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살다 보면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작가로서 받았던 수많은 질문들 중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단연코 이것이었다.
“소설을 써서 먹고살 수 있나요?”
어린 시절부터 나 스스로에게도 수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다. 결국 대답을 찾지 못한 나는 전업 소설가를 포기하고 시나리오작가를 병행하다가 결국 다른 직장을 가졌다. 지금까지도 나는 낮에는 방송국 PD, 밤에는 작가로 이중생활을 해오고 있다.
작가의 분야도 참 많다. 드라마작가, 시나리오작가, 여행작가, 소설가 등등. 그중에서도 소설가 앞에는 유난히 ‘가난한’이라는 수식어가 익숙하게 붙는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특히 20대에는 그게 싫어서 일부러 빨간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다분히 허세이긴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일에 씌워진 ‘가난’이라는 멍에를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시장은 점점 쪼그라들었고 소설가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사실 그 와중에 나는 글을 써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는데, 그 역시도 80퍼센트 이상이 소설의 영화 판권료와 시나리오 작가료였음을 고백한다.
책 판매가 그토록 줄었다는 것은 독자층이 얇아졌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이대로 소설은 소멸하나 싶었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소위 등단이라는 거창한 절차를 통과한 문단 작가들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 동안, 평론가들의 외면을 받았던 문단 밖의 장르소설 작가들은 꾸준히 독자층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웹에서 소설을 연재하는 플랫폼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웹소설 시장은 급성장했고, 마침내 네이버가 웹소설 플랫폼을 구축하면서 폭발적인 성장의 계기를 맞이했다. 요즘은 연수입 1억이 넘는 웹소설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소설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해준다.
“웹소설 아세요?”
대세는 웹소설이다. 웹소설 시장으로 돈이 몰려서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이 종이보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쉽게 가기 때문이다. 현재는 장르소설에 편중되어 있지만, 결국은 문학 전반의 무게중심도 종이에서 웹으로 이동하리라 본다.
등단을 하기 위해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과 씨름하며 청춘을 바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학생들은 웹소설 작가가 되기 위해 모니터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 학생들뿐이겠나. 직장인, 가정주부들 중에서도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작가의 꿈을 웹에서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장 포털에 올라와 있는 질문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하면 웹소설 작가가 될 수 있나요?”
이 책은 이렇게 묻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다.
이 책에 함께 글을 실은 작가들은 웹소설 작가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이들이다. 이미 여러 편의 웹소설을 연재했으며, 현재도 네이버 ‘오늘의 웹소설’에서 연재를 진행 중인 현역작가로 집필 자격을 한정했다고 들었다.
나보다 더 조회 순위가 높은 작가도 있고, 내 작품보다 몇 배 더 많은 판매를 기록한 작가도 있지만, 감히 내가 대표 서문을 쓴다. 음, 출판사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혹시 나이가 제일 많아서일까, 의문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이재익(SBS PD, 소설가)
나는 2007년에 데뷔해서 2015년 현재 데뷔 9년차를 맞이한 로맨스소설 작가다. 9년간 총 13종에 달하는 종이책을 냈고, 전자책으로만 출간한 작품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네이버와 카카오페이지 등에서 연재를 진행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희귀하다는 글로만 벌어서 먹고사는 ‘전업작가’다.
내가 작가라는 것을 알면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나요?”
그럴 때 내 대답은 굉장히 심플하다.
“쓰고 싶은 글을 써서 장르에 맞는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하세요. 연재 중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면 그대로 데뷔하는 거고, 출간 제의가 오지 않으면 직접 출판사에 투고하면 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참 쉽죠, 잉?”이라는 말이 떠오를지 모르지만, 사실이 이렇다. 실제로 현재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장르소설 작가들이 이렇게 데뷔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작가가 되어야지!’ 하고 주먹 불끈 쥐고 비장하게 시작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저 취미삼아 썼던 글을 인터넷에 몇 편 연재하다가 출판사의 눈에 띄어 운 좋게 데뷔했다.
이렇게 써놓으니까 내가 봐도 참 쉬운 것 같지만, 물론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있을 리 없다. 순문학처럼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낮고, 그래서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하다. 특히나 2, 3년 전부터는 ‘웹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장르소설이 뜨면서 더욱더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상태다. 데뷔하기는 쉽지만 살아남기는 예전보다 훨씬 어렵다.
내가 이 책의 원고 청탁을 받고 수락한 이유는 바로 그런 작가 지망생이나 신인작가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이 길을 선택했다면 어쨌든 앞으로 끊임없이 고민과 회의에 시달릴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먼저 길을 간 선배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해서.
작가의 재능이란 무엇일까?
아무래도 경력이 있다 보니 주위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도 업계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기성작가들이다. 이런 동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재미있는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중·고등학교 때부터 습작을 했다, 라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년에 한 편씩 노트 몇 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썼다. 2학년 때부터는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에 연재를 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독자는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노트에 소설을 썼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독서실에 가서도 친구들이 공부할 때 나는 글을 썼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내 책상 앞에 친구들이 줄을 서 있는데 어떻게 그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 내내 그렇게 글만 썼다. 물론 고3 때까지도.
재미있는 것은 주위에 있는 작가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내 추억을 남의 입으로 듣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이 입시공부를 팽개치고 딴짓에 매달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심지어 그때는 글을 써서 돈 한 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출판을 하겠다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 나중에 작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습작의 과정이라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저 독자가 읽어주는 것이 즐거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즐겁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작가’가 된다.
지금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들이나 신인작가들은 아마 매일같이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아마 작가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사람들 중 이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정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작가들도 이 문제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심지어 이미 성공한 작가들조차도.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애초에 작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디까지나 글쓰기가 좋아서 취미로 썼던 것이지, 내가 작가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서는 일본어를 전공했고 대학 시절 내내 글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냈다.
그러던 중 스물일곱 살의 어느 봄날,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음까지 함께 살랑거렸다. 갑자기 연애하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니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져서 로맨스 전문 연재 사이트를 찾아서 연재했다. 고교 시절에 PC통신에 연재했던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무려 출판사에서 종이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날 밤에는 설레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책이 나오다니! 혹시나 다음 날 출판사의 마음이 변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계약은 이루어졌고, 그해 가을에 두 권짜리 책을 내면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책을 한번 내고 나니 이제는 취미가 아니게 되었다. 아, 나도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가 취업활동을 해야 할 시기였는데 취업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 글만 쓰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작가라는 것은 굶어죽기 딱 알맞은 직업이라고 여겨졌다. 장르소설 작가도 대부분은 크게 다를 바 없고, 심지어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시장이 작았다. 전업작가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장이었다.
물론 글로만 먹고살 수 있는 작가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 정말 극소수의 이야기였고 나는 이제 겨우 데뷔한 신인이었다. 두 권짜리 첫 책 출간으로 얻은 수입이라고 해봤자 300만 원 남짓. 거기에 전자책 수입을 합친다고 해도 5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당시는 전자책 시장도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수입 역시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작가의 길을 계속 가도 되는 것인가. 내게 그런 재능이 있는가. 이 고민을 정말 오랫동안 했다. 재능이 없다면 허송세월하지 말고 빨리 취업해서 일해야 하는데,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리송했다. 어떤 날은 ‘아, 난 역시 재능이 있어!’ 하는 자신감이 들기도 하고, 또 그다음 날은 다시 ‘역시 난 재능이 없어’ 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희망을 가졌다가 좌절했다가, 또다시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좌절하고. 무한 반복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이런 짓도 해봤다.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산에 올라가서 제발 제대로 된 답을 달라고 속으로 기도한 후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오면 글을 계속 쓰고, 뒷면이 나오면 깨끗하게 접고 취업하겠다고 결심하고.
결과는 정확히 뒷면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속에서 오기가 났다. 이까짓 동전이 뭔데 나한테 글을 쓰라 말라 한단 말인가? 다 필요 없으니 나는 내 길을 가겠다, 하는 오기가.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아, 나는 어쨌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물론 고민이 그 순간 딱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방황하고 힘들어했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내게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계속 쓰다 보니 어느새 작품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5년이 지나고, 6년이 지나고, 어느새 데뷔 10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으로도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했을 만큼 좋아졌다. 가끔은 한 달에 웬만한 회사원 연봉만큼 들어올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 부디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가장 큰 재능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타고난 재능이요, 후천적으로 배울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이 있으면 그 외의 것들은 결국 따라오게 되어 있다. 글은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늘게 되어 있으니까. 그걸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조금은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해도 지망생들은 분명 또 고민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서도 부디 글은 놓지 않기를 바란다. 고민하더라도 계속 쓰면서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작품이 하나씩 늘어나고 어느새 작가로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그 고민을 여태까지도 하고 있다. 물론 계속 쓰면서.
이 글을 읽기 전 주의사항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하라’ 하는 식의 서술이 계속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아무쪼록 걸러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라’고 쓰여 있더라도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쓴 걸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대단한 작가가 아니다. 그런 작가가 과연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작가 위에 작가 없고, 작가 아래 작가 없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다. 모두가 자기 스타일로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내는데, 거기서 고하를 따진다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말이 절대적인 지침이 될 순 없다. 그저 조금 먼저 글을 쓴 사람의 조언 정도로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라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등의 스낵컬처가 유행하면서 웹소설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늘어났다. 먼저 정확히 웹소설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웹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네이버가 2013년 1월에 장르소설 연재 서비스를 시작할 때, 그 서비스를 ‘웹소설’이라고 명명하면서 생겨난 것이니까. 즉 쉽게 말해 웹소설은 장르소설의 일부분이자 한 형태다. 굳이 기존의 장르소설과 웹소설의 차이점을 이야기하자면, 장르소설이 종이책, 전자책을 목표로 하는 글이라면, 웹소설은 처음부터 연재를 목표로 하는 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기존의 장르소설 역시 대부분 인터넷에 연재를 했고, 또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간 전 홍보 차원에서 무료 연재를 하는 것이고, 현재의 웹소설 시장은 유료 연재로서 연재 자체에서 수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웹소설도 인기를 얻으면 종이책, 전자책으로 출간되지만 아무래도 부차적인 것이고, 일차적인 목적은 연재다. 즉 기존의 장르소설이 출간 > 연재라면, 웹소설은 연재 > 출간이다.
이러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예 처음에 쓸 때부터 다르게 써야 한다.
웹소설 쓰는 법
웹소설의 대전제는 가독성이다. 무조건 읽기 쉬워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문장의 길이가 짧아야 하고, 문단의 길이도 확 줄여야 한다. 이유는 독자들이 웹소설을 읽을 때는 대부분 PC 화면이 아닌 모바일, 즉 자신의 휴대폰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글 프로그램에서 세 줄 나오는 문장이 폰으로 보면 여섯 줄 이상 나온다. 어떤 플랫폼에서는 한 줄에 채 스무 자가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여덟 줄, 아홉 줄도 된다. 이러면 문장 한두 개로 벌써 페이지의 반이 꽉 차버린다. 그러니 원래 소설을 쓰던 버릇 그대로 웹소설을 쓰게 되면 독자는 보기가 힘들어진다.
이 느낌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품을 모바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드시 글을 올리고 난 후 PC가 아니라 폰으로 읽어보기를 바란다. 무슨 말인지 확 느껴질 것이다.
또 한 가지, 웹소설 독자들은 전자책 독자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주로 모바일로 본다는 점은 같지만, 전자책 독자들은 책을 읽겠다고 생각하고 돈 들여 그 책을 산 사람들이다. 웬만하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어느 정도 집중해서 본다.
하지만 웹소설 독자들은 대부분 호기심에 한번 눌러본 사람들, 혹은 그냥 시간 때우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집중력이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힘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면 바로 가차 없이 뒤로가기를 누른다.
그러니 최대한 읽기 쉽게, 또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하는 것이 웹소설이다. ‘글로 설명한다’라기보다는 ‘장면을 보여준다’라는 느낌으로 쓰는 것이 유리하다. 서술보다는 대화를 많이 넣고, 묘사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시작부터 사건을 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 설정이나 인물의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를 처음부터 풀어놓으면 안 된다. 그걸 다 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웹소설 독자들은 참을성이 강하지 않다. 설명은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뒤에 해줘도 괜찮다. 우선은 흥미로운 사건으로 눈길부터 잡아놓은 후, 뒤에서 차차 풀어주어도 좋다는 말이다.
또한 웹소설은 처음 쓸 때부터 연재 형식으로 써야 한다. 미리 한 권의 책을 써놓고 그것을 분량대로 무 자르듯 딱딱 자른다고 해서 연재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연재 글을 쓰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술과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책 한 권을 써내는 것보다 한 편씩 연재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골치 아픈 일이다. 사실 이 부분은 책을 이미 몇 권씩 내고 연재를 많이 해왔던 기성작가들에게도 어렵다.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미 무료 연재를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료’였기 때문에 분량의 제한도 없었고, 다음 편을 꼭 보게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유료 연재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우선 유료 연재의 경우 대부분 정해놓은 회당 분량이 있는데, 물론 작가가 기계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약간 넘치거나 덜한 정도는 허용되지만 그래도 선을 훌쩍 넘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네이버에 연재했던 〈위험한 신입사원〉의 경우 늘 원고지 40~45장 안에서 한 회 차가 이루어졌다. 90화 가까이 쓰면서 이 범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문제는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연재 글이라면 반드시 다음 회가 기대되도록 아슬아슬한 곳에서 끊어야 하는데, 그 절단 포인트가 40~45장마다 한 번씩 칼같이 올 리가 없다. 이 포인트는 20장 뒤에 오기도 하고 60장 뒤에 오기도 하고, 심지어 100장 뒤에 오기도 하는데, 한 회 차의 분량은 늘 40~45장으로 비슷하게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매한 곳에서 대충 끊어버릴 수도 없다. 주인공이 밥 먹고 수다를 떤다든가, 혹은 세수하고 이를 닦는 장면에서 끝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연재 글 역시 마찬가지다. 끝은 늘 아슬아슬하게, 다음 편이 궁금해지도록 끊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회당 분량은 그때그때 비슷하게 맞춰주어야 한다. 만약에 연재 글을 쓰다가 절단 포인트가 20장 만에 와버렸다고 치자. 그러면 중간에 20장 정도를 더 늘려야 한 회 분량을 채울 수 있는데, 이 비는 분량을 별 쓸데없는 대화로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밥 먹었어?”
“응.”
“뭐 먹었어?”
“삼겹살.”
이런 식으로 분량을 채우게 되면 글은 필연적으로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분량만 늘리고 늘려서 40장을 채웠을 뿐이지 실제로 내용은 20장짜리니까. 게다가 읽고 나면 독자에게도 ‘볼 게 없었다’는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늘려야 하는가.
‘늘린다’는 생각을 한 순간 글은 반드시 지루해진다. 분량을 늘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에피소드의 순서를 바꿔서 분량을 채워야 한다. 뒤에 올 에피소드의 일부를 앞으로 가져와서 넣어준다든지, 아니면 앞에 들어갈 에피소드에서 분량이 너무 많은 부분이 있었을 테니 그걸 조금 빼서 뒤로 가져가도 괜찮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분량을 조절하려면 필수적으로 최소 몇 화 정도는 여유분을 가지고 연재를 진행해야 한다. 부디 유료 연재를 실시간 연재로 진행하는 모험은 하지 않기를 권한다!)
이런 방법이 여의치 않다면 에피소드를 좀 더 세밀하게 쓰는 방법도 있다. 몇 줄의 서술로 넘어갈 부분을, 조금 더 자세하게 장면으로 뽑아서 서술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장면으로 풀어서 써주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질 부분을 골라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드라마로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을 길고 세세하게 찍어봤자 시청자 채널 돌아가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남편의 불륜 현장을 잡고 분노하는 장면은 어떨까? 표정 하나, 몸짓 하나까지 세세하게, 대사도 길게 해서 찍어도 시청자는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몰입하면서 재미를 느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웹소설은 가독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서술이 아니라 보여주듯 장면으로 풀어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이미 이야기했다. 즉 어떤 부분을 독자들이 세세하게 보고 싶어하는가, 그것만 제대로 캐치해낼 수 있다면 이 방법은 분량과 재미, 그리고 가독성까지 보장되는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분량이 넘칠 경우에는 필히 중간에서 자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흔히 작가들끼리 말하는 ‘절단 신공’이 필요하다. 무조건 그 뒤가 궁금하게 끊어주어야 한다. 물론 어렵겠지만 계속해서 하다 보면 점점 감을 잡게 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써야 하는가
지금까지는 전반적인 웹소설을 쓸 때의 주의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제 내 전문 분야인 로맨스소설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로맨스 작가 지망생들, 혹은 신인작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사실 장르소설이라는 것이 문학계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에 속한다. 장르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작가 중에서는 최하위층이 되는 것을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어디 가서 장르소설을 쓴다고 하면 다짜고짜 가르치려 들려는 사람도, 얕보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장르소설 중에서도 로맨스는 한층 더 지위가 낮다. 판타지, 무협을 즐기는 독자들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로맨스를 ‘한심한 여자들이 읽는 책’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전자책이나 장르소설에 대한 세미나가 열려도 판타지, 무협에 대해서만 다루고 로맨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로맨스의 점유율이 제일 큰데도.
현재 장르소설 시장은 2, 3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졌다. 첫째는 스마트폰의 보급에 의한 전자책 시장의 확대 때문이고, 둘째는 웹소설과 유료 연재 등 연재 시스템의 정착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르소설 시장에서도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바로 로맨스다.
나는 이것을 로맨스의 힘이라고 본다. 세상이 점점 살기 힘들어질수록 로맨스의 힘은 빛을 발한다. 사람들에게 온갖 시름을 잠시잠깐 내려놓고 꿈을 꾸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남들이야 뭐라 말하든 작가 자신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 마음을 잊지 않아야 세상이 로맨스 작가에 대해 폄훼를 하든 조롱을 하든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
또 하나 당부할 것은,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가끔씩 신인작가나 지망생들이 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조급함이 눈에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겨우 3, 4년 전만 해도 작가들이 이렇게 조급하지 않았다. 그때는 어차피 이 일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취미로 시작한 작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웹소설이 돈이 된다는 기사도 많이 나고 하다 보니 모두들 조급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빨리 인기작가가 되어 정식 연재를 하고 싶어하고, 심지어 전업작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장이 커졌다 해도 하루아침에 글밥 먹고살기는 힘들다. 나만 해도 전업작가로 먹고살기에 충분한 수입을 벌어들이기 시작한 것은 겨우 2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 전 7년 동안은 입에 풀칠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돈에 대해 조급해하면 자칫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 더 많은 독자에게 보이고 싶은 것과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는 더 재미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게 되지만, 후자는 빨리 대충 많이 써서 팔아넘기고 싶어하게 된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다작이나 과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에 따라 다작을 할 수도, 과작을 할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다작을 하려고 들면 바로 작품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을 많이 내지 못하지만, 다작을 하면서도 늘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많이 있다. 이건 작가마다 다르므로 자기 스타일에 맞게 하면 되지, 정답은 없다.
단지 다작을 하든 과작을 하든 반드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쓰라는 것이다. 자기가 봐도 재미가 없고 미흡한데, 돈 때문에 그걸 그대로 세상에 내놓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요즘은 연재가 돈이 되다 보니 하루에 몇 천 자, 심지어 만 자 단위까지 정해놓고 꾸역꾸역 일하듯 억지로 써내는 경우도 있는데, 당장에 얼마간의 돈이 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자기가 읽었을 때는 재미있는 글을 내놓도록 하자.
글 자체에 대해서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바람직하지만, 자칫 조급해한 나머지 쉽게 절망할 수 있다. 타고난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하루아침에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겠는가? 다 쓰면서 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좋은 작품도 나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이 일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운이 좋아 하루아침에 되었다 해도 부작용이 따르기 쉽다. 부디 인내심을 가지고,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쌓아간다는 마음으로 썼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읽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을 갖기 바란다.
장르소설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문학이다.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잠시 와서 마음을 쉬고 갈 수 있는 오아시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치열한 삶에 대한 고뇌를 풀어내며 작가정신을 발휘하고 싶다면 로맨스는 적합한 무대가 아니다.
장르소설은 독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독자가 로맨스를 왜 읽는가에 대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자신에게 독자를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일찌감치 로맨스는 접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공식
보통 로맨스를 그냥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단어 자체의 정의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한국 장르소설로서의 로맨스는 정확히 정해진 틀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독자들로부터 비난받고 외면당한다. 아예 이건 로맨스가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특히 로맨스 시장이 커지면서 남자 작가가 로맨스를 쓰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자들과 남자들이 생각하는 로맨스의 포인트는 전혀 다르다. 문제는 로맨스 시장의 독자들은 절대 다수가 여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 작가 본인은 로맨스라고 생각하고 쓰는데 결과물을 보면 남성향일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남주인공이 무능력하다든가, 여주인공이 여럿(!)이라든가.
꼭 남자가 아니라 로맨스 장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여자가 써도 마찬가지다. 자칫 로맨스에서 용납되지 않는 부분을 건드릴 수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경우, 데뷔작에서 여지없이 실수를 범했다. 바로 남자 조연의 역할이 너무 컸던 것이다. 여주(여자 주인공)가 남주(남자 주인공)보다 남조(남자 조연)와 먼저 키스를 하고, 심지어 황홀해한다.
그때 편집자가 내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작가님, 남조와의 키스는 절대 달콤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니, 남주, 남조 다 멋진 남자들인데? 아직 남주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왜 남조와 달콤한 키스를 하면 안 되는 거지?
이해가 안 갔지만 당시 나는 로맨스의 로 자도 모르는 신인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편집자의 조언에 따라 수정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편집자의 조언이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었다!
만약에 그대로 책이 나왔더라면 독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여주의 마음이 갈대 같아요.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흔들려요. 얘랑 키스해도 좋아하고, 쟤랑 키스해도 좋아하고. 헤픈 스타일이에요.”
이래서 무작정 사랑 이야기만 쓴다고 다 로맨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소설로서의 로맨스에는 정확히 지켜야 할 공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을 알려면 다른 작품들을 많이 봐야 한다. ‘읽으라’는 말이 아니다. 많은 로맨스 작가들이 그렇듯, 나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잘 못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거의 다른 로맨스들을 읽지 못한다. 그저 인기 있는 작품의 연재분을 한두 개씩 훑어본다든가, 새 책들이 나오면 책 소개를 보는 정도로 충분하다. 최소한 다른 작가들이 어떤 글을 쓰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냥 무작정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 이야기를 쓴다고 로맨스가 아니다.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장르의 특성을 파악한 후에 쓰기를 권한다.
한 가지 더, 판타지나 무협 등의 다른 장르의 이야기에다 러브라인만 더 강조해놓고 이건 로맨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야기를 써놓고 거기에 러브라인을 넣는 것이 로맨스가 아니다. 전후관계가 반대다. 로맨스에서는 반드시 모든 사건이 사랑을 위해 벌어져야 한다. 전쟁이 터져도, 세계가 멸망해도 좋지만 그 모든 일은 남주와 여주 사이의 감정 변화에 기여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남주와 여주 사이의 감정이 아닌 그 외의 것들은 많이 자제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리성이 너무 강하면 로맨스가 죽어버린다. 물론 스토리가 재미있으면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로맨스가 약해서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클리셰, 잘 알고 제대로 써라
〈타이타닉〉의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보았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결말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어떤가? 과정은 물론 결말까지 모두 나와 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었고, 대부분 성공했다. 과정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또 보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장희빈이 패악을 부리다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은 전 국민이 이미 몇 번씩 본 장면이다. 그런데 배우와 대사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또 보고 싶어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람들이 ‘이미 뻔히 알면서도 다시 보고 싶어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로맨스가 뻔하다는 이야기는 사실 독자들에게서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뻔하게 흘러가지 않으면 은근히 실망한다. 뻔한 줄 알면서도 꼭 보고 싶은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장희빈〉에서 사약 신이 나오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서운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상 그런 이야기는 만들 수도 없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나니.’ 이미 솔로몬이 3천 년 전에 한 얘기다. 자신의 이야기가 굉장히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 이야기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했다.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
심지어 장르가 정해지면 이건 더욱더 새롭기가 어렵다. 특히나 큰 틀에서 보면 로맨스는 정말 딱 정해져 있다. 두 남녀가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늘 먹던 음식에서 이미 알고 있는 맛이 나기를 바라지 희한한 맛이 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된장찌개를 먹을 때는 된장찌개 맛을 기대하고 먹지, 거기서 과일 맛이 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같아서야 식상할 뿐이다. 게다가 우리는 작가다. ‘그럼 어차피 다 뻔하니까 나도 뻔하게 쓰면 되겠네!’ 이렇게 뱃속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 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