밀은 허구와 사실을 교묘히 결합시켜 이야기의 존재를 믿게 하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_북 리스트
“또 한 권의 스릴 넘치는 대작을 완성한 넬슨 드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와일드 파이어》에 빠져들다 보면, 이 책이 꽤나 두껍고 무겁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될 것이다.”
_인디펜던트
“진정한 대가. 지금까지 드밀의 작품 중 가히 최고다.”
_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저자
“완전히 사로잡혔다. 매혹적 스토리 속에 냉철하게 짚어낸 국제 정세가 빛을 발한다.”
_워싱턴 포스트
“드밀은 조금씩 긴장감을 높이면서 읽는 이의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든다.”
_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
“강렬하다. 모두가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_뉴욕 데일리 뉴스
“빠른 흐름의 공격과 놀랄 만한 반격. 존 코리는 소설 역사상 최고의 알파 메일이다.”
_덴버 포스트
“유머, 신랄함, 두려움까지… 가차없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기막힌 주인공.”
_뉴욕 선
저자의 말
소설 속에서 실제와 허구가 하나로 합쳐질 때, 독자들이 진실과 허구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출판되기 전 《와일드 파이어》의 원고를 읽었던 사람들은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내가 상상해낸 허구인지를 물어보곤 했기 때문에 이 지면을 빌어 내가 그 점을 밝혀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첫째, 이 책을 비롯해 존 코리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의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Anti-Terrorist Task Force, ATTF)는 실제 합동 테러 전담 특별 기동대( Joint Terrorism Task Force, JTTF)를 기반으로 약간의 문학적 자유를 추가했다.
특별히 이 책에서는 ELF에 대한 정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약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ELF에 관련된 모든 정보는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모두 정확한 사실이다.
‘와일드 파이어’라는 명칭의 정부 비밀 계획에 관한 한, 그것은 내가 접했던 된 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대부분의 정보는 온라인에서 접했기 때문에 일종의 소문이나 실제 사실, 순수한 허구, 혹은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정보, 어느 쪽으로든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와일드 파이어의 몇 가지 변형들이(다른 암호명에 의해)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다룬 다른 소재들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했던 것들 중에서 NEST나 니캡(Kneecap)을 비롯한 몇몇 약어들은 사실에 해당한다. 여러분이 책을 읽다가 어떤 대상이 실제적으로 느껴지면, 그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 진실이 실제로는 허구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지며 종종 더 가공스럽기도 하다.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것이다. “베어뱅거(BearBanger)가 실제로 존재하나요?” 물론, 존재한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2002년10월로2001년9월11일로부터1년 하고1달이 지난 시점이다. 내가 소설에 도입한 <뉴욕 타임스> 헤드라인과 기사 내용은 진짜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보안 절차 혹은 그런 절차의 부재에 대한 언급도 이 책이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시점에서는 모두 사실 그대로이다.
법집행기관에 근무하는 몇몇 독자들은 존 코리 형사가 권한과 관할권상의 제약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위해 일부 극적인 파격을 취했음을 인정한다. 존 코리가 규정이나 규정집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한다고 하자. 아마 사람들은 누구도 그런 식의 영웅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 나에게 들려준 소감에 따르면, 그들은 다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가공할 시기를 다룬 무시무시한 책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9·11이후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넬슨 드밀
01
내 이름은 존 코리, 전직 뉴욕 시경 강력계 형사이다. 현장 근무 중 부상을 입고75퍼센트 장애 연금을 받는 것으로 현직에서 은퇴했다. 이것은 연금을 타기 위한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아직 내 몸은 대략98퍼센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지금은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Anti-Terrorist Task Force, ATTF)의 특수 계약직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와 사무실 칸막이를 마주하고 있는 친구는 해리 멀러로 지금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커스터 힐 클럽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없는데, 왜요?”
“이번 주말에 거기에 갈 예정이거든.”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나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뉴욕 주 북부 지역에 있는 사냥 움막을 갖고 있는 자들이란, 하나같이 돈 많은 우익 계통 얼간이들이라서 말이야.”
“나한테 사슴고기를 갖다 줄 생각이라면 제발 그만두시죠, 해리. 시체가 된 조류들도 사양합니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커피 탁자로 갔다. 커피포트 위에는 미국 법무부의 지명수배 전단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대부분 이슬람 계통의 신사들이었으며, 당연히 제1급 혐오 대상, 오사마 빈 라덴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거의 스무 장에 달하는 수배 전단에 포함된 또 다른 인물로 아사드 칼릴이라는 이름의 리비아인도 있었는데, 그는 사자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나는 그 인물의 사진을 일부러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비록 공식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적은 없지만, 내 얼굴만큼이나 놈의 얼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미스터 칼릴 사이의 짧은 인연은 대략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그를 은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는 그가 나를 추적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는 도주했고 나는 찰과상을 입었다. 아랍인들은 십중팔구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우리는 나중에 다시 만나서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커피포트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스티로폼 컵에 부은 다음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를 훑어보았다.2002년10월11일자 헤드라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의회,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승인과 동시에 광범위한 권한 위임’.
부제는 ‘미국은 이라크 점령 계획을 갖고 있다. 고위 당국자의 발언’.
이것을 보니 전쟁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당연히 그것은 미군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점령 계획을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이라크 사람 중 누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커피를 들고 책상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몇 건의 내부 메모를 차례로 읽었다. 현재 우리는 거의 전자화된 조직을 구현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 나는 메모에 이름의 머리글자를 적어서 열람했음을 표시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전에는 그리스 펜(유리용 색연필 - 옮긴이)으로 모니터 화면에 이니셜을 적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 펜에 상응하는 전자 펜에 적응한 상태였다. 만약 내가 이 조직의 수장이 된다면, 모든 메모는 에치 어 스케치(Etch A Sketch, 플라스틱 프레임에 두꺼운 회색 스크린을 넣어 그 안에 글자를 쓰고 지울 수 있게 만든 장남감 - 옮긴이)로 작성해서 회람할 것이다.
잠깐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오후4시30분이었다. 그리고 페더럴 플라자26번지26층의 내 동료들은 급격하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내 동료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들은 나처럼,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이자 정부 ‘국(局)’마다 세 글자 약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네 글자 약어(ATTF)를 갖고 있는 ‘국’의 요원들이다.
지금은9·11이후의 세상이고, 따라서 이론상으로 휴일이란 모든 요원들에게 또 다른 형식의 근무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로 ‘연방정부 금요일’ ― 조기 퇴근한다는 의미이다 ― 의 명예로운 전통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 결과 뉴욕 시경은 특별 기동대의 일원이자, 어쨌든 달갑지 않은 시기에 근무하는 데 익숙한 정부 관리로서 주말과 휴일에 이 요새를 지켰다.
해리 멀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 주말에 뭐 하면서 지낼 거야?”
이번 주 토요일부터 콜럼버스 기념일3일 연휴가 시작되지만, 운수 좋게도 나는 월요일부터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콜럼버스 기념일 퍼레이드에 참가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월요일에는 출근해야 해요.”
“그래? 시가행진에 참가한다고?”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페레시 경감에게는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며 시가 행진에서 내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드리기로 했다는 말까지 했지요.”
해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가 믿던가?”
“아니요. 그래서 자기가 우리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드리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자네 부모님이 플로리다에 사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게다가 어머니는 아일랜드계지.”
“아일랜드계 맞습니다. 이제 나는 이탈리아인 어머니를 구해서 페레시가 콜럼버스 애비뉴까지 휠체어를 밀어드리게 해야 할 판이에요.”
해리는 다시 한 번 큰 웃음을 터뜨리고 자신의 컴퓨터 책상으로 돌아갔다.
해리 멀러는 특별 기동대 중동 전담반(Mideast Section)에 속한 대부분의 뉴욕 경찰처럼, 잠복근무와 요주의 인물에 대한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요주의 인물이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표현해서, 이슬람 공동체를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주로 정보원의 면담이나 모집을 담당했다.
내가 담당한 정보원들 대부분은 새빨간 거짓말쟁이 혹은 허풍 기술자들로, 돈이나 시민권을 바라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밀접하게 연결된 공동체 속의 누군가를 엿 먹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에 불과했다. 때때로 진짜 정보를 얻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그 내용을 FBI 친구들과 공유해야만 했다.
특별 기동대는 주로 FBI 요원들과 뉴욕 시경 형사를 비롯해 나와 같은 퇴직 뉴욕 경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다른 연방정부 기관으로부터 인원을 지원받았는데 이를테면, 출입국 및 세관국(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 ICE)과 주경찰 및 교외경찰, 항만경찰 기타 등등 나로서는 그 명칭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또한 우리의 분업적 조직에 포함된 사람 중에는 마치 유령처럼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사람도 있으며, 만약 그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를 CIA라고 불렀다.
이어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세 개의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첫 번째 메일은 내 상관인 FBI 주임 특별 요원(Special Agent in Charge, SAC), 톰 월시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이전 상관이었던 잭 쾨니히가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망한 뒤에 부임했다. 이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3급 비밀 ― 주의 촉구 ― 이라크에 대한 적대 행위의 가능성이 증폭됨에 따라, 우리는 CONUS에 거주하는 이라크 국적 인사들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CONUS’는 ‘미국 본토(Continental United States)’를, ‘적대 행위’는 결국 ‘전쟁’을 의미했다. 이메일의 나머지 문장이 전달하는 취지는 이런 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과 연관시킬 수 있는 이라크인을 찾아내라. 그러면 우리는 워싱턴의 양반들이 바그다드를 신나게 폭격하기 전에 그들의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메일 내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최우선 순위 위협과 주안점은 여전히 UBL이며 더불어 UBL과 사담 간의 연계 가능성에 새로운 주안점을 둔다. 이 문제에 대한 브리핑은 다음 주에 있을 예정이다. TBA(To Be Announced, 추후통보). SAC 월시.’
이 분야를 잘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UBL’은 ‘오사마 빈 라덴’을 의미한다. 그 이름의 약자는 ‘OBL’이어야 하지만, 오래전 어떤 친구가 아랍문자를 라틴문자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Usama’라고 표기했는데, 그것 역시 맞는 음역이었다. 대중매체는 대부분 그 쓰레기의 이름을 ‘오사마’로 표기하고 있는 반면, 정보 계통에서 그는 여전히 ‘UBL’로 통했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쓰레기를 가리킨다.
다음 이메일은 나의 차상급자로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빈스 페레시가 보낸 것이었다. 원래 그는 뉴욕 시경 소속 경감이지만 ATTF에 배속되어 다루기 어려운 경찰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보통 그런 경찰들은 FBI에 소속된 동료들과 별로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페레시 경감은 데이비드 스타인 경감의 후임인데, 스타인 역시1년하고도한 달 전에 세계 무역센터에서 잭 쾨니히와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 사실은 살해당했다는 말이 옳다.
데이비드 스타인은 정말 대단한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매일 그를 그리워한다. 잭 쾨니히는 그가 가진 모든 단점이나 우리들이 서로 간에 겪었던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전문가이자 억세지만 공정한 상사이며, 또한 애국자였다. 그의 시신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스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수천의 실종자와 함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테드 내시로 CIA 요원이자, 엄청나게 혐오스러운 인간이었으며, 황공하게도 소생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 빌어먹을 인물과 관련해서 무엇인가 좋은 말을 해줄 게 없을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고작 ‘놈과 함께 귀찮은 일도 사라졌다’는 것이 전부였다.
더욱이,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는―적어도 이미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아주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 나는 섣불리 샴페인부터 터뜨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페레시 경감이 모든 뉴욕 시경과 ATTF 인원들에게 발송한 이메일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라크 국적 거주자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과거 우리에게 협조적이었던 이라크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며, 감시 목록에 있는 이라크인들을 연행하여 심문해야 함. 사우디아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의 다른 이슬람 국가와 연관이 있는 이라크인을 특히 주목할 것. 이슬람 사원에 대한 잠복과 감시도 더욱 강화돼야 함. 브리핑은 다음 주에 있을 예정임. TBA. 경감 페레시, 뉴욕 시경.’
나는 여기서 어떤 유형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수행해야만 하는 업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 우리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인상을 주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 상황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세 번째 이메일은 내 아내, 케이트 메이필드가 보낸 것이었다.26층에서 뉴욕경찰과 FBI를 가르는 거대한 분수계를 넘어가면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사실은 그녀가 미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내의 외모는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메시지는 이렇게 말했다. ‘일찍 업무를 끝내죠. 집에 가서 섹스를 나누자고요. 칠리소스를 바른 핫도그를 요리하고 당신을 위해 마실 것을 만들어줄게요. 당신은 그저 속옷 차림으로 TV나 보고 있으면 돼요.’
물론 이메일은 그런 식으로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와인을 음미하는 낭만적 주말을 즐기러 노스 포크로 가요. 내가 B&B를 예약해놨어요. 사랑해요. 케이트.’
도대체 내가 왜 와인 맛을 음미해야 한단 말인가? 그 술은 전부 맛이 같았다. 또한 B&B―그저 겉만 예쁘게 꾸민 낡은 오두막에 백 년 전 욕실과 삐걱 거리는 침대를 갖춘―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숙박객들하고 함께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거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온 여피족 호색한들로, 자기들이<타임스>의 ‘예술과 오락’ 섹션에서 읽은 내용을 화제로 삼기를 바라는 자들이었다. 나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권총에 손이 갔다.
나는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썼다. ‘몹시 기대되는군. 신경 써줘서 고마워. 사랑해. 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나도 차라리 돌격 소총의 총구를 마주할지언정, 감히 마누라를 열 받게 하지는 못한다.
케이트 메이필드는 FBI 요원이자 법률가이며, 우리 팀의 일원이었다. 우리 팀은 뉴욕경찰 한 명과 또 다른 FBI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불어 필요에 따라 가끔씩, ICE나 CIA와 같은 다른 기관의 요원 한두 명 정도를 보강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우리와 함께 일했던 CIA 요원이 바로 앞에서 말했던 테드 내시였는데, 나는 그가 당시에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던 내 아내와 한때 낭만적인 관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증오하는 이유이다. 나는 직업적인 이유로 그를 싫어한다.
나는 해리 멀러가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민감한 자료를 서랍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워서 청소부들이 이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을 복사하거나 사막에 있는 나라에 팩스로 보내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퇴근하려면 아직 21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요.”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몇 가지 기술 장비를 수령하러 가야 해.”
“왜요?”
“아까 말했잖아. 나는 우리 뉴욕 주 북부의 오지에 들어가 감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커스터 힐 클럽 말이야.”
“나는 선배가 초대받은 손님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아니, 일종의 불법 침입이야.”
“어떻게 이런 일을 맡게 된 겁니까?”
“나도 모르지. 물어보기나 했을 것 같아? 나는 캠핑용 트레일러도 갖고 있지. 부츠도 있지. 게다가 귀마개 달린 모자도 있잖아. 따라서 일단 자격 요건은 갖춘 거지.”
“그렇군요.”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해리 멀러는 나처럼 전직 뉴욕경찰이었고20년 전에 은퇴해10년 동안은 정보 분야에 종사하다가 지금은 연방정부에 고용되어 잠복과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 덕분에 우리가 빈정거리며 ‘겉멋’이라고 부르는 FBI 요원들은 머리 굴리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선배, 이런 우익 단체들이 도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선배가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중동 전담반을 의미하는 말로 현재 ATTF 인력의 약90퍼센트가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해리가 말했다. “나도 몰라. 물어보기나 했을 것 같아? 나는 그저 사진이나 찍어 오는 거지, 놈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고.”
“월시하고 페레시가 보낸 이메일 안 읽었어요?”
“읽었지.”
“우리가 전쟁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생각 좀 해보고.”
“그 우익 집단이 이라크나 UBL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나도 몰라.” 해리는 잠깐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 본 다음 말을 이었다. “기술지원부 직원들이 문을 닫고 퇴근하기 전에 가봐야겠어.”
“아직 시간 있어요.”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혼자 가는 건가요?”
“물론. 하지만 문제없어. 이건 그저 비침투형 감시 및 잠복근무에 불과하니까.”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사이니까 하는 말인데. 월시의 말로는 그저 숲 속에서 나무나 밟고 있다가 오면 된다더군. 그냥 정보 파일을 쌓기 위한 임무라는 말이지. 알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아랍인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담당한 집단 중에는 국내 그룹도 있어. 신나치주의자나 각종 민병대 나부랭이들, 생존주의자, 뭐, 그런 부류들 말이야. 일단 놈들이 화제의 대상이 됐을 때, 이런 정보 파일은 대중매체나 의회에 좋은 인상을 줄 거야. 맞지?9·11이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어. 기억나지 않아?”
“그랬죠.”
“이제 가야겠어. 내가 보기에 우리는 월요일에 만나게 될 것 같아. 나도 일단은 월요일에 월시를 봐야 하니까.”
“그가 월요일에 출근한대요?”
“뭐,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맥주나 하자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도 출근할 거라고 짐작할 수밖에.”
“그렇군요. 그럼 월요일에 보죠.”
해리는 자리를 떠났다.
해리가 말한 정보 파일 작성 부분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조직에는 국내 테러 전담반이 따로 있었다. 게다가 뉴욕 주 북부 지역의 클럽에서 부유한 우파 인사들을 염탐한다는 것도 약간은 이상했다. 또한 톰 월시가 일상적 감시 임무에 대해 휴일에 출근해서 해리의 보고를 받는다는 사실도 석연치가 않았다.
나는 꼬치꼬치 캐기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유능한 형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성향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별도로 독립된 컴퓨터 쪽으로 갔는데, 그 컴퓨터를 통해야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나는 구글에서 ‘커스터 힐 클럽’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커스터 힐’을 입력했다. 화면 상단의 카운터는40만 개의 검색 결과가 있음을 알려주었고, 첫 번째 페이지의 결과물이 다양한 양상을 띤다는 사실로부터―골프장이나 식당은 물론 사우스다코타에서 게시된 몇몇 사료는 리틀 빅혼 전투(미국7기병대가 전멸한 유명한 전투지 - 옮긴이)와 관련하여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들 검색 결과들 중 어느 것도 커스터 힐 클럽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10여분에 걸쳐 검색 결과를 훑어보았지만, 뉴욕 주와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내 자리로 되돌아왔다. 여기서는 ATTF 패스워드를 사용해 ACS
―자동화 사건 지원 시스템(Automated Case System)의 약자로 FBI판 구글이다 ―의 내부 파일을 열람할 수 있었다. 커스터 힐 클럽 정보가 나오기는 했지만, 분명 나는 그 파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제목을 빼고 그 밑에 있는 모든 내용이 X표로 처리되어 있었다. 보통 우리가 어떤 정보에 접근했을 때, 비록 그것의 열람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라고 해도 파일이 열람됐던 시기, 파일을 열람한 사람, 아니면 적어도 그 파일의 보안 등급 정도는 알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 파일은 모든 내용이 완벽하게 X로 삭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보안 부서의 얼간이들에게 경보를 발령한 셈이 됐다. 나는 접근이 제한된 파일을 요청했다. 문제는 현재 내가 이라크인을 담당하는 요원이기 때문에 그 파일이 내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놈들의 머리를 조금 뒤흔들어주기 위해 나는 다른 검색어를 입력했다. ‘이라크 낙타 클럽 대량 파괴 무기’.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의 비밀 자료들을 모두 안전하게 치운 뒤, 외투를 집어 들고 케이트의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케이트 메이필드와 나는 둘 다 앞에서 언급한 아사드 칼릴 사건에 투입됐고 거기서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그 작고 위험한 인물은 가급적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미국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나아가 나와 케이트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무사히 빠져나갔다. 나로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사건이지만, 덕분에 나와 케이트는 인연을 맺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내가 놈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 점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놈의 배에 총알을 박아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놈이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감상할 것이다.
나는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제안이네요.” 그리고 다시 자기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즈 메이필드는 중서부 출신 여성으로 워싱턴에서 근무하다 뉴욕으로 전출됐다. 처음에는 자신의 새로운 전출지에 불만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에서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와함께 살게 됐다는 사실에 열광적인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주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시외로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뭐야?”
“왜냐하면, 이 도시가 나를 미치게 하니까요.”
거대도시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나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뭐지?”
“지금 노스 포크에 적당한 B&B 숙소가 있는지 검색하는 중이에요.”
“아마 모든 숙박 시설들은 주말 연휴를 맞아서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일 거야. 그리고 내가 월요일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내가 어떻게 그 사실을 까먹을 수 있겠어요? 휴일에도 근무하게 됐다고 당신은 이번 주 내내 불평했잖아요.”
“내가 언제 불평했다고 그래.”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에 반사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거의 3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보통 나와 함께 살았던 여자들은 금방 나이를 먹었다. 내 첫 번째 아내였던 로빈은 우리의 신혼 첫 해가 마치 10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나는 케이트에게 제안했다. “에코에서 기다릴게.”
“다른 여자한테 낚이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나는 빽빽하게 칸막이로 구분된 구획 사이를 걸어 나갔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동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몇몇 지인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해리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커다란 금속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내 짐작에 그 속에는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제가 술 한잔 사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가능한 빨리 길을 떠나야 해.”
“오늘 밤에 운전을 한다고요?”
“맞아. 동틀 무렵까지는 그곳에 도착해야 하니까. 모종의 회합이 그곳에서 진행될 예정이야.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도착할 때 참석자와 자동차 번호판의 사진을 찍어야 하거든.”
“마치 우리가 결혼식이나 장례식 행사에서 갱단을 감시하는 것하고 똑같은 이야기로 들리네요.”
“그렇지. 똑같은 일이야.”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해리가 말을 걸었다. “케이트는 어디다 팽개친 거야?”
“뒤따라올 거예요.” 해리는 이혼한 상태였지만 한 여성과 교제를 하는중이었다. 그래서 나도 예의상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리는 어때요?”
“그녀야 최고지.”
“매치 닷 컴(match.com)에 있는 그녀의 사진은 정말 잘 나왔던데요.”
“이런 지긋지긋한 놈 같으니라고.”
“잠복 지점이 어디에요?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에 있어요?”
“그곳이라니? 아… 새러낵 호수 근처야.”
우리는 건물을 나와서 브로드웨이를 향해 걸었다. 쌀쌀한 가을날이었고 거리에는 ‘주여, 감사합니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분위기가 넘쳤다.
브로드웨이에서 해리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어 맨해튼은 고층 빌딩과 비좁은 골목이 빽빽하게 들어찬 구역이었고, 그런 형태로 인해 그 지역에서는 최소한의 일조량과 최대한의 스트레스가 보장됐다.
이 지역에는 내가 태어난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비롯해 차이나타운, 리틀 이태리, 트라이베카, 소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의 주요 산업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기업과 금융, 월스트리트와 행정부가 중심이 되는 부분과 연방 법원이나 주 법원, 시 법원을 중심으로 삼는 부분 그리고 시청, 감옥, 페더럴 플라자, 폴리스 플라자 기타 등등. 이 모든 당사자들의 필수적 부가물이 바로 법률 회사로, 그들 중 하나는 변호사인 내 전처를 고용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로지 최고 수준의 쓰레기 범죄자들이 관련된 사건만 다루었다. 그것도 우리가 이혼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요리와 섹스를 멀리 중국에 있는 어느 도시의 이름 정도로 아득하게 여긴다는 데 있었다.
앞쪽으로 하늘에는 텅 빈 공간이 존재했는데, 그곳은 한때 트윈 타워가 서 있던 자리였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심지어 대부분의 뉴욕 주민들에게도 무역센터 건물의 상실은 먼 하늘의 빈 공간 정도로만 인식됐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에 살거나 그곳으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그 거대한 건물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이라면 거리를 걷다가 무역센터 건물이 보이지 않을 때, 건물의 부재로 인해 아직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해리 멀러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한편으로 보면 그의 휴일 임무에 비정상적이라거나 특이한 부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내 말은 현재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인 상황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인데, 해리는 뉴욕 주 북부의 오지에 파견되어 돈 많은 우익 인사들의 어떤 모임 장소 주변에서 코를 킁킁거리게 된 것이다. 국가 안보에 대한 그들의 위협 수준은 아마 낮음과 전무 사이의 어딘가에 불과할 것이다.
더불어 톰 월시가 해리에게 말했다는 그 터무니없는 소리도 문제였다. 정보 파일을 쌓아 두었다가 ATTF가 미국 내 자생적 테러 집단을 꿰뚫고 있는지의 여부를 언론이나 의회의 어떤 인물이 알기를 원할 경우에 대비한다니.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논리가 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9·11사태 이후로, 신나치주의나 민병대를 비롯해 국내파 테러 조직들은 활동이 잠잠해진 상태였고, 실제로는 미국이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국가가 악당들과 분연히 맞서는 데다 곳곳에서 검거 열풍이 몰아치는 등등, 일련의 사태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휴일인 월요일에 임무 보고를 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어쨌든 비록 약간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이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래는 그것이 내 일도 아닐뿐더러, 페더럴 플라자26번지에서 내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할 때마다 항상 문제가 발생했다. 즉, 우리 엄마가 늘 썼던 말인 ‘존, 트러블이 네 중간 이름이란다’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 출생증명서를 볼 때까지 그 말을 믿었었는데, 사실 거기에는 알로이시어스가 내 중간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나는 알로이시어스를 버리고 트러블을 내 중간 이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02
나는 챔버스 스트리트를 향해 방향을 꺾은 다음 살롱의 분위기를 가진 이탈리아 레스토랑, 에코에 들어갔다. 어느 쪽이든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바에는 양복 차림의 신사와 비즈니스 정장을 입은 여성들로 바글바글했다. 나는 몇몇 아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설사 내가 이곳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훌륭한 형사이자 뉴욕의 삶에 대한 뛰어난 관찰자로서 나는 고임금을 받는 변호사나 공무원, 법집행기관의 요원, 금융업 종사자들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전처하고도 몇 번이나 마주쳤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이곳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듀어스(스카치 위스키의 한 종류 - 옮긴이)와 소다를 한 잔 주문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케이트가 들어오자 나는 백포도주를 주문했는데, 덕분에 주말을 보내는 문제가 머리에 떠올랐다. “포도 고사병이라고 들어봤어?”
“포도 고사병이 뭔데요?”
“노스 포크에 번지는 병이지. 이 이상한 균류에 감염된 모든 포도는 인간에게도 전염을 시킬 수 있다는군.”
아내는 내 말 따위는 듣지도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매티턱에서 좋은 B&B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어떤 여행 전문 웹사이트의 정보를 기초로 그 위치를 설명한 뒤에 이렇게 통보했다. “정말 매력적인 장소일 것 같아요.”
매력적이기는 트란실바니아 지방 웹사이트가 설명하는 드라큘라 백작의 성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신, 커스터 힐 클럽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아니요. 노스 포크 웹사이트에서 그런 곳은 본 적이 없는데요. 그곳이 어느 읍에 있어요?”
“사실 그곳은 뉴욕 주 북부 지역에 있어.”
“아… 괜찮은 곳인가요?”
“나도 몰라.”
“다음 주에는 거기를 가고 싶은 건가요?”
“내가 먼저 확인해보고.”
분명, 그 이름은 미즈 메이필드의 머리에 아무런 자극도 일으키지 않았다. 때때로 그녀는 나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사항들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 말은, 비록 우리가 결혼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FBI이며, 내가 알아야 할 것에는 한계가 있고 보안 등급도 그녀보다 낮다는 뜻이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미즈 메이필드가 ‘커스터 힐 클럽’이라는 말을 듣고 그게 어떤 숙박 업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했다. 오히려 어떤 사적지이거나 컨트리클럽, 혹은 기타 다른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단순히 대화의 전개상 자연스럽게 그것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말한 장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화제를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언급했던 메모로 돌렸다. 그리고 한 동안 지정학적 정세에 대해 토론했다. 특별 요원 메이필드의 의견으로 이라크와의 전쟁은 단순히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했다.
페더럴 플라자26번지는 조지 오웰식 기관으로 그곳 종사자들은 당의 노선에 약간의 변화라도 있을 경우 거기에 완벽하게 동조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라면, 사람들은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가 자존심 결핍 사이코패스들을 위한 사회봉사 기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모든 사람이 회교원리주의자들을 죽이고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승리로 이끄는 이야기들을 떠들고 있었다. 문법적으로는 ‘테러리즘과의 전쟁(war on terrorism)’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언론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미즈 메이필드는 충실한 공무원으로서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는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한동안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UBL을 증오하다가 어떤 훈령이 떨어져 오늘은 누구를 증오하라는 말이 있을 경우, 즉시 사담 후세인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심하게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공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빈 라덴이나 알카에다에 관한 한, 나도 전적으로 논리적이지는 않았다. 그9월11일에 많은 친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신의 가호와 교통 정체가 없었다면, 케이트와 나 역시 노스 타워가 붕괴될 때 그 건물 안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노스 타워107층 윈도스 온 더 월드에서 있었던 조찬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시간에 늦었고 케이트는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비드 스타인과 잭 쾨니히를 비롯해 당시 내 파트너이자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을 돔 파넬리는 정시에 도착했으며, 더불어 몇몇 좋은 사람들과 테드 내시 같은 몇몇 나쁜 친구들도 이미 식당에 들어가 있었다. 그 레스토랑에서는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총알을 세 발이나 맞고 과다 출혈로 길거리에서 거의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심지어 그런 일조차도 나의 정신 건강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지속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당시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내 말은,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그 순간 바로 그 밑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봤다는….
“존?”
내가 고개를 돌리자 케이트가 보였다. “왜…?”
“한 잔 더 할 거냐고 물었잖아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잔이 비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위스키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바의 끝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가 내게는 희미하게 들렸다. 리포터는 이라크 문제에 대한 의회의 표결을 다루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다시9월11일 당시로 돌아갔다. 나는 무엇인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방관과 경찰을 도와 로비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활동에 참가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케이트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들것을 운반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다 우연히 건물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 케이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다시 시선을 힐끗 옆으로 돌려서 그녀의 자리를 응시했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다가 물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했다. 그다음으로 나는 철근 콘크리트가 무너지며 내는 그 기묘한 우르릉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들어보았던 그 어떤 소리하고도 닮지 않았다. 그리고 내 발밑에서 지면이 진동을 일으키는 가운데 빌딩이 무너져 내리고, 하늘에서 유리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곧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들것을 떨어뜨렸는지 아니면 반대편 끝을 잡고 있던 사람이 먼저 놓아버렸는지. 아니 실제로 내가 들것을 운반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 기억해낼 것 같지도 않았다.
9·11이후 몇 주 동안, 케이트는 우울증에 빠져서 잠도 자지 못했고, 눈물을 많이 흘리는 대신 미소는 줄어들었다. 그녀를 보니 내가 담당했던 강간 사건 피해자가 떠올랐다. 그들은 순결뿐만 아니라 자기 영혼의 일부를 상실했던 것이다.
워싱턴의 예민한 관료들은9·11참사에 관계된 모든 인원에게 상담을 받으라고 강요했다. 나는 자신의 문제를 얼굴도 모르는 전문가나 혹은 그 반대의 인물들에게 털어놓는 성질의 인간이 아니었지만, 케이트가 끈질기게 졸라서 결국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연방정부에 고용된 그들은 엄청난 수요를 감당해야 했다. 내가 만난 의사는 본인 스스로가 약간은 정신병적 증상을 갖고 있었는데, 결국 우리는 첫 번째 상담에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두 번째 상담을 비롯해 그 뒤에 이어졌던 상담들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인근에 있는 술집 드레스너를 찾아갔고, 그곳의 바텐더 아이던이 나에게 현명한 상담을 제공했다. “삶에는 불만족스러운 일투성이죠.” 아이던이 말했다. “술이나 한 잔 더 해요.”
반면 케이트는 거의 반년에 걸쳐 정신과 상담에 집착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모종의 사태가 발생했고, 그것은 결국 완벽하게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점점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알고 지냈을 때부터 그녀는 언제나 훌륭한 직원이었고, 규칙을 준수하며 연방수사국이나 그들의 방식에 비평을 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그녀는 내가 FBI를 비난한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정도였다.
겉으로 보면, 내가 지금까지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충직한 병사였으며 당의 노선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겠지만, 내적으로는 그녀 스스로도 당의 노선이180도 바뀌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전보다 약간 더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변했고 의심도 늘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좋은 현상이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이 공통적인 요소를 갖게 된 것이니까.
때때로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당시, 우리 팀의 치어리더와 같았던 그녀의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또한 나는 지금과 같이 강인하고 더욱 노련해진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행을 겪었지만, 이제 다시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9·11로부터1년 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테러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감을 색깔로 표시하는 어떤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다. 오늘 테러 경보 수준은 오렌지였다. 내일은 어떨지 누가 알겠는가?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녹색으로 떨어질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03
해리 멀러 형사는 캠핑용 자동차를 오래된 벌목용 도로 옆에 주차하고, 앞 좌석에 놓아둔 장비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 후 북서쪽을 향해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을용 위장복을 입고 검은 니트 모자를 썼다.
도보 이동이 용이하게 구성된 지형에 소나무들이 적절한 간격을 두고 자라고 있었고, 지면에는 이끼와 수분을 함유한 양치류가 깔려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햇살이 소나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며 지면의 두터운 물안개를 드러냈다. 새들이 지저귀고 작은 동물들이 관목들 사이로 다급하게 뛰어다녔다.
기온은 차가웠다. 숨을 내쉬면 입김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원시의 산림은 장관을 연출했다. 그래서 그는 비참보다는 행복에 더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어깨에 걸친 장비는 쌍안경과 핸디캠, 부가적으로 니콘12메가픽셀 카메라와 긴3백 밀리미터 렌즈였다. 또한 《시블리 조류 가이드(Sibley Guide to Birds)》도 한 권을 소지했는데, 우연히 사람을 만나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상대방이 그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한9밀리미터 구경 글록 반자동 권총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에게 임무를 브리핑해준 사람은 에드라고 알려진 기술지원부 요원으로, 그의 말에 따르면 커스터 힐 클럽의 토지는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6.4킬로미터 정도이고 전체 면적은4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사유지였다. 놀랍게도 토지 전체가 다이아몬드 무늬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술지원부 요원은 그에게 철사 절단기까지 제공했고, 지금 해리는 그 도구를 허리에 찬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10분 만에 그는 철망에 도착했다. 철망의 높이는 대략4미터 정도에 꼭대기는 면도날이 부착된 철사로 보강되어 있었다. 대략3미터 간격으로 부착되어 있는 철제 표지판에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개인 사유지 ― 침입 시에는 고발 조치함.’
다른 표지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경고― 접근 금지 ― 무장 경비원과 경비견이 순찰하고 있음.’
오랜 경험을 통해 해리는 이런 경고문이 사실보다는 공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역시 경고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또한 월시가 경비원이나 경비견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 혹은 알면서도 말해주는 걸 잊은 것인지, 그 부분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어떤 경우든 월요일에 월시를 만나면 그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착신 신호를 벨소리 모드에서 진동 모드로 전환시켰다. 그러다 전화기 수신 신호의 강도도 대단히 양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런 산악 지대에서는 대단히 드문 경우였다. 그는 충동적으로 여자친구인 로리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다섯 번 울린 뒤, 그의 전화는 음성메시지로 전환됐다.
해리는 전화기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기, 안녕. 당신의 유일한 그이야. 나는 지금 산에 올라와 있어. 그러니 오랫동안 자기의 환대를 받지 못할 것 같아. 그래도 안부 인사는 하고 싶어. 내가 어제 자정 무렵에 여기에 도착했거든. 캠핑카에서 자고 지금은 극우파 인사의 산장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 나중에 휴대전화가 안 되면 유선전화를 찾아서 내가 전화할게. 알았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는 인근 비행장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 같아. 그러니 아마 오늘은 밤을 새게 될 거야. 언제 끝날지 알게 되면 당신에게도 알려줄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사랑해.”
휴대전화를 끄고 철사 절단기를 꺼냈다. 철망을 갈라서 틈을 낸 후 그 사이로 몸을 비집고 사유지 안으로 들어갔다. 철망 안쪽에서 그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철사 절단기를 다시 허리 주머니에 넣은 다음 나무 사이로 계속 전진했다.
약5분 정도 흘렀을 무렵, 소나무들 사이로 우뚝 솟아오른 전신주를 발견한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전신주에는 전화기 박스가 달려 있었지만 잠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전신주는 높이가 약10미터 정도였다. 대략6미터 지점에는 투광등이 달려 있고, 그 위로 다섯 가닥의 전선이 가로보 위를 지나고 있었다. 전선 하나는 분명 전화기에 출력을 제공했고 다른 하나는 투광등에 사용됐다. 나머지 세 개의 전선은 사실 고출력의 전류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케이블이었다.
해리는 무엇인가 낯선 물체를 발견하고 쌍안경의 초점을 전신주 꼭대기에 맞췄다. 그가 주위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상록수 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제 보니 전신주에 부착된 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이런 가지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것으로, 이동통신 회사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이동전화 중계기를 위장하거나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 사용했다. 왜지? 이동통신 회사가 그것을 이런 숲 속에 설치한 이유는 의심을 자극했다.
그는 쌍안경을 내리고 니콘 카메라를 잡았다. 그리고 전신주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톰 월시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동차와 인물, 자동차 번호판 외에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이든 사진을 찍어 오게.”
해리는 그것이 관심을 끄는 존재이며 정보 파일에 적당한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핸디캠으로 10초 정도 그 부분을 촬영하고 다시 이동했다.
지대가 완만하게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소나무는 사라지고 커다란 오크나무와 느릅나무, 단풍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남아 있는 단풍잎은 붉은색과 오렌지, 노란색으로 찬란하게 물들어 있었다. 해리가 융단처럼 대지를 덮은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리는 잠깐 동안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한 뒤 산장이 현재 진행 방향으로 약6백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침 식사용 시리얼바를 꺼내 그것을 먹으며 계속 이동했다. 아디론댁 산의 맑은 공기를 만끽하면서도 곤란한 상황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그가 연방정부의 요원이기는 하지만, 불법 침입은 불법 침입이었다. 따라서 영장 없이 철망으로 표시가 된 사유지를 침범할 권리가 없기는 밀렵꾼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영장에 대해 월시에게 물었을 때, 월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들을 감시할 만한 적절한 근거가 없어. 거부될 게 뻔한 상황에서 판사에게 영장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다시 말해 뉴욕 시경이 적법한 절차를 의도적으로 회피할 때마다 즐겨 쓰는 표현처럼, ‘지금 허가를 요청하는 것보다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더 낫지’라는 말이었다.
해리는 대테러 분야에 종사하는 다른 모든 이들처럼, 세계무역센터의 두 번째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하고 대략2분 뒤에 자기 세계의 규칙이 바뀌었으며, 새로 바뀐 규칙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전반적으로 그의 업무가 수월해졌지만, 동시에 지금과 같은 몇몇 상황에서는 업무가 약간 더 위험해지기도 했다.
숲이 점차 엷어지면서 수많은 그루터기들이 해리의 눈에 띄었는데, 원래 있던 나무를 베어낸 뒤 운반해 가고 남은 흔적으로, 나무는 아마 땔감으로 사용됐을 것이다. 아니면 경비 업무를 위해 시계를 넓힌 것이든지. 이유가 무엇이든 불과1백 미터 뒤의 상황보다 은폐와 엄폐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크게 감소했다.
그 앞으로 개활지가 보였고, 그는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그곳을 향해 접근했다.
그는 마지막 단풍나무 아래 멈춰서 쌍안경으로 탁 트인 대지를 관찰했다.
포장도로 하나가 넓은 대지와 내리막을 통과해 출입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쌍안경을 통해 그곳에 있는 수위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따라 금속 지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보안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나무로 된 전신주에서 다섯 가닥의 전선이 숲에서부터 뻗어 나와 개활지와 도로를 가로지른 뒤 반대편의 숲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짐작에 따르면 그것은 아까 철망 근처에서 보았던 전선들의 연장선이었고, 전신주들과 전선이 사유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25.6킬로미터에 달하는 사유지 경계선 전체를 투광등이 비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단순한 사냥 오두막이 아니야.’
그가 도로를 유심히 관찰해본 결과 전선은 경사면을 올라가 아디론댁양식의 거대한2층짜리 산장에 도달했고, 산장은 그의 정면으로 대략2백 미터 떨어진 오르막 위에 서 있었다. 산장의 정면에 있는 잔디밭에는 높은 국기 게양대가 설치되어 가장 높은 깃대에는 성조기가, 그 밑으로는 모종의 노란색 삼각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산장 뒤로는 수도와 전기 시설이 보였고 언덕 꼭대기에는 무전기 혹은 이동전화기의 송수신 안테나로 보이는 구조물이 보였다. 그는 니콘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해 그 구조물의 사진을 찍었다.
산장은 강에서 채취한 골재와 통나무, 지붕널로 제작됐고 정면에 커다란 기둥을 세워 주랑 현관을 설치했다. 녹색 지붕널로 제작된 지붕 위로 여섯 개의 석조 굴뚝이 삐져나왔고, 모든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의 눈에는 건물 정면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나 산장 앞에 자갈을 깔아 만든 넓은 주차장, 그리고 거기에 주차하고 있는 검정색 지프도 한 대 보였다. 누군가가 산장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그들은 아마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손님들 때문에 그가 이곳에 온 것이다.
그는 니콘 카메라로 주차장과 산장의 망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핸디캠을 사용해 산장과 그 일대에 대한 구축 샷(관객에게 다음에 전개될 장면의 의미 맥락을 제시하기 사용되는 촬영 기법 - 옮긴이)을 촬영했다.
그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동차들이 도착하는 장면이나 인물, 자동차 번호판 등을 찍기 위해서는 산장에 더욱 접근해야만 했다. 기술지원부의 에드는 산장의 항공사진을 보여주며 주변 지형이 탁 트여 있지만, 커다란 바위들이 지면에 노출되어 있는 노두(露頭)들이 많아서 은신처로 삼기에 적절하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해리는 언덕의 여러 노두들을 바라보며, 각각의 노두 사이를 뜀박질로 이동해 전망이 좋은 장소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계획했다. 그가 생각한 지점은 산장과 주차장으로부터 약30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였다. 그 장소라면 산장에 도착하는 사람들과 주차된 자동차들의 사진,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월시의 지시에 따르면 그는 오후 늦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뒤에는 인근의 지방 공항으로 가서 도착한 승객 명단과 자동차 임대 업체의 명단을 대조하고 확인해야 했다.
그는 일단의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이 관련된 사건을 맡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당시 그들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훈련 캠프를 설치했었다. 아디론댁 산림 보호 구역은 뉴햄프셔 주만큼이나 넓은 면적에 국유지와 사유지가 뒤엉켜 있지만 인구는 대단히 희박하기 때문에 사냥이나 하이킹, 혹은 불법 무기의 시험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번 감시 임무는 IRA 체포 작전 때와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아직은 겉으로 드러난 범죄행위가 없었고, 저렇게 커다란 산장에 머무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어떤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요 인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해리가 첫 번째 노두를 향해 뛰어나가려는 바로 그 순간, 산장 뒤에서 검정 지프 세 대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들판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사실 바로 그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제길.”
그는 몸을 돌려 숲을 향해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숲 속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젠장.”
세 대의 지프는 바로 숲의 경계선 앞에서 멈췄다. 각각 두 사람이 지프에서 나왔다. 그들은 사냥용 소총을 들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숲에서 세 남자가 나타났는데, 각자 줄에 묶인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 독일산 셰퍼드를 데리고 있었다. 해리는 순식간에 그들의 엉덩이 부근에서 휴대용 무기를 꽂는 가죽 케이스를 확인했다. 그 순간 네 번째 남자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니, 마치 그가 선임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 동작 감지기 혹은 소음 감지기가 설치됐다는 것만이 유일한 설명이라는 사실을 해리는 깨달았다. 이들은 ‘심각하게’ 자신들의 사생활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비록 공포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불안감이라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현재의 상황이 곤란을 초래하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봤다.
경비원들은 그를 원형으로 둘러쌌다. 하지만 대략5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은 모두 군복과 같은 형태의 위장복을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에는 성조기 기장을 부착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챙 달린 모자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부착되어 있었다. 각자 왼쪽 귀에 철사벌레 같은 이어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단단한 외모의 중년 남자―한 걸음 다가섰다. 해리는 그의 위장복에서 ‘칼’이라고 적힌 군대식 명찰을 볼 수 있었다.
칼이 해리에게 통보했다. “귀하께서는 사유지를 침입했습니다.”
해리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가요?”
“확실합니다.”
“아, 이런. 그렇다면, 나가는 길을 일러준다면….”
“귀하는 어떻게 철망을 통과하셨죠?”
“철망? 무슨 철망 말인가요?”
“대지를 빙 둘러 철망이 쳐져 있고 접근 금지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나는 전혀 철망을… 아, 그 철망. 칼, 미안하게 됐소. 나는 딱따구리를쫓고 있었는데 놈이 날아갔지 뭐요. 그런데 철망에 구멍이 있길래, 그래서….”
“당신은 이곳에 왜 들어온 거요?”
해리는 칼이 약간 무례해졌음을 눈치챘다. 그의 말에서 ‘귀하’라는 존칭이 사라졌다. 그래서 질문에 일단 대답했다. “나는 조류 관찰자요.” 그는 조류 안내서를 꺼내보였다. “새를 관찰하고 있었죠.” 그리고 쌍안경을 툭툭 쳤다.
“카메라를 갖고 있는 이유는 뭐요?”
“새의 ‘사진’을 찍었소.” 밥통 같은 자식. “그러니 내가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면, 아니 그보다는 나를 태워준다면, 이곳에서 나가리다.”
칼은 대꾸하지 않았다. 덕분에 해리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첫 번째 신호를 감지했다.
이때 칼이 말했다. “이 일대에는 수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공유지가 있는데 당신이 철망에 구멍을 뚫고 들어온 이유가 뭐요?”
“이봐, 친구, 나는 빌어먹을 어떤 구멍도 뚫지 않았어. 나는 그 빌어먹을 구멍을 ‘찾았을’ 뿐이라고. 그런 거야 어쨌든, 칼, 엿 먹는 소리 그만하지.”
해리는 물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의 말투가 더 이상 조류 관찰자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이제 연방정부 신분증을 꺼내, 이 멍청이들에게 차렷 자세를 취하게 만든 다음 그가 캠핑카를 세워둔 곳까지 탈것을 제공하게 만들 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 일에 연방정부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자신이 연방정부 요원이며 이곳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됐다는 사실을 밝힐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랬다가는 월시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대신 해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나갈 거요.” 그리고 숲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사냥용 소총의 총구가 앞으로 뻗어 나왔고 권총이 총집에서 빠져나왔다. 세 마리의 개는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줄을 당겼다.
“멈춰. 안 그러면 개를 풀겠다.”
해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걸음을 멈췄다.
칼이 말했다. “당신에겐 두 가지 길이 있어. 쉬운 쪽과 어려운 쪽이지.”
“그럼, 어려운 쪽으로 가시죠.”
칼의 시선이 다른 아홉 명의 경비원을 향했다가, 개를 보고 다시 해리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의 말투가 약간 달래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귀하께서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누구든 이곳을 침입한 사람은 일단 산장으로 모셨다가, 보안관에게 연락해서 해당 인물이 법집행기관 요원에 의해 호송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소하는 일은 없겠지만, 귀하는 보안관으로부터 다시 이곳을 무단으로 침입할 경우 체포될 수도 있다는 조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법률상으로든 우리의 보안 정책상으로든 귀하는 혼자서 도보로 이곳을 떠나게 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도 귀하를 태워주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보안관만이 귀하를 내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하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해리는 그의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비록 임무는 망쳤지만 산장 내부를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약간의 점수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그곳에서 어떤 정보를 발견하거나 보안관으로부터 약간의411(미국의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로 ‘정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 옮긴이)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칼의 제안에 응했다. “사냥꾼 양반, 알겠소. 그럼 그리로 갑시다.”
칼은 해리에게 손짓으로 방향을 돌려 지프를 향해 걸으라고 했다. 해리는 그들이 자신을 차에 태우려고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보안 정책은 실제로 엄격했다.
하지만 지프들은 그를 혼자 놔두지 않았다. 그가 도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 산장으로 안내되는 동안 모든 경비원들이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해리는 걸음을 옮기며 이들 열 명의 경비원들과 경비견을 비롯해 수위실, 철망, 면도날이 부착된 철사, 투광등, 전화기 박스, 그리고 아마도 동작 감지기나 소음 감지기일 가능성이 높은 어떤 존재들을 검토했다. 이곳은 결코 일상적 의미의 사냥이나 낚시 클럽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는 월시 때문에 화가 났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더욱 분노했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한심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20년에 걸친 경찰 생활과5년의 대테러 업무를 통해 예리해진 본능은 이곳에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경보를 울렸다.
본능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해리는 자기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칼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이쯤해서 휴대전화로 보안관에게 전화를 하는 게 어때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자고요.”
칼은 대꾸하지 않았다.
해리가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휴대전화를 빌려줄 수도 있어요.”
칼이 날카롭게 외쳤다. “손을 내가 볼 수 있도록 꺼내놔. 그리고 빌어먹을 입 좀 다물어.”
섬뜩한 냉기가 해리 멀러의 등골을 타고 쏜살같이 달렸다.
04
해리 멀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책상 하나 건너편에 크고 마른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베인 매독스이며, 커스터 힐 클럽의 사장이자 소유주라고 소개했다. 매독스의 설명에 따르면 커스터 힐 클럽의 운영은 그의 본업이 아니라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 또한 그는해리도 들어본 적이 있는 글로벌 오일 코퍼레이션(Global Oil Corporation, 약자로 GOCO라고도 한다)의 사장 겸 소유주이기도 했는데, 그 설명을 통해 해리는 벽에 걸린 두 장의 사진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나는 유조선의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곳인가 사막에 있는 유전이 불타는 사진이었다.
매독스는 해리가 사진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쿠웨이트요. 걸프전 당시의 사진이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질 좋은 원유가 타는 장면을 보는 게 싫소.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불하지도 않았는데 타서 없어지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매독스는 푸른색 블레이저와 화려한 격자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해리 멀러는 달랑 보온 내복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칼과 다른 두 명의 경비원에게 모욕적인 알몸 수색을 당했다. 그들은 소몰이용 전기충격기를 들고 만약 해리가 반항한다면 가차 없이 그것을 사용하겠다고 장담했다. 지금 칼과 그 두 경비원은 전기충격기를 손에 든 채 해리의 뒤에 서 있었다. 이때까지 보안관이 올 것이라는 징후는 전혀 없었고 해리는 그가 오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산장2층, 소나무 패널을 두른 넓은 사무실 안에서 해리는 베인 매독스가 커다란 자기 책상 뒤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왼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 그는 산장 뒤에 있는 오르막 경사도 볼 수 있었고, 거기에 있는 높은 안테나가 그가 숲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독스는 자신의 손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커피나 차를 좀 드릴까?”
“엿 먹어.”
“필요 없다는 뜻이오?”
“엿 먹으라니까.”
베인 매독스가 해리를 응시하자 해리도 지지 않고 시선으로 응수했다. 매독스는60대 정도 돼 보이는군. 해리는 생각했다. 상당히 단단한 체구에 피부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그을렸다. 바짝 뒤로 넘긴 회색 머리카락과 독수리의 부리처럼 가늘고 길게 휜 코가 회색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더불어 해리는 이 남자가 부자이기는 하지만 돈만 아는 멍청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독스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고 그 속에는 그가 가진 힘과 권력, 지적 능력에 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휘 통제형 인물인 것이다. 더불어 매독스는 자신이 연방정부 요원을 납치, 감금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고, 해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매독스는 책상 위에 있는 나무 상자에서 담배를 하나 꺼낸 뒤 양해를 구했다. “내가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소?”
“당신이 태우든 말든 나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아. 보안관이나 불러줘. 지금 당장.”
매독스는 은색 탁상용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생각에 잠긴 채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멀러 형사,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왔소?”
“조류 관찰.”
“내가 일부러 무례하게 굴려는 것은 아니지만 계집애들처럼 새나 쫓아다닌다니, 대테러 기동대 요원답지 않은 취미 아니오?”
“당신은 나한테 체포되기 딱1분 전이야.”
“저런, 그렇다면, 나는 그1분을 아주 현명하게 써야겠소.” 매독스는 자기 책상 위에 배열된 소지품들을 찬찬히 살폈다. 해리의 휴대전화와 무선호출기는 전원이 꺼진 채 놓여 있었다. 해리의 열쇠고리, 핸디캠, 니콘 디지털카메라, 쌍안경, 《시블리 조류 가이드》, 지도, 나침반, 철사 절단기,9밀리미터 글록26권총. 그것은 이른바 아기 글록이라고 불리는 모델로 몸에 숨기기가 쉬웠다. 해리는 매독스가 미리 탄창을 제거해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영리하다는 의미였다.
매독스의 질문이 재개됐다. “이것을 보고 내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겠소?”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싶든지 간에 친구, 그 빌어먹을 물건들을 내게 반납하고 나를 이 빌어먹을 장소에서 나가게 해줘. 아니면 연방정부 요원을 납치한 대가로 감방에서20년을 보낼 준비를 하든가.”
매독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가 짜증나서 더 이상 참을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멀러 씨, 이제 그만하지. 이미1분도 훨씬 넘었잖소. 그러니 이야기에 뭔가 진전이 있을 필요가 있소.”
“엿이나 먹으쇼.”
매독스 쪽에서 제안이 나왔다. “나는 탐정의 역할을 해볼까 하오. 나는 여기에서 쌍안경과 작은 비디오카메라와 대단히 비싼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거기에 딸린 망원렌즈를 보고 있소. 조류 안내서도 있군. 이런 증거물로부터 나는 당신이 대단히 열광적인 조류 관찰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거요. 사실 너무나 열광적이어서 이런 물건들 외에 당신은 자신과 새 사이를 가로막는 철망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비해 철사 절단기도 준비할 정도이고, 더불어 새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오래 한곳에 머물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9밀리미터 구경 권총까지 소지하고 다닐 정도요.” 여기서 그는 해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추리가 어떻소?”
“별로 대단하지 않아.”
“그럼 다시 시도해보도록 하지. 또한 나는 미국 지질조사소 발행 지도를 볼 수 있는데, 이 지도에는 내 부동산의 경계선을 비롯해 수위실과 이 산장, 부속 건물들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소. 이 붉은색 표시로 인해 나로 하여금 내 사유지에 대한 항공정찰이 있었으며, 인공물에 대한 정보가 당신의 지도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유추했소. 맞소?”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매독스의 추리는 계속 이어졌다. “또한 나는 책상 위에서 이 배지와 한 장의 카드를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당신이 은퇴한 뉴욕 시경 형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소. 성공적 은퇴를 축하하오.”
“똥이나 처먹고 뒤져라.”
“하지만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자극한 증거는 또 다른 이 배지와 신분증인데, 그들은 당신의 신분이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 소속 연방요원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은퇴’ 상태가 아니란 말이지.” 그는 신분증 사진을 응시하다 해리 멀러를 향해 시선을 돌린 다음 질문했다. “오늘도 업무 중인 거요?”
해리는 다시 한 번 위장 시나리오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앞에 있는 남자가 단순히 자신을 풀어줄 구실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좋소. 편집증에 걸린 당신의 임대 경찰에게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들려드리지. 나는 주말을 맞아 이곳에 캠핑을 즐기러 왔소. 새를 관찰하고 사진도 찍고. 내가 연방정부의 요원인 것도 맞소. 법에 따라 나는 신분증과 장비를 소지하고 다녀야 한단 말이오. 제발, 당신은2더하기2를 해놓고 다섯으로 확대해석하지 마시오. 알겠소?”
매독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하지만 당신이 내 입장이 되어 보시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소. 나는 연방정부 요원인 해리 멀러이고, 어떤 사람의 주장을 듣고 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내 앞에 놓인 증거물들이… 나를 감시했다는 증거요, 조류 관찰을 위한 물건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오. 그럼 내가 당신을 놓아주어야 할까? 아니면 더욱 논리적이며 믿음이 가는 다른 설명을 요구해야 할까?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미안하지만, 당신 셔츠가 너무 요란한 소리를 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어.”
매독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시블리 안내서를 들고 안경을 썼다. 그리고 임의로 페이지를 펼쳤다. “멀러 씨, 아비(阿比)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호수 근처.”
“이 정도는 너무 쉽지.” 매독스는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서루리언 와블러(Cerulean Wabler, 청솔새)는 무슨 색이오?”
“갈색.”
매독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틀렸소, 멀러 씨. 서루리언은 청색을 의미해. 정확하게 스카이 블루 말이오. 한 번 더 질문하겠소. 세 개 중 두 개를 맞추면 통과하는 거요.”
그는 다시 파라락 책장을 훑었다.
“이번에도 색깔이오. 수컷….”
“이봐, 그 책에 윤활제나 잔뜩 처바른 다음 당신 똥구멍에나 처박으라고.”
매독스는 책을 덮고 옆으로 책상 가장자리로 툭 던져버렸다. 그는 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당신이 찍은 디지털 사진이 있군. 내 눈에는 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당신이 우리 전신주들 중 하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정도는 알 것 같아. 어디 보자… 이것은 우리 산장 뒤에 있는 탑이네…. 산장의 확대 사진이고…. 아, 여기 산장의 지붕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군. 이게 무슨 새지?”
“똥 누고 있는 매야.”
매독스는 핸디캠을 들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뷰파인더를 통해 내용을 검색했다. “여기 전신주가 또 나오는군. 당신은 가지가 플라스틱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거야. 내 짐작이지만… 여기 산장도 다시 나오네. 당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는 정말 잘 보이지. 아까 그 새가 이제 날아가고 있군. 저 새가 뭘까? 푸른가슴왜가리 같은데. 하지만 그들은 지금쯤이면 남쪽으로 이동했어야 맞는데. 아마 올가을이 너무 따뜻했나 봐. 지구온난화 탓이겠지. 당신이 그 헛소리를 믿는다면 말이야.”
그는 캠코더를 내려놓고 물었다.
“당신은 지구온난화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모른다고? 그럼 내가 말해주지. 바로 핵겨울이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구식 농담이오.”
매독스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완벽한 원형의 연기를 뿜어내고 그것이 위로 떠오르다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것은 사라지는 예술이지.”
해리 멀러는 방 안을 둘러보았고 그동안 베인 매독스는 자신의 사라지는 예술을 구현했다. 멀러의 귀에는 뒤에 있는 두 남자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액자들로 도배된 한쪽 벽을 보고 있었다. 액자에는 몇 가지 인증서들을 들어 있었다. 해리는 이 친구들이 어떤 인물인지 단서를 잡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매독스는 해리가 한곳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왼쪽 위에 있는 증서는 나의 은성무공훈장 훈장증이오. 그 옆에 있는 것이 청동성장의 훈장증이고, 그 옆은 상이기장이오. 그 옆은 나의 미 육군 소위 임관 사령장이고, 다음 줄에 있는 것은 일상적인 종군기장들이오. 거기에는 베트남 전역 종군기장과 대통령부대 표창도 포함되어 있지. 나는1공수기병사단 제7기병연대에 복무했소. 제7기병대는 원래 커스터 장군의 부대였지. 이 클럽의 이름이 커스터 힐이 된 데는 그런 사실도 약간은 관계가 있소. 다른 이유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만약 그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죽여야 해.” 그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오, 농담. 이봐, 얼굴 좀 펴. 그저 농담이라니까.”
해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재수 없는 놈.
“마지막 열에 있는 것은 전투보병 기장과 정예 소총사수 기장, 밀림전 훈련 과정 이수증이고 끝에 있는 것은 전역명령서요. 나는8년을 복무한 뒤 중령으로 전역했소. 그 당시에는 진급이 무척 빨랐어. 수많은 전사자들 덕분에 진급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니까. 당신은 군대에 갔다 왔소?”
“아니.” 해리는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이후 징병제도가 폐지됐으니까.”
“그렇지. 미국은 징병제도를 부활시켜야 해요.”
“절대적으로 동감해요.” 해리가 맞장구를 쳤다. “미국은 여자도 징집해야 하죠. 그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면 의무도 동등하게 짊어져야하니까.”
“정말 옳은 말을 했소.”
해리는 이제 대화에 열을 올리며 자기 생각을 계속 떠들었다. “내 아들은 징병제가 부활될 경우에 대비해서 아직도 병적부에 등록되어 있는데 딸은 그렇지 않아요. 도대체 그게 다 뭐하는 짓이죠?”
“바로 그렇소. 그럼 일남 일녀를 둔 거요?”
“그래요.”
“결혼했소?”
“지금은 이혼한 상태죠.” 해리가 대답했다.
“아, 나 역시 마찬가지요.”
“여자는 남자를 미치게 하지요.” 해리가 덧붙였다.
“하지만 남자가 그렇게 하도록 놔둘 때만 그렇소.”
“어쨌든, 우리가 그러게 놔두고 있지요.”
그 말에 매독스가 낄낄 웃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지. 어쨌든, 당신은 연방정부의 대터러 특별 기동대 요원으로서 이곳을 감시하러 왔소. 이유가 뭐요?”
“당신은 베트남에 얼마나 근무했지요?”
매독스는 잠시 해리 멀러를 응시하다가 질문에 대답했다. “각각1년 씩 두 번 복무하고 세 번째 복무는 AK-47총탄이 내 심장을2센티미터 벗어나 오른쪽 폐를 찢고 갈비뼈 하나를 부러뜨린 덕분에 중간에 끝나버렸소.”
“명줄이 기시군.”
“매일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소. 하루하루가 일종의 선물이라고. 총격을 당해본 적이 있소?”
“다섯 번. 하지만 한 번도 총에 맞은 적은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명줄이 긴데.” 매독스는 해리를 응시했다. “일단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면, 사람은 바뀌지. 다시는 그 전과 같을 수 없어. 하지만 그게 반드시 나쁜 법은 아니오.”
“나도 압니다. 아는 사람 중에 총을 맞아본 사람이 있어요.” 해리는 존 코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존 코리가 총을 맞은 뒤에도 여전히 당당했다는 점은 꽤나 확실하게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때때로 군대에 지원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요. 베트남 전쟁은 끝났지만 그래도 군에 복무할 수는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레나다 침공이나 다른 작전에 투입될 수도 있었겠죠.”
“그렇다고 자신을 학대할 필요는 없소.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군에 복무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신에게는 솔직하게 말하겠소. 실제 전투는 정말 무섭소. 게다가 우리는 지금 테러와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소. 그리고 당신, 멀러 씨는 분명 그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거요. 맞소?”
“음… 그렇죠.”
“그리고 당신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쫓고 있소. 맞소?”
해리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분주했지만, 매독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이 문제에 있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멀러 씨, 그저 내게 말만 하시오. 테러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문제에 대해 나만큼 열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대략5년 전쯤, 나는 IRA 친구들, 즉 테러리스트들 사건을 맡았었죠. 여기서 불과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어요. 놈들이 거기다 훈련장을 만든 겁니다.”
해리는 매독스에게 당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렇게 말을 끝냈다. “우리는 여덟 명을 연방 감옥에 보내서3년에서20년 사이의 형기를 살게 했지요.”
“아, 그렇군. 나도 그 일이 기억나요. 여기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이번 일도 같은 경우지요. 우리는 몇 군데 사유지들을 점검하면서 IRA와 관련된 의심스런 활동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어요. 우리의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그러니까, 이번 일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오?”
“네. 아직까지는 관계가 없어요. 우리는 IRA를 담당하고 있지요.”
“9·11사태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과 인력의 낭비인 것처럼 보이는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죠.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항, 모든 인물들에 대해 통달해야 하니까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오.”
매독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커스터 힐 클럽이 뭐더라… 아일랜드공화국군 훈련장이라고 생각한 거요?”
“뭐, 우리 보스가 이 지역의 어떤 활동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엿볼 인물로 나를 선택한 거죠. 아시다시피, 당신도 모르게 사람들이 당신의 사유지를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나도 모르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도 좀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을 거요.”
“네, 깨달았지요. 내 보고서에는….”
“분명 이곳 사람들은 준군사 조직의 훈련 활동과 관계가 없소.”
“네, 나도….”
“그리고 그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당신이 우리 산장을 촬영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오. 당신이 IRA 친구들을 찾고 있었다면 숲 속을 뒤지고 있었어야지.”
“그래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죠.”
“분명 당신은 그러고 있었지. 문제는 당신이 산장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요.”
“뭐, 그런 셈이죠. 나는 이 지역 사유지 몇 군데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어요.”
“알겠군. 그러니까 나만 이런 영광을 누린 게 아니란 말이오?”
“네?”
“그러니까, 특별히 나만 감시 대상으로 지목된 게 아니란 뜻이오?”
“아니에요. 그저 일상적인 활동에 불과죠.”
“그럼 안심이 되는군. 그런데, 정부는 당신의 활동에 대해 수색영장을 발부했소?”
“영장은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원래 영장을 소지하도록 되어 있지 않소?” 그는 책상 위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소. 심지어 당신 항문 속을 열어봐도 나오지 않는군.” 매독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뒈져라! 뒈져!” 해리는 벌떡 일어섰다. “이 비열하고 똥보다 더러운 자식아!”
“뭐라고요?”
“똥구멍에다 똥이나 처발라라! 나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갈 거야!” 해리는 매독스의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엄청난 고통이 그의 몸 오른쪽을 찢어발기듯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해리는 쿵 소리와 함께 몸이 지면에 부딪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으며 온몸이 차가운 땀으로 덮여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의 위로 칼이 서 있는 정도는 분간을 할 수 있었다. 놈은 전기충격기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한 방 더 먹여줄까?”
해리가 일어서려고 시도했지만 다리가 고무처럼 흐느적거렸다. 다른 경비원이 뒤에서 그를 잡고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다시 주저앉혔다.
해리는 호흡과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근육들을 안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모든 소리가 너무나 작게 들렸다.
경비원 하나가 물이 든 플라스틱 잔을 줬지만 해리는 그것조차 제대로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매독스가 입을 열었다. “전기가 사람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정말 놀라워. 게다가 전혀 시각적인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거든. 우리가 어디까지 했지?”
해리는 ‘엿 먹어’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IRA 캠프를 조사하는 일상적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던 것 같은데. 나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었지.”
해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말했다. “내 말은 사실이야.”
“좋소.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당신에게 다짐하리다. 내 사유지에는 단 한 명의 아일랜드공화국군도 없소. 멀러 씨, 사실 내 조상들은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도 철두철미한 잉글랜드인이오. 그래서 나는 IRA에 대해 전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소.”
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매독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IRA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곧바로 우리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시다. 정확하게 당신의 상관이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뭐요?”
다시 한 번,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당신이 대답하게 하려면 전기 자극이 필요한 거요?”
“아니… 나는 몰라. 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무엇이든 말을 하기는 했을 거 아니요. 이를테면… 해리, 우리는 커스터 힐 클럽이라는 곳에 대해 이러저러한 의심을 품고 있어 라고 했을 때, 이러저러한 사항에 해당하는 내용이 뭐였소? 그들이 우리 클럽이나 그 회원을 어떤 식으로 분류했소? 그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요.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그 부분을 알려주기를 바라오. 당신은 지금이 아니라도 결국 나중에는 불게 될 거요. 하지만 지금 말하는 쪽이 훨씬 편하지.”
해리는 전기 충격에 의한 머릿속의 몽롱함을 제거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 번도 취조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었고,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훈련을 받거나 경험한 적이 전혀 없었다.
“멀러 씨?”
멀러는 IRA 이야기를 고수해야 할지 아니면 이 빌어먹을 자식에게 자신이 그나마 알고 있는 최소한의 사실을 털어놔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목표는 분명했다.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삶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조차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이 목표였다.
“멀러 씨? 우리는 조류 관찰 이야기도 들어봤고 이어서 IRA 이야기도 들었소. 사실 그것은 꽤나 그럴 듯했지. 하지만 진실은 아니었소.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으니 내가 좀 도와주는 것이 좋겠소. 당신은 커스터 힐 클럽이 한 무리의 돈 많은 우익 미치광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무엇인가 불법일 수도 있는 활동을 모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렇지 않소?”
해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외에 그들이 우리에 대해 무슨 말을 했소?”
“아무것도. 내가 그 이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 그렇겠지. 알아야 할 필요라. 그들은 우리 회원 중 몇몇은 사교계와 정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지위도 높다는 사실을 언급했소?”
해리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내가 알 필요는 없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이 그 이유를 알았든 혹은 몰랐든 상관없이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니까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니까. 사실 우리 클럽의 회원들은 상당한 힘을 갖고 있소. 정치적 권력은 물론 재정적 부, 군사적 물리력 모든 것을 갖고 있단 말이오. 당신은 우리 회원 중에 국방차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또 다른 회원은 대통령의 고위 국가 안보 보좌관이오.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소?”
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어떤 정부 기관이 전적으로 합법적인 우리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감시했다는 사실을 별로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소. 우리는 사냥이나 낚시를 즐기고 술을 마시며 세계정세를 토론하는 모임이오. 헌법은 집회와 의사 표현, 사생활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소. 안 그렇소?”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기관의 누군가가 한계를 초월했고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다시 한 번,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독스의 말을 믿었다. 자신의 상관이 판단을 잘못해서 전혀 무고한 어떤 집단이나 인물에 대해 감시를 명령했던 경우를 이번에 처음 당해 보는 것도 아니었다. 반면, 감시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범죄 활동에 대한 의심이 정확한지 아니면 그것이 정당한 활동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해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들이 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저런, 나도 그들이 그랬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리고 당신은 현장에서 들켜버렸지.”
“맞아요.”
“당신은 FBI 요원이 아니오?”
“아닙니다.”
“아니면 CIA 요원인가?”
“맙소사, 아니에요.”
“당신은… 뭐더라? 계약직 요원?”
“그래요. 은퇴한 뉴욕경찰이죠. 지금은 FBI에 고용된 상태지요.”
“하급 요원이고.” 매독스가 추측했다.
“뭐… 그렇죠.”
“당신이 징계를 받지 않을 거라는 점은 내가 보장하겠소.”
“그럼, 전기 충격에 대해 감사드려야겠네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소.” 매독스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말했다. “손님이 오게 되어 있소.” 그는 해리를 응시했다. “내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아니요.”
“그저 우연히 오늘 여기에 오게 된 것이란 말이오?”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러 씨, 내게 얘기해봐요. 나도 오늘 아침은 상당히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소.”
“음… 그렇다면, 내가 들은 말은… 만약 누군가를 보게 되면….”
“당신은 손님이 도착하는지 관찰하다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자동차 번호판과 도착 시간을 등등을 기록해두라는 지시를 받았군.”
“네.”
“당신에게 지시하는 사람들이 오늘 여기서 모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그것은 저도 모르죠.”
“전신주 사진을 찍은 이유는 뭐요?”
“그저… 눈에 띄어서요. 우연히 그렇게 됐죠.”
“언제 이곳에 도착했소?”
“어젯밤입니다.”
“동행한 사람은?”
“없어요.”
“여기는 어떻게 왔소?”
“내 캠핑카를 몰고 왔지요.” 해리는 술술 대답했다.
“그리고 이게 자동차 키요?”
“네.”
“캠핑카는 어디에 있소?”
“이곳 남쪽에 있는 벌목용 도로에 있어요.”
“당신이 침입했던 곳 근처 말이오?”
“네.”
“당신은 전화로 보고를 하게 되어 있소?”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해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언제?”
“이곳을 벗어날 때죠.”
“알았소.” 매독스는 해리의 휴대전화를 들고 전원을 켰다. “당신에게 음성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소.” 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오지에서 휴대전화가 이렇게 잘 터지는 이유가 궁금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우리는 자체 중계기를 갖고 있소.” 그는 창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제 당신은 저 탑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사진에 이름도 붙일 수 있게 됐지. 당신은 또한 저 탑이 비화기라고 적어놓을 수도 있을 거요. 덕분에 내 전화는 아무도 감청할 수 없지.” 그리고 해리에게 물었다. “부자가 된다는 게 정말 좋지 않소?”
“아마 나는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의 음성 메시지 암호가 뭐요?”
해리가 암호를 알려주자, 매독스는 음성 메시지 번호를 누르고 암호를 입력했다. 그는 전화기를 스피커에 연결했다.
로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자기. 당신 메시지 잘 받았어. 나는 자고 있었어. 당신 여동생하고 앤이랑 오늘 쇼핑을 갈 계획이야. 나중에 전화 줘. 휴대전화를 갖고 갈 거니까. 알았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으면 알려줘. 사랑해, 자기. 그리고 너무 보고 싶어.” 그녀는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골수 우익분자들은 조심해야 돼. 그 사람들은 총을 너무 좋아 한다니까. 알았지?”
매독스의 평가가 이어졌다. “그녀는 정말 좋은 말만 하는군. 골수 우익하고 총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가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여기서 밤을 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녀의 말이 맞게 될지도 몰라.” 그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해리에게 말했다. “나는 이 물건이 신호를 전송해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믿소.”
“그럼요. 그게 내 일이죠.”
“그것도 맞는 말이군. 정말 놀라운 기술이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지. 물론, 그들은 결코 전화를 받지 않아. 하지만 음성 메시지를 다섯 번 받거나 뭔가 필요한 것이 생기면 응답 전화를 걸기는 하지.”
해리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따라서.” 매독스는 선언했다. “당신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로 그 인물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소. 솔직히 말하자면, 멀러 씨, 나는 당신이 외국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뭐라고요?”
“나는 편집증 환자가 아니오. 우리 클럽의 회원들은 세계 전역에 적을 갖고 있소. 그들의 적은 정당한 적이지. 멀러 씨, 우리는 모두 애국자들이라 세계 전역에 있는 미국의 적들에게 여러 가지 문젯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오.”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나도 당신이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소. 그리고 우리의 적들이 바로 당신의 적이기도 하지. 따라서 오래된 아랍식 표현을 빌리자면, 내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오.”
“맞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내 적의 적이 역시 나의 적인 경우도 있소. 그가 적이 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적을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한 의견이 다루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 문제는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합시다.”
“그러죠. 제가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베인 매독스가 일어서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당신과 당신의 조직이 이 클럽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으니 나도 지금까지는 내가 결코 허용한 적이 없었던 일을 한 가지 해야겠소. 외부인인 당신을 우리 클럽의 중역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겠소. 회의는 경영진을 위한 환영 오찬 뒤 오늘 오후에 열릴 거요.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소?”
“나는… 아니요. 정말 사양합니다. 내 생각에 나는….”
“나는 당신이 여기에 정보를 얻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아니요, 서두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내 크게 인심 써서 사진도 찍을 수 있게 해드리리다.”
“고맙습니다만 그래도….”
“내 생각에 당신이 중역 회의에 참석해준다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요. 당신은 무엇인가를 파악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회의에서 논의되는 내용에 대해 당신이 보이는 반응을 관찰할 수 있을 거요. 때때로 우리는 벙커 심리 속에 빠져들곤 하지. 당신도 알겠지만 벙커 속에서는 외부의 현실이 완전히 배제된 채, 오로지 우리의 현실만 들리기 마련이오. 그것은 결코 건전하지 않아요.”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베인 매독스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했다. “나는 당신이 마음을 편하게 갖고 의견을 밝혀서 우리가 마치 한 무리의 늙고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같은 소리를 하는지 알려주시오. 얼간이 우익 인사처럼 보이는지 말이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다음 프로젝트, 프로젝트 그린에 대해 당신이 솔직한 의견을 말해주길 바라오.”
“프로젝트 그린이 뭡니까?”
매독스는 경비원들을 힐끗 돌아보고 해리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입술을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핵 아마겟돈이오.”
05
해리 멀러는 맨발로 두 눈을 가린 채 두 층 아래로 끌려갔다. 그곳은 산장의 지하실이 분명했다. 주위는 춥고 습했다. 그는 내연기관과 전동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그는 앞으로 떠밀렸다.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와 금속 빗장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봐, 옆에 있나?”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한동안 주변 소음에 귀를 기울이다가 안대를 벗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홀로 남아 있었다.
해리는 작은 방에 있었다. 벽을 쌓은 콘크리트 벽돌은 콘크리트 바닥과 똑같은 회색 에나멜로 칠해져 있었다. 낮은 천장은 골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밝게 빛나는 천장의 형광등 불빛에 눈이 적응되자, 그는 방 안을 잘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달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고, 게다가 볼트로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침대에는 얇은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그가 입었던 위장복 상하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일단 옷을입었다. 주머니를 확인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방구석에는 변기와 세면대가 있었다. 변기에는 좌석도 물탱크도 없었다. 감방의 변기와 똑같았다. 세면대에는 거울이 달려 있지 않았는데, 감방에 있는 플라스틱 혹은 철제 거울조차도 설치되지 않았다.
철제 문 앞에 서보니 손잡이도 창문도 없었다. 문을 밀어보았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방을 찬찬히 살펴보며 무엇인가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침대와 잔뜩 녹이 슨 라디에이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라디에이터에서는 별로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천장 한쪽 구석에 안구 모양의 작은 선회 카메라를 발견했는데, 그 옆에 있는 작은 벽감에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욕을 했다. “엿 먹어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카메라와 스피커를 때려 부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아 다시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방에서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물체는 바로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몇 걸음을 뛰다가 도약해서 카메라를 손으로 후려쳤다. 카메라는 계속 선회하며 방 안을 주시했고 그러다 갑자기 날카로운 고출력 소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해리는 손으로 귀를 가리고 스피커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통스러운 소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렸고 결국 해리는 항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소음이 멈추고 육성이 흘러나왔다. “앉아.”
“엿 먹어라.” 빌어먹을 자식. 내가 나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대략 오전10에서11시 정도 됐을 거라고 짐작했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그렇다고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았다. 다만 목이 말랐다. 오줌도 마렵고.
그가 변기 쪽으로 움직이자 카메라가 그를 따라 회전했다. 해리는 소변을 갈기고 세면대로 가서 수도관이 하나만 연결된 수도꼭지를 돌렸다. 차가운 물이 세면대 위로 졸졸 흘렀다. 그는 손을 씻은 뒤 양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수건도 없었다. 해리는 손을 바지 옆에 문질러 물기를 닦았고 침대로 돌아가 그 위에 앉았다. 베인 매독스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떠올랐다.
‘핵 아마겟돈이오.’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리고 난 어떤 모임에 초대받은 걸까? 이 모든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다만 이것이 모두 연출이라면 모를까.
해리는 벌떡 일어섰다. “그거야!” 짜증나게 나를 훈련소에 보낸 거였군. “빌어먹을!”
그는 임무를 맡으면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보았다.10여분 동안 톰 월시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부터 기술지원부 직원을 만났던 일, 철망을 절단하던 순간, 경비원에게 들키는 장면, 그리고 여기 사유지의 감방에 갇히게 된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 모든 일들이 일종의 시험이다… SERE 과정 중 하나인거야. 생존(Survival)과 도피(Evasion), 저항(Resistance), 탈출(Escape)훈련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도피 단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감방에 갇혀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해리는 자기 이름을 매독스라고 밝혔던 친구의 심문 과정을 세밀하게 검토했다. 그것은 이번 시험의 저항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젠장! 이 단계도 망친 걸까?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떠벌린 거지? 처음에는 놈에게 엿 먹으라며 내 위장 신분을 고집했었지… 그리고 IRA 이야기를 꾸며댔고, 거기까지는 현명했어. 그렇지?
그는 전기충격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훈련인데도 그런 것을 사용할까? 그래… 아마 그래야 할 거야.
그렇다면, 이제 평가의 마지막 단계로 탈출 부분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 도피 단계가 다시 시작되고 숲 속에서 생존하는 단계가 이어질 것이다. 그거야! 지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그는 모든 일을 머릿속으로 재현하면서 그것들을 그의 새로운 믿음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했다. 그의 새 믿음에 따르면, 이것은 CIA나 FBI가 개입된 모종의 얼간이 짓이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상황은 너무나 괴상하니까.
그들은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위해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은 대단히 중요한 시험 과정인 게 분명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그가 과연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커스터 힐 클럽은 버지니아에 있는 CIA 요원 양성소와 너무나 비슷하다. 그렇지?
그는 속으로 말했다. 오케이. 좋아. 일단 첫 번째 시험은 치렀고 이제 회의를 한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짓인지 거기서 알아보도록 할까. 해리, 침착하라고. 계속 열 받은 척하는 거야. 그는 감시 카메라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네놈의 빌어먹을 대가리를 찢어발기고 목구멍에다 똥을 갈겨줄 테다!”
그는 얇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히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곧 하품이 나오면서 옅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머리 위의 형광등 불빛과 방 안의 쌀쌀한 공기로 인해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 숲 속을 걸어 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 속에서 그는 새를 보고 사진을 찍은 뒤 어떤 남자들과 말다툼을 벌였고, 이어서 매독스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독스는 그의 총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마 이게 필요할 거요.” 남자들이 갑자기 소총을 겨누었고 개도 달려들었다. 그는 글록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해리는 벌떡 일어나 얼굴의 식은땀을 닦았다. 맙소사….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금속 천장널을 응시했다. 무엇인가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바로 매독스였다. 그 친구의 무엇인가가 그를 너무 뭐랄까…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아니야, 이게 실제 상황일 리가 없어.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라면, 그는 생명마저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와.”
06
나와 케이트는 밤10시로 규정되어 있는 영업 외 시간이 되기 전에 매티턱의 작은 촌락에 있는 B&B에 도착했다. 민박 소유주와 함께 입실 수속을 했는데, 그 여성은 나로 하여금 메트로폴리탄 교도소의 거만한 여성 교도관들을 떠올리게 했다.
주택의 예스러움과 고색창연함은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사실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늦잠을 잤다. 따라서 집에서 만든 아침 식사를 걸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놓쳤지만, 사실 그들 중 둘은 어제 저녁 얇은 벽을 통해 들리는 소리로 알고 있었다. 여자가 괴성을 질러댔는데, 다행히 오르가즘을 자주 느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노스 포크 포도원들을 관광하며 토요일 오전을 보냈다. 포도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이곳은 감자 농장이었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감자밭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포도가 잘 익어서 질 좋은 샤르도네와 메를로, 기타 등등의 각종 포도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포도원을 들릴 때마다 무료로 제공되는 포도주를 시음했고, 나는 특별히 쇼비뇽 블랑을 많이 마셨다. 그 포도주는 쌉쌀하면서 향이 있었는데, 일종의… 그렇지, 감자 향이 느껴졌다.
밤이 되자 우리는 수상 레스토랑에 갔다. 그곳은 페코닉 만이 잘 보이는 아주 낭만적인 장소였다. 뭐, 케이트의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우리는 바에 앉아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바텐더가 한 잔씩 주문이 가능한 10여 종류의 와인에 대해 따발총처럼 읊었다. 케이트와 바텐더는―그 젊은 친구는 너무 계집애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몇 주간 신병 훈련소에 처박아두면 많은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포도주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다음 과일 향이 강하지 않은 와인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 포도는 과일인데 말이다.
그 젊은 놈팽이가 나에게 물었다. “이들 와인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모두 마음에 들어. 그러니 맥주를 주게.”
그는 우리의 주문을 접수시킨 뒤 음료를 갖고 왔다.
바에는 신문이 쌓여 있었고 나는 그중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을읽을 수 있었다. ‘국방부 천연두 백신 주사50만 개까지 추가 확보할 계획’.
사담이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는 한, 침공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나는 도박사에게 전화해서 전쟁 가능성에 대한 승률이 오늘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아직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쪽의 승률이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했던 지난주에 돈을 걸었어야 했지만, 나는 내부 정보를 갖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기였다. 게다가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버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았다. 내가 정부 계약자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나는 법률가인 케이트에게 물었다. “내 신분은 정부 계약자야 아니면 정부를 위한 계약직 요원이야?”
“그런 건 왜 물어요?”
“나는 윤리적 문제로 고민하고 있어.”
“아마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가 보군요.”
“뻣뻣하게 굴지 마. 나는 지금 도박사에게 전화해서 이라크 전쟁에 돈을 걸까 생각 중이라고.”
“도박사를 알고 있어요?”
“물론이지. 당신은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그건 불법이에요.”
“그럼 나 체포되는 건가? 수갑이라도 채울 거야?”
그녀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시선을 돌려 바를 둘러보았다. “목소리 좀 낮춰요.”
“나는 지금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안내원이 나타나 우리를 자리로 인도했다.
케이트는 메뉴를 훑어보다가 자기와 함께 열두 개의 굴을 먹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미소와 함께 강조했다. “굴은 정력에 좋아요.”
나는 그녀에게 통보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지난주에 이미 열두 개를 먹었지만 그중 열한 개만 효과가 있었거든.” 그리고 덧붙였다. “옛날에 써먹던 농담이야.”
“굴도 굴 나름이에요.”
이 레스토랑은 해물이 전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롱 아일랜드 오리를 주문했다. 그들도 물에서 사니까. 맞지?
나도 일과 도시가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로 인해 안도와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여행은 아주 좋은 생각이었어.”
“우리도 일탈이 필요하다고요.”
나는 문득 뉴욕 주 북부로 파견된 해리가 떠올랐다. 그러자 케이트에게 커스터 힐 클럽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이곳에 온 목적은 일에서 벗어나는 데 있었다.
케이트는 포도주를 주문하는 책임을 맡아서 웨이터와 매력적인 의견 교환을 나눈 뒤, 어떤 적포도주를 주문했다.
주문한 포도주가 나오자 아내는 그것을 시음하고 잘 익은 데다 자두 맛이 약간 감돈다고 만족감을 표현하며, 그것이 내 오리와 잘 어울릴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오리 요리가 포도주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내는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주말에 호출기가 울리지 않기를.”
“아멘.” 우리는 잔을 쨍 부딪치고 포도주를 마셨다. 아마 자두는 그녀의 잔에 들어간 모양이다.
나는 샹들리에 불빛에 포도주 잔을 비춰 보면서 말했다. “소매가 좋은데.”
“뭐가 좋다고요?”
“수갑이었나?”
아내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렇게 우리는 쾌적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저녁을 먹었다. 케이트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영롱하게 반짝였고, 붉은색 포도주의 기운으로 나는 몸이 뜨거워지며 의식이 몽롱해졌다.
현실의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기는 쉬운 법이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과거에도 그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씩 약간의 시간을 훔쳐서 나머지 세상도 지옥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척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9월11일 이후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아직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나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나나 케이트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각성을 일으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은 사소한 일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재결합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떨쳐버려야 할 시기야.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에게 삶이 필요해.”
우리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인데, 한번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분위기를 내게 설명해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별로 말주변이 없어서,1941년12월7일 직후에 맞이한 크리스마스를 묘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겁을 먹었지. 그래서 열심히 술도 마시고 섹스도 많이 했어. 그리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방문하기 시작했지. 사람들이 주고받는 엽서나 편지의 양도 엄청나게 늘었어.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서로를 도운거야. 그러다 보니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더구나.” 그리고 나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 꼭 전쟁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아버지,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식으로 되먹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작년9월11일, 우리 부모님은 이틀에 걸친 고생 끝에 플로리다에서 나를 만나러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찾아 내셨을 때, 무려15분에 걸쳐 두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야기하셨다. 그것이 약간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분명 부모님의 의도는 그것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하지만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없이1년 혹은2년 정도가 흘러가게 되면, 우리는 다시 원래 정상적 상태인 자기중심적이고 서로 거리를 두는 존재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다른 곳에 사는 친지들이 계속 안부를 물어보는 통에 이제는 나도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화 작용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만큼 가졌으니, 이제는 그게 무엇이든 과거에 하던 일과 화해하고 과거의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하지만 나는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섹스도 많이 즐기더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꽤나 오랫동안 거기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아직 총각인 친구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아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에 관한 한, 나는 케이트에게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식탁 위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존, 저도 사랑해요.”
이런 면이 있어서 그날의 참상이 안 좋은 결과만을 초래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9월10일에 나는 별로 자상한 남편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다음 날, 아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내 세계는 무역센터 건물과 함께 무너졌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되자,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업무나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바로 내일 벌어질 일조차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07
해리 멀러는 눈가리개를 하고 발목에 족쇄를 찬 채, 느낌상 푹신한 가죽 의자로 여겨지는 자리에 앉았다. 나무 타는 냄새와 담배 연기가 코에서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에 베인 매독스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멀러의 눈가리개를 목 주위로 내려주었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그는 자신이 긴 소나무 탁자의 한쪽 끝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다섯 사람이 더 있었는데, 한쪽에 각각 두 명씩, 그리고 그와 마주 보고 있는 상석에 베인 매독스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마치 해리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들 각자의 앞에는 리갈 패드와 펜, 물 잔, 커피 컵이 놓여 있었다. 해리는 매독스 앞에 키보드가 놓여 있다는 차이점을 발견했다.
해리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서재가 아니면 개인 전용실이었다. 그의 왼쪽에 벽난로가 있었다. 벽난로의 양옆에 창문이 있었지만 커튼이 드리워져 그는 밖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눈가리개를 하고 감방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면서 이곳이 산장의1층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구에는 칼과 또 한 명의 경비원이 서 있었다. 그들은 권총이 든 총집을 차고 있었지만 전기충격기는 소지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방바닥의 중앙에 세워놓은 커다란 검은색 여행 가방에 주목했다. 그것은 오래된 물건으로 바퀴 달린 상자에 묶여 있었다.
베인 매독스는 해리의 존재를 이제 처음 인식한 것처럼 말을 걸었다. “멀러 씨, 환영하오. 커피나 차를 좀 드시겠소?”
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독스는 다른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던 그 사람, 뉴욕 시경 해리 멀러 형사입니다. 지금은 은퇴해서 연방정부의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를 위해 일하고 있지요. 우리가 그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모두 손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임으로써 일단 경의를 표했다.
해리는 그들 중 두 사람이 몹시 낯익다고 느꼈다.
매독스가 계속 말을 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연방 대테러 특별 기동대에 몇 명의 친구가 있지만, 분명 그들 중 누구도 멀러 씨가 오늘 이곳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의 내면을 꿰뚫어보려고 애를 썼다. 이것이 정교하게 계획된 시험일 수도 있다는 희망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 희망마저 점차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간절하게 거기에 매달렸다.
매독스가 경비원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방을 나갔다.
해리는 탁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두 사람은 매독스와 비슷한 연배였고 한 사람은 더 연장자였으며, 해리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만이 다른 사람들보다 젊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매독스와 똑같이 푸른색 블레이저와 격자무늬 셔츠 차림이어서 그게 마치 오늘의 제복인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낯이 익은 것처럼 보이는 두 남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분명 두 사람을 TV나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매독스는 해리의 시선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용서하시오. 내가 우리 중역 회의 임원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한 사람이 말을 끊었다. “베인, 통성명 따위는 필요치 않아요.”
매독스가 대꾸했다. “그래도 멀러 씨는 우리들 중 몇 사람을 알아본 것 같습니다만.”
아무도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해리만 예외였다. “저도 이름을 알 필요는 없는데….”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매독스가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모임에 합류했는가를 아는 것이오.” 그는 자기 바로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방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자 조금 전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이었다. “해리, 이쪽은 폴 던, 대통령 국가 안보 담당 고문이자 국가 안전보장회의의 일원으로, 당신도 이분을 알아봤을 것이오.”
매독스는 이어서 던 옆, 해리 근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국 공군의 제임스 호킨스 장군은 합동참모본부의 일원이오. 비록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지만, 당신은 이분도 알아봤을 것이오.”
이어 매독스는 자기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쪽은 에드워드 울퍼, 미국 국방차관이며 카메라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오. 에드하고 뉴스 카메라 사이에는 절대 끼어들지 마시오. 그랬다가는 주먹으로 크게 한 방 맞게 될 거요.” 매독스는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매독스가 덧붙여 말했다. “에드와 나는1967년4월, 조지아주 포트 배닝에서 육군 학사장교로 함께 임관했소. 그리고 같은 함께 베트남에서 복무했지. 그 이후로 이 친구는 상당한 명성을 쌓았는데, 그동안 나는 돈을 벌었지.”
울퍼는 전혀 웃지 않았다. 해리가 보기에 그것은 그들 사이의 오래된 농담 같았는데 말이다.
매독스의 소개는 계속 이어졌다. “해리, 이어서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중앙정보국의 스콧 랜스데일로 분명한 카메라 기피증 환자이자 중앙정보국의 백악관 연락관이기도 하오.”
해리는 힐끗 랜스데일을 훑어보았다. 그는 약간 건방지고 교만해 보였는데, 불행하게도 해리가 함께 일해야 했던 CIA 요원들 대부분이 그런 경향이 있었다.
매독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으로 커스터 힐 클럽의 중역 회의 소개를 마치겠소. 우리 클럽의 나머지 회원들은… 이번 주의 경우 약 열두 명 정도인데, 하이킹이나 조류 관찰을 즐기는 중이오. 그리고 조류 관찰이라는 말이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기를 바라오.” 그리고 매독스는 다른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멀러 씨는 조류 관찰자입니다.”
해리는 ‘엿 먹어’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잠자코 참았다. 그는 이제 확실하게 파악했다. 여기 그들이 일부러 워싱턴에서 이곳에 온 이유는 멀러의 자격 인증 시험을 수행하고 그에게 더 중요하고 좋은 직책을 부여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매독스가 해리에게 말했다. “이번 주의 모임은 정기적으로 계획된 행사로 국제정세를 의논하거나, 정보를 교환하면서 단지 동료애 비슷한 것을 나누는 자리요.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 등장했기 때문에 나는 긴급 간부 회의를 소집해야 할 필요를 느꼈소. 지금은 그것이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조금 지나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거요.”
해리가 입을 열었다. “회의 내용을 듣고 싶진 않아요.”
“나는 당신이 탐정이 아닐까 생각했었소.” 매독스는 해리를 뚫어지게 응시하다 말했다. “하지만 ATTF에 있는 우리 친구를 통해 당신의 신분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고, 당신은 스스로 주장하는 그 인물이 맞는 것처럼 보이오.”
해리가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ATTF에 있는 매독스의 친구가 누구인지는 궁금했다.
매독스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만약 당신이 CIA나 FBI였다면 우리는 크게 걱정했을 것이오.”
CIA측 인물인 스콧 랜스데일이 말했다. “베인, 나는 멀러 씨가 CIA 요원이 아님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매독스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내부 사정은 내부인이 잘 알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랜스데일의 말이 이어졌다. “더불어 멀러 씨가 FBI 요원도 아니라는 점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드러난 모습 그대로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전직 경찰관으로 FBI를 위해 감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죠.”
“당신의 보장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매독스가 말했다.
“별말씀을. 이제 나도 약간의 보장을 받고 싶습니다. 베인, 당신은 어느 시점에서 멀러 씨가 임무 중 실종됐다고 알려지게 될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매독스가 말했다. “멀러 씨에게 물어보시죠. 바로 당신 옆에 있습니다.”
랜스데일은 해리를 향해 상체를 돌렸다. “그들은 언제 당신의 행방을 궁금하게 여길까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나는 페더럴 플라자26번지에서 일이 어떤 식으로 수행되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모르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까.”
해리는 생각했다. 전형적인 CIA 머저리군. 항상 자기가 실제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