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HENKERSTOCHTER
by Oliver Pötzsch
Copyright © by Ullstein Buchverlage GmbH, Berlin
Published in 2008 by Ullstein Taschenbuch Verlag
All Rights Reserved.
No Part of this publication may be used or reproduced in
any manner whatever without the written permission except in the case of
brief quotation embodied in critical articles or reviews.
Korean Translation Copyrights © 2013 by Moonye Publishing Co., Ltd.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Ullstein Buchverlage GmbH, Berlin
through BC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BC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사와 독점 계약한 (주)문예출판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제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프리츠 퀴슬을 추억하며
가계의 또 다른 끝에 있는
니클라스와 릴리에게
야콥 퀴슬 숀가우의 사형집행인
지몬 프론비저 의사의 아들
막달레나 퀴슬 사형집행인의 딸
안나 마리아 퀴슬 사형집행인의 아내
퀴슬 쌍둥이 게오르크와 바르바라
보니파츠 프론비저 의사
마르타 슈테흘린 산파
요제프 그리머 짐마차꾼
게오르크 리그 짐마차꾼
콘라트 베버 교구신부
카타리나 다우벤베르거 파이팅의 산파
레즐 골데너 슈테른 여관의 하녀
마르틴 휘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온 짐마차꾼
프란츠 슈트라세 알텐슈타트의 여관 주인
클레멘스 크라츠 식품점 주인
아가테 크라츠 식품점 주인의 아내
마리아 슈레포글 시의원의 아내
볼프 디트리히 폰 산디첼 백작 바바리아의 선거후 공작의 비서
요한 레흐너 법원 서기
카를 제머 현직 시장 겸 골데너 슈테른 여관의 소유주
마티아스 아우구스틴 내의원
마티아스 홀츠호퍼 시장
요한 퓌흐너 시장
빌헬름 하르덴베르크 성령 구빈원의 원장
야콥 슈레포글 화덕 제작자이자 심문 참관인
미하엘 베르히톨트 제빵업자이자 심문 참관인
게오르크 아우구스틴 짐마차꾼이자 심문 참관인
조피 당글러 아마포 방직업자 안드레아스 당글러의 피후견인
안톤 크라츠 식품점 주인 클레멘스 크라츠의 피후견인
클라라 슈레포글 시의원 야콥 슈레포글의 피후견인
요하네스 슈트라세 알텐슈타트의 여관 주인 프란츠 슈트라세의 피후견인
페터 그리머 요제프 그리머의 아들, 어머니는 사망
크리스티안 브라운슈바이거, 안드레 피르크호퍼, 한스 호헨라이트너,
크리스토프 홀츠아펠
* 옮긴이 주는 〔 〕로 표시했습니다.
10월 12일은 사람을 죽이기에 좋은 날이었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지만, 헌당 축일이 지난 뒤인 이번 금요일에는 우리의 선한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다. 이미 가을이었는데도, 바바리아 주 중에서도 파펜빙켈(사제들의 지역)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햇빛이 밝게 비치고, 시내에서는 즐거운 소리들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둥둥거리는 북소리, 챙챙거리는 심벌즈 소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 바싹 튀긴 도넛과 구운 고기의 향기가 악취를 풍기는 무두장이들의 동네까지 흘러들어 왔다. 그래, 정말로 멋진 처형이 될 것 같았다.
야콥 퀴슬은 햇빛에 흠뻑 잠겨 있는 안방에 서서 아버지를 깨우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경비병이 벌써 세 번째로 찾아온 참이라, 이번에는 도저히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숀가우의 사형집행인은 몸을 구부려 머리를 탁자 위에 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탁자에 고인 싸구려 브랜디와 맥주 웅덩이 속에 둥둥 떠 있었다. 그는 코를 골다가 가끔 잠결에 움찔거리곤 했다.
야콥은 아버지의 귓가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술과 땀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두려움의 냄새. 처형 전에 아버지에게서는 항상 그런 냄새가 났다. 평소에는 적당히 술을 마시는 편인 아버지지만 사형선고가 떨어지기만 하면 곧장 폭음을 시작했다. 식사도 하지 않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밤이면 식은땀에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는 일도 허다했다. 처형 이틀 전부터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 카타리나는 그걸 알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시누이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야콥은 집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장남이자 도제였기 때문에.
“이제 가야 돼요! 경비병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처음에는 속삭이는 소리이던 야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이제는 아예 고함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코를 골던 거인의 몸이 움직였다.
요하네스 퀴슬은 충혈된 눈으로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는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반죽 같은 색이었고, 헝클어진 검은색 턱수염에는 어젯밤에 먹은 보리죽이 아직도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흡사 짐승의 발톱처럼 보이는 긴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6피트에 육박하는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몸이 휘청거리면서 순간적으로 다시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요하네스 퀴슬은 이내 균형을 잡아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야콥은 아버지에게 때 묻은 외투, 어깨에 걸칠 가죽 망토, 장갑을 건네주었다. 거대한 몸집의 아버지는 천천히 옷을 입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방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거기, 십자가와 말린 장미가 있는 가내 제단과 낡은 부엌 작업대 사이에 사형집행인의 칼이 세워져 있었다. 길이는 두 팔을 합한 것보다 길고, 날밑은 짧았다. 끝이 뾰족하지는 않았지만, 날은 허공에서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리했다. 이 칼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날카롭게 갈아두었기 때문에 칼이 햇빛 속에서 마치 어제 갓 벼린 칼처럼 번득였다. 요하네스 퀴슬의 것이 되기 전에 이 칼은 그의 장인인 외르크 아브리엘의 것이었고, 그전에는 장인의 아버지, 또 그전에는 장인의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야콥의 것이 될 터였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비병은 몸집이 작고 홀쭉한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성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예정보다 늦었기 때문에 군중들 일부가 짜증을 부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짐마차를 준비해라, 야콥.”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묵직했다. 어젯밤의 흐느낌 소리는 마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요하네스 퀴슬이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지막한 나무 문틀을 지나 돌진하듯 밖으로 나오자 경비병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성호를 그었다. 도시의 어느 누구도 사형집행인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집이 성벽 밖의 무두장이 동네에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덩치가 커다란 이 사형집행인은 여관에서 술을 마실 때도 탁자에 혼자 앉아 침묵을 지켰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면 재수가 없다고들 했다. 특히 처형이 있는 날에는 더했다. 그가 오늘 낀 가죽 장갑은 처형이 끝난 뒤 불에 태워질 터였다.
사형집행인은 자기 집 앞의 긴 나무 의자에 앉아 한낮의 햇볕을 즐겼다. 지금 누가 그를 보면, 겨우 한 시간 전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이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요하네스 퀴슬은 사형집행인으로서 평판이 좋았다. 빠르고, 강하고, 결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가족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처형 전에 그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시내에서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음악 소리, 웃음소리, 근처에서 찌르레기가 지저귀는 소리. 칼은 지팡이처럼 긴 나무 의자에 기대어져 있었다.
“밧줄 잊지 마라.” 사형집행인이 눈을 감은 채 아들에게 외쳤다.
집에 붙어 있는 마구간에서 야콥은 뼈가 앙상한 말에 마구를 채워 짐마차에 맸다. 어제 그가 몇 시간 동안 박박 닦아놓은 마차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죄다 헛수고였다. 때와 핏자국이 나무를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야콥은 가장 더러운 곳 몇 군데를 밀짚으로 가렸다. 오늘의 행사를 위한 짐마차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야콥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이미 처형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교수형이 두 번, 그리고 도둑질 혐의로 세 번 유죄 선고를 받은 여자의 익사형이 한 번이었다. 처음으로 교수형을 본 것은 채 여섯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야콥은 교수대에 매달린 노상강도가 거의 15분 동안 꿈틀거리며 몸부림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댔고, 아버지는 그날 저녁 유난히 커다란 양 다리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형이 끝난 뒤 퀴슬 일가는 언제나 잔치 같은 식사를 했다.
야콥은 마구간 저 뒤편의 궤짝에서 밧줄 몇 개를 집어 사슬, 녹슨 펜치, 피를 닦을 때 쓰는 아마포 걸레 등과 함께 자루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자루를 마차 위로 던진 뒤 마구를 채운 말을 끌고 집 앞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짐마차에 올라 나무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칼은 아버지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놓여 있었다. 경비병은 이제 사형집행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앞에서 빠르게 걸었다.
“자, 가자.” 요하네스 퀴슬이 소리쳤다.
야콥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짐마차가 엄청나게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도시 북쪽으로 이어진 대로를 따라 터벅터벅 걷는 동안 야콥은 계속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기 집안의 가업을 항상 존중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수치스러운 직업이라 부르지만, 야콥은 무엇이 수치스럽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짙은 화장을 한 매춘부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노상강도들······. 그들의 직업은 확실히 정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많은 경험이 필요한, 힘들고 진지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야콥이 사람을 죽이는 힘든 일을 배운 것도 아버지에게서였다.
만약 운이 좋다면, 그리고 선거후에게서 허락을 얻는다면, 야콥도 몇 년 안에 정식 사형집행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격을 얻으려면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전문적인 참수형 솜씨를 한번 보여주어야 했다. 야콥은 아직 참수형을 본 적이 없으므로, 오늘이야말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짐마차는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시내로 들어서서 시장 광장에 멈춰 섰다. 유력자들의 집 앞에 매점들과 천막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더러운 얼굴의 여자아이들이 구운 견과류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작은 롤빵을 팔았다. 구석에는 유랑 음유시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공으로 저글링을 하면서 아이를 죽인 여자 살인범을 조롱하는 조잡한 노래를 불렀다. 이다음 마을 축제는 10월 말에나 열릴 예정이었지만, 참수형 소식이 이미 근처 마을들에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이런저런 소문을 주고받고, 음식을 먹고, 달콤한 과자 등을 사면서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될 유혈 장면을 고대하고 있었다.
야콥은 짐마차에 앉은 채 주위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웃고 있는 사람도 있고, 놀란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숀가우 주민들은 벌써 시장 광장을 떠나 성벽 바로 바깥에 있는 처형장에 가 있었다. 미리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처형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뒤에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이제 30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형집행인의 짐마차가 포석이 깔린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음악이 끊겼다. 누군가가 고함쳤다. “어이, 사형집행인! 칼은 잘 갈아뒀나? 혹시 그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냐?” 사람들이 좋아 죽겠다는 듯이 아우성을 쳐댔다. 사형집행인이 범죄자와 결혼한다면 그 범죄자가 사형을 면할 수 있다는 관례가 숀가우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요하네스 퀴슬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고, 그의 아내인 카타리나 퀴슬은 딱히 다정하고 친절한 여자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악명 높은 사형집행인 외르크 아브리엘의 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피의 딸’이라거나 ‘사탄의 아내’라고 불렀다.
짐마차가 구르르 소리를 내며 광장을 가로질러 창고 겸 시청 역할을 하는 발렌하우스를 지나 성벽으로 향했다. 높은 삼층탑이 거기 서 있었다. 외벽은 검댕으로 뒤덮였고, 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들은 총안처럼 좁은 구멍에 불과했다. 사형집행인은 칼을 어깨에 메고 짐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돌문을 지나 서늘하고 어두운 탑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낡은 계단이 지하 감옥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하 감옥의 어두운 복도 양편에는 징이 박히고 눈높이에 창살이 달린 작은 구멍이 뚫린 무거운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이처럼 훌쩍거리는 소리와 신부의 속삭임이 오른편의 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야콥은 라틴어 단어 몇 개를 띄엄띄엄 들을 수 있었다.
경비병이 그 문을 열자마자 오줌 냄새, 똥 냄새, 땀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야콥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방 안에 있던 여자의 울음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높고 공허한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아이를 죽인 이 여자가 마침내 끝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신부의 기도 소리도 더 커졌기 때문에 여자의 비명 소리와 뒤섞여 지옥 같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Dominus pascit me, et nihil mihi deerit······.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다른 경비병들이 물건 꾸러미처럼 널브러져 있는 여자를 밝은 햇빛 속으로 끌고 나가려고 다가왔다.
예전에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와 미소 짓는 눈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였다. 오므린 입술은 언제나 살짝 냉소적인 표정으로 꾹 다물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콥은 그녀가 레흐 강에서 다른 아가씨들과 빨래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비병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버렸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뺨은 홀쭉했다. 몸에는 죄인의 옷, 그러니까 얼룩이 잔뜩 묻은 회색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양쪽 어깨뼈가 살갗과 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어찌나 수척한지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통적으로 제머의 여관에서 제공하는, 사형수가 사흘 동안 꼬박 즐길 수 있는 푸짐한 마지막 식사 말이다.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는 뢰젤바우어 농장의 하녀였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므로 농장 일꾼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들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그녀에게 이끌려 작은 선물을 주기도 하고, 집까지 그녀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뢰젤바우어가 그 때문에 그녀를 나무랐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와 함께 건초 속에서 뒹굴었다며 제각기 다른 청년들을 상대로 지목했다.
헛간 뒤의 구덩이 속에서 죽은 아기를 발견한 것은 다른 하녀였다. 아기를 덮은 흙은 이제 막 파낸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고문에 금방 무릎을 꿇었다. 아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엘리자베트가 그런 처지가 된 것은 그 미모 때문이었으므로, 많은 못생긴 주부들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감옥에서 끌어내려고 애쓰는 세 경비병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두려움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은 그녀를 묶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매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형집행인이 앞으로 나서서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은 것이다. 커다란 덩치의 그는 거의 상냥하게 보이는 동작으로 그 가냘픈 여자를 향해 몸을 숙이더니 뭔가 귓속말을 했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야콥뿐이었다.
“아프지 않게 해주마, 리즐. 약속해. 아프지 않을 거야.”
여자가 비명을 그쳤다. 여전히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지만, 얌전히 포박에 응했다. 경비병들은 경외심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사형집행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요하네스 퀴슬이 여자의 귓가에서 주문이라도 왼 것 같았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숀가우 주민들이 벌써 잔뜩 모여서 이 가엾은 죄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삭이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성호를 긋는 사람도 있고, 짤막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 높이 종루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높게 찢어지는 듯한 그 소리를 바람이 붙잡아서 사방으로 실어 날랐다. 야유가 그쳤기 때문에 오로지 종소리만이 침묵을 깨뜨렸다.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도 예전에는 이런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곤 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사로잡힌 야생동물 같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요하네스 퀴슬이 떨고 있는 여자를 들어 짐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또 그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약병을 건네주었다. 엘리자베트가 망설이자 그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움켜잡고 뒤로 젖히더니 약을 그녀의 입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상황을 알아차린 구경꾼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의 눈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짐마차 구석으로 기어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숨소리가 조금 가라앉았고, 몸을 떨지도 않았다. 숀가우 주민들은 퀴슬의 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사형수들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었다. 10년 전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헌금함도 훔쳤던 페터 하우스마이어는 퀴슬이 뼈를 내려칠 때마다 그 타격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는 수레바퀴에 묶인 채 뼈가 부러져 죽는 형을 당했는데, 사형집행인이 마침내 경추를 바스라뜨릴 때까지 내내 비명을 질러댔다.
대개 사형수들은 사형장까지 걸어가거나 아니면 동물 가죽에 싸여 말 뒤에서 끌려갔다. 하지만 사형집행인은 아이를 죽인 이 여자가 평범하게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없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에게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마지막 날 포도주 3리터가 제공되었고, 퀴슬의 약이 마무리를 했다. 그래서 대개 여자들은 반쯤 의식이 없는 양처럼 살육의 장소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요하네스 퀴슬이 짐마차를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짐마차의 뒤쪽 울타리는 저세상을 향해 가는 가엾은 죄인에게 몇몇 주민들이 추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사형집행인이 직접 고삐를 잡았고, 아들 야콥은 옆에서 걸었다. 사람들이 입을 헤벌린 채 짐마차 주위에 잔뜩 몰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프란체스코회의 탁발 수도사가 여자 옆으로 올라와 묵주기도를 했다. 짐마차는 천천히 발렌하우스를 지나 그 건물 북쪽에서 삐걱거리며 멈춰 섰다. 헤넨로(路)에서 온 대장장이가 벌써 화로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야콥의 눈에 띄었다. 그는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못이 박인 손으로 풀무질을 하며 석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집게가 선혈처럼 빨갛게 빛났다.
경비병 두 명이 엘리자베트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몸은 인형처럼 흐느적거리고,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집행인이 집게로 여자의 오른쪽 팔뚝을 꼬집자 여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처럼 변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살 타는 냄새가 났다. 야콥은 아버지에게서 미리 절차를 들었는데도 토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짐마차는 발렌하우스의 나머지 세 귀퉁이에서 다시 멈춰 섰고, 그 때마다 같은 절차가 반복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왼팔, 왼쪽 가슴, 오른쪽 가슴 순이었다. 하지만 퀴슬의 약 덕분에 통증은 참을 만했다.
엘리자베트는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그들은 호프 문을 통해 숀가우를 벗어나서 알텐슈타트 길을 따라갔다. 곧 처형장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처형장은 농경지와 숲 사이의 풀밭으로, 군데군데 흙이 드러나 있었다. 숀가우와 이웃 마을들의 모든 주민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시의원들이 앉을 벤치와 의자도 나와 있었다. 평민들은 뒤편에 서서 간식을 먹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처형대는 돌을 쌓아 만든 7피트 높이의 단에 나무 계단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짐마차가 처형장으로 다가오자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졌다. 모두 짐마차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 살해범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난리였다.
“여자를 일으켜! 일으켜! 일으켜! 어이, 사형집행인, 여자를 보여줘!”
사람들은 확실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범인의 모습조차 볼 수 없다니. 일부 구경꾼들이 돌멩이와 썩은 과일을 던지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자신의 갈색 옷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게 하려고 몸을 숙였지만 사과 여러 개가 그의 등에 맞았다. 경비병들은 짐마차를 향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치 사람들이 마차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요하네스 퀴슬은 차분한 표정으로 처형대를 향해 짐마차를 몰았다. 거기서 시의원들이 선거후의 비서인 미하엘 히르슈만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히르슈만은 선거후의 대리인 자격으로 2주 전 이 여자에 대한 사형선고를 발표한 사람이었다. 그가 여자의 눈을 다시 한번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 노인은 엘리자베트가 아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이런, 이런, 리즐,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각하.” 엘리자베트는 계속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이미 죽어버린 눈으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선하신 주님만이 아실 일이지.” 히르슈만이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형집행인은 여자를 이끌고 처형대를 향해 여덟 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야콥이 그 뒤를 따랐다. 엘리자베트는 두 번 발을 헛디딘 뒤, 마침내 마지막 발걸음을 떼었다.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또 다른 수도사와 관리가 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콥이 아래의 풀밭을 둘러보니 호기심에 찬 수백 명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들 입과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시의원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시내에서 종소리가 불길하게 죽음을 알렸다. 기대감과 긴장이 사방에 가득했다.
사형집행인은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를 부드럽게 밀어서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가져온 아마포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녀는 살짝 몸을 떨면서 기도를 중얼거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관리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한번 사형선고문을 읽었다. 야콥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중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대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의지하여 복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해야······.”
야콥의 아버지가 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네가 저 여자를 좀 붙들고 있어야겠다.” 그가 사형선고문 낭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네?”
“네가 저 여자의 어깨를 붙들고 고개를 들게 해야 내가 정확히 내려칠 수 있어. 리즐을 봐라. 붙잡지 않으면 픽 쓰러져버릴 것처럼 보이잖아.”
사실 여자의 몸은 지금도 천천히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야콥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처형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말은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야콥은 엘리자베트 클레멘트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위로 잡아당겼다. 여자가 우는 소리를 냈다. 야콥의 손가락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칼을 내려칠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팔을 쭉 뻗었다. 양손으로 칼을 잡고 휘둘러 두 개의 경추 사이를 단번에 정확히 내려치는 것이 요령이었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숨 한 번 쉴 사이에, 일이 모두 끝날 터였다. 그러니까, 제대로만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주님이 그대의 영혼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관리의 낭독이 끝났다. 그는 가느다란 검은색 나무 막대기를 꺼내서 엘리자베트 클레멘트의 머리 위로 올리더니 뚝 부러뜨렸다. 나무가 부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풀밭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선거후의 비서가 요하네스 퀴슬을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사형집행인은 칼을 들고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 야콥은 땀에 젖은 손가락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엘리자베트 클레멘트의 머리를 붙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녀가 밀가루 푸대처럼 앞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칼이 휙 지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칼은 여자의 목이 아니라 귀 언저리를 때렸다.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는 단 위에서 몸부림을 치며 꼬챙이에 꿰인 짐승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관자놀이가 깊게 벌어져 있었다. 피 웅덩이 속에 귀의 일부분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야콥의 눈에 언뜻 들어왔다.
여자의 눈을 가린 천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눈을 크게 뜬 채 사형집행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칼을 들어 올린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구경꾼들이 한목소리로 신음을 내지르자 야콥은 목이 콱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다시 칼을 휘둘렀지만,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는 칼날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번에는 칼이 그녀의 어깨를 내려치면서 목덜미를 깊숙이 베었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형집행인과 그를 도우러 온 아들, 그리고 경악에 찬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의 몸에 튀었다.
엘리자베트 클레멘트는 처형대 가장자리까지 네 발로 기어갔다. 대부분의 숀가우 주민들이 경악에 차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듯 고함을 질러대며 사형집행인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서투른 솜씨로 일을 망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하네스 퀴슬은 이런 소동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신음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또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세 번째 등뼈와 네 번째 등뼈 사이를 제대로 때렸기 때문에 즉각 신음이 멈췄다. 하지만 머리가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힘줄과 살점이 아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네 번째로 칼을 휘두른 뒤에야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었다.
머리가 나무 바닥 위를 굴러 야콥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는 기절할 것 같았다. 배 속이 뒤틀려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아침에 먹은 물 같은 맥주와 귀리죽을 게워냈다. 노란 물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토하고 또 토했다. 사람들의 고함 소리, 시의원들의 욕설, 바로 옆에서 아버지가 무겁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마치 베일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야콥 퀴슬은 다행히 까맣게 정신을 잃기 직전에 결정을 내렸다. 절대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결코 사형집행인이 되지 않을 거라고.
이런 결정을 내린 뒤 그는 피 웅덩이를 향해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막달레나 퀴슬은 작고 나지막한 사형집행인의 집 앞에 놓인 긴 나무 의자에 앉아 허벅지로 묵직한 청동 절구를 단단히 조여 고정시켰다. 그리고 말린 타임, 석송, 산당귀 등을 꾸준한 속도로 빻아서 고운 초록색 가루로 갈았다. 다가올 여름의 맛을 미리 느끼게 해주는 아찔한 향기가 호흡에 섞여 들어왔다. 짙게 그을린 얼굴에 햇빛이 닿아 반짝였기 때문에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진주 같은 땀방울들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굴러 내려왔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진정한 따뜻함을 맛볼 수 있는 날씨였다.
그녀의 동생들인 여섯 살짜리 쌍둥이 게오르크와 바르바라는 마당에서 이제 막 봉오리를 내밀기 시작한 양딱총나무 덤불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긴 가지가 손가락처럼 얼굴을 스칠 때마다 자꾸만 기쁨에 차서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막달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났다. 겨우 몇 년 전 그 덤불들 사이를 뛰어다니던 자신을 아버지가 뒤쫓곤 하던 것이 기억났다. 그녀는 자신을 뒤쫓아 뛰어오던 아버지의 커다란 몸집을 그려보았다. 커다란 곰처럼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큼직한 손을 들어 올리던 모습. 아버지는 정말 좋은 놀이 친구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시내에서 자신들을 만났을 때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버리는 이유도, 아버지가 근처에 다가오면 기도를 중얼거리는 이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아버지가 그 큼직한 손으로 장난만 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형집행인의 언덕에서 아버지 야콥 퀴슬이 도둑의 목에 삼으로 만든 올가미를 두르고 단단히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막달레나는 자신의 집안이 자랑스러웠다. 증조할아버지 외르크 아브리엘과 할아버지 요하네스 퀴슬도 사형집행인이었다. 막달레나의 아버지 야콥은 할아버지의 도제였고, 그녀의 동생인 게오르크도 언젠가 아버지의 도제가 될 터였다. 그녀가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녀를 잠재우면서 아버지가 처음부터 사형집행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소명을 느끼고 숀가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린 막달레나는 아버지가 전쟁 때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갑주를 걸치고 반짝이는 칼을 들고 타지로 진군하는 대신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일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어머니는 그냥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댈 뿐이었다.
막달레나는 약초들을 다 빻은 뒤 초록색 가루를 토기에 쏟아 넣고 조심스레 뚜껑을 닫았다. 이 향기로운 혼합물을 걸쭉한 수프로 끓이면 끊어진 월경을 다시 시작하게 해주는 약이 될 것이다. 그것은 원하지 않는 출산을 막는 데 사용되는 유명한 방법이었다. 타임과 석송은 웬만한 집 텃밭에서 흔히 자라고 있었지만, 희귀한 산당귀가 어디서 자라는지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주변 마을의 산파들조차 이 가루를 얻으려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성모님의 가루’라고 명명한 이 가루로 몇 푼의 추가 수입을 거둬들였다.
막달레나는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밀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아버지처럼 제멋대로 구는 머리카락을 지닌 탓이었다. 검게 반짝이는 눈 위에서 굵은 눈썹이 아치를 그렸고, 눈은 계속 깜박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스무 살인 그녀는 사형집행인의 맏딸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뒤 두 아이를 사산했고, 그다음에 낳은 세 아이는 너무 약해서 첫돌도 맞이하지 못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쌍둥이가 태어났다. 쌍둥이는 시끄러운 장난꾸러기였지만, 아버지에게는 자랑이자 기쁨이었다. 때로 막달레나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질투 비슷한 것을 느낄 정도였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외동아들이므로 언젠가 사형집행인의 일을 배우는 도제가 될 터였다. 바르바라는 아직 이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일들을 꿈꾸는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막달레나는 ‘사형집행인의 딸년’이자 ‘피의 처녀’였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 등 뒤에서 오가는 헛소문과 웃음의 대상.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형집행인들은 항상 집안끼리 뭉치니까 그녀 역시 다른 도시의 사형집행인과 결혼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 그녀를 설레게 하는 젊은이가 몇 명 있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성모님의 가루를 다 만들었으면 안에 들어가서 빨래나 해. 저절로 빨래가 되는 건 아니잖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막달레나를 깨웠다. 안나 마리아 퀴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들일 때문에 흙투성이였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훔친 뒤 말을 계속했다.
“또 사내놈들 꿈을 꾸고 있었군. 얼굴에 다 써 있다. 사내놈들 생각은 그만 좀 해. 안 그래도 사람들이 쑥덕거리는데.”
그녀는 막달레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지만, 딸은 어머니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현실적이고 딱딱한 사람이라서 딸의 꿈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막달레나에게 글을 가르친 것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책에 코를 박은 여자를 남자들은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설상가상으로 사형집행인의 딸인 그녀가 남자들한테 집적거리기까지 한다면 칼과 굴레를 쓰고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사형집행인의 아내는 남편이 딸에게 직접 굴레를 씌워 밧줄을 잡고 동네를 돌아다녀야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어두운 목소리로 몇 번이나 예언했다.
“알았어요, 어머니.” 막달레나는 절구를 긴 나무 의자에 내려놓았다.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더러운 침대보가 든 바구니를 들고 텃밭을 지나 레흐 강으로 향했다. 시름에 잠긴 어머니의 눈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집 바로 뒤에서 약초와 꽃이 자라는 텃밭, 헛간, 멋진 집들 사이로 잘 다져진 길이 강을 향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물이 얕은 후미가 나타났다. 막달레나는 강 한복판에서 생겨나고 있는 소용돌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봄이라 수위가 높아서 물이 자작나무 뿌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와 가지들은 물론이고 아예 나무들까지 통째로 물에 실려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막달레나는 흙처럼 갈색을 띤 물속에서 아마포 조각을 본 것 같았지만, 더 자세히 보려고 하자 가지와 나뭇잎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바구니에서 빨랫감을 꺼내서 축축한 자갈 위에 놓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3주 전에 열린 성 바오로 축제가 생각났다. 특히 그와 춤추던 기억이······. 그녀는 지난 일요일에야 비로소 그를 다시 만났다. 미사 때 그녀가 교회 뒤편의 신도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가 일어서서 기도서를 가지러 오는 길에 그녀를 향해 윙크를 했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키득거리자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막달레나는 자갈 위에서 리듬에 맞춰 빨래를 후려치며 콧노래를 불렀다.
“무당벌레야 날아라, 네 아버지는 전쟁터에 갔단다······.”
그녀는 워낙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비명 소리가 들렸을 때도 자신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상류 쪽 어딘가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을 처음 본 사람은 가파른 강둑에 서 있던 숀가우의 나무꾼이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붙들고, 허옇게 거품을 일으키는 물속에서 자그마한 나뭇잎처럼 빙빙 돌고 있었다. 처음에 나무꾼은 거세게 흐르는 물속 저편의 그 작은 것이 정말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물체가 거세게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자 그는 이른 아침의 안개 속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첫 항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뗏목 사공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쳤다. 강기슭은 숀가우에서 북쪽으로 4마일 떨어진 킨사우 직전에서야 비로소 완만해졌다. 사람들이 소년을 향해 다가갈 엄두를 낼 수 있을 만큼 레흐 강이 차분해지는 곳도 그곳이었다. 그들은 긴 삿대로 소년을 물속에서 끌어내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매번 미끄러운 물고기처럼 뒤로 밀리기만 했다. 때로는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서 불안할 정도로 오랫동안 떠오르지 않다가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코르크 마개처럼 떠오르곤 했다.
소년은 다시 힘을 내서 미끄러운 통나무에 기어올라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른손 손가락을 있는 힘껏 뻗어 삿대를 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통나무가 뗏목 선착장에 얽혀 있던 다른 통나무들에 커다랗게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통나무에서 떨어진 소년이 아래로 미끄러져 물 위에 떠 있는 수십 개의 거대한 나무줄기들 사이로 가라앉았다.
그동안 뗏목 사공들은 킨사우의 작은 부두를 향해 노를 저었다. 서둘러 뗏목들을 한데 묶은 그들은 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떠 있는 통나무들의 불안정한 표면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미끄러운 통나무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노련한 뗏목 사공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자칫하면 발이 미끄러져 거대한 너도밤나무 줄기와 전나무 줄기 사이에서 곤죽이 되도록 짓이겨지기 쉬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강이 잔잔했기 때문에 나무줄기들은 그저 한가로이 출렁일 뿐이었다.
곧 두 남자가 소년이 매달려 있던 통나무에 다다랐다. 그들은 삿대로 통나무들 틈새를 찌르며 혹시 부드러운 물체가 느껴지지 않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이 밟고 있는 통나무가 흔들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몇 번이나 거듭 애써 균형을 잡았지만,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나무껍질 위에서 맨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찾았다.” 둘 중 몸집이 더 크고 힘도 더 센 남자가 갑자기 외쳤다. 그는 힘센 양팔로 소년과 삿대를 한꺼번에 물에서 꺼내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를 던지듯이 안전한 강변으로 던졌다.
뗏목 사공들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도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처 킨사우의 세탁부들이 몇몇 짐마차꾼들과 함께 강가로 달려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낡아빠진 부두에 서서 자기들 발치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힘센 뗏목 사공이 소년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소년의 얼굴은 퍼렇게 부어 있었으며, 무거운 나무토막에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뒤통수가 깨져 있었다. 소년이 신음을 흘렸다. 젖은 외투에서 스며나오는 피가 부두를 흠뻑 적시고 강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 소년은 그냥 물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밀어서 떨어뜨렸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를 물에 빠뜨리기 전에 사납게 후려치기까지 했다.
“이런, 이거 요제프 그리머의 아들 아냐. 숀가우 짐마차꾼의 아들이야.” 어떤 남자가 외쳤다. 그는 소들이 끄는 짐마차와 함께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내가 잘 아는 녀석이야. 제 아비랑 같이 선착장으로 나오곤 했는데. 어서 녀석을 내 짐마차에 실어. 내가 숀가우까지 데려갈 테니.”
“그리고 누가 그리머한테 달려가서 아들이 죽어간다고 알려줘요.” 어떤 세탁부가 비명처럼 외쳤다. “세상에, 벌써 자식들을 몇 명이나 잃은 사람인데!”
“빨리 알려주는 게 좋겠어.” 땅딸막한 뗏목 사공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는 주위에 서서 시끄럽게 굴고 있는 소년들 몇 명을 찰싹 때렸다. “얼른 가서 이발사나 의사를 데려와.”
소년들이 숀가우를 향해 출발했지만, 다친 아이의 신음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아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 기도인가?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창백하고 깡마른 모습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벌써 몇 주 전일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물 같은 맥주와 묽은 보리죽만 먹은 탓에 뺨이 홀쭉해져 있었다.
아이가 계속 오른손을 뻗었다.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저 아래의 레흐 강처럼 높아졌다 다시 낮아졌다. 뗏목 사공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몸을 기울여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들어보았다. 하지만 중얼거리는 소리가 목이 막힌 것 같은 소리로 변하더니 밝은 빨간색 피거품과 침이 입가로 조금씩 떨어졌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아이를 들어 짐마차에 태우자 짐마차꾼이 채찍을 휘둘렀다. 짐마차는 킨사우 길을 따라 숀가우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가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침묵의 행렬에 합류했다. 그들이 마침내 근처 도시의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스무 명을 훌쩍 넘는 구경꾼들이 짐마차를 따르고 있었다. 아이, 농민, 울고 있는 세탁부 들. 개들은 소들을 향해 요란하게 짖어댔고, 누군가가 성모송을 중얼거렸다. 짐마차꾼은 창고 옆의 부두에서 짐마차를 멈춰 세웠다. 뗏목 사공 두 명이 아주 조심스레 소년을 들어 올려, 콸콸 소리를 내며 기둥들 사이로 거세게 흐르는 레흐 강 바로 옆의 밀짚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갑자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최후의 순간이 두려운 듯 부두 옆으로 물러나 기다리던 소년의 아버지가 이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나왔다.
요제프 그리머는 아이를 여덟이나 낳았지만 모두 잃었다. 전염병, 설사, 열병 등으로, 또는 그냥 선하신 주님의 뜻으로 하나씩 차례로 죽어간 것이다. 한스는 여섯 살 때 놀다가 레흐 강에 빠져 죽었다. 마리는 세 살 때 좁은 길에서 술에 취한 용병들이 몰던 말에 치여 죽었다. 그리머의 아내는 막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제 늙은 그리머에게 남은 것은 어린 페터뿐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 아들조차 주님이 데려가실 예정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 아이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아이의 눈은 벌써 감겨 있었고, 가슴은 발작하듯이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잠시 후 경련이 그 작은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고는 침묵이었다.
요제프 그리머는 고개를 들고 레흐 강 너머까지 슬픔의 비명을 질렀다. 여자처럼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 비명 소리가 의사 지몬 프론비저의 귀에 다다랐다.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헤넨로에 있는 그의 집은 강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조금 전 지몬은 책을 보다가 뗏목 사공들이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여러 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 시내의 좁은 길들에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듣고 보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무거운 해부학 책을 덮었다. 다른 해부학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인체의 표면 아래로는 결코 들어가지 못했다. 체액의 구성,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추천하고 있는 방혈······. 지몬은 똑같은 소리가 적혀 있는 이런 책들을 몇 번이나 읽었지만 인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우지 못했다. 오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래층에서 고함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는 상황이니······.
“의사 선생, 의사 선생! 빨리 좀 와봐! 그리머의 아들이 저기 선착장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다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지몬은 반짝이는 구리 단추가 달린 검은 외투를 휙 걸쳐 입고 손가락으로 검은 머리를 빗어 내린 뒤, 서재의 작은 거울 앞에서 턱수염을 정리했다. 어깨 길이의 머리카락과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는 반다이크 풍의 턱수염 때문에 그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숀가우 주민들 중에는 지몬을 한량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들의 시각은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숀가우의 숙녀들은 꿈꾸는 듯한 검은 눈, 잘생긴 코,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게다가 그는 깔끔했다. 아직 치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목욕도 정기적으로 했다. 장미향이 나는 향수를 특별히 아우크스부르크에 주문해서 쓰고 있기도 했다. 그의 빈약한 수입의 한도 내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키뿐이었다. 5피트를 넘지 못하는 키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뿐만 아니라 일부 여자들까지도 올려다보아야 했다. 하지만 물론 그 문제도 굽 높은 장화로 해결할 수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제는 규칙적인 망치 소리처럼 변해 있었다. 지몬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밖에는 저쪽 강 아래에서 일하는 무두장이가 서 있었다. 지몬이 기억하기로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이었다. 전에, 그러니까 작년에 그가 성 유다 축제에서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다가 팔을 다쳐서 지몬이 부목을 대준 적이 있었다. 지몬은 남 앞에서 짓는 공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두장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레흐 강에서 심각한 사고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진료소에 가 계십니다. 급한 일이라면, 나나 이발사로 어떻게 해보는 수밖에요.”
“이발사는 본인도 환자인걸······.”
지몬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가 잉골슈타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아버지의 조수로서 거의 7년 동안 온갖 질병을 다뤄봤는데도 이 도시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의사의 아들로만 생각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그가 혼자서 사람들을 치료하기까지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최근에 맡은 환자는 위험한 열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통장이의 그 어린 딸을 위해 며칠 동안이나 발목에 냉찜질을 해주고 습포를 대주었으며 새로 나온 약을 처방했다.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노란 나무껍질을 갈아서 만든 것으로 ‘예수회 가루’라고 불리는 약이었다. 결국 아이는 열이 내렸고, 통장이는 고맙다며 원래 치료비보다 2길더를 더 내놓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못했다.
지몬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도전적인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무두장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깨 너머로 깔보는 듯한 시선을 흘깃 던졌다.
“그럼 같이 가지, 뭐.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몬은 서둘러 남자의 뒤를 따라 뮌츠 거리에 들어섰다. 성 게오르그의 날 다음 날이라서 건물 1층에 있는 상점들의 문이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열려 있었다. 성 게오르그의 날은 또한 하녀들과 농장 일꾼들이 숀가우 주위의 농장들에서 일을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벌써 거리에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왼편의 대장간에서 땅땅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나왔다. 시의원의 말에게 막 편자를 박은 참이었다. 그 옆 정육점에서는 막 돼지 한 마리를 잡은 뒤라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길을 포장한 자갈들 사이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지몬은 새 가죽 장화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보폭을 넓혀 핏줄기를 건너뛰어야 했다. 거기서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는 제빵업자가 갓 구운 빵을 팔고 있었다. 지몬은 그 빵에 곡물 껍질이 잔뜩 들어 있어서 씹으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 진짜 흰 빵을 사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시의원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특별한 명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숀가우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지 11년째인 올해 들어서는 뭐라도 먹을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 처지였다. 지난 4년 동안 두 번이나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불어와서 밭에 심어둔 작물들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작년 5월에는 지독한 폭우로 레흐 강이 범람해서 시내 방앗간이 물에 휩쓸려가 버렸다. 그 뒤로 숀가우 주민들은 추수한 곡식을 들고 알텐슈타트나 아니면 그보다 훨씬 먼 도시까지 가야 했다. 거리가 멀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물론이었다. 근처 마을들에는 놀고 있는 밭이 많았고 버려진 농가들도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역병이나 굶주림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 안에서 가축을 기르며 자기네 텃밭에서 난 양배추와 순무로 연명했다.
지몬은 시장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발렌하우스를 언뜻 바라보았다. 원래 창고였던 그 건물이 지금은 시청 겸 시의회 의사당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숀가우가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도시들과 맞먹는 부유한 곳이었을 때는 발렌하우스가 이곳의 자랑이었다.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유력한 상인들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고대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레흐 강변의 이 도시는 한때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거래되는 중요한 무역도시였다. 하지만 전쟁이 그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발렌하우스는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벽에서는 회반죽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출입문은 경첩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살인과 강도가 판치는 이 시대가 숀가우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한때 바바리아의 파펜빙켈 지역에서 부유하고 멋진 도시이던 이곳이 지금은 실직한 용병들과 기타 떠돌이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기근, 질병, 가축 전염병, 우박 폭풍이 찾아왔다. 그리고 도시는 끝장이 나버렸다. 지몬이 보기에는 이 도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몬은 레흐 문을 지나 강으로 내려가면서 색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짐마차 주인들은 마차를 몰아 시장 광장으로 이어진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었다. 저편 무두장이 구역에서는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강변에서는 여자들이 바삐 빨래를 하면서 빨래통에 든 구정물을 마구 날뛰며 흐르는 레흐 강에 비우고 있었다. 산 위에 높게 자리 잡은 숀가우는 숲과 강을 임금님처럼 굽어보았으며, 좀 더 긴 역사와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자매 같은 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마치 자부심 강한 여장부처럼 바라보았다. 지몬은 빙긋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이 도시는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난무하는 시절인데도 삶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선착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지몬의 귀에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자꾸만 탄식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의 창고로 향했다. 부두에 바로 맞닿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겨우 뚫고 나아가서 무리의 한복판에 다다랐다.
짐마차꾼 요제프 그리머가 젖은 나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피가 묻은 덩어리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의 넓은 등이 지몬의 시야를 가렸다. 지몬이 그리머의 어깨에 한 손을 대자 그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고, 죽은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등 뒤에 서 있는 의사를 알아보았다.
지몬을 향해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거친 말을 내뱉었다. “놈들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돼지처럼 찔러댔어! 죽여버리겠어! 전부 죽여버릴 거야!”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지몬이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리머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짐마차꾼들을 말하는 거야.” 어떤 남자가 가까이에서 중얼거렸다. 지몬은 그가 짐마차꾼 길드의 일원임을 알아보았다.
“요즘 그쪽하고 싸움이 있었거든.” 그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쪽이 화물수송을 우리한테 넘길 수밖에 없으니까. 놈들은 우리가 화물 중 일부를 따로 우리 몫으로 빼돌릴 거라고 떠들고 있어. 그래서 요제프가 저쪽 슈테른에서 그놈들하고 싸움을 벌인 적이 있지.”
지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관에서 싸움이 벌어진 뒤 그도 코가 부러진 사람 몇 명을 치료해준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벌금이 부과되었지만, 그 조치는 아우크스부르크와 숀가우 짐마차꾼들 사이의 증오심만 부채질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공작령 조례에 따르면, 아우크스부르크 사람들은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온 화물을 숀가우까지만 운송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숀가우 사람들이 운송을 맡았다. 아우크스부르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운송 독점 상태를 살 속에 박힌 가시처럼 생각했다.
지몬은 슬픔에 잠긴 아이 아버지를 부드럽게 옆으로 이끌었다. 짐마차꾼 길드에서 나온 그의 친구 몇 명이 힘을 보탰다. 그러고 나서 의사는 아이를 향해 몸을 수그렸다.
지금까지는 굳이 아이의 젖은 셔츠를 벗기려고 애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지몬이 그 셔츠를 찢어서 벌리자 여기저기 칼에 찔린 상처들이 드러났다. 누군가가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아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음이 분명했다. 밝은 빨간색 피가 뒤통수에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상당한 크기의 상처에서 배어나고 있었다. 지몬이 보기에 아이는 물에 떠 있는 통나무들 사이로 빠지기도 한 것 같았다. 얼굴의 검푸른 멍 역시 통나무들 때문에 생긴 것일 수 있었다. 거대한 통나무들은 흐르는 물속에서 엄청난 힘을 얻기 때문에 사람을 썩은 과일처럼 바스라뜨릴 수 있었다.
지몬은 아이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고는 작은 거울을 꺼내서 피투성이의 부러진 코 밑에 대어보았다. 숨결이 거울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페터 그리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지몬은 침묵 속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젖은 천을 좀.” 그가 요구했다.
어떤 여자가 아마포 조각을 건네주었다. 지몬은 그것을 레흐 강물에 적셔 아이의 가슴을 깨끗이 닦았다. 피를 모두 닦아내자 칼에 찔린 상처가 일곱 군데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심장 주위에 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아이는 금방 죽지 않았다. 무두장이 가브리엘이 선착장까지 오는 도중에 아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중얼거렸다고 지몬에게 말해주었다.
지몬은 아이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등을 덮고 있는 셔츠도 세게 잡아당겨 찢어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일었다.
한쪽 어깨뼈 아래에 손바닥만 한 기호가 있었는데, 지몬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빛바랜 보라색 원 밑에 불쑥 튀어나온 십자가가 붙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부두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첫 번째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마녀다! 마녀가 한 짓이야!”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숀가우에 마녀가 다시 나타났어! 마녀들이 우리 애들을 잡아갈 거야!”
지몬은 손가락으로 그 기호를 쓸어보았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니 뭔가가 생각났지만,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두운 색깔 때문에 악마의 기호 같았다.
그때까지 몇몇 친구들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요제프 그리머가 휘청거리며 아들의 시체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기호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슈테흘린 그 여자가 저걸 만든 거야! 그 산파, 마녀! 그 여자가 아이 몸에 저걸 그렸어! 그 여자가 아이를 죽였어!”
지몬은 정말로 최근 그 산파의 집에서 여러 번 아이를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퀴 문 근처에서 그리머의 바로 옆집에 살았다. 아그네스 그리머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는 슈테흘린에게서 자주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의 출혈을 막지 못한 슈테흘린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
“조용히 하세요! 우린 아직 아무것도 모르······.”
의사는 분노에 찬 군중의 울부짖음을 가라앉히려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슈테흘린이라는 이름이 들불처럼 부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벌써 다리를 건너 시내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슈테흘린 그 여자! 슈테흘린이 한 짓이야! 경비병을 불러와! 그 여자를 잡으라고 해!”
곧 부두에는 지몬과 죽은 소년만 남았다. 심지어 요제프 그리머조차도 증오에 가득 차서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가 버렸기 때문에 강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지몬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세탁부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느라 두고 간 더러운 아마포로 소년을 싸서 어깨에 멨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레흐 문으로 향했다.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자기 방에 서서 피가 묻은 손가락을 따스한 물이 들어 있는 대야에 담그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뭉쳐서 엉켜 있고, 눈 밑은 거뭇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의 서른 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올해 클링엔슈타이너만큼 힘들게 아이를 낳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누워버린 탓이었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손에 거위 기름을 바른 다음 모체의 몸속 깊숙이 손을 넣어 태아의 방향을 돌려놓으려고 했지만, 아이가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져버렸다.
마리아 요제파 클링엔슈타이너는 마흔 살로 벌써 해산을 열두 번이나 이기고 살아남은 여자였다. 그중에 살아서 태어난 아이는 아홉 명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명은 첫 번째 봄조차 맞이하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마리아 요제파에게는 아직 네 딸이 남아 있었지만, 남편은 여전히 아들을 바랐다. 산파는 모체의 몸속을 더듬으면서 이번에는 아이가 아들임을 이미 확인한 터였다. 아이는 살아 있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산모도 아이도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리아 요제파는 비명을 지르고, 사납게 날뛰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매번 아이를 낳은 뒤에 호색한 염소처럼 또다시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는 남편을 저주했다. 아이도 저주하고, 전능한 주님도 저주했다. 동이 터올 무렵, 산파는 아이가 죽었다고 확신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그녀는 끝에 갈고리가 달린 낡은 부지깽이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응급 상황에서 산모의 몸 안에 있는 아이를 고깃덩이처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조각조각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숨이 막힐 만큼 뜨거운 방 안에 있던 다른 여자들, 그러니까 이모, 고모, 조카, 사촌 들은 이미 교구신부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응급 세례를 위한 성수도 벽난로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산모 클링엔슈타이너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산파는 아이의 발을 붙잡을 수 있었다. 아이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밝은 빛 속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아이는 살아 있었다.
기운찬 아이였다. 그리고 어쩌면 제 어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마리아 요제파의 얼굴을 바라보고 가위로 탯줄을 자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대장장이의 아내가 피를 워낙 많이 흘렸기 때문에 바닥에 깔아둔 짚이 빨갛게 미끌거렸다. 눈은 시체처럼 푹 꺼져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남편은 이제 아들을 얻었다.
분만으로 밤을 꼬박 새운 마르타 슈테흘린은 산모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아침에 포도주, 마늘, 회향풀을 넣어 달인 물을 준비하고 산모를 씻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자기 방 탁자에 앉아 피곤한 눈을 달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정오쯤이면 아이들이 그녀를 들여다보러 올 것이다. 요즘 그런 일이 잦았다. 슈테흘린은 수많은 아이들의 탄생을 도왔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피, 페터 같은 아이들이 자신을 자주 찾아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연고며 항아리며 가루 등을 갖고 있는 마흔 살의 산파를 아이들이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배 속이 우르릉거렸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자신이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문득 깨달았다. 화덕 위의 냄비에서 차가운 귀리죽을 몇 숟갈 먹은 뒤 그녀는 집 안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뭔가 사라진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엉뚱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되는 물건이었다. 혹시 그것을 저기 어디에 놔뒀나······.
시장 광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불분명하게 웅성거리는 소리였다. 성난 말벌 떼가 붕붕거리는 소리처럼 조용하지만 위협적이었다.
마르타는 대야에서 얼굴을 들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해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볼 기운이 없었다.
그때 고함 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이 포장된 시장 광장을 가로질러 슈테른 여관을 지나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와 퀴 문까지 뛰어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들 속에서 어떤 이름이 들려왔다.
마르타 슈테흘린, 그녀의 이름이었다.
“슈테흘린, 이 마녀! 말뚝에 묶어야 돼! 불에 태워야 돼! 썩 나와, 슈테흘린!”
산파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1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때 주먹만 한 돌멩이가 그녀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개처럼 시야를 가로막은 핏물 너머로 자기 집 문이 억지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해 벌떡 일어나서 문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여러 사람의 다리가 틈새를 통해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곧 문이 닫혔고, 밖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타는 옷 속에 넣어둔 열쇠를 찾아보았다. 그게 어디 있을까? 누군가가 다시 문을 밀어대고 있었다. 그때 사과들 옆의 탁자 위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산파는 튼튼한 몸으로 문을 막은 채 더듬더듬 탁자 위의 열쇠를 찾았다. 피와 땀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손에 열쇠가 들어오자 그녀는 그것을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밖에서 밀어대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지만, 겨우 몇 초 뒤에 뭔가가 격렬하게 문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남자들이 문을 향해 무거운 기둥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벌써 얄팍한 나무가 쪼개지고 있었다. 털투성이 팔 하나가 틈새를 통해 나타나 그녀를 찾아 헤맸다.
“슈테흘린, 이 마녀. 얼른 나와. 안 그러면 우리가 집에 불을 지를 테다!”
깨진 문 틈으로 밖에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뗏목 사공들과 짐마차꾼들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그녀가 받아준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은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고함을 지르며 문과 벽을 두드려댔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쫓기는 짐승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덧창 하나가 쪼개지면서 이웃에 사는 요제프 그리머의 거대한 머리가 나타났다. 마르타는 그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소동이 벌어진 걸까? 그리머가 못이 듬성듬성 박힌 창틀 조각을 휘둘렀다.
“죽여버리겠어, 슈테흘린! 사람들이 널 태우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일 거야!”
마르타는 뒷문으로 뛰어갔다. 이 문은 성벽 바로 뒤에 있는 작은 약초밭으로 통했다. 이 텃밭에서 그녀는 스스로 덫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오른편과 왼편의 집들은 성벽에 바로 맞닿아 있었고, 성벽 위 보행로까지의 높이는 족히 10피트나 되었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이였다.
성벽 바로 옆에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서둘러 달려가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성벽 위의 보행로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집 안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리더니 텃밭 문이 부서졌다. 문간에 요제프 그리머가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못이 박힌 창틀 조각을 든 채였다. 그 뒤에서 짐마차꾼들이 텃밭으로 몰려나왔다.
마르타 슈테흘린은 고양이처럼 허겁지겁 사과나무 위로 올라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침내 가지들이 어린아이의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곳에 다다랐다. 그녀는 성벽 가장자리를 붙들고 안전한 성가퀴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가지가 부러졌다.
산파는 손끝에서 피를 흘리며 성벽을 따라 미끄러져 젖은 텃밭에 떨어졌다. 요제프 그리머가 다가와 그녀를 죽이려고 창틀 조각을 들어 올렸다.
“나라면 안 그러겠어.”
그리머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의 머리 바로 위, 성가퀴에 구멍투성이의 긴 외투를 입고 누더기가 다 된 깃털 두 개가 꽂힌 챙 넓고 부드러운 모자를 쓴 커다란 덩치가 서 있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는 멋대로 헝클어져 있고, 무성한 턱수염은 아주 오랫동안 이발사의 손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성가퀴들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매부리코와 긴 토기 담뱃대 외에는 남자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 전 말을 할 때도 담뱃대를 그냥 입에 문 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손에 들고 산파를 가리켰다. 산파는 그가 있는 곳 아래의 성벽 앞에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르타를 죽인다고 해서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 마.”
“닥쳐, 퀴슬! 자네가 끼어들 일이 아냐!”
요제프 그리머는 다시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처음에는 성벽 위의 남자가 아무도 모르게 다가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순간적인 놀라움은 사라졌다. 이제 그는 누가 뭐라든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창틀 조각을 여전히 손에 든 채로 서서히 산파에게 다가갔다.
“그건 살인이야, 그리머.” 퀴슬이 말했다. “지금 그걸 휘두르면, 내가 아주 기꺼이 자네 목에 올가미를 걸어주게 될 거야. 내 약속하는데, 아주 천천히 죽게 해주지.”
요제프 그리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머뭇거리며 동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없어 보였다.
“이 여자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퀴슬.” 그리머가 말했다. “레흐 강에 가서 자네 눈으로 직접 보라고. 이 여자가 내 아들한테 주문을 걸고 칼로 찔렀어. 그리고 아이 몸에 사탄의 표식을 새겼단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아들 옆에 남아서 경비병한테 마르타를 잡아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요제프 그리머는 죽은 아들이 강가에 그냥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증오에 사로잡힌 그가 아들을 내버려 둔 채 다른 사람들의 뒤를 서둘러 따라온 것이다.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담뱃대를 입에 문 남자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민첩한 몸놀림으로 성가퀴의 난간을 넘어 텃밭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가 거대한 몸을 마르타 슈테흘린에게 기울였다. 그녀의 눈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매부리코, 고랑같이 파인 잔주름, 텁수룩한 눈썹, 깊숙한 갈색 눈. 사형집행인의 눈이었다.
“당신은 나랑 함께 가요.” 야콥 퀴슬이 속삭였다. “법원 서기한테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서기가 당신을 가둘 거예요. 지금은 거기가 당신한테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알겠어요?”
마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집행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음악 같아서 그녀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산파는 야콥 퀴슬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의 아이들도 그녀가 받았다. 살아서 태어난 아이도, 죽어서 태어난 아이도 모두······. 대개 사형집행인이 출산을 도와주었다. 때로는 그녀가 그에게서 월경 불순이나 원치 않는 임신을 치료해주는 물약과 찜질 약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그가 막내인 쌍둥이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많은 사람들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교수대에 매달리게 생겼구나.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람이 내 생명을 구해줬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콥 퀴슬이 일어서는 그녀를 부축해준 뒤 기대에 찬 눈으로 주위의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내가 마르타를 감옥으로 데려가겠네.” 그가 말했다. “마르타가 그리머의 아들이 죽은 일과 정말로 관련이 있다면 정당한 처벌을 받을 거야. 그건 내가 약속하지. 하지만 그때까지는 마르타를 건드리지 마.”
이 말을 끝으로 그는 마르타의 목덜미를 붙잡고, 침묵에 잠긴 뗏목 사공들과 짐마차꾼들 사이로 밀었다. 산파는 사형집행인의 협박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님을 확신했다.
지몬 프론비저는 숨을 몰아쉬며 투덜거렸다. 등이 서서히 젖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땀이 아니라 피 때문이었다. 천을 통해 스며 나온 피. 외투를 뜯어 다시 바느질해야 할 것 같았다. 검은 천에 묻은 얼룩이 너무나 뚜렷했다. 게다가 어깨에 멘 짐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지몬은 거북한 짐을 멘 채 레흐 다리를 건너 무두장이 구역을 향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지린내와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 냄새가 모든 것에 배어 있었다. 그는 숨을 참고 남자 키만큼 높은 건조대들을 터벅터벅 지나쳤다. 가죽 천들이 건조대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심지어 무두질을 반쯤 하다 말고 발코니 난간에 널어놓은 동물 가죽에서도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났다. 도제들 몇 명이 궁금하다는 시선으로 지몬과 그의 피투성이 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틀림없이 그가 도살한 양을 사형집행인에게 가져가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마침내 그는 좁은 골목들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져 사형집행인의 집이 있는 오리 연못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그늘을 드리운 떡갈나무 두 그루 밑에 서 있었다. 마구간 하나, 커다란 텃밭 하나, 짐마차를 넣어두는 헛간 하나가 있는 이 집은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의사는 집을 둘러보았다. 부러운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형집행인이라는 직업은 수치스러운 것인지 몰라도, 그 일로 버젓한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몬은 새로 칠을 한 문을 열고 텃밭으로 들어갔다. 4월이라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들이 벌써 모습을 드러냈고, 사방에서 향기로운 식물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산쑥, 박하, 레몬밤, 스팅크워트, 야생 타임, 세이지······. 숀가우의 사형집행인은 텃밭에 다양한 약초를 키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몬 아저씨, 지몬 아저씨!”
쌍둥이 게오르크와 바르바라가 떡갈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지몬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달려왔다. 지몬은 그들의 친구였다. 아이들은 그가 언제나 기꺼이 함께 게임을 하거나 장난을 치며 놀아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깬 안나 마리아 퀴슬이 앞문을 열었다. 지몬이 조금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아이들은 그가 어깨에 메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를 향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사형집행인의 아내는 얼추 마흔 살이었지만 아직도 매력적이었다. 큰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텁수룩한 눈썹 때문에 마치 그의 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몬은 혹시 그녀가 야콥 퀴슬의 먼 친척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혼자 생각할 때가 많았다. 사형집행인은 수치스러운 직업으로 간주되어서 평범한 시민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했으므로, 집안끼리 결혼을 해 가까운 친척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르면서 사형집행인 가문 여럿이 형성되었고, 퀴슬은 바바리아에서 가장 큰 가문이었다.
안나 마리아 퀴슬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의사를 맞으러 나왔지만, 그가 메고 있는 짐과 주의를 주는 눈빛과 방어적인 몸짓을 보고 아이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 손짓했다.
“게오르크, 바르바라! 집 뒤에 가서 놀아라. 지몬 아저씨랑 엄마는 할 얘기가 좀 있어.”
아이들이 투덜거리며 사라진 뒤에야 지몬은 비로소 안으로 들어가 부엌의 긴 나무 의자에 시체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체를 싼 천이 옆으로 떨어졌다. 안나 마리아는 아이를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그리머의 아이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지몬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동안 안나 마리아는 물을 섞은 포도주를 토기 물병에서 따라주었고, 의사는 그것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래서 남편한테 아이를 보이려고 온 거야?”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안나 마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꾸만 아이의 시체를 힐끔거렸다.
지몬이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맞아요. 아저씨는 어디 계세요?”
마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못을 좀 사야 한다면서 시내 대장장이한테 갔는데······. 새 벽장이 필요하거든. 지금 있는 옷장들이 터질 것처럼 가득 차서.”
그녀는 긴 나무 의자 위의 피투성이 꾸러미를 한 번 더 힐끔 바라보았다. 사형집행인의 아내인 그녀는 시체를 보는 것에 익숙할 대로 익숙했지만, 아이의 죽음에는 항상 동요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것······.”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냉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삶은 계속된다. 밖에서는 쌍둥이들이 소란스럽게 뛰놀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새된 소리로 있는 힘껏 꺅꺅거리는 것이 들렸다. “여기서 그이를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안나 마리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뭘 좀 읽어도 되고.”
사형집행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몬이 순전히 남편의 낡은 책들을 훑어보려고 자주 이곳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끔은 사형집행인의 집에 오려고 다소 미약한 핑계를 지어내기도 했다.
안나 마리아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죽은 소년을 한 번 더 힐긋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벽장에서 모직 담요를 꺼내 시체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쌍둥이가 갑자기 들어오더라도 시체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녀가 문으로 향했다. “애들이 밖에서 뭘 하고 있는지 좀 봐야겠어. 원한다면 포도주를 마셔도 괜찮아.”
문이 닫히고 지몬은 혼자가 되었다. 사형집행인의 거실은 크고 널찍해서 집 1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화덕은 바깥쪽 복도에서 불을 지피게 되어 있었다. 옆에는 식탁이 있고, 그 위쪽의 벽에는 사형집행인의 칼이 걸려 있었다. 통로의 가파른 계단은 퀴슬 부부와 세 자녀가 잠을 자는 2층으로 이어졌다. 오븐 옆에 있는 낮고 좁은 문 뒤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지몬은 고개를 숙이고 그 낮은 문을 지나 지성소 중의 지성소에 들어섰다.
왼편에는 야콥 퀴슬이 처형과 고문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넣어두는 궤짝 두 개가 있었다. 밧줄, 사슬, 장갑뿐만 아니라 엄지손가락을 죄는 기구와 집게도 있었다. 이것들을 제외한 다른 무서운 도구들은 시당국의 소유로 탑 안의 지하 감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궤짝들 옆에는 사형대 사다리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몬이 찾으려는 것은 다른 물건이었다. 반대편 벽 거의 전체가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벽장이었다. 지몬은 벽장의 많은 문들 중 하나를 열고 병, 단지, 가죽 쌈지, 약병 등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말리려고 벽장 안에 매달아놓은 약초들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지몬은 로즈마리, 남방등갈퀴, 월계수 잎 등을 알아보았다. 두 번째 벽장문을 여니 셀 수 없이 많은 서랍이 보였다. 연금술 기호와 상징이 그려진 이름표가 서랍에 붙어 있었다. 지몬은 세 번째 문으로 주의를 돌렸다. 이 문 뒤에는 먼지 쌓인 낡은 책들, 파삭거리는 양피지 두루마리, 인쇄된 책, 필사본 등이 쌓여 있었다. 사형집행인의 집안이 수 세대에 걸쳐 수집한 고대의 지식이 모여 있는 도서실이었다. 이곳의 지식은 지몬이 잉골슈타트의 대학에서 무미건조한 강의를 수없이 들으며 공부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몬은 그중에서도 무거운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자주 보는 책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제목을 쓸어보았다.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그가 중얼거렸다. 몸속의 모든 피가 심장의 힘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순환의 일부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저술되어 논란을 일으킨 책이었다. 잉골슈타트에서 지몬을 가르친 교수들은 이 이론을 비웃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지몬은 계속 책을 훑어보았다. ‘의학서’라는 제목의, 제본 상태가 형편없는 작은 필사본에는 질병에 대한 온갖 종류의 치료법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역병의 치료법으로 말린 두꺼비를 추천한 페이지에 지몬의 시선이 멈췄다. 이 책 옆에 꽂혀 있는 것은 사형집행인이 최근에야 손에 넣은 책이었다. 《수술법》이라는 책인데, 울름 시의 의사인 요하네스 스쿨테투스가 쓴 이 책은 워낙 신간이라서 잉골슈타트 대학조차 아직 확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몬은 수술에 관한 이 위대한 책의 장정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오로지 책밖에 볼 줄을 모르시니 안타까워요.”
지몬은 고개를 들었다. 막달레나가 문간에 기대서서 밝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젊은 의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스무 살인 막달레나 퀴슬은 자신이 남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었다. 지몬은 그녀를 볼 때마다 입 안이 마르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지난 몇 주 동안은 증세가 더 심해져서 줄곧 그녀 생각만 했다. 때로는 잠들기 전에 그녀의 풍만한 입술, 뺨의 보조개, 웃음 짓는 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사형집행인의 딸이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더듬거렸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긴 나무 의자 위에 누워 있는 죽은 아이 옆을 지나치면서도 그 아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몬도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드문 순간들이 워낙 귀중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죽음과 고통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책꽂이에 책을 돌려놓았다.
“반경 몇 마일 이내에서 이만큼 훌륭한 의학서들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걸 이용하지 않는 건 바보짓이죠.”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모양 좋은 젖무덤 두 개가 뚜렷이 보일 만큼 쑥 파인 목선 쪽으로 멋대로 향했다. 그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 아버님 생각은 다르시지 않아요?” 막달레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지몬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형집행인의 책들을 악마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한 막달레나에 대해서도 자주 경고했다. 사탄의 여자라는 것이었다.
‘사형집행인의 딸을 상대하면 절대로 존경받는 의사가 되지 못해.’
지몬은 막달레나와 결혼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아버지처럼 ‘수치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겨우 몇 주 전에 두 사람은 성 바오로 축제에서 잠깐 동안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것이 며칠 동안 사람들의 입에 소문으로 오르내렸다.
지몬의 아버지는 그에게 막달레나와 함께 있는 모습이 또다시 눈에 띈다면 매질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사형집행인의 딸들은 사형집행인의 아들들과 결혼한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지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막달레나가 그의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었다.
“내일 나랑 같이 초원에 갈래요?” 그녀가 물었다. “아버지가 겨우살이랑 크리스마스로즈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애원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막달레나, 나는······.” 그의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 혼자 가도 되잖니. 지몬은 나랑 이야기할 것이 아주 많다. 그만 나가봐.”
지몬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치채지 못한 새에 사형집행인이 이 좁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막달레나는 젊은 의사를 한 번 더 바라본 뒤 텃밭으로 달려나갔다.
야콥 퀴슬은 찌를 듯이 엄한 눈으로 지몬을 바라보았다. 그를 집 밖으로 내쫓아버릴 것 같은 표정이 언뜻 스쳤다. 하지만 그는 입에서 담뱃대를 떼어내며 빙긋 웃었다.
“자네가 내 딸을 좋아해주니 기쁘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아버지가 알게 하지는 말게.”
지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형집행인의 집을 드나드는 것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화를 내며 부딪혔다. 보니파츠 프론비저는 사형집행인을 돌팔이로 보았다. 하지만 사형집행인의 집에 가지 말라고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의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숀가우 주민 절반이 갖가지 통증 때문에 그를 찾았다. 야콥 퀴슬이 처형과 고문으로 버는 돈은 전체 수입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가 주로 돈을 버는 것은 치유 기술을 통해서였다.
그는 통풍과 설사에 쓰는 물약을 팔고, 치통에 담배를 처방하고,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주고, 탈골된 어깨를 맞춰주었다.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그의 지식은 전설적이었다. 지몬이 보기에는 자기 아버지가 사형집행인을 미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아버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고, 사실 의사로서의 실력도 더 나으니까······.
야콥 퀴슬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 있었다. 지몬도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에 금방 담배 연기가 구름처럼 자욱해졌다. 담배는 사형집행인의 유일한 나쁜 버릇이었으며, 그가 열심히 탐닉하는 버릇이기도 했다.
입에 담뱃대를 문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무 의자에 다가가 죽은 소년을 탁자 위로 올리더니 담요와 천을 젖혔다. 그리고 잇새로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아이를 어디서 찾았지?” 그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토기 대야에 물을 채워 시체의 얼굴과 가슴을 씻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소년의 손톱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페터가 맨손으로 어딘가를 긁기라도 했는지 손톱 밑에 붉은 흙이 끼여 있었다.
“저 아래 뗏목 선착장에서요.” 지몬이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산파에게 복수를 하려고 시내로 몰려간 부분까지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사형집행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는 살아 있어.” 그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계속 닦으면서 말했다. “내가 직접 감옥으로 데려다 줬으니까. 당분간은 거기 있는 게 안전하지. 모든 걸 자세히 살펴봐야겠군.”
전에도 자주 그랬던 것처럼 지몬은 사형집행인의 침착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퀴슬 일가가 모두 그렇듯이 그도 말수가 적었지만,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사형집행인이 시체를 다 씻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엉망이 된 소년의 몸을 살펴보았다. 코가 부러졌고, 얼굴은 검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가슴에 난 칼자국은 일곱 개였다.
야콥 퀴슬은 외투에서 칼을 하나 꺼내서 상처에 날을 넣어보려고 했다. 칼날 양편에 모두 적어도 반 인치 너비의 틈이 남았다.
“이것보다 넓은 칼이었나 보군.” 그가 중얼거렸다.
“검(劍)일까요?” 지몬이 물었다.
퀴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는 사브르나 도끼 창일 가능성이 높아.”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지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형집행인이 시체를 뒤집었다. 어깨에 그 기호가 있었다. 강에서 건져낸 뒤로 조금 흐릿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상당히 또렷했다. 자주색 원 아래에 십자가가 있는 모습.
“그게 뭐죠?” 지몬이 물었다.
야콥 퀴슬이 소년의 시체 위로 몸을 수그렸다. 그러고는 집게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기호를 부드럽게 문지른 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아주 맛있다는 듯 쪽쪽 빨았다.
“양딱총나무 즙이야.” 그가 말했다. “그렇게 나쁜 물건은 아니지.” 그가 지몬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하지만 저는 그게······.”
“피인 줄 알았다고?” 사형집행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피였다면 벌써 오래전에 씻겨나갔을걸. 이렇게 오랫동안 색을 유지하는 건 양딱총나무 즙뿐이야. 우리 집사람한테 한번 물어보라고. 우리 꼬마들이 옷에 그걸 묻히면 아내가 아주 화를 내거든. 하지만 어쨌든······.” 그는 기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색이 피부 아래까지 부분적으로 스며들었어. 누가 바늘이나 단검으로 색을 주입했을 거야.”
지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티야와 프랑스의 병사들에게서 그런 ‘예술’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팔뚝에 십자가나 성모를 문신으로 새겼다.
“그럼 그 기호의 의미는 뭐죠?”
“좋은 질문이야.” 퀴슬은 담뱃대를 깊이 빨아들인 뒤 연기를 내뿜고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나서 대답했다. “비너스의 상징일세.”
“무슨 상징이오?” 지몬은 기호를 내려다보았다. 전에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