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JUHEA KIM
ⓒ권혁재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이자 친환경 생활과 생태문학을 다루는 온라인 잡지 《피스풀 덤플링》의 편집장.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소설과 수필, 비평 등을 기고했다. 그중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바이오돔Biodome」은 TV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났지만, 모국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에서 늘 한국어를 사용해 온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고故 최인호 소설가의 단편소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듣고 자라면서 한국의 역사를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했고, 이러한 가족 내력을 간직한 채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 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소설을 썼다. 2021년 마침내『작은 땅의 야수들』은 “톨스토이 스타일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출간 즉시 아마존 ‘이달의 책’에 올랐고, 《하퍼스 바자》 《리얼 심플》 《미스 매거진》 《포틀랜드 먼슬리》에서 ‘2021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영미 40여 개 매체에서 추천 도서로 소개되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13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22년 9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포틀랜드에서 두 번째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한편, 비영리 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한반도 야생의 호랑이와 표범을 복원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홈페이지 juheakim.com
표지 디자인_데일리 루틴
작은 땅의 야수들
BEASTS OF A LITTLE LAND
Copyright © 2021 by Juhea Kim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cco, an imprint of HarperCollins Publishers
through Eric Yang Agency.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2 Dasan Books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저작권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다산북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엮어낸 황홀한 사랑 이야기.
_아마존
문학적 걸작이 탄생했다.
_커커스
꿈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데뷔작이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랑 또는 전쟁을 다룬다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 소설은 사랑과 전쟁 둘 다에 관한 것이다.
_하퍼스 바자
600쪽에 달하는 엄청난 대서사시를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_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도전과 야망이 흘러넘치며, 따뜻한 시선과 현명한 통찰이 함께하는 책이다.
_USA 투데이
서사의 범주는 실로 장대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친밀하고 다정한 언어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_미국 공영방송 라디오
엄청나게 몰입감 있고, 마음을 온통 빼앗아가는 작품이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이민진의『파친코』,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팬들에게 완벽한 추천작이다.
_시카고 리뷰
고향이라 부르는 땅의 서정적인 초상.
_포틀랜드 먼슬리
강렬하고 로맨틱하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_미즈 매거진
가슴 아픈 짝사랑, 계급 간의 투쟁, 스캔들……. 이 소설에는 그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_리얼 심플
올해의 눈부신 데뷔작. 독자들은 마음을 빼앗길 준비를 해야 한다.
_E!
김주혜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저자다.
_아파트먼트 테라피
세상을 놀라게 한 이 작품은, 힘차게 달려 나가는 한 편의 시처럼 운을 뗀다.
_오스트레일리언 위민스 위클리
이토록 매력적인 이야기가 끝나 버려 책을 덮어야만 한다는 완독의 슬픔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_뉴 인터내셔널리스트
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릴 것이며, 그 후엔 사랑과 상실에 대한 현명한 통찰과 명상으로 당신을 고요한 정적 속에 가만히 붙들어 둘 것이다.
_알렉시스 샤이트킨, 『세인트X』 저자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르다.
_브랜던 홉슨, 『제거된 것들theRemoved』 저자
야망이 넘치는 장편 대하소설의 폭넓은 서사와 호흡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흡사 톨스토이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_케이자 파르시넨, 『머시 루이의 몰락the Unraveling of Mercy Louis』 저자
소설이 묘사하는 땅은 작은 곳이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범주는 엄청나게 크다. 격동의 역사를 장대하게 관통하는 러시아의 고전 문학이 그렇듯 이 소설에도 격렬한 전장, 세대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유산, 그리고 뒤엉킨 운명의 연애사가 가득하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비범하며, 그들이 속한 특출한 시대와 혈투를 벌이는 야수들이다. 그리고 김주혜 작가의 유려한 문체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 이들의 움직임은 뚜렷한 성과로 돌아온다. 그것은 마치 광대하게 확장되는 하늘의 별들을 하나의 성좌로 연결해 내어, 힘차게 변화하고 있는 나라를 비추는 것만 같다. 진정 놀라운 작품이다.
_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이야기는 눈밭에서 범과 마주친 사냥꾼으로부터, 아이를 재우고 따뜻한 바다에 안기는 해녀로 흐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저 유명한 경구를 되새기며 삼가 손을 모아본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운명은 되풀이되지만, 그 역사를 이루는 세포도 결국 우리 인간이라는 깨달음 또한 오롯하다. 누군가는 단순한 허기 때문에, 누군가는 정욕과 관능으로, 누군가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저마다의 욕망을 품은 채 이어지고 갈라지며 충돌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은 삶이라는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답을 동시에 남긴다.
김주혜가 그려내는 이 땅과 이 땅의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스스로를 사냥꾼이자 사냥감으로 인식하는 포수처럼, 이민 2세 한국계 작가의 담담하고도 예리한 필치는 이방인과 원주민의 시선을 아우르며 경이를 자아낸다. 이것은 먼 나라에서 도래한 우리 이야기이고, 새로운 정통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토록 충격적인 축복에 감사드린다.
_소설가 박서련(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체공녀 강주룡』 저자)
2015년, 나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단편소설을 에이전트 조디 칸에게 보냈다. 한 달 뒤, 네 편을 더 써 보냈다. 그다음에는 아예 책 한 권 분량을 보냈다. 그해 총 열세 편의 단편을 보낸 뒤에야 조디는 나를 자신의 작가로 받아들였다. 너무 기뻤던 나는 조디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출판사를 다니면서 저축했던 돈으로만 생계를 이어오고 있어서 앞으로 언제까지 월세를 낼 수 있을지 캄캄합니다. 언제쯤 제 단편집을 낼 수 있을까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처지를 고백한 나에게 조디는 이렇게 말했다. 단편소설은 돈이 되지 않으니 지금부터 장편소설을 쓰라고.
나는 낙심한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고 공원에 갔다. 겨울이었고,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경을 달리던 중 어느 사냥꾼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냥꾼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소설의 거의 맨 마지막 부분인 아주 오래된 두 친구가 재회하는 장면도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십 년의 세월과 여러 등장인물이 마음속에서 별자리처럼 그려지는 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사냥꾼 이야기를 단번에 썼다. 그 뒤 수년간 수십 번의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공원에서 본 장면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 에이전트, 편집자들 — 없었다. 지금 책에 수록된 프롤로그는 그 첫날 내가 쓴 글과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말하면 하루아침에 생겨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작은 땅의 야수들』의 씨앗은 훨씬 오래전에 심겼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할아버지는 김구 선생 옆에서 독립운동을 도우셨다고 한다. 또한 선한 성품에 뛰어난 운동신경,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옅은 황갈색 눈을 가진 분이셨다고 한다. 그러한 특징이 내 무의식에 자리 잡아 사냥꾼과 호랑이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가족 내력이 있기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근대사는 고리타분한 역사가 아니라 내 현실의 한 부분이 되었다. 조부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한반도는 왜적을 피로 물리쳤으며, 야수들은 아직 분단되지 않은 남과 북의 영토를 넘나들었다. 이렇게 가까운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아가 시대와 지리를 초월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인류는 지금 자연 파괴, 전쟁, 기아 등을 맞이해 과거보다 더 큰 물리적, 윤리적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런 환멸의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바람과 목적이 이 책이 문화적 국경을 뛰어넘고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는 요건이 되었다고 본다. 힘든 시대를 극복한 우리 조상이 가졌던 우정, 사랑, 이타심, 정의로움, 용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제목은 일본인 장교가 한국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나왔는데, 작은 땅에서 거침없이 번성하던 야수들은 한국의 영적인 힘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때 호랑이는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사람들을 북돋아 줬다. 월간지 《개벽》의1920년6월 창간호 표지에는 용맹스럽게 포효하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민족사상 양성에 주목적을 둔 잡지에서 우리나라의 첫 상징으로 호랑이를 뽑은 것이다. 당시 지도자들은 일제의 호랑이 사냥을 민족 탄압으로 여겨 비난했다. 호랑이가 국민에게 연민의 대상이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한반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수천 가지 설화, 옛날이야기, 민화 등 예술 작품에서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전통예술 속의 호랑이는 익살스럽고, 사납고, 똑똑하고, 용맹하고, 게으르고, 착하고, 멍청하고, 복수를 하며, 은혜를 갚는다. 호랑이는 그저 사람을 해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사촌이었다. 너무나도 작은 땅덩이에서5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런 어마어마한 맹수들이 인간과 공존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자연에 대한 경의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을 존중하여 함께하는 것이 한국 문화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신이 많이 피폐해진 지금, 우리의 본질을 일깨우고 싶었다.
집필 당시 하층민의 이름은 모두 순우리말로 상상했다. 역사적으로 빈민층과 하인, 특히 여자아이들은 ‘간난이’, ‘큰애’, ‘작은애’ 등 흔하고, 어렵지 않은 명칭으로 불렸다. 주변에 흔히 보이는 사물이나 태어난 달 등에서 따온 순우리말 이름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뜻이 단순했다. 이를 영어판 원서에서는 ‘돌쇠’는 ‘Stoney’, ‘옥이’는 ‘Jade’로 표현했다. ‘Dolsueh’, ‘Ok-ee’라고 표기하면 영미권 독자는 그 뜻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설정이 한자로 지은 ‘정호’의 고급 이름을 ‘JungHo’로 표현했을 때 바로 눈에 띄게 하고, 그 특별함에 대한 정호의 엄청난 자부심을 설명한다. 한국어판에서는 처음에 상상했던 등장인물들의 우리말 이름을 살려냈다. 다만 약간의 수정은 있었다. ‘옥이’는 ‘옥희’로, ‘월이’는 ‘월향’으로 바꾸는 정도의 변화에 합의한 것은 번역본뿐만 아니라 모든 책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지 저자 혼자 해내는 게 아니라는 믿음에서였고, 박소현 번역가의 예술성을 존중하고 존경했기 때문임을 이 지면을 빌려 밝힌다.
한반도가 작은 땅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 지구본으로 본 한국은 너무나도 작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은 작은 영토에 걸맞게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에 족하지 않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독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도 적은 인구와 작은 영토 이상으로 세계에 기여하고 있다.
흔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맞는 말이다. 내가 책을 쓸 때 가장 나다운 글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로 책이 나오는 것은 특히나 큰 의미이고 영광이다. 야수들이 모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고대해 주고 응원해 준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22년9월
김주혜
어머니와 아버지께 드립니다
일
러
두
기
1 이것은 픽션이다. 이름, 인물, 장소, 사건들은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인 것이며 실제처럼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사건, 지역, 조직, 사람, 산 사람, 죽은 사람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다.
2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대한제국 수립 선포 이후임을 고려하여 원서의 ‛Korea/Korean’은 ‛한국/한국인’ 또는 ‛대한/대한인’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일본인 등장인물 시점으로 진행되는 문장에서는 맥락에 따라 ‛한국인’이 ‛조선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단 ‛경성’ ‛상해’ ‛동경’ 등의 지명은 당대의 한자어 표기 방식을 따랐다.
3 모든 각주는 옮긴이 주다.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 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남자는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물들은 여기 그들의 영토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산은 그의 것이기도 했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에 속해 있었다. 험준하게 펼쳐진 산들이 특별히 관대하다거나 위안을 주어서가 아니라, 이 깊은 숲의 어느 곳이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똑같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을 타고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죽여야 하는지. 마치 표범이 표범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닥은 대부분 적갈색 솔잎으로 덮여 있었고, 이어지던 발자국은 점점 뜸해졌다. 남자는 나무둥치의 긁힌 자국이나 주변 덤불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흔적, 부러져 나간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성긴 털 몇 가닥을 찾아보았다. 그는 사냥감과의 거리를 점점 좁히고 있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그 짐승의 모습을 포착해 내지 못한 터였다. 준비해 온 식량이었던, 소금 몇 알만으로 맛을 낸 보리쌀 주먹밥은 이미 오래전에 동이 났다. 전날 밤 남자는 붉은 소나무의 갈라진 둥치 틈에 앉아, 까무룩 잠들어 버리지 않도록 밤하늘에 떠오른 하얀 낫 모양의 달을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허기와 피로가 쌓일수록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아졌기에, 그는 계속 나아갈 작정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쓰러져 죽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살육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토끼나 사슴, 그리고 다른 작은 동물들은 겨우내 씨가 마르기 마련이기에, 인간과 마찬가지로 표범도 먹잇감을 찾느라 고달픈 시간을 견뎌야 했다. 어느 시점이 오면 놈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을 테고, 바로 그때 남자는 그 짐승을 죽일 것이다.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남자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쫓는 사냥감보다 더 오래 버텨내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남자는 험한 산등성이에 뿌리를 내린 어린 소나무들로 에워싸인 작은 빈터에 다다랐다. 삐죽 솟아오른 바위로 올라가, 스산한 잿빛과 회녹색으로 펼쳐진 겨울 벌판을 품은 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떠밀려 온 얇은 구름층이 산꼭대기의 목 주변에 걸려 갈기갈기 찢긴 비단처럼 너울거렸다. 남자가 발을 디디고 선 아래쪽으로는 거친 흰색의 심연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장소로 이끌려 오게 되어 기뻤다. 표범은 험준한 절벽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고, 따라서 이곳에 그 짐승의 은신처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무엇인가 연약하고 차가운 것이 부드럽게 남자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 위에서는 발자국을 쫓기가 더 쉬워지겠지만, 너무 두껍게 쌓이기 전에 짐승을 찾아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야 할 것이다. 그는 활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직감대로라면 지금 표범은 남자가 서 있는 절벽 아래쪽에 자리한 은신처에 틀어박혀 있을 테고, 그러면 그 짐승을 찾기 위한 고행도 이제 끝날 터였다. 그러나 놈이 다시 먹이를 찾으러 나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킨 채 기다려야 했고, 그건 한 시간, 어쩌면 사흘까지 걸릴 수도 있었다. 그때쯤이면 그는 선 채로 머리끝까지 눈에 뒤덮이고 말리라. 남자는 눈이 되고, 바위가 되고, 바람이 될 것이다. 그의 내장은 표범의 먹이가 되고, 그의 피는 어린 소나무들의 영양분이 될 것이다. 마치 그가 산 아래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던 인간의 삶을 아예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 삶에서, 남자는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던 병사였다. 활 쏘는 기술로는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명사수들만 특별히 차출하여 만든 부대였다. 화승총이나 활로는 누구도 남자를 능가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험준하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개척해 낸 북부인들은 사냥꾼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평양군수 밑에 소속된 병사였다. 훈련을 건너뛸 때마다 아버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보통은 사슴, 산토끼, 여우, 꿩 같은 고만고만한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가끔은 멧돼지, 반달곰, 표범, 그리고 이리를 잡아 오기도 했다.
남자가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 혼자서 호랑이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었다. 그 짐승을 산 아래로 끌어오기 위해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장정이 여섯이나 아버지를 도우러 가야 했다. 마침내 죽은 호랑이를 끌고 내려왔을 때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한마음으로 기뻐했고, 아이들은 군중의 맨 앞쪽에서 내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호랑이 가죽만 해도 병사의 한 해 치 봉급보다 더 값이 나갔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아래 거대한 사체가 놓였고, 먹을 것이라곤 한 톨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쓴 건지 여자들은 그들만의 장기를 발휘하여 어떻게든 잔치 음식을 마련했다. 사발을 가득 채운 뽀얀 막걸리를 모두가 신나게 들이켰다.
그러나 그날 밤, 뜨거운 온돌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은 아버지는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호랑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제 우린 부자예요.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어요. 소년이 말했다. 뭉툭하게 그루터기만 남은 초가 조용히 깜박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작고 얌전한 불빛은, 마치 두꺼운 겨울 솜이불같이 그들 모두를 뒤덮어 보호해 주고 있는 이 깜깜한 어둠에 맞설 뜻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다른 방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잠들어 있었다. 사냥 중인 부엉이들이 웅얼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소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는 어린아이 때부터 산토끼나 꿩을 사냥했지.
예, 아버지.
너는 삼백 자* 떨어진 곳에서도 꿩을 쏘아 떨어뜨릴 수 있지.
* 약 90미터. 한 자는 약 30센티미터다.
예, 아버지.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미 마을에서 소년보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만 빼면.
너는 삼백예순 자 떨어진 곳에서도 목표한 나무를 맞히고, 곧바로 다음 화살을 쏘아 그 화살을 쪼개버릴 수 있지.
예, 아버지.
그래서 너는 네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물었다. 소년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거기에 맞는 유일한 대답은 침묵이라는 것을 이미 느낄 수 있었다.
네 활 좀 보자꾸나. 아버지가 말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활을 가져와서 아버지와 자신 사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네가 아무리 뛰어난 명사수라도 이 활로는 호랑이를 죽일 수 없다. 아버지가 말했다. 멀리서 쏠 때는 힘이 부족하고, 호랑이는 꿩 같은 날짐승이 아니다. 이 활이 가진 힘으로 호랑이에게 상처라도 내려면 예순 자 안에서 쏴야 할 거다. 치명상을 입히려면 마흔다섯 자 안까지는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에게 마흔다섯 자가 얼마나 짧은 거리인지 아느냐?
소년은 침묵으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호랑이의 덩치는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아홉 자나 되고, 내킨다면 마을 어귀의 고목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 호랑이에게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오두막을 뛰어넘는다는 건, 마치 너와 내가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를 뛰어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거다.
호랑이에게 너무 이르게 화살을 쏜다면, 그저 가벼운 상처만 입힐 뿐 결국 그 짐승을 더 흉포하게 만들어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발 늦게 쏘거나 빗맞힌다면, 눈을 한 번 깜박이기도 전에 호랑이가 이미 너를 덮치고 말 것이다. 호랑이는 1초에 마흔다섯 자를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는 오늘 호랑이를 잡아 오셨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내가 말했지, 호랑이를 죽이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만이라고. 그리고 그건 호랑이 쪽에서 먼저 너를 죽이려고 할 때뿐이다. 그럴 때가 아니면 절대로 호랑이를 잡으려 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사냥꾼의 오래된 기억은 지금 주위에 폭신하게 쌓여가는 눈처럼 그의 머릿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절벽 끝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응시했다. 차디찬 눈보라가 그의 두 눈과 콧속으로 거칠게 파고들고 맨손을 장갑처럼 하얗게 둘러싸 사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남자의 예상보다 더 짙은 눈발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눈구름까지 확연히 보이는 이 정도 높이에서는, 한동안 눈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눈송이의 냄새를 맡았던 순간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 위에 촉촉하게 찍힌 그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던 바로 그때 말이다.
남자는 재잘거릴 기력도 없는 아이들이 누추한 오두막에서 고요한 침묵 속에 굶주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싫었다. 머지않아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고 길을 나섰다. 사슴이나 토끼라도 잡았다면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그 작고 행복한 얼굴들이 불을 켠 등처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발견한 건 표범의 발자국뿐이었고, 어쩌면 한 해 수확량의 반절이 넘는 값어치를 하는 그 짐승의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홀려버렸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려나?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남자는 극심하게 피로해졌고, 지금껏 그를 떠받쳐 온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쌓인 눈의 모습이 마치 갓 지어 뜨거운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흰 쌀밥 한 그릇 같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뜨끈한 쌀밥을 먹어본 건 평생을 살면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남자는 분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여윈 몸을 무심하게 관통하며 불어가는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 먹고 싶었던 음식 몇 가지를 더 떠올려 보고 싶었다. 간장과 파를 끼얹어 푹 고아낸 갈비찜이나, 걸쭉하게 녹은 골수가 입천장에 쩍쩍 들러붙을 정도로 진한 꼬리곰탕 같은 것들. 딱 한 번, 어느 명절 잔치에서 먹어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지금 그를 향해 다시금 떠밀려 오는 또 다른 기억보다는 강렬하거나 유혹적이지는 못했다.
남자가 순영을 처음 보았을 때, 순영은 자매들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골짜기에 쑥과 나물을 캐러 가던 참이었다. 순영은 열세 살이었고, 남자는 열다섯 살이었다.
화려한 꽃 자수로 장식한 초록 비단 저고리와 붉은 비단 치마 차림에 옥구슬이 박힌 족두리를 쓰고 있던 순영. 왕궁의 공주들이나 입는 예복이지만 평민들에게는 일생에 단 한 번, 혼례식을 치를 때만 입을 수 있었던 활옷이었다. 혼인이란 천지신명에게도 인간에게도 신성하기 그지없는 대사였기에, 평생토록 염색하지 않은 무명 삼베에 둘러싸여 태어나고 자라온 소작농의 딸이라도 그날 하루만은 반상의 구분 없이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자의 의복을 입어보도록 허락되었다. 남자 또한 조정에 드나드는 백관들이 입는 관복을 입었다. 커다란 허리띠가 달린 푸른 단령을 걸치고 머리에는 검은 말총으로 만든 사모를 썼다. 마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짓궂게 놀려댔다. 새신랑이 색시한테 홀딱 반해 눈을 떼질 못하네! 보아하니 오늘 밤에는 한숨도 잘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먼. 순영은 발걸음을 옮길 때조차 그 예쁜 눈을 줄곧 내리깐 채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시중을 드는 아주머니 둘이 양쪽에서 순영의 팔을 잡고서 순영이 묵직한 혼례복 아래 천천히 발을 끌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순영과 남자는 제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차례대로 맑은 술 한 잔씩을 권하고, 상대방이 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심으로써 영원히 서로에게 속하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밤이 되어 단둘이 신방에 남겨지자, 남자는 여러 겹의 비단옷으로 켜켜이 포개어진 공주의 혼례복을 한 꺼풀씩 조심스럽게 벗겨나갔다. 이 마을의 모든 새신부가 대를 이어가며 빌려 입은 옷이었다. 평소의 명랑하고 활기찬 모습과 달리 순영은 퍽 수줍어했고, 남자 또한 몹시 떨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남자가 촛불을 불어 끈 뒤 순영의 부드러운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빛이 쏟아지는 그 피부에 입을 맞추자, 순영은 양다리를 들어 남자의 허리를 감고 자신의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순영 역시 자신을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이 남자로서는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순영과 한 몸이 되는 기쁨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것은 남자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가장 강렬한 행복감, 산꼭대기에 올라가 펼쳐진 경치를 볼 때의 감정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산의 정상에서 느꼈던 것이 까마득한 높이와 차가운 공기, 고요한 고독감이 준 절정이라면, 이것은 아주 깊고, 따스하고, 하나가 되는 결합에서 맛볼 수 있는 환희였다. 남자가 순영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끌어안자 순영은 남자의 어깨와 가슴 사이 구석에 제 머리를 얹으며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행복해? 남자가 물었다. 우리가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어. 순영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 목숨이 끊어진대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기도 해. 죽어도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아.
나도 그래. 남자가 말했다. 나도 꼭 그런 마음이야.
사냥꾼은 부옇게 흐린 추억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현실을 쥐고 있는 손을 놓은 채 과거의 그림자들 속에 파묻히는 느낌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저 꿈의 세계로 난 문 하나를 통과해 가는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그를 부르는 순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여보, 내 남편,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와요.
왜 나를 떠났어? 남자는 말했다. 당신 없이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어. 순영이 말했다. 당신과 아이들 곁에.
이제 당신이랑 같이 가고 싶어. 남자가 말하곤 순영이 자신을 데려가기를 기다렸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만날 거야. 순영이 말했다.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로 어떤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벼랑 가장자리에서 낮게 그렁대는 숨소리였다. 짐승이 호흡할 때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수증기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러나 사냥감을 포획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가진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표범의 먹이가 되어 죽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호랑이였다.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남자가 양팔을 한껏 펼친 길이만 했다. 다 자란 표범 정도의 크기. 새끼 호랑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아직은 어려서 혼자서 사냥하지는 못하는 놈이다. 하얀 털로 폭신하게 뒤덮인 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어린 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냥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색 홍채는 겁을 먹지도 화가 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그래서 이 이상한 형상의 등장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활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호랑이와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모든 언덕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가며 닥치는 대로 포획한 탓에, 그 많던 호랑이들은 가장 깊숙하고 험한 산속으로 떠밀리듯 숨어들었다. 호랑이의 값어치는 훌쩍 뛰어올라 가죽, 뼈, 심지어 고기까지 인기 상품이 되었다. 본래 고기를 취하기 위해 포획되는 짐승이 아니건만, 이제 한국의 호랑이 고기는 부유한 일본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고급 진미가 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호랑이의 살점을 먹으면 그 용맹함과 정력까지 섭취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온갖 견장과 훈장을 단 관료들과 유럽식 드레스를 입은 상류층 여성들이 모여 앉아 호랑이의 각종 부위로 구성된 특별 코스 요리를 맛보는 연회를 마련하곤 했다.
이 호랑이를 죽이면, 최소 3년은 넉넉히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땅 한 뙈기까지 살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의 아이들은 안전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친 바람이 그의 귓가에서 아우성을 쳤고, 남자는 활과 화살을 아래로 내렸다. 호랑이가 널 먼저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절대로 호랑이를 죽이지 말아라.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어린 호랑이는 마을의 강아지처럼 겁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짐승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사냥꾼 역시 뒤돌아서서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뚫고 발걸음을 뗐다.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눈은 그의 종아리 반절까지 푹푹 잠길 만큼 쌓여 있었다. 지금껏 남자의 움직임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던 공복감이 이제는 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그를 땅바닥으로 무겁게 끌어내리는 듯했다. 잿빛 어스름이 폭설에 몸을 떠는 나무들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남자는 산신령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영물을 놓아주었으니 저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군.” 야마다 대위가 말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잔뜩 겁먹은 것처럼 보였는데, 야마다 대위의 말이 맞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가 자기 상관들 앞에서도 그들에게 닥친 이 재앙을 선고하는 데 거침없고 대담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쪽에 있는 나무들의 가지가 더 굵직한 것을 보니 틀림없이 이 방향이 남쪽이지. 우린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 반대쪽으로 왔던 거야!” 야마다 대위는 노여움과 경멸감을 감추지 못했다. 막 스물한 살이 된 그에겐 반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남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습관이 이미 배어 있었는데, 이러한 위풍당당한 성향은 행세깨나 하는 세력가인 그의 집안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야마다 가문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무사 가문의 분가였으며, 야마다 대위의 아버지인 야마다 남작은 하세가와 총독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세가와 집안과 야마다 집안 모두 영국인 가정교사를 고용해 아들들을 서양식으로 교육했으며, 야마다 겐조는 장교 임관을 위해 본토로 돌아오기 전까지 하세가와 집안의 사촌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일주했다. 그처럼 젊은 나이에 대위 계급장을 달 수 있었던 것도, 또 그의 상관인 하야시 소좌*마저도 겐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소좌님.” 마침내 야마다 대위가 하야시 소좌에게 한마디를 던지자 일행 모두가 발을 멈추었다. 야마다 대위와 하야시 소좌 외에도 네 명이 더 있었는데, 현지 경부** 후쿠다와 그의 부하인 순사 둘, 그리고 조선인 길잡이 한 명이었다.
* 소령에 해당하는 일본군 계급 명칭이다.
** 현재 한국의 경감과 비슷한 계급으로, 경찰서장에 해당한다.
“그러면 대위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하야시 소좌는 느릿느릿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마치 그들이 지금 눈 내리는 깊은 산속에 있는 게 아니라 안전한 막사 안에 있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밤이 그들을 빠르게 덮쳐오고 있었다.
“날이 시시각각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낮에 길을 잃었는데 밤중에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오늘 밤을 버틸 수 있도록 야영을 준비해야 합니다. 밤새 다들 얼어 죽는 사태만 피할 수 있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산에서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하야시 소좌가 어떻게 반응할지 불안스레 예측하느라 일행은 더욱 조용해졌다. 야마다 대위가 이런 식으로 하극상을 내비쳐도 하야시 소좌가 인내심을 잃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이처럼 지독하고 다급한 상황에 놓인 지금 이들의 갈등에는 본격적인 반란의 기운마저 감돌았다. 하야시 소좌는 자신의 직속 부하인 겐조의 얼굴을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새 군화를 장만해야 할지, 혹은 토끼의 생가죽을 벗기는 최적의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때 줄곧 그 가 얼굴에 띄우는 표정이었다. 그의 뿌리 깊고 본능적인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하야시는 무턱대고 자신의 감정을 분출해 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순사 한 명에게로 몸을 돌려 야영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행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땔감을 찾으러 이리저리 흩어졌다. 눈이 오는 데다 땅이 이미 젖어 있어 땔감이 될 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는 말고. 너는 여기 내 옆에 남아 있어.” 겁 많고 심약해 보이는 조선인 길잡이 백 씨가 허둥지둥 자리를 뜨려고 하자 하야시 소좌가 말했다. “네놈이 내 시야를 벗어나도록 내버려 둘 것 같나?” 백 씨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신음을 흘리며 누더기 천으로 묶여 있는 젖은 가죽신 속의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이 지방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야시 소좌는 후쿠다 경부에게 이곳 어디쯤에서 사냥할 만한 곳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근방 200리*** 이내의 모든 조선인을 조사하여 상세한 인구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던 후쿠다는 이 사냥 산행의 길잡이 역할을 맡을 조선인 세 명을 추천했다. 백 씨 말고 다른 두 후보자는 감자를 캐는 농사꾼들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거친 야인 부족으로 통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산속에 외따로 숨어 살면서 자기네들끼리만 혼인하고 자급자족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이 세상에 간신히 얼굴을 내비치고 교류하는 시기는 고작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큰 장이 서는 날뿐이었다. 감자 농부 두 사람 모두 산길에 밝아 그 산에 있는 모든 나뭇가지와 돌멩이 하나까지 모르는 게 없었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떠돌이 비단장수 백 씨뿐이었다. 하야시 소좌는 그 점이 더 중요한 자질이라 여겼으나 그 판단은 일행 모두에게 애석한 결과를 가져왔고, 백 씨 자신의 유감스러움 또한 전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약 80킬로미터. 1리는 약 0.4킬로미터다.
그건 야마다 소위의 삶이 끝나기 직전 그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잊지 못할 형상들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달빛 아래 그림처럼 평온히 누워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땔감을 모으러 숲속으로 스무 자쯤 들어갔을 때, 야마다는 눈밭에 늘어진 누군가의 몸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첫 충격이 가신 뒤 야마다 대위에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은 채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이 대단히 차분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마치 추위 속에서 얼어 죽은 게 아니라, 어떤 황홀한 열락悅樂의 순간에 그대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두 번째로 놀라웠던 건, 이 작은 남자가 몸에 두르고 있는 천 조각이 너무나 얇고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입은 누비저고리는 닳고 해지다 못해, 날카롭게 튀어나온 여윈 어깨뼈가 훤히 다 비쳐 보일 지경이었다.
야마다 대위는 남자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이후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파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향해 몸을 굽히고 귀를 기울였다.
“이봐, 어이! 일어나!” 남자의 콧구멍에서 희미한 숨결이 여전히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닫고서 야마다가 냅다 고함을 쳤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양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싸 들고 가볍게 뺨을 때렸다. 남자에게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마다 대위는 남자의 머리를 다시 눈 위에 내려놓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해로운 벌레만도 못한 이 조센징****을 굳이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야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지만, 몇 발짝 떼고서는 다시 몸을 돌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어두운 숲과도 같아서, 야마다처럼 이성적인 남자도 내면에 그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담아두곤 한다. 야마다는 그 조센징을 두 팔로 들어 올렸다. 어린아이를 안아 들 때처럼 가볍고 가뿐했다.
**** ‘조선인’을 일본어로 발음한 단어. 한국인에 대한 혐오의 맥락에서 사용된 경우, 원문 그대로 ‘조센징’으로 번역했다.
“이게 대체 뭔가?” 야영지로 돌아오자 하야시 소좌가 언짢은 기색으로 호통을 쳤다.
“숲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야마다 대위가 남자를 땅바닥에 눕히며 말했다.
“죽은 조센징으로 뭘 어쩌게? 땔감으로 삼으려는 게 아니고서야. 꼴을 보아하니 불도 제대로 붙지 않을 것 같은데. 혼자 죽게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 뒀어야 했네.”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혼자 사냥하고 있었으니, 이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갈 길을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마다 대위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조선인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말라는 속뜻을 담은 은밀한 경고에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야마다가 품고 있는 의도나 감정의 여러 결 사이에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연민이 자리했던 적이 결코 없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잘 아는 바였다.
나머지 일행이 돌아왔다. 야마다 대위는 백 씨에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그 남자를 불 가까이 옮겨 몸을 녹여주고 조선말로 소리쳐 보라고 지시했다. 남자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자 백 씨는 미친 사람처럼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야마다를 불렀다. “대위님! 대위님! 이자가 깨어나고 있습니다요!” 야마다 대위는 백 씨에게 일러 남자에게 비상식량인 건빵을 조금 먹이고 야마다 자신의 몫으로 특별히 배급된 말린 곶감까지 주게 했다.
“건빵은 반드시 눈에 약간 적신 상태로 먹이도록 해. 안 그러면 저놈의 목구멍이 막혀 질식할 테니까.” 야마다 대위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백 씨는 남자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얹은 뒤 조선말로 무언가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놈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가?” 하야시 소좌가 물었다. 그는 간부용으로 준비된, 딱딱하게 언 주먹밥과 약간의 매실 장아찌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순사들은 어디에선가 나온 사케 한 병을 돌려가며 마셨고,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명랑하고 화기애애해졌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백이 이놈을 특별히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야마다 대위가 말했다. 후쿠다 경부 역시 남자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순사 중 하나는 그가 아마도 소작농 남씨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이 사냥꾼이 그 지역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뭇 농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대한제국군에 복무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는 경찰의 주의를 끄는 인물이 된 터였다.
“그렇다면 위험한 자로군. 배은망덕한 독사 놈이야.” 하야시 소좌가 말했다.
“유용한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날이 밝아올 때 우리를 이 저주받은 산에서 내려갈 수 있게 해준다면, 하루 정도는 살려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마다는 변함없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 자신도 건빵 한두 조각과 곶감 한 개를 먹고 첫 불침번을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출도 없이 찾아온 새벽은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이 뿜어내는 회백색 은광을 비추며 은은하고 부연 빛으로 숲을 채웠다. 햇볕도 그림자도 없는 숲속에는 자리한 모든 것이 중력을 잃고 부유하는 듯 보였다. 나무들과 바위들, 그리고 눈까지 모두 여린 은빛 공기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흡사 이승과 저승 중간에 있는 세계, 다른 세계들 사이에 살며시 끼어 있는 세계의 모습이었다.
잠에서 깨어 그런 아침을 맞이한 야마다 대위는 혹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눈을 뜨면 자신의 포근하고 따스한 이불 속에 누워 있기를 바랐다. 그러다 다음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고, 뒤따라오는 크나큰 실망감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과 교육으로 인해, 그는 철저히 이성을 중시하며 감정을 불신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이나 우정까지도 하류계급에 속한 사람들, 혹은 여자들이 빠져드는 헛된 몽상으로 여겨 경멸했고 남자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감정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한 사람의 내적인 의지와 신중한 판단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 요인으로 야기된 반응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진득한 자기 연민에 빠져들어 가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곧장 담요를 떨쳐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선 야마다는, 자신의 잠자리에서 불과 몇 자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찍힌 발자국들을 발견했다. 흔적을 보아하니 거대한 짐승이 그들의 야영지 둘레를 여러 차례 맴돈 모양이었다. 야마다는 백 씨와 사냥꾼을 깨웠다. 두 사람은 체온으로 추운 밤을 버티느라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야생 짐승의 흔적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백 씨는 거의 뛰어오르듯 몸을 일으키더니 사냥꾼에게 조선말로 상황을 허겁지겁 설명했다. 사냥꾼은 병약해 보였지만, 바로 전날 밤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치고는 놀랍도록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였다. 남자가 뭔가 속삭이듯 말했고, 그러자 백 씨가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뭐라는 건가?” 발자국을 살피며 조선말로 중얼거리는 사냥꾼의 모습에, 야마다 대위가 백 씨에게 물었다.
“호랑이가 틀림없다고 합니다요. 이렇게 가마솥 뚜껑처럼 커다란 발자국을 내는 짐승은 호랑이 말고는 없습죠. 누구라도 아는 얘기입니다.” 백 씨가 말했다. “저 사냥꾼 말로는, 지금 당장 산에서 내려가야 한답니다. 호랑이는 지난밤 내내 이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기분이 좋은 상태도 아니랍니다.”
“왜 아무도 이 호랑이를 못 봤지?” 자기 다음에 경계를 선 이들에게 언짢음을 느끼며 야마다 대위가 물었다. 백 씨가 이 말을 사냥꾼에게 전한 뒤 남자의 답변을 통역했다.
“저이 말로는 호랑이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요. 우리가 호랑이를 볼 수 있는 건 호랑이가 기꺼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할 때뿐이고, 그 전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죠. 우리는 호랑이들의 터전, 그들의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걸 그냥 내버려 두고 조용히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산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 짐승이 눈에 뜨인다면 나는 그놈을 잡아 죽일 거야.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총독님께 대령할 거라고.” 야마다 대위가 말했다. “너희 같은 겁쟁이 조센징 노예들이 무사의 용기에 대해 뭘 알겠냐.”
백 씨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어쨌든 모두가,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야마다 대위 자신이 한시바삐 돌아가는 길을 찾아 최대한 빨리 이 산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앞장서서 길을 이끄는 사냥꾼의 몸놀림은 굉장히 날쌔고 민첩했다. 산에서 내내 굶다가 어젯밤 쌀 건빵 약간과 김, 그리고 장아찌로 겨우 배를 채운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남자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으로 오랫동안 버티는 데 익숙한 듯했다. 야마다 대위는 그가 지니고 있던 활과 화살을 압수했지만, 사냥꾼은 그러한 조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 억울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태도로 나무들 사이를 빠르게 뚫고 나아갔다.
“저놈이 도망칠 눈치를 보이면 곧바로 쏴버려.” 하야시 소좌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소좌님.” 대위가 대답했다.
우중충한 회색빛 날에 태양은 줄곧 구름 뒤에 숨어 나오지 않건만, 명확히 드러나는 빛 없이도 세상은 조금씩 밝아졌다. 바람의 한기가 수천 개의 얼음 바늘처럼 그들의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전날보다 훨씬 더 차갑고 혹독한 바람이었다. 그들이 떼는 발걸음마다 눈 위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겼다. 사냥꾼은 이따금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자가 백 씨에게 무엇인가 속삭이자, 백 씨는 야마다 대위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전했다.
“나리,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답니다.” 백 씨가 애원하듯 말했다. “호랑이가 계속 우리의 뒤를 쫓는 중인데, 이 속도라면 지금쯤 우리 바로 뒤쪽에 바짝 붙어 있을 것 같답니다.”
“너희 조센징은 정말 한심하고 나약한 벌레 같은 놈들이다.” 야마다 대위가 경멸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는 활과 화살 따위가 아니라 총이 있다고 저 사냥꾼 놈에게 전해라. 자랑스러운 우리 황군* 장교들은 미개한 짐승들을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나지 않아. 우리는 그놈들을 사냥한다.”
* 당시 일본에서 자국군을 부르던 말.
백 씨는 입을 다물고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사냥꾼 뒤쪽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미소와 고갯짓으로 대위의 일침에 동의를 보냈고, 각자 조선에 와 겪었던 이런저런 사냥 무용담이며 자신이 죽인 야생 동물들에 대해 뽐내듯이 읊어댔다. 담청색 눈동자를 한 새끼 표범들, 가슴에 창백한 초승달 무늬의 흰 털이 돋은 검은 반달곰들, 큰 뿔을 지닌 수사슴들, 그리고 이리들. 하지만 백수 중에서도 제일 영험한 짐승이자 조선 땅 어디에나 있다는 호랑이를 직접 사냥해 봤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자랑도 시들해졌다. 구름 때문에 해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그들 배 속의 허기와 조금씩 밀려오는 좌절감 외에는 몇 시나 되었는지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꼬박 하루가 넘도록 길을 잃고 헤매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리고 전날의 저녁 식사도 빈약했기에, 그들 대부분은 마지막 남은 식량을 아침 식사 때 다 먹어버린 뒤였다. 침묵 속에 행군이 이어지던 중, 갑자기 사냥꾼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나머지 일행에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스쳐 간 바람에 아직도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파도의 물안개처럼 곱고 흰 눈가루가 나뭇가지 아래로 사르륵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뭐야?” 야마다 대위가 백 씨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기나긴 장마철에 울리는 천둥처럼 깊고 불안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모두는 미지의 힘의 형언할 수 없는 응시를 느꼈다. 그들 바로 앞에 놓인 나무들 사이, 불과 예순 자도 안 되는 거리에서 번쩍이고 있는 주황색과 검은색 섬광에서 온 것이었다. 서리로 뒤덮인 텁수룩한 갈기의 미세한 떨림을 제외하면, 그 짐승은 전혀 흔들림 없는 자세로 그들을 대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동공이 박힌 밝은 노란색 눈동자는 온통 하얀색뿐인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었다.
순간 군인들은 모두 소총을 꺼내 들고, 마치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는 호랑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야마다 대위가 부하들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낸 뒤, 이어 거의 동시에 쏟아진 무수한 총탄 중 가장 첫 발을 쏘았다. 뜻밖의 공격에 호랑이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네발로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더니 마치 하늘을 날듯이 그들 쪽으로 도약했다. 군인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짐승은 그들 사이의 몇 자 안 되는 거리를 단숨에 가로질렀다. 야마다 대위의 심장이 얼음처럼 섬뜩해지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시야 안으로 휙 지나갔다. 사냥꾼이 양손을 공중에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하지 마!” 그의 고함이 빈터에 울려 퍼지자 나무들이 몸서리를 쳤다. “안 돼!”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호랑이는 방향을 날쌔게 바꾸어 사냥꾼에게로 돌아섰다.
“안 돼! 안 돼!” 사냥꾼이 계속 되풀이해 외쳤다. 무섭게 달려오던 호랑이가 자신의 코앞에서 멈출 때까지. 호랑이는 노란 눈동자로 사냥꾼의 눈을 한순간 마주 응시하다가, 홱 몸을 돌리곤 달려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군인들이 다시 사격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잡목 숲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뒤였다. 왼쪽 뒷다리로 디딘 세 번째 발자국마다 선홍색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하야시 소좌가 고함을 쳤다. “놈을 추격해야지! 상처를 입었으니 속도를 내지 못할 거야. 해가 지기 전에 우리가 놈을 잡아 죽이자고!”
사냥꾼이 다급한 말투로 백 씨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자, 나이 든 비단장수는 일본인들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이 사람 말로는 호랑이를 보내줘야 한답니다요. 상처 입은 호랑이는 건강한 호랑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요. 호랑이들은 영물이라 복수심을 품을 줄 압니다. 불의와 정의를 기억할 만큼 영리하고, 공격을 받아 다치면 상대를 죽일 기세로 덤빈답니다. 게다가, 설령 우리가 호랑이를 죽인다 해도 하룻밤 더 이 산속에 갇혀 있게 되면 우리 목숨 또한 끝나고 말 겁니다요. 이미 어젯밤보다 더 추워졌으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요, 소좌님.”
하야시 소좌는 부하들을 쭉 돌아보았다. 모두 이미 패배한 듯 겁에 질린 얼굴이었고, 그 거대한 야수의 뒤를 따라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보고자 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총상을 입고서도 그 짐승은 속도를 늦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은 터였다.
하야시는 이런 사냥 여행뿐 아니라 전장에서의 전투를 이끈 경력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러시아를 상대로 만주에서 싸웠고, 물론 내내 불만과 반항의 기운이 끊이지 않는 식민지 조선도 통제해야 했다. 그는 싸움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지만, 그것이 용기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하야시에게 용기란 곧 무모한 어리석음과 같았다. 그는 오직 성공만을 추구했고, 피를 보길 좋아하는 그의 잔혹성조차도, 사실 개인적인 만족보다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고 부하들을 위협하여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야시에게 성공이란 윤리가 아닌 실용적인 성격을 지닌 삶의 목표였기에, 이번에도 그는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경로를 택했다. 그는 조선인 사냥꾼에게 그들을 이끌어 산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산길을 내려가는 방향을 잡아 야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중에도, 노란 눈동자 한 쌍이 뒤쪽에서 목덜미를 노리고 있는 듯한 두려운 감각은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은 두껍게 쌓인 눈 너머로도 알아볼 수 있는 오솔길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길을 따라 한두 시간 정도 걷고 나서야 간신히 깊은 숲에서 빠져나온 그들에게 산 아래쪽에 펼쳐진 마을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옹기종기 짚을 이어 엮은 초가지붕들이, 지평선 너머 구름을 뚫고 마지막으로 예기치 않게 솟아 나온 햇살 한 자락에 비쳐 반짝이는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친 눈앞에 펼쳐진 인가의 정경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간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눈이 쌓여 미끄러운 언덕길을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처럼 신나게 뛰어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있는 상관의 눈치를 보느라, 일행은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행군할 뿐이었다. 이들이 산기슭에 도달하기까지는 반 시간이 더 걸렸다. 마을 경작지와 숲이 만나는 곳이었다. 눈이 담요처럼 뒤덮인 휴경지 위에는 새들과 아이들의 발자국이 아무렇게나 나 있었다.
하야시 소좌는 일동에게 멈추라고 지시한 뒤 경부와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후쿠다 경부는 본래 배에 기름기가 차고 투실투실하니 탐욕스러워 보이는 남자였는데, 지난 이삼일간의 고행 탓인지 일시적으로나마 수척한 모습이었다. 다른 장교들은 짐을 내려놓고 담배를 피우며 가벼운 마음으로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공포의 순간은 이미 잊은 채, 곧 따스한 음식과 불씨로 몸을 녹이며 이 모든 모험담을 웃어넘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들 잔뜩 들떠 있었다.
“너.” 야마다 대위가 사냥꾼을 불렀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백 씨 곁에 몸을 붙였다. “네놈 이름을 대라.”
“제 이름은 남경수입니다.” 사냥꾼이 서툰 일본어로 대답했다.
“대한제국군에 있었나?”
백 씨가 이 말을 통역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류를 막론하고 조센징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놈을 이 자리에서 당장 체포할 수도 있어.”
이 말을 조선말로 속삭이듯 전하며 백 씨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였지만, 남경수는 그저 야마다 대위를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장교는 미간을 찡그리고 사냥꾼의 응시를 맞받았다. 두 남자는 서로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따스한 간부용 군복 차림에 풍성한 털모자를 썼으며, 깊은 숲속에서 고생스러운 사흘 밤낮을 보내고 온 직후에도 여전히 기운과 활력이 넘치는 젊고 훤칠한 청년이었다. 다른 사람은 키가 작았고, 날카롭게 튀어나온 광대뼈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데다, 검은 머리보다 백발이 더 성성했다. 세월에 지치고 시들어버린 노인 같은 그의 여윈 몸에는 뼈가 마른 바위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야마다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의 눈 속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보았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은 다르기보다 오히려 비슷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에게는 각자의 편에 있는 민간인들보다 자신과 맞선 상대편 군인들이 훨씬 더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마련이다. 비록 외양은 초라할지언정, 남경수는 자신의 적수들을 기꺼이 살해하고 동맹군을 몸 바쳐 보호할 인물 같아 보였다. 야마다는 그러한 위엄을 존중했다.
“네 무기는 압수하겠다. 네가 사냥을 한다는 소리가 다시 들리면, 그때는 내가 직접 와서 너를 체포할 것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무사히 인도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백 씨가 그 말을 사냥꾼에게 전하며 젊은 장교를 향해 연신 절을 올렸다. 백 씨가 대신하는 감사 인사에 야마다는 짧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남경수는 잠시 야마다를 빤히 바라보다가 휙 돌아설 뿐이었다.
“어이, 백!” 하야시 소좌가 외쳐 부르자 늙은 상인은 힘겨운 듯 발을 끌며 다가왔다.
“예, 소좌님.”
“너 때문에 우리 모두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잖아, 이 멍청한 벌레 같은 놈.” 하야시 소좌는 거의 여유를 즐기듯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백 씨는 겁을 먹고 움츠러들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요, 소좌님. 오솔길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요. 제가 이 산을 오르내린 적이 수백 번은 되는데도…….”
“네놈은 우리 사냥을 망치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어.” 하야시 소좌가 말했다. “썩 꺼져라. 내가 너라면 지금 아주 빨리 뛰어갈 거야.”
백 씨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몇 번이나 주억거리다가, 결심한 듯 몸을 돌리고는 노구가 허락하는 가장 빠른 속도로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가 전력으로 질주하여 논 한 마지기를 거의 가로질렀을 때쯤, 하야시 소좌가 자신의 소총을 꺼내 어깨 위에 얹고 방아쇠를 당겼다.
백 씨는 돌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양팔을 쫙 펼친 채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소리가 전달되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등 중앙에서부터 붉은 피가 천천히 퍼지며 비단이 가득 들어 있던 봇짐을 흠뻑 적셨다.
“제대로 된 사냥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달래야지. 안 그런가, 후쿠다 경부?” 하야시 소좌의 말에 후쿠다는 아첨을 섞어가며 동의했다.
“그 남 뭐시기라는 놈은 자네 몫으로 남겨주지. 어쨌든 여기는 자네 관할지니까 말이야.”
“아, 그럼요, 물론입니다. 아주 좋은 본보기를 세울 수 있겠죠.” 후쿠다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그놈을 처리하면, 아무도 이 근방 지역에서 감히 무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소좌님.” 야마다 대위가 앞으로 나섰다. “이 조센징은 우리가 산에서 내려오도록 길을 인도했습니다. 이놈이 없었다면 우리는 산에 갇혀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대위도 얼어 죽을 뻔한 놈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나. 그러니 피차 빚은 갚은 것 같은데. 게다가 놈이 불법으로 밀렵한 죄까지 생각하면, 정의의 저울은 놈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우는 셈이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이 만족스러운 듯 후쿠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호랑이에게서도 우리를 구했죠.” 야마다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보기엔 그 저울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습니다만.” 야마다는 후쿠다로부터 하야시 소좌에게로, 다시 후쿠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더러운 조센징들을 향한 애정 따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제가 직접 그놈들을 충분히 죽였다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나 오늘 여기서 이 남자를 해친다면, 두 분은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되는 셈입니다.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빚지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또 저놈은 제 목숨도 구했으니, 저는 두 분이 그러한 일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어 수치를 당할 수 없습니다. 저놈을 그냥 보내주십시오.”
“정말 주제넘은 소릴 하는군, 대위.” 당혹감으로 얼굴이 시뻘게진 채, 후쿠다는 하야시 소좌가 자신을 거들어주길 바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야시는 거의 무표정했다. 그가 가장 위험할 때의 모습이었다. 그는 교활한 한 마리 뱀처럼 습관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하긴, 이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조센징을 모두 죽여버린다는 게 불필요한 일 같긴 하군.” 하야시가 말했다. “실제로 저놈이 유용하긴 했으니까. 그 쓸모없는 백가 늙은이와는 달랐지.”
그 말에 후쿠다는 얼른 자신의 주장을 굽혔고, 일행은 다 함께 경찰서로 향하기로 했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졌을 때, 비로소 야마다는 진심 어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이를 위해, 혹은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었고, 이는 그가 일생을 통틀어 느껴온 은밀한 만족감의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자립을 이룬 존재라 생각했다. 심지어 차갑고 흰 손을 가진 조용하고 우아한 귀부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서조차 그 어떤 온기와 애정도 갈구하지 않았으며, 여자가 줄 수 있는 사랑을 그리워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후쿠다의 미개한 폭력성 때문에 하마터면 체면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었다는 순간의 가능성은 야마다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의 화를 돋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의 운명에 결부되어 있다는 감각도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남경수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할수록, 이 불쾌한 연결의 감각은 계속 남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야마다는 남경수를 끌어당겨 한쪽으로 세웠다. 남자는 내내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키며 저 멀리 쓰러진 백 씨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 위엔 까마귀들이 벌써 한 무리 모여들어 흥분에 찬 울음소리를 시끄럽게 내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를 찾아와라.”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야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 이름은 야마다 겐조다.”
남경수는 야마다 쪽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야마다는 외투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은제 담뱃갑을 꺼내 남경수의 손에 쥐여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이 각인된 옆면을 쓸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른 간부들과 함께 멀어져 갔다. 남경수의 운명이 결정된 그 순간, 군인들은 일제히 그에게서 관심을 돌렸고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홀로 사라져 버렸다.
1918년~1919년
비밀 편지들
1918년
반짝반짝 빛나는 얼음 위로 비치며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온기가 겨울과 봄 사이를 맴돌던 어느 날, 한 여자와 한 소녀가 부드러운 녹색 싹이 땅의 속눈썹인 양 올라오는 시골길을 40리가 넘도록 걷고 있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시작된 여정은 평양 시내의 높다란 담이 있는 어느 저택 앞에 도착해서야 겨우 멈추었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 양옆에 달라붙은 귀밑머리를 눌러 정리했다. 허름한 어머니의 행색과 비교하면, 딸아이는 흑단처럼 반짝이는 머리채를 양쪽 귀 뒤로 땋아 넘겨 등 중앙을 따라 긴 댕기를 늘어뜨린 단정한 모습이었다. 옥희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집안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지만, 매일 밤 어머니는 그 아이의 머리카락만큼은 정성스레 빗고 땋아 주었다. 끼니때는 아들인 남동생들에게 더 많은 음식을 챙겨줬지만, 엄연히 맏이인 옥희에게 먼저 떠 주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옥희가 생애 첫 10년 동안 받았던 유일한 애정 표현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옥희는 그마저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옥희는 어머니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나 그냥 어머니랑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 울음이 섞여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이처럼 징징 짜지 말고 내 말대로 해라.” 어머니가 아이를 꾸짖었다. “매달 한 번 반나절은 집에 다녀올 수 있을 거야. 너도 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 않니?”
단풍잎처럼 빨갛고 작은 손으로 눈물 젖은 얼굴을 훔쳐내며 옥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녀로 태어났다는 짐이 벌써부터 아이의 작은 몸뚱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인이 곁문에서 그들을 맞이하여 안뜰로 인도해 그곳에서 기다리게 했다. 기와로 지붕을 장식한 가옥들이 삼면으로 어깨를 맞댄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잘 가꾸어진 고택 특유의 차분하고 별세계적인 분위기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바람이라곤 한 점도 없었지만, 옥희는 저택이 내쉬는 숨결인 양 서늘한 돌풍 한 자락이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나무로 된 툇마루 바닥은 반들반들하게 잘 닦였고, 잦은 발길에 닳아 움푹 팬 자리에서는 이 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이 신발을 벗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쾌락과 위안을 좇으며, 아직도 왕성한 정력의 입증이나 어쩌면 그들 인생 최초의 열정을 되새기고 싶어 하는 남자들. 옥희는 아직 어렸지만, 남자들이 이 집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기란 쉬웠다. 그들의 동기는 단순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것. 옥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건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면서, 여자들은 자신 또한 살아 있음을 느낀 적이 있을까?
가옥의 무수한 미닫이문 중 하나가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쪽으로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그 단아한 등의 모양과 뒤쪽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길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선만으로도, 옥희는 그 여자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향해 짐짓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순간, 옥희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갈망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 사이에서 곧잘 질투의 원인이 되곤 하는 흔한 외적 매력 대신에, 이 낯선 사람의 아름다움은 훨씬 드물고 희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뭔가 희망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러한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온화한 표정 속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엄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희망을 한껏 부풀려 띄워놓았다가도 곧 내동댕이쳐 그들이 겁을 먹고 움츠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유롭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옥희 어머니는 뻣뻣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 여자의 매력에 전혀 휘둘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 뙈기 땅에 몸을 내던져 고달프게 벌어 먹고사는 소작농일지언정, 옥희나 옥희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은 굳이 따지자면 백정 혹은 무두장이나 진배없이 오물과 추잡함 속에서 돈을 버는 천민인 기생보다는 나은, 떳떳한 평민이었다.
“바로 이 아이군요?” 기생이 부드러운 어조로 묻자 어머니는 웅얼대듯 대답했다. 사촌의 친구가 이 집 하인으로 일했는데, 그 덕분에 옥희가 한 달에 2원씩 받는 숙식 세탁부로 소개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녹아 땅이 진흙투성이인데 먼 길을 힘들게 걸어오셨네요.” 어머니에게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에도 여자의 시선은 옥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어 그는 구제할 길 없는 가엾은 대상을 바라보듯 긴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가느다란 눈초리는 분명 예쁘고 잘 가꾸어진 것들의 값어치를 매기는 데 익숙할 거라고 옥희는 생각했다. 자신의 윤기 없이 메마르고 갈라진 얼굴은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치다 못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리라. 마치 다리를 하나 잃어버린 채 세 발로만 다니는 개처럼 말이다.
“아주머니,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참 안타깝지만, 일이 좀 틀어졌어요. 얘기가 되고 나서도 보름 동안 아무 연락이 없기에 집안일을 도울 다른 아이를 이미 구했거든요. 하지만 이왕 이렇게 먼 길을 와주셨으니 부엌에 가서 따뜻한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돌아가시기 전에 한숨 돌리실 겸요.” 탐스럽게 땋은 머리채를 화관처럼 두른 얼굴을 양쪽으로 절레절레 저으며, 그 여자가 말했다.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은실 아씨? 저희는 분명히 전갈을 보냈는데.” 옥희 어머니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한껏 억울한 몸짓을 해 보였다. 이런 억척스러운 동작은 은실이 지닌 서늘하고 우아한 분위기와 특히 대조되어, 옥희가 보기에도 촌스럽고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큰 집에 하인 하나쯤 더 필요하지 않겠어요? 우리 옥희는 네 살 적부터 집안일을 두루 해왔답니다.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예요.”
“하인은 충분히 있습니다.” 은실이 말을 자르듯 톡 쏘았다. 그럼에도, 옥희는 그 기생이 차분한 달걀형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감지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원할 때만 입을 여는 사람 특유의 고고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원하신다면 옥희를 견습생으로 받아줄 수는 있어요.” 은실이 몸을 돌리며 단호한 태도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일시금으로 50원을 내드릴 겁니다. 만약 아이가 하인으로 일한다면 꼬박 2년을 벌어야 할 액수죠. 방과 음식을 제공하고, 훈련 비용과 의복도 무료예요. 그렇게 한두 해의 견습 기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제게 50원에다 그간의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해요. 그러고도 벌어서 남는 돈은 어머니께 얼마를 보내드리든 아이 마음이고요.”
옥희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닫았다. “나는 여기에 딸내미를 기생이나 하라고 팔러 온 게 아녀요.” 어머니는 ‘기생’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내뱉듯 말했다. ‘창부’라는 말을 가까스로 억누른 듯이. “어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한답디까? 날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시나요?”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은실은 냉정을 잃지 않고 담담히 대꾸하는 것 같았지만, 옥희는 은실의 입가 한구석이 엷은 경멸의 미소로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부엌에 가서 국밥 한 그릇씩 들고 가세요.” 은실이 돌아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아씨.” 옥희는 제 목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어머니가 입을 다물라는 신호로 어깨를 탁탁 쳤지만, 옥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 여기에 견습생으로 있을래요……. 괜찮아요, 엄마. 저 이거 할게요.”
“조용히 해. 이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만일 어머니와 옥희 단둘이었다면, 어머니는 다리를 벌려 생계를 꾸려가는 여자들에 대해 아주 신랄한 욕을 바가지로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은실이 앞에 버젓이 서 있는 당장은, 그저 아직 깃털도 돋지 않은 어린 새의 접힌 날개처럼 삐죽 튀어나온 옥희의 깡마른 어깨뼈 사이를 매섭게 후려칠 뿐이었다.
은실은 미처 말하지 못한 생각들을 듣기라도 한 양 미소를 지었다. “맞아,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너 아니?”
옥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네 살, 열다섯 살이 되어 결혼한 언니들을 둔 친구들이 신부의 첫날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준 터였다. 어색하고 불쾌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에 대해 생각하면 허벅지 안쪽이 탄탄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한 남자에게서 돈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하든 아니면 여러 남자에게서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든, 육체적인 면에서만 보자면 그리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쨌든 옥희는 한두 해 안에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될 것이었다. 아프고 모자란 아들과 짝지어 줄 신붓감을 끈질기게 찾고 있는 고향 마을 의원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옥희가 보기에도 그 아들이 가엾긴 했지만, 새나 짐승의 발톱처럼 울퉁불퉁하고 볼품없는 손을 가진 그 얼빠진 소년과 결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길이든 더 나을 것 같았다. 만일 그와 혼인한다면, 사실상 그의 아내가 아니라 그를 돌보는 누나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그의 엄마 역할까지 해주어야 할 것이다.
50원은 의원이 줄 수 있는 돈의 곱절보다도 많았고, 꽤 많은 일을 해낼 종잣돈이 될 수 있었다. 영지 주인에게서 작은 땅 한 뙈기를 살 수도 있고, 젊은 수탉과 건강한 암탉들을 들여와 병아리들을 키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 나면 식구들이 저녁을 굶은 채로 잠자리에 드는 일은 결코 없겠지. 남동생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막내 여동생은 나중에 평판 좋고 유복한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을의 그 누구도 옥희가 기방에 팔렸다는 사실을 몰라야 했다.
옥희는 눈물조차 말라버릴 정도로 지친 어머니의 어두운 눈동자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이 비치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은실이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는데도 어머니는 뿌리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절에 갇혀 자라난 여자아이도 기생이 되려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에요.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더 흔하긴 하지만요. 옥희가 결국 이 길을 걷지 않을 운명이라면, 비록 기방에서 자란다 해도 충분히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은실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건 제 손을 떠난 문제예요.”
은실의 집에 오기 전까지, 옥희는 단 한 번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세숫대야에 담긴 물 위로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모습은 딱히 허영심을 부풀릴 만한 형상이 아니었다. 윤기 없이 보송한 그의 피부는 양초의 밀랍처럼 연한 노란빛을 띠었다. 검은 깃털처럼 숱 많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두 눈은, 작았지만 초롱초롱 밝게 빛났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면 왼쪽 눈동자가 미세하게 중심을 벗어나 곁눈질하듯 바깥을 향해 있었는데, 이러한 특징이 옥희의 얼굴에 어딘가 물고기 같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동그란 입술은 굳이 연지를 칠하지 않아도 붉은색을 띠었다. 약간의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그렇게 웃을 때마다 확연히 비뚤어진 앞니가 드러나지만 않았어도 매우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옥희의 외양에는 특출 나게 어여쁜 여자아이에겐 속하지 않을 특징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결론적으로, 옥희는 평범함과 예쁘장함 사이의 딱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어린 소녀였다. 그러나 정작 옥희 자신은 제 외모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전반적으로 아름다움을 탐탁지 않은 것으로 대한 탓이었다.
옥희의 어머니는 또한 어린 여자아이를 지나치게 교육하는 것도 해롭다고 여겼다.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다 같이 한 방에서 공부하는 마을 서당에 고작 1년 정도 다닌 것이 옥희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옥희는 어머니가 흡족해할 만큼의 단순한 계산과 기초적인 글자 읽기 이상의 것을 배웠다.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옥희는 자신이 아궁이나 괭이처럼 순종적인 살림의 일부라고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의 유입으로 위축되는가 하면 확장되기도 했으며, 자신이 느끼기 시작한 어렴풋한 불만스러움에 스스로 놀랐다. 물론 이것이, 애초에 배움이 그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진 이유였다. 만약 옥희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면 어머니는 훨씬 더 자주 그를 꼬집고 때렸을 것이다. 손찌검에 대한 두려움은 심지어 어머니와 헤어지는 순간에조차 옥희의 눈물을 한층 가라앉혔다. 그러한 서글픔이 과연 어머니를 기쁘게 할지 아니면 화나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은실을 따라 1층 마루를 종종걸음 치는 동안 옥희는 내내 입을 다문 채 다소곳했다. 하지만 집 전체가 은밀하게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 부르는 듯해, 옥희는 50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 만들고 진사로 붉게 칠한 그 기둥들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옥희가 지나칠 때마다 처마 아래 매달린 비단 등불들이 춤을 추듯 흩날리는 모습에서 고요한 정적과 움직임이, 인공성과 자연미가 묘하게도 동시에 느껴졌다. 그 황홀한 분위기가 이 집 전체에 감돌고 있다고, 옥희는 복도로 인도하는 은실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무엇보다 은실에게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은실 아씨처럼 구름 위를 사뿐사뿐 미끄러지듯 걷는 사람을 옥희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발이나 발가락처럼 낮고 미천한 부분이 그 몸에 달려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옥희는, 여자 본연의 아름다움을 은실처럼 잘 보여주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게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사람처럼 화사하게 미소 짓고 말했으며,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옥희보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은실이 매끄러운 걸음을 멈추더니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여기가 음악 교실이란다.” 은실이 말했다. 네 벽 모두 화려한 그림의 병풍으로 장식된 커다란 방이었다. 한편에서는 아주 어린 소녀들 열두어 명이 나이 든 기생의 선창을 따라 한 줄씩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며 전통 가요를 배우는 중이었고, 그 맞은편에서는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가야금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아이들은 1학년 견습생이야. 2학년이 되면 가야금과 대금, 그리고 여러 종류의 북과 장구를 배우게 될 거다. 기생이 되려면 반드시 숙달해야 하는 다섯 기예 중 두 가지지. 가창과 악기 연주 말이다.” 은실이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 가창 연습을 하던 소녀 중 한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 쪽으로 냅다 달려왔다. 은실이 언짢게 미간을 찌푸리는 소리가 옥희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엄마, 얘는 누구예요?” 소녀의 말에 옥희는 깜짝 놀란 기색을 감추려 애썼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을 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소녀는 우아한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아 보였다.
“선생님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수업을 빠져나와선 안 된다.” 은실이 엄하게 말했고, 그제야 옥희의 머릿속에 제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 세상 어디에 어머니가 화난 얼굴로 딸을 맞이하지 않는 곳이 과연 있을까?
“수업은 이제 금방 끝날 건데요.” 아이가 졸라댔다. “새로 온 애예요? 내가 얘 데리고 여기 안내해 줄까요?”
은실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야 할 더 중요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럼 가보라고 두 아이에게 손등을 흔들어 보였다. 소녀는 살갑게 옥희의 팔짱을 끼고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난 연화라고 해. 네 덕에 수업 빼먹었네, 고마워.” 소녀가 키득거렸다. “네 이름은 뭐야?”
“옥희.”
“예쁜 이름이다. 그 정도면 너는 새로 바꾸지 않아도 될 거야.” 연화가 또 다른 장지문을 열며 말했다. 먼젓번 방보다 약간 작은 방이었고, 학생들 무리가 한편에서는 수채화를, 다른 편에서는 서예를 연습하고 있었다.
“기생이 갖춰야 할 다섯 기예에 대해 엄마가 얘기해 줬니? 이게 세 번째랑 네 번째야. 그림과 시가……. 여기서 우리는 국어, 일본어, 산수도 배워. 한 달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데, 모든 과제를 바르게 이행하지 못하면 그달에 배운 내용을 되풀이해야 해.”
“일본어랑 산수도 배운다고?” 옥희는 당혹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럼, 특히 그 두 가지가 중요해.” 연화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학년 진급 시험서 낙제해서 한동안은 복습해야 돼. 그러니 너랑 같이 수업 들을 수 있겠다!”
연화가 키득거리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옥희도 웃으며 숨 가쁘게 그를 따라갔다. 거기서, 연화는 옥희가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큰 교실로 옥희를 데려갔다. 텅 비어 있는 그 방의 잘 닦인 나무 바닥은 세월에 닳아 반들반들 윤이 났다. 벽에는 형형색색의 예복과 가면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가죽을 늘려 만든 장구와 다른 악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 방은 기생의 다섯 번째 기예인 춤을 배우는 곳이야. 춤은 2학년이 되어야 배우기 시작해.” 연화가 말했다. “우리 교실 건물은 이게 다야. 이제 자는 곳을 보여줄게.”
여자아이들이 모여 자는 숙소는 교실 건물 뒤에 있는 단층 별당이었다. 둘이 1학년 견습생 숙소로 향하는 안뜰을 지나가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부엌 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몸에 걸친 값나가는 의복이며 손에 쥔 쌀엿 한 조각을 한가롭게 즐기듯 음미하는 태도에서, 옥희는 이 아이가 한낱 하인 신분이 아님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이가 그들을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언니야. 월향 언니.” 연화가 속삭였다. 월향은 누가 봐도 그 어머니의 딸이었다. 강물에 비친 달이 그 원형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은실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새로 온 애가 너구나.” 월향이 표범 꼬리처럼 굵고 탐스럽게 땋은 댕기 머리 끝자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월향의 예쁜 얼굴이 그야말로 환한 빛을 발하는 듯해서, 옥희는 그 밝은 형태의 한 조각씩만 간신히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코가 있고, 그 아래 입이 있고.
“응, 난 옥희야.” 옥희가 수줍게 웃으며 답하자 월향의 웃음소리가 빛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넌 이가 그렇게 삐뚤어지지만 않았어도 꽤 예쁜 얼굴이었을 텐데. 이 난 꼴이 꼭 반쯤 쓰러진 비석 같다.” 언니가 짓궂게 놀려댔다.
“그러는 언니는 머리가 비석 같잖아.” 연화가 단칼에 받아쳤다. 하지만 덜컥 솟구친 분노로 붉어진 안색도 월향의 아름다운 얼굴에 일말의 흠집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사춘기를 맞아 예민한 성정을 내비치는 황후의 모습으로 바꿔놓을 뿐이었다. 외모는 엄마를 똑 닮았어도, 어린 월향은 감정의 표현이 더 활기차고 가혹했다. 자신보다 불우한 이들을 자로 잰 듯한 깍듯함으로 대하는 은실의 친절한 면모는 그 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넌 망나니야. 그러니까 아무도 널 예뻐해 주지 않지, 엄마까지도 말이야.” 월향이 말했다. 동생은 그저 언니가 경멸 가득한 눈길을 자신에게서 완전히 돌리기 전까지 맞서 쏘아보기만 했다.
그날 밤 옥희는 이부자리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기생이 되는 건 둘째치고, 다만 한 달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아마 은실은 결국 그를 하인으로 부리게 될 터였다. 심지어 지금도 이 집의 위계질서 속에서 이미 옥희는 하인의 위치와 그리 멀지 않았으며, 그런 점에서 월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별로 상서롭지 못한 시작이었다. 보아하니, 나이 많은 선배 학생들과 기생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이곳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인 듯했다. 그 밖에도 다른 수많은 암묵적 규칙들과 기대가 작용하고 있으며, 은실이 명실공히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수장임을 옥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곧 이곳의 주인인 은실이 그러한 위치와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은실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훈계만 아득히 읊어대는 신비한 존재도 아니었다. 나이 많은 선배 기생들에게 불손하게 행동한 어린 견습생들을 따끔하게 처벌하는가 하면, 공연한 입소문이나 퍼뜨리고 기방에 내야 할 수입을 몰래 숨기는 기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추궁했다. 월경혈로 얼룩진 이부자리, 도둑맞은 비녀, 누군가 꾸준히 한두 숟가락씩 훔쳐 먹어 비어가는 꿀단지까지, 은실의 주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사소하고 잡스러운 문제에 개입하여 온갖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그는 17세기의 그림 속에 묘사된 백옥 같은 미인처럼 은은한 태도를 유지했고, 언제나 무심하고 공정한 모습이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과 의식적으로 취하는 품행 양쪽에서 은실이 아주 오래된 골동품을 연상시키는 그만의 우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것을, 옥희는 그의 모든 측면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가발을 함께 엮어 머리에 얹은 커다란 왕관 형태의 가체도, 다른 여자들이 썼다면 너무 구식이거나 살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은실에게는 그런 모습이 곧 흘러간 과거의 낭만적인 향수와 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었다.
첫 두 달이 지나가는 동안 저택의 주인이 옥희를 따로 칭찬하거나 알아봐 준 적은 거의 없었다. 옥희에게 그 어떤 관심이라도 보인 유일한 사람은 그 자신 또한 이곳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연화뿐이었다. 연화가 제 언니와 싸울 때마다 은실은 언제나 월향의 편을 들었다. 어머니의 눈으로 본 연화는 게으르고 의뭉스럽고 성급한 아이인 반면, 월향은 잘못을 할 수 없는 완벽한 딸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연화는 마치 벽 뒤에 몰래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할퀴어대는 고양이처럼 끈질기고 교활하게 월향 언니를 공격하곤 했다. 하지만 옥희에게만은 기꺼이 날카로운 발톱을 거두는 연화였다. 그저 머리를 스치는 생각들, 잘 모르면서 얼핏 들어보기만 한 것들에 대해서도 연화는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유행하는 옷차림, 평양과 경성 등지에 떠도는 소문, 남자들의 유형, 여자들의 유형, 또 그들에게 금지된 별당의 특정한 문들 뒤에서는 벌어지는 일까지. 연화가 남자들에 대해 품고 있는 노골적인 관심에 옥희는 충격을 받았다. 연화의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용모가 예쁘지 않은데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연화는 남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밋밋하고 둥글넙데데한 얼굴을 가졌다. 평양 미인의 원형이라 불릴 만큼 갸름하고 섬세한 얼굴선이 돋보이는 제 어머니와는 딴판이었다. 그 전까지 옥희는 외모가 매력적인 여자일수록 관능적인 욕망도 더 강하리라 생각했지만, 이제 반드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연화와 가까운 친구가 되고서는 옥희의 생각도 바뀌어, 넘치는 성적 욕망이 어떤 기벽이 아니라 그저 자질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제는 친구의 얼굴도 못생겼거나 밋밋하기보단 독특하고 흥미로워 보였다. 무엇이든 과장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연화만의 재능의 진가도 인정하게 되었다. 연화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마치 하늘에 나타난 별똥별처럼, 이 세상에서 오직 그와 옥희 두 사람만 증인이 되어 지켜보는 예기치 못하고 신비로운 현상처럼 들리게 할 수 있었다. 옥희는 끝없이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연화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는데, 그 사이에 적절한 균형점이 자리했기에 둘은 완벽한 단짝이었다. 연화는 규칙을 어기는 일에도 대담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베개를 층층이 쌓은 뒤 까치발을 하고는 장롱 꼭대기로 손을 뻗어 은실이 혼자 먹으려고 감춰둔 꿀단지를 태연하게 끌어 내렸다. 옥희가 놀라움 속에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은실이 들어와 현장에서 연화를 검거했다. 벌을 받느라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채 한쪽 발로 서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에도 연화는 제 어머니 뒤에서 장난스레 사팔뜨기 흉내를 내거나 혀를 빼물어 옥희를 웃게 했다.
옥희를 끔찍이도 두렵게 했었지만 어쩐 일인지 심지어 일본어 과목까지 무사통과한 첫 월말 시험을 치르고 나서, 연화는 옥희가 내내 묻기 어려워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왜 월향 언니와 연화는 자매간에 그토록 서로 닮지 않았는지.
“엄마가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가 월향 언니 아버지야. 엄마는 열아홉에 그분을 만나셨대. 아직도 그 남자가 준 반지를 끼고 있는걸. 그동안 다른 손님들도 모셨지만, 그 반지만은 몇 년이 지나도록 절대 뺀 적이 없어.” 연화가 말했다. 옥희는 은실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은가락지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은실이 지닌 다른 보석들처럼 값비싸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묵직하고 단아한 아름다움 때문에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
월향이 비극적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라면, 연화는 어느 부주의한 손님 때문에 남겨진 사고에 불과했다. 은실이 작은딸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옥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연화는 은실의 일생에서 은실의 뜻을 거슬러 발생한 유일한 존재였다. 은실 같은 여자마저 행복하지 못한데, 하물며 옥희 자신이 그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스물다섯이 넘은 기생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을 들었고, 서른이 넘은 경우엔 노기老妓로 통했다. 그 나이가 되기 전까지 누군가의 첩이나 부인, 혹은 직접 기방을 운영하는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흔한 창부나 다름없는 상태로 남기 마련이었다. 자연스럽게, 은실의 기방에 있는 나이 찬 기생들은 주름이 쪼글쪼글한 지주들이나 늙어빠진 은행가들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지는 연기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남성과 여성 양쪽에서 공모하는 일종의 유희였다.
평범한 수준의 용모를 지닌 기생으로 지역 기적妓籍에 공식적으로 입적하기까지 불과 몇 년을 앞둔 지금도, 옥희로서는 금니 사이에서 끔찍한 구취를 풍기는 늙다리 지주와 잠자리를 한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꿈꾸는 건 시를 사랑하는 젊고 잘생긴 귀인들이었다. 은실에게 듣자니, 역사상 널리 사랑받았던 시대 최고의 기생들은 시가를 나누는 서신 교환을 통해 가장 고귀한 신분에 속한 양반 나리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곤 했다. 글을 쓰는 재주가 어찌나 빼어난지, 때로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서간 필담만으로도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뜨거운 열정은 종종 육체적으로 맺어지기도 했지만, 평생 안타까운 그리움만을 불태우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옥희는 곧잘 이런 낭만적인 연애담에 대한 몽상에 빠져, 그 엇갈린 사랑에 공물을 바치듯 달콤한 한숨을 내쉬곤 했다. 아마도 이것이 예전에 어머니가 교육이 끼치는 해악에 대해 경고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