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케네디Margaret Kennedy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1896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총 15편의 소설과 문학 비평을 발표했고 제인 오스틴의 전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1924년 두번째로 발표한 장편소설 『The Constant Nymph』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 작품은 수차례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21세기 들어 『휴가지에서 생긴 일』과 『Lucy Carmichael』 『The Midas Touch』가 복간되는 등 영미 문학계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작가의 아홉번째 소설인 『휴가지에서 생긴 일』은 1937년 기독교의 일곱 가지 대죄를 현대적 인물로 형상화하여 각각 단편소설을 써보자는 케네디와 친구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죄에 대한 오래된 질문에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더해진 이 작품은 1949년 『레이디스 홈 저널』에 「Never Look Back」이라는 제목의 축약된 형태로 처음 게재된 후 이듬해 정식으로 출간된다. 『휴가지에서 생긴 일』은 2021년 영국에서 재출간된 이후 지금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옮긴이 박경희
독일 본대학교에서 번역학과 동양미술사를 공부하고, 번역가로 일하며 한국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 넬라 라슨의 『패싱』, 닉 혼비의 『슬램』,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 루트 암만 외 『내면의 그림』,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등이 있다.
디자인 표지 김현우 본문 이원경
THE FEAST
By Margaret Kennedy
Copyright © The Estate of Margaret Kennedy, 1950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Bokbokseoga. Co., Ltd., 2023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e arranged with Faber & Faber Ltd. through EYA(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Eric Yang Agency)를 통해 Faber & Faber Ltd.와 독점계약한 복복서가(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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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주석은 모두 옮긴이주다.
2. 본문 중 고딕체나 볼드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나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이다.
마고 스트리트에게
장례식 설교
1947년 9월에 록스턴 세인트프라이즈와이드의 제럴드 세던 신부는 매년 그래왔듯 콘월 북부 세인트소디의 새뮤얼 봇 신부를 방문했다.
오랜 벗인 그들은 둘이 함께 보내는 이 휴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봇은 어딘가로 떠날 형편이 못 되지만, 세던이 찾아와 머무는 동안엔 긴장을 풀고 제법 휴가 기분을 내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 입는 수단 대신 해묵은 플란넬 바지와 스웨터로 갈아입고 절벽을 따라 조류 관찰 탐험에 나선다. 저녁에는 체스를 둔다. 둘 다 오십대 후반으로 앵글로가톨릭주의자*에 독신이고, 당혹스러울 만큼 진지하다. 그들은 여전히 교구민에게 ‘신부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개신교도와의 충돌을 젊었을 때만큼 즐기지는 않는다. 봇 신부는 다부진 체격에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털이 많다. 스코티시테리어와 닮은 데가 있고, 세인트소디 교구에서 인기가 없다. 세던 신부는 목살이 처진 음울한 블러드하운드를 연상시킨다. 그의 삶은 한층 힘겹고 더 팍팍하지만, 교구민의 인정을 받고 있다.
* 성공회 복음주의가 18세기 이래 개인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자유주의사상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써 19세기 초의 영국국교회에서는 교회 관념이 희박해지고 교회를 경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에 대항해 고교회측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옥스퍼드 운동(1833년)이며, 그 신학적 입장을 앵글로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라 부른다. 신적 권위에 대한 개인의 순종을 강조하고, 예배에서 의식적(儀式的) 요소와 고대의 것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어 의식주의(儀式主義)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세던 신부는 저녁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체스판을 꺼낸다. 런던에서는 저녁이면 사교클럽과 선교관을 전전하기 일쑤이므로, 그는 매번 이 느긋한 휴식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므로 1947년, 도착한 당일 저녁에 친구가 체스판을 치우라고 하자 그는 다소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저녁엔 체스를 둘 수 없어.” 봇이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설교문을 써야 해서 말이야.”
세던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교문은 미리 다 써놓아야 하는 게 그들 휴가의 규칙이었다.
“예정에 없던 설교라네. 나도 오늘 오후까지 마쳐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더라고.”
“별일이네.” 세던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음…… 장례식 설교인데……”
봇은 책상 앞으로 가서 타자기 뚜껑을 열었다.
“평범한 장례식이 아니야.” 그가 불평했다. “사실 딱히 장례식이라고 볼 수도 없지. 고인들을 묻어줄 수가 없으니까. 이미 묻혔거든, 절벽 아래……”
“오, 펜디잭만灣 말인가?”
세던 신부는 평소 신문을 읽을 여유가 없었지만, 친구의 교구에서 일어난 일이니만큼 그 사건은 기억했다. 8월에 갑자기 절벽 한쪽이 크게 무너져내린 일이 있었다. 붕괴한 절벽이 세인트소디에서 몇 마일 떨어진 작은 만을 덮쳐 동쪽 곶에 세워져 있던 저택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기뢰 때문이었다지?” 세던이 물었다. “기뢰가 파도에 휩쓸려 저택 뒤편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고?”
“부분적으로는. 하지만 몇 달 전의 일이었네, 기뢰는.” 봇이 말했다. “지난겨울이었지. 동굴 내부에서 터졌고 피해도 없는 걸로 보였어. 다들 그 집 큰일날 뻔했다고 그랬지. 거기가 호텔이었거든. 개인 소유 저택을 게스트하우스로 바꿔 운영하고 있었다네. 절벽 바로 아래 동굴이 있었지. 기뢰가 폭발할 때 동굴 안쪽 암석이 산산조각나면서 단애면의 상당 부분이 느슨해진 것 같더군. 나중에 절벽 꼭대기에서 내륙 쪽으로 100야드 정도의 균열이 발견됐어. 험프리 베빈이라고 저 너머 팰머스 근방에 사는 측량 전문가가 있는데, 소식을 듣고 다녀갔지. 그의 의견은 두 가지였어. 무너질 거였으면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균열이 커지면 저택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이사를 하는 게 낫겠다. 그렇게 시달에게 편지를 썼다네. 시달은 호텔의 소유주였어.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지. 그 일과 관련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제는 절벽 아래 누워 있다네.”
“자네 말은 피해자 모두가 아직 거기 묻혀 있다는 건가?”
“끌어낼 방법이 없어. 자네가 현장을 봐야 해. 못 알아볼 거야. 이제 만은 존재하지 않아. 아무도 거기에 저택과 정원과 마구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런 끔찍한 의식을 치러야…… 일단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 최대한 사망자들 가까이…… 험한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지. 내키지는 않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 우리한테는 최대한 고인들에게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줄 의무가 있으니까. 사망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자는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은 벌써 끝났을 텐데. 내일이네. 내가 자네라면 얼른 자리를 피할 걸세. 사방에서 기자들이 몰려오고, 구경꾼들이 타고 온 자동차로 발 디딜 틈이 없을 텐데…… 나더러 거기서 설교하라니!”
봇은 타자기 앞에 앉았다. 본인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악필인 그는 언제나 타자기로 설교문을 작성했다. 하지만 타자기로 썼다고 해서 꼭 잘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타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으니까. 그는 페이지 상단에 q를 타이핑하려다 실수로 1을 누른 후, 다시 주의를 집중해 윗글자 걸쇠와 1을 동시에 눌러 q를 타이핑했다. 그런 다음 대문자키를 누르고 제목을 썼다.
불가항 력ACTOF GOD
그리고 이십 분이 흘렀다. 세던은 본격적으로 체스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벽난로 위 선반의 싸구려 자명종 시계가 분주히 째깍거렸다.
봇은 압지를 대고 그림을 그렸다. 먼저 돌고래를 그렸다. 다음에는 휘어진 기둥머리를 그렸다. 그러고 나서 바다 쪽으로 돌출된 펜디잭곶을 그렸다. 그것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에서 먼 쪽에. 수백 수천 년 동안 그래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지러이 굴러다니는 바위와 암반, 새로운 단애면이 동쪽 해변에 나타난 것은 겨우 한 달 전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릴 수 없었다. 어떤 형태로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몇 주 동안 무슨 생각을 하든 결국에는 어지러운 돌소리와 몸서리치는 공포가 그의 사고를 가로막았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인지 보러 달려내려갔을 때 길이 막혀 있었던 것처럼. 마을 사람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무너지는 절벽의 포효와 굉음을 들었다. 들판을 달려가며 펜디잭 호텔이 ‘사라졌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폐허, 소음, 혼란, 비명, 시체 같은 것을 발견하리라 예상했다—그가 본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공포를.
그들이 언덕을 내려가 절벽으로 갔을 때 숨막히는 먼지구름이 눈앞을 가렸다. 호텔 진입로는 작은 계곡 옆의 나무와 덤불 사이로 곤두박질치듯 지그재그로 깊숙이 갈라져 있었다. 두번째 모퉁이를 돌아 바윗더미와 마주치기 전부터 이미 절벽 아래의 고요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눈앞에 언덕이 솟아 있었다. 더는 길이 없었다.
처음에 그는 무너진 바윗돌 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생각해 훌쩍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결국 발길을 되돌려 바위를 쓰러뜨리고 피하며 진입로로 다시 올라갔고, 철쭉으로 둘러싸인 작은 샛길을 통해 탁 트인 절벽 위에 도달했다. 거기서, 아직 먼지가 자욱한 달빛 속에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 있었다. 무너진 절벽이 만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호텔도, 건물이 서 있던 곶도, 그곳에 있던 어떤 것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 조수가 벌써 새로 떨어진 바위 주변을 부드럽게 핥았다. 해안선은 새로운 형태를 받아들이고, 절벽은 태곳적의 고요한 단단함을 되찾았다.
봇은 한숨을 내쉬며 줄을 그어 제목을 지우고 새로운 문구를 써넣었다.
너희는 가만 히있어 내가 하니님 되 ㅁ을 알ㅉ어다.
“잘 안 써지나보군.” 세던이 바라보며 말했다.
“무서웠네.” 봇이 중얼거렸다.
그가 썼다.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도 공포스러워.”
“그래도 1941년의 런던 대공습만 할까.” 세던이 말했다.
“알지.”
봇이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밤바람이 선선했다. 그는 교회 첨탑을 둘러싼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별이 없는 어두운 하늘에서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 머지않아 나뭇잎은 떨어져 무덤 위로 흩어질 것이고, 시들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는 강한 겨울바람에 교회 벽을 때리며 새잎이 돋을 때를 기다릴 것이다. 한 주, 한 달, 시간이 흐르고 그 여름밤의 기억은 점점 먼 과거가 되어갈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며 봇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는 생각했다. 봄이 온다는 것 말고는.
“생존자들이 이곳에 왔었네. 사고가 난 첫날밤에 와서 재워달라고 하더군.” 봇이 말했다.
“생존자가 있었나?”
“아, 그렇다네. 그들이 이리로 와서 이야기했지. 여기 앉아서 밤새 이야기를 하더군. 충격받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평소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말이 새어나오지. 그들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했어. 어떻게 모면했는지 말해줬고……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 듣지 않는 게 나았을 거야.”
“그들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봇이 창가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내 생각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거든.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어. 완벽한 진실은 영영 아무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한 이야기는……”
그는 벽난로로 다가와 세던을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들어보게나.” 봇이 말했다. “그리고 자네 생각도 한번 정리를……”
1. 레이디 기퍼드가 시달 부인에게 쓴 편지
1947년 8월 13일
첼시 퀸스 워크,
올드 하우스
친애하는 시달 부인,
우리가 펜디잭에서 보낼 휴가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진즉에 편지로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 인사가 늦어졌군요. 하지만 남편이 방을 예약했던 봄에는 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편지를 쓸 수 없었답니다. 지금은 훨씬 좋아졌고요. 의사가 가을에는 맹세코 제 몸을 완벽히 낫게 해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16일 토요일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이들은 기차로 갈 터라 차로 마중나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열차와 도착역 등을 남편의 비서가 알려드릴 겁니다. 저는 남편과 승용차로 내려가려 하는데, 가능하면 티타임과 저녁식사 사이에 도착하려고 해요. 하지만 우리가 늦어질 경우, 죄송하지만 아이들을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해주시겠어요? 아이들은 여행 끝에 지치고 들떠 있을 거예요.
부인과 저의 지인인 시빌 에이버리에게서 펜디잭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요. 일반 호텔보다 훨씬 훌륭하다죠, 특히 아이들에게. 시빌 말로는 댁에도 사내아이들이 있다던데, 나이는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아직 취학 전 연령이라면, 마이클과 루크는 식당에서 소란을 피울 수도 있으니 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게 좋을 듯하네요. 저는 아무래도 위층에서 따로 식사를 해야 할 테니 아이들을 감독하지 못할 거예요. 너무 번거로운 부탁일까요? 물론 제 식사는 남편이 직접 가져다줄 겁니다. 제가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해서요. 하지만 제 주치의가 식사중에 안정을 취하라고 너무 강조하고—저는 끔찍한 소화불량을 앓고 있는데 의사의 소견으로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라네요—먹는 동안 생각도 말도 너무 많으니까 정말 혼자 먹는 게 낫죠.
시빌이 제게 전하길 개인 소유의 농장이 있으시다고요. 그럼 저의 식이요법에 따른 식단을 준비하기가 훨씬 수월하시겠네요. 일반 호텔에서는 어려움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환자를 고려하지 않으니까. 정말 별것 아니지만, A. 의사가 먹어도 좋다고 한 것과 B.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을 여기 적어두겠습니다.
A. 가금류, 야생 고기, 신선한 정육, 간, 콩팥, 송아지 췌장 등, 베이컨, 혀, 햄, 생채소, 채소 샐러드, 신선한 달걀, 우유, 버터 등. 보다시피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B. 가공육, 두 번 가열한 고기, 마가린, 통조림류, 분말계란, 분유 등과 절인 쇠고기.
귀찮은 세부사항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건 캐럴라인이 태어난 이후로 저의 신진대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데다 런던의 할리 스트리트를 통틀어 제 병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는 의사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귀찮은 일만 아니라면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성가시게 구는 건 질색이지만, 환자이다보니 폐를 끼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하지만 이해해주리라 생각해요. 시빌한테서 부인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리고 손님을 얼마나 잘 보살펴주는지 들었습니다. 펜디잭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새로 태어날 거라고 장담하더군요. 그리고 위층에서의 식사에 관해서입니다. 당연히 이 어려운 시기에 모든 손님에게 저와 같은 음식을 제공할 수는 없을 터이니 제 식사가 다른 손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호텔 입장에서도 나을 듯싶네요. 사람들은 이따금 무척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부족하니까요.
오래 살아온 아름다운 저택을 지키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해내신 것이 너무도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는 서퍽에 있는 시골 별장을 포기해야만 했답니다. 하인이 없어요! 편안하고 좋은 것은 모두 사라진 세상이 아닌가요?
아, 그리고 고양이 괜찮으세요? 히비가 키우는 고양이를 데려가겠다는데 제가 마음이 약해서 말리지 못하겠어요. 제가 아이들 버릇을 망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시빌이 저의 기막히고 슬픈 사연을 들려드렸겠지요! 원래 저는 아이를 열두 명은 낳고 싶었는데 캐럴라인을 낳고서 더는 갖지 못했어요! 하지만 캐럴라인이 외동으로 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을 입양하게 되었죠. 원치 않게 세상에 태어난 불쌍한 아이들 가운데서요.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어머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애들이 태어나 맨 처음 겪은 그 끔찍한 불운을 보상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히비는 열 살, 쌍둥이 사내아이들은 여덟 살입니다.
생각해보니 생선을 깜빡했네요. 훈제 청어 말고는 다 먹어도 돼요. 하지만 가자미랑 해덕은 그리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버터를 듬뿍 넣은 경우가 아니라면. 게와 바닷가재도 금기가 아니니 편하실 줄 압니다. 항상 넉넉히 구할 수 있는데다 못 먹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뵙게 될 날이 기다려지네요. 온종일 호텔 관리만 하지 않고 저와 종종 수다를 떨 정도의 여유는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인과 제 친구가 많이 겹치는 듯하거든요.
그래컨소프 집안을 아실 테지요. 저는 베로니카를 너무 좋아하는데, 건지섬으로 이사를 가서 너무 서운해요. 하지만 조만간 소득세가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거기서 살게 되겠죠.
진심을 담아
감사의 안부를 전하며,
에이린 기퍼드 드림
추신—제 남편이 골프를 칠 만한 곳이 있을까요?
2. 거트루드 힐에게 보내는
도러시 엘리스의 쓰다 만 편지
1947년 8월 16일 토요일
포스메린,
펜디잭 매너 호텔
보고 싶은 거티,
어제저녁에 너의 엽서를 받았어. 네 편지도 잘 받았는데, 여태 답장을 안 썼다고 화내지 않으면 좋겠어. 여기 온 후로는 말 그대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바빴으니까. 네가 편지로 했던 질문에 대해서라면, 여기 오는 건 추천하고 싶지 않아. 변변치 못한 나와 달리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야—요리사는 어디서나 구하잖아. 주방의 열기를 감내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곳에 있지 않을 거야—여긴 사람들도 별로인데다 지저분하고 내가 본 중 최악이야. 나도 다른 일자리를 찾는 대로—구인광고를 보고 여러 곳에 지원했어—그만둘 생각이야. 물론 여기로 오는 바람에 이번 시즌 최고의 일자리들은 놓치고 말았지—주인 여자가 그럴듯하게 나를 속여서 여기 붙들어뒀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필요한 건 객실 책임자가 아니라 만능 하녀거든—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혼자 일을 도맡게 될 판이라니까.
여긴 정식 호텔도 아니고 그냥 게스트하우스에 불과해—무너지기 직전에다 지붕까지 새는 걸 보면 수년 동안 손보지 않은 게 분명하고 욕실도 하나뿐이야. 재산을 다 잃은 여주인이 꿈도 야무지게 이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여하튼 사랑하는 아드님들이 그 상류층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니까. 호텔 경영에 대해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는 여주인이 이 거대한 저택 살림을 꾸려가는 모양새를 보면 내가 미칠 지경이야—여건만 되면 나도 찻집 정도는 차릴 수 있을 텐데.
주인 남자는 내가 보기에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말고는 평생 손가락 한번 까딱 안 해본 사람이야—잠은 하인이 쓰던 골방에서 자고, 집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 지난주에는 한 가족이 이곳에 머물렀어. 버그먼이라고 ‘최상류층’은 아니고 그냥 아주 평범한 사람들. 버그먼 씨가 물이 뜨겁지 않다고 불평하니까—사실이 그래—여주인이 와서 휙 둘러보고는 제리—이 집 첫째 아들—가 들어오면 보일러를 수리하도록 시키겠다고 했어. 아니 이런, 지금 당장 직접 해주시죠, 시달 부인. 누가 보일러를 고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니, 버그먼 씨가 말했어, 난 일주일에 6기니를 내고 있소, 당신이 아니라 내가 쉬려고 말이오. 그때 여주인의 얼굴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난 잘 웃는 편이 아닌데도—웃을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그냥 복도에 비켜서 있었어. 사회주의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해도 아쉬운 대로 부자들을 끌어내리기는 한 거지.
호텔이 포스메린 시내와 상점가에서 수 마일 떨어져 있으니 당연히 일할 사람도 구할 수 없어. 소위 파출부와 좀 덜떨어진 젊은 남자를 웨이터랍시고 고용한 게 다야. 요리사를 구할 때까지는 여주인이 직접 요리를 해야 해. 지금 당장은 손님이 없어, 페일리라는 지루한 노부부 말고는—오늘 저녁에 두 가족이 새로 온다고는 하지만.
거티, 여덟시가 다 되어가니 편지는 나중에 마무리해야겠어. 창밖에 파출부 낸시벨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오는 게 보여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 가만두면 아무것도 안 하거든. 자고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했으니!……
3. 페일리 씨의 일기장에서 발췌
8월 16일 토요일, 펜디잭
나는 오전 다섯시부터 내 방 창가에 앉아 바닷물이 빠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어리고 예쁜 객실 종업원이…… 그녀의 이름은 잊었다…… 펜디잭곶의 절벽 오솔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녀는 매일 아침 썰물 때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같은 길을 걸어온다. 벌써 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나보다.
아내는 자고 있다. 그녀는 저 종업원이 우리가 마실 찻잎과 뜨거운 물을 가져온 다음에야 일어난다. 그러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짧은 휴식은 곧 끝난다. 아내가 일어나면 난 혼자가 아니니까.
아내는 내가 왜 밤의 절반을 여기 앉아서 지새웠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더는 질문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지내든 이제 관심이 없다. 내 곁에서 침묵 속에 삶을 흘려보내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끔찍한 삶이겠지만, 나는 그녀를 도울 수 없다. 적어도 그녀는 잠은 잘 수 있다. 나는 아니다. 종업원은 이제 모래사장에 닿았지만 매우 느리게 걷는다. 젊고 우아한 아가씨다. 걸음걸이가 보기 좋다. 아내는 저 종업원을 꽤 좋아하는 듯하다. 하긴 아내는 항상 젊은 아가씨에 대해 감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죽은 우리 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모성 본능이란 순전히 동물적이다. 새끼를 잃은 고양이에게 강아지를 데려다 젖을 물리면 상당히 흡족해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어제 나는 호텔 주인인 시달과 얘기를 나눴다. 그는 예전에 펜디잭만이 헬스 키친Hell’s Kitchen이라고 불려서 아들들이 이 저택을 지옥 호텔로 부른다고 했다. 나는 농담으로 여기고 웃어넘겼을 뿐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지옥이다! 내가 벗어날 수도 없는. 하지만 이 문장, 이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결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능하다면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나? 이따금 나에게 그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은 여행한다. 나는 머문 채로…… 내가 있는 곳으로.
시달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별난 사람이다. 다른 피조물에 대한 감정이 내게 남아 있다면 그를 매우 동정할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가진 돈을 모두 날려 아내에게 기대어 살아야만 한다—아내가 손에 쥔 빵을 얻어먹으며. 그는 여기서 맡은 역할이 없다. 아무도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듣자 하니 그는 과거에 하인이 기거했던 주방 뒤 골방에서 지낸다고 한다. 이 저택의 제일 좋은 방들은 물론 손님을 받기 위해 비워두었다. 시달 부인은 어디 다락방 같은 데서, 그리고 시달의 아들들은 마구간 위층에서 잔다고 한다.
시달은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디는 걸까? 하인용 골방에서 잠을 자야 한다면 어째서 아내도 그곳에서 그와 함께 자라고 말하지 못할까? 나라면 어쨌든 그럴 것이다. 아니, 나라면 애초에 내 집이 이런 용도로 쓰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는 두 아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식 교육을 위해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건 너무 비싼 값이 아닌가. 게다가 아들들은 명백히 아버지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젊은 시절엔 수재였던 것 같다. 변호사로 일했으니까. 그가 왜 실패했는지 나는 모른다. 재산이 있었다는데, 야망의 결핍과 더불어 그것이 그를 나락의 길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나는 재산이 한푼도 없고 타인에게 어떤 도움이나 지원도 받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었다.
그를 만나면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대개 보이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가끔 테라스나 라운지에 나타난다.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과 대화를 나눌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그에게는 그를 경멸하는 세 아들이 있다. 나는 자식이 없다. 하지만 시달과 내 처지를 바꿀 마음은 없다……
4. 일손
낸시벨 토머스는 출근이 조금 늦었지만, 페일리 씨가 본 대로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아침마다 똑같았다. 마지막 발걸음을 서두를 수가 없었다. 호텔이 보이자마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불행과 좌절의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거부감이 더 심해졌다.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펜디잭 호텔의 일이 그렇게 힘들거나 싫은 것도 아니었고 모두가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그녀는 미스 엘리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 생활은 싫은 사람을 포함해 온갖 부류의 사람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호텔이 가까워질 때면 그녀를 엄습해오는 거부감, 뭔가 두렵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이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그 느낌을 미스 엘리스의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었다.
이따금 그녀는 그 감정이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슬픔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펜디잭과 절벽 위의 오두막집 사이를 뛰어다니며 심부름을 했던 이곳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기에 지난겨울은 힘겨웠다. 하지만 나 때문이라면 나아지겠지, 느리게 모래사장을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난 나아지고 있으니까. 극복해가고 있어. 이제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걸. 하지만 저 저택은 점점 싫어져.
그러나 그날 아침 호텔의 외관은 순결하고 무심해 보였다. 방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울긋불긋한 수영복이 내걸린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버그먼 가족이 떠난 뒤로는 해수욕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언젠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오다 바위 근처에서 버그먼 씨를 만난 기억이 났다. 그는 수영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수작을 걸까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꽤 정중히 아침 인사를 건네고 나서 그냥 바위 사이로 걸어내려갔다. 이제 아무도 그녀에게 수작을 걸지 않는다. 그녀의 상처와 그것을 견디게 한 용기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눈치 없는 버그먼 씨마저도 그녀가 그저 그런, 평범하고 예쁘장한 검은 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어머니의 눈에도 그랬는지 낸시벨에게 더는 조언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끔은 역으로 조언을 구할 때도 있었다.
호텔 앞에 도착해보니 커튼이 걷힌 방도 있었다. 가엾은 페일리 씨가 여느 때처럼 2층의 커다란 퇴창 앞에 앉아 있었다. 바다를 응시하는 그는 동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가마우지가 일렬로 앉아 있는 처마 밑의 다락방 여닫이창에서 뭔가 휙 스쳐갔다. 미스 엘리스가 안에서 훔쳐보다가 재빨리 몸을 피한 것이다.
낸시벨은 걸음을 재촉해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계단 끝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원 테라스가 나오고, 그곳에서 뒤뜰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었다. 주방 바깥벽 고리에 그녀의 흰 앞치마가 걸려 있고 그 아래 바닥에 작업화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앞치마와 작업화를 착용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스토브 위의 주전자에서 벌써 물이 끓고 있었다. 웨이터인 프레드가 아니라 제리 시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방학이 되어 제리가 집에 머무는 동안이면 펜디잭 호텔의 일이 한결 수월했다. 그는 스스로 일을 많이 할 뿐 아니라 마구간에서 함께 지내는 프레드가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는지 눈여겨보았다. 집안을 둘러보는데 박자를 맞춘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드가 카펫 청소기로 식당 바닥을 이리저리 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낸시벨이 위층에 찻잎과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고 라운지를 정리하는 동안 프레드는 복도와 계단을 청소하고 시달 부인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다음에는 설거지, 객실과 층계참과 욕실 청소가 뒤따른다. 그러다보면 그냥저냥 프레드와 낸시벨은 점심 전에 일을 모두 마친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정말 새로운 손님이 열 명이나 더 온다면 그러지 못하겠지, 그녀는 페일리 부부의 차를 가지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 많은 객실을 더는 혼자 치울 수 없어. 미스 엘리스도 일손을 거들어야지.
그저 그런 평범한 아가씨였던 일 년 전이라면 차분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도한 업무량에 관한 호소문을 작성해 따로 연습했을 것이고, 시달 부인 앞에서 문제점을 말할 때 허둥댔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을 보살피는 법을 알았다.
그녀가 페일리 부부의 방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이 걷힌 창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들어왔다. 페일리 씨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페일리 부인은 단정한 잿빛 머리에 분홍색 그물 모양 나이트캡을 쓰고 침대의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다. 싸움을 벌이다가 낸시벨의 노크 소리에 갑자기 멈춘 듯 방안은 굳은 분위기였다. 페일리 부부는 언제나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낮 동안 기울여야 할 엄청난 노력에 대비하듯 매일 우울하고 팽팽한 침묵 속에 아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조금 지나면 책과 방석과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모래사장을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페일리 씨가 앞서고 아내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절벽 오솔길로 올라가 곶에 닿으면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네시에, 더프 시달의 빈정거림대로 사체라도 처리하고 온 것처럼 같은 길을 되돌아와 테라스에서 차를 마셨다. 온종일 책을 읽고 샌드위치를 먹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다니 믿기 힘들었다.
낸시벨은 뜨거운 물주전자를 세면대에 올려놓고 찻잔이 놓인 쟁반을 침대 옆으로 가져갔다. 페일리 부인은 자고 있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채 긴장한 상태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페일리 씨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분명 싸움이 다시 시작될 터였다.
다음은 미스 엘리스에게 차를 가져갈 차례였다. 노크하면 그녀는 절대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 항상 이렇게 외쳤다.
“누구세요?”
언젠가는, 낸시벨은 맹세했다, 윈저 공작이라고 응답할 테야.
“차 가져왔어요, 미스 엘리스.”
“아! 들어와.”
퀴퀴한 방안에 마분지 상자가 흩어져 있었다. 미스 엘리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화사한 색감의 사라사 천과 좋은 가구로 꾸며진 아담하고 예쁜 방이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그녀는 방에 가난으로 찌든 분위기를 덧씌우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방 정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모든 물건이 방안에 널려 있어 누구든 그 볼품없고 지저분하고 망가진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화장대 위의 지저분한 솔빗과 얼레빗 옆에 그녀의 의치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결한 것은 해진 진흙색 잠옷을 걸치고 떡진 검은 머리가 눈을 덮은 미스 엘리스 자신이었다.
“라운지 청소는 했어?”
“아뇨, 미스 엘리스.”
(라운지를 다 치우고 차를 가져왔다면 난리를 쳤을 거면서!)
“그럼 당장 가서 거기부터 치우는 게 좋겠어, 낸시벨.”
“네, 미스 엘리스.”
“프레드는 일어났고?”
“네, 미스 엘리스.”
“식당은 다 치웠나?”
“치우는 중이에요, 미스 엘리스.”
“좋아. 라운지 청소가 끝나면 주방 일을 돕도록 해. 나도 금방 내려갈 테니.”
이 의례적인 대화는 매일 아침 반복되었고, 그 무례함은 의도적이었다. 이는 낸시벨이 일과를 기억할 지능이 없을뿐더러 매일 일러주지 않으면 그것을 따를 양심도 없다는 암시였다. 시시콜콜 지시하는 것, 미스 엘리스의 주장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주요 임무였다. 일주일에 4파운드 미만을 받고는 수행할 수 없는 임무.
낸시벨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프레드는 여전히 청소기를 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청소기를 빼앗으며 가서 계단의 먼지를 털라고 말했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낸시벨, 넌 정리해고야. 그러니까, 정리하라고.”
이 역시 매일 반복되는 의례였다. 프레드의 유일한 위트로, 그는 그 표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유순한 청년으로 낸시벨의 말을 잘 따랐다.
라운지 청소를 끝낸 후 낸시벨은 잠시 짬을 내 차를 마시러 갔다. 시달 부인이 주방에 있었고, 커피와 토스트, 지글거리는 베이컨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낸시벨이 찻주전자를 들 수 있도록 스토브 옆으로 비켜서며 마구간에 있는 유아용 침대를 큰 다락방에 가져다두라고 말했다.
“오늘 오후에 도착하는 코브 부인이 자녀 셋과 한방을 쓰고 싶어해.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보니 아이들이 아직 많이 어린 모양이야.”
“그 방에 침대를 하나 더 들이기는 힘들 텐데요.” 낸시벨이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러게. 그리고 다른 방도 세 개 준비해야 해. 레이디 기퍼드와 남편이 쓸 바다 전망 방하고 그 위층에 자녀들이 쓸 방 두 개. 미스 엘리스에게 시트를 부탁하도록 해. 그리고……”
그녀의 말은 프레드가 복도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징소리에 묻혔다. 그녀는 즉시 귀리죽 냄비를 테이블로 옮겨놓고 매일 아침 징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나타나는 페일리 부부의 그릇에 덜었다. 냄비는 무거웠고, 그녀를 지켜보던 낸시벨은 귀부인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색한지 생각했다. 시달 부인은 그런대로 괜찮은 요리사였지만 집안일을 너무 늦게 배워 힘도 요령도 없었다. 어설프고 미숙해 불필요한 동작이 너무 많았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덮고, 일을 시작한 지 삼십 분만 지나면 옷은 이미 구김살투성이였다. 낸시벨의 어머니라면 절반의 시간 동안 두 배의 일을 해냈을 것이다.
가엾은 분! 낸시벨은 생각했다. 어서 제대로 된 요리사를 구해야 할 텐데. 어쩌면 그게 이 집의 문제일 수도 있어. 요리사가 있다면 이렇게 우울하지 않을지도 몰라.
5. 주방에서의 아침식사
더프와 로빈 시달은 수영하러 갔다가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돌아왔다. 그들이 다시 뜰로 나가 빨랫줄에 수건을 너는 동안 시달 부인은 아들들이 먹을 귀리죽을 떠서 창가의 작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호텔을 열었을 때 그녀는 가족을 주방에서 식사하게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다. 식당에 가족 전용 테이블을 두고 프레드에게 시중을 들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식당에선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손님들 때문에 영 어색했다.
“제리는 어디 있니?” 더프와 로빈이 돌아오자 그녀가 물었다. “너희랑 수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더프가 말했다. “발전기 손보고 있어요.”
“귀리죽이 식겠네.”
그녀는 제리의 귀리죽 그릇을 식지 않도록 오븐에 넣어두었다. 제리가 없었다면 누가 전기를 살폈으려나. 그는 세 아들 중 가장 도움이 되었으나 가장 적게 사랑받았다. 왜냐하면 결혼할 만큼 그녀를 홀린 딕 시달의 매력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으므로. 땅딸막한 체구와 들창코, 불같은 성격을 어디서 물려받았는지는 하늘만 알 것이다. 심지어 아기였을 때도 제리는 누구보다 말썽을 덜 피웠지만 정이 가지 않았다. 제리는 다정한 추억 하나 남기지 않고 감수성이 떨어지지만 착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심지어 전쟁터(그는 아른험에서 싸웠다)에서 보낸 편지마저도 지루해서 하품이 나왔다.
시달 부인은 그런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나머지 두 아들이 실망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오롯이 채워주었다. 로빈은 그녀의 친정 트리헌가 사람들을 닮았다. 1918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오빠와 판박이였다. 혈색 좋고, 잘생기고, 쾌활했던. 그리고 더프는 꿈의 아들이었다. 딕의 매력, 딕의 수려한 외모, 실패에 가려지기 전 딕의 총명함을 물려받았다. 더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더프가 귀리죽에 크림을 넣어달라고 했을 때 힘없이 거절해야 했다.
“오늘부터는 안 돼.” 시달 부인이 말했다. “레이디 기퍼드를 위해 크림을 남겨둬야 하거든. 그녀의 식사 준비가 아주 까다로울 거야. 하지만 시빌 에이버리가 소개한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야지.”
“어디가 아픈데요?” 더프가 물었다. “되게 좋은 병처럼 들리는데, 저도 옮으면 좋겠어요.”
주방 복도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옛 하인의 골방에 기거하는 주인장이 바깥 행차를 나온 것이다. 시달 씨는 낡은 가운을 여미며 문가에 잠시 서서 들어가도 될지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더프와 로빈이 의자를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내주고 아내가 귀리죽 그릇을 내밀자 그는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었다. 아들들에게 귀찮게 자리를 옮기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오늘은 불쌍한 컨셉으로 밀고 나갈 모양이었다.
짧고 어색한 침묵 후에 더프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두 가족이 더 온다니, 할일이 엄청나게 많아지겠어요.”
“그렇지.” 시달 부인이 말했다. “낸시벨 혼자 다 할 수는 없어. 미스 엘리스가 객실을 맡아줘야지. 내가 어젯밤에 말해두었어.”
“엄마!” 로빈이 외쳤다. “정말 용감하시네요! 그랬더니 뭐래요?”
“놀라서 말을 못하더구나. 하지만 조금 있더니 객실 변기통을 치워야 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래야 한다고 했지.”
“이제 사표 던지겠네요.” 더프가 예언했다.
“아닐 거야.” 시달 부인이 말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테니.”
날카롭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 단단한 주름이 잡혔다. 날카로움과 완고함은 시달 부인의 본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하는 거나 여가, 휴식, 안락함을 희생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못되게 굴 때 자신을 위해 싸우는 건 싫었다. 그리고 차츰 무자비한 괴롭힘만이 미스 엘리스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시달 부인은 더프를 위해 자기 것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호텔이 이득을 내지 못한다면 더프는 절대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직접 해도 되지만, 아침부터 주인이 객실에 나타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녀가 말했다.
시달 씨는 귀리죽을 먹고 나서 소심한 눈빛으로 아내와 아들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말없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그는 소외되고자 애썼다. 그들이 그를 대화에 끼워주려 한다면 아무것도 이해 못하는 척할 것이 뻔했다. 호텔 업무는 그처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에겐 너무 힘든 일이라고 은근히 말할 터였다.
그런데도 더프는 과감히 아버지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엘리스에게 오물을 버리라고 하는 건 좀 별로 아니에요? 실수로 자기를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자기가 오물이나 마찬가지니까—인간 오물.”
시달은 변기통의 본질과 그것이 사물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곧 서광이 비쳤다.
“이제 이해되기 시작하는구나.” 그가 더프에게 말했다. “그건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겠니? 평등한 사회의 아름다움을 설명한 프랑스 사람의 말이 있잖아. 누가 요강을 비울 것인가?”
시달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건, 문명인이라면 누구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에요. 하지만 집에 욕실이 더 있으면 좋겠어요.”
“아, 알아요.” 시달이 말했다. “나도 그러길 바라요. 톨스토이도 그랬지. 적어도 그가 그 주제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는 건 기억나는 것 같군. 그렇지, 더프?”
“모르겠는데요.” 더프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 너희 세대가 톨스토이를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했구나. 미안하다. 촌스러운 영감이 유행 지난 책을 곱씹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리고 여하튼 우리 손님들은 문명인처럼 보이지도 않아. 다들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해 귀찮은 일은 다 낸시벨에게 떠넘기더군. 프롤레타리아가 되기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낸시벨은 예쁘고 착하고 굉장히 총명한데다 우리 모두를 다 합친 것보다 가치 있는 사람인데 이 집에서 유일하게 사회적 격변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그런 일을 떠맡아야 하지. 단지 농장 노동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톨스토이 읽었는데요.” 더프가 말했다. “다만……”
“여기 당신 베이컨요.” 시달 부인이 남편의 코밑에 접시를 들이밀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거 정말 내 거 맞나? 이게 전부? 너무 인심 쓰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진짜 공평한 사회에서는(그리고 그거야말로 우리가 이뤄내고자 하는 것이겠지, 더프?) 그런 일이 가장 낮고 천한…… 가장 쓸모없고 가장 비생산적인 시민에게 주어지겠지. 탄복할 만한 원칙이야. 난 전적으로 찬성이다. 이 집에서 누가 적합할지 생각해봐야겠다. 누가 제일 할일이 없나? 지금보다 좀 덜 중요한 업무를 맡아도 될 사람이 누구지?”
그는 식구들을 둘러보며 의견을 기다렸다.
“미스 엘리스요.” 로빈이 말했다.
“네 생각은 그러냐? 본인 생각은 다를 거다. 봐라, 내가 훨씬 보잘것없잖아. 지금 난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도 없고. 네 엄마는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난 그게 적잖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지만 내가 할 만한 일이 너무 없어. 어쨌든 이 일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은 아니고, 나는 만반의 준비가……”
“헛소리 말아요, 여보.” 시달 부인이 말했다.
“헛소리?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말이오?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도 한 번쯤은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없는 게……”
“어째서 안 되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손님들이 불편해할 거예요.”
“당신 말은 페일리, 기퍼드, 코브 마나님께서 내가 그들의 방으로 쳐들어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걸……”
로빈이 웃음을 터뜨렸고 시달 부인이 외쳤다.
“딕! 정말이지! 그만해요.”
시달 씨는 잠시 의기소침한 침묵에 잠겼고, 더프는 화제를 바꿔 낸시벨을 얼마나 더 데리고 있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아쉽지만 이번 시즌뿐이야.”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낸시벨이라면 당연히 훨씬 더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하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로 한동안 집에 머물 모양인가보더라. 그애 어머니가 그러는데…… 세척실에 프레드가 있니?”
“아직요.” 열린 문 사이로 세척실을 살펴본 후 로빈이 말했다.
“토머스 부인 말로는 실연당한 후로 회복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더라. 어떤 젊은이와 약혼하고 혼수까지 다 준비했는데 남자가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차버렸대. 남자 눈에 여자 쪽이 너무 기울어 보였나봐. 중부지방의 경매인 집안이라는데, 부모가 신붓감을 탐탁잖게 여겨서 파혼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더라. 아까울 것도 없는 남자지만 낸시벨은 좋아했던 거야. 가여운 것. 이렇게 기막힌 일이 어딨겠니. 대체 어느 집안에서 낸시벨을 제 아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시달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아마 당신도, 제리가 그녀와 결혼하려 하면 어마어마하게 화낼걸.”
그러자 시달 부인은 나머지 세 식구가 웃음을 터뜨릴 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시달이 아내를 안심시켰다. “제리는 그럴 리 없으니. 당신이 그러라고 하기 전에는 말이오.”
“더 못난 여자를 데려올 수도 있겠죠.” 안심한 시달 부인이 말했다. “낸시벨보다 괜찮은 아이는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었어요?” 더프가 물었다.
“네 엄마는 낸시벨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아버지가 말했다. “제리가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두려운 거지. 제리는 결혼 못한다. 널 옥스퍼드에 보내려면 돈을 벌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제리는 앞으로 칠 년은 여자에게 눈길도 줘서는 안 돼. 네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날까지. 그래서 네 엄마가 제리의 여드름을 낫게 할 방도를 찾지 않는 거야. 젊은 의사를 따라다니는 존스의 어린 간호사들을 항상 경계하거든. 너희 엄마는 여드름이 아가씨들을 쫓아주길 바라고 있어.”
너무나 진실에 가까운 그의 말에 누구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6. 헨리 기퍼드 경의 상념
경찰이 부인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다가는 차로 나무를 들이받을 지경이다.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 여보, 난 흥분하면 안 돼요. 내 심장 전문의에게 절대 흥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아내는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오늘 안으로 펜디잭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단지 아내가 콘월식 클로티드 크림과 바닷가재를 파는 곳에 대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50마일을 돌아갈 시간은 없다. 작고 멋진 동네. 멋지기는 개뿔. 절대 멋질 리 없다. 아내는 그 터무니없는 광고 전단을 읽는다. 덕분에 어제 쓸데없이 주행거리가 늘었다. 경찰이라…… 나는 건지섬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직진할 것이다. 미안해서 어쩌지, 아무래도 지나간 것 같아. 차를 돌리기엔 너무 늦었어. 오늘밤 안으로 펜디잭에 도착하려면 계속 가야 해. 아내는 뒷좌석에서 지도를 들고 바스락거린다. 교차로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지도를 읽을 줄 모른다. 너무 멍청하니까. 그러나 일단 뭔가 하기로 작정하면 멍청하지 않다. 그 작은 식당을 정말 찾아가고 싶다면 지도를 읽어내고야 말 것이다. 정말 원한다면…… 그러나 건지섬은 아니다. 나는 건지섬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하려면 오크햄프턴에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아마도 허술한 식사겠지만 어쩔 수 없다. 서둘러야 하니까. 아이들에 이어 우리도 곧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만 그곳에 도착하도록 할 수는…… 여하튼 모두 무사히 출발하기는 했다. 경찰이…… 나는 전화를 했다. 오 매더스! 아이들은 오늘 아침 패딩턴에서 잘 출발했나? 예, 헨리 경. 그리고 경찰이 전화를 걸어 부인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용건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골로 여행을 떠나셔서 안 계신다고 하고 주소를 주었습니다. 여보…… 경찰이 당신을 찾는 전화를 했다는군요. 경찰이요? 어머, 이상한 일이네요. 아뇨, 난 짐작 가는 일이 전혀 없는데. 무슨 일로요? 만약 그랬다면 겁먹은 얼굴을 했겠지…… 아니! 저 사람은 겁낼 줄 모르는 사람이야. 흥분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정말로 그걸 지키고 있어. 게다가 자신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지. 어쩌면 아무 일 아닐 수도…… 75파운드. 그녀가 정말 허용된 비용만으로 버텼을까? 하지만 내가 이미 백 번은 계산해봤잖아. 그녀가 정말 바렝가에 머물렀다면…… 난 당신이 왜 그들을 부역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여보! 루이즈 말처럼 우리는 짐승 사이에서 문명인이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고생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전쟁 내내 편하게 눌러앉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전형적인 프랑스인……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고생을 했나? 아내와 나는? 아내와 아이들도 매사추세츠에 편히 눌러앉아 있지 않았나? 그리고 이제 아내는 건지섬에 눌러앉겠다는 건데, 나 말고는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전쟁에 나가 싸웠고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녀가 바렝가에 머물며 호텔비를 지출하지 않았다면 75파운드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떠나기 전에 내가 그렇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나는 통화 규정에 관해 설명했다. 법을 어긴 것이 밝혀지면 내가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가 해서는 안 되는…… 분명 아내는 이해했을 테지?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한다.
오 맙소사! 양떼! 이 속도로 저 양떼의 뒤를 쫓아간다면 뒷걸음치는 꼴인데. 저 사람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거고…… 아, 안 돼! 양떼가 문을 통과하는군. 다행이야. 아내가 건지섬에 집을 산 건 내 책임이 아니다. 막을 수 없었다. 자기 돈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니. 난 그곳에 살 마음이 없지만, 내가 아니면 아내는 소득세를 피할 수 없다. 내 일은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여보, 왜 일을 하려는 거죠? 건지섬에 살면 소득세를 낼 필요도 없고 당신은 부자가 될 텐데요.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미국에 있었다. 대공습을 경험하지 않았다. 나는 경험했다. 그 모든 고통, 그 모든 희생자, 그 모든 영웅주의를…… 나는 목격했다. 나는 건지섬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저렇게 아프지만 않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의사가 찾아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불쌍한 사람이니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데. 여기가 교차로인 듯하다. 뒷좌석의 그녀는 무척 조용하다. 잠들었나? 어젯밤에 그녀는 잠을 설쳤다. 이제 교차로를 지났다. 맞다, 그녀는 신경통을 앓았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녀를 대해야 한다. 그녀는 이겨내야 할 것이 많으니까. 하지만 건지섬에 대해서는 내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밤 안에 거기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오크햄프턴에서 점심. 경찰이……
7. 뜻밖의 횡재
집에 머무는 동안 제리 시달의 여드름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것은 마치 욥을 괴롭히듯 그를 괴롭혔다. 최대치에 도달한 인내의 성흔이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역시 사랑했다. 형제를 아꼈고. 그러나 펜디잭의 상황은 이제 어떤 지점에 이르렀고, 식사 때면 그는 식구들을 피하고자 무슨 일이든 찾아내려 했다. 그들 각자와는 잘 지냈지만, 다 함께 하는 자리는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아침식사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고 아버지가 골방으로 돌아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발전기를 붙들고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방으로 가서 어머니가 페일리 부부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불은 귀리죽을 먹었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레이디 기퍼드를 위해 남겨두었던 크림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그녀는 이따금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애를 먹었다.
“너는 지방을 좀더 섭취해야 해.” 그녀가 말했다. “분명 그래서 여드름이 나는 걸 거야. 아무래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 얘야…… 오늘 아침에 포스메린에 갈 거니?”
“시키실 일이 있으면 갈 수도 있고요.”
“장 볼 목록을 적어놨는데…… 내가 갈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가기 전에 낸시벨을 도와 코브 부인의 방에 침대를 하나 더 가져다놓아주겠니?”
“코브 부인에게 확실하게 하시기를 바라요.” 제리가 말했다. “편지를 보니까 한방에서 다 같이 자는 대신 값을 깎아주길 기대하는 것 같던데요.”
“음…… 애들이 아직 어리다면……”
“어차피 깎아주실 거네요, 뭐. 더 깎아달라고 하면 해주지 마세요.”
“너무 가난한 것 같더라. 차를 요청하지 않고 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겠다잖니.”
“우리도 끔찍하게 가난해요. 형편이 안 되면 여기 오지를 말아야죠.”
“나는 그녀가 오는 게 기쁘구나. 달리 손님이 없잖아.”
“알아요. 하지만 늘 뜻밖의 횡재라는 게 있잖아요, 포스메린의 호텔이 저렇게 붐비니까, 거기서 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그 끔찍한 버그먼 가족처럼. 난 예의바르고 조용한 사람들을 원해.”
그녀는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제리는 낸시벨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그릇을 들고 세척실로 갔다. 거기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낸시벨이 특유의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따뜻함과 상냥함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어머니의 세척실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기에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세상으로 통하는 고통스러운 길을 계속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는 큰 다락방에 침대를 밀어넣은 다음, 포스메린에서 구매할 물품 목록을 들고 가파른 진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의 두번째 길목에서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여기가 호텔로 가는 길이냐고 수줍게 물었다.
“펜디잭 매너 말씀인가요?” 그가 말했다. “맞아요. 뭘 도와드릴까요? 저희 어머니가 운영하는 호텔입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저…… 그러니까…… 저는 그냥…… 확실치는 않지만…… 사람들이 거기 가면 방이 있다고……”
“방을 원하세요?”
“아 네, 그…… 그게 아니라…… 한번 내려가볼까 생각했는데…… 하지만 물론……”
“방 몇 개요?”
그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사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어떤 것이든 그녀를 공포에 빠뜨리는 듯 보였다. 제리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하면서 떨기도 하고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이 보통 그렇듯 눈을 내리뜨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떨구었다.
“제가 길을 알려드리죠.” 마침내 그가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는 안도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무척 아름다웠지만 약간 광기가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진입로로 되돌아가며 제리는 은근슬쩍 대답을 유도했다.
“지금 1층에 더블룸이 하나, 2층에 작은 싱글룸 두 개가 비어 있어요.”
“싱글룸 둘요? 아,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싱글룸 두 개를 원하시는군요. 금방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 네. 아, 고맙습니다.”
“우린 주당 6기니를 받아요.”
“아, 고맙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꽤 앳되어 보였다. 하지만 어찌나 깡마르고 지쳐 있는지 첫눈에는 젊음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걸음걸이며 목소리, 떨리는 동작까지 늙어가는 노처녀 같았다.
“친구는 포스메린에 두고 왔나봐요.” 그가 물었다.
그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겁에 질린 듯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 저는 친구가 없는데요.”
“하지만 방이 두 개 필요하다면서요.”
“네…… 하나는 제 거고…… 그러니까 제…… 제 아버지…… 아버지가 방을 하나 원하시고…… 저도 하나 필요하고요.”
“아? 아버지요. 방이 두 개 필요하군요. 하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는 아버지를 위해.”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아버지가 포스메린에 계시는군요.”
“아, 아뇨. 아버지는…… 아버지는 여기 계세요.”
“여기요?”
“저기…… 저 위…… 저 위에…… 계세요. 차 안에요.”
“차를 가져오셨어요?”
“아, 네. 제 말은…… 아버지 차요.”
“그럼 주차장이 필요하겠군요.”
“아, 네. 고맙습니다.”
어느덧 그들은 호텔에 도착했고, 제리는 그녀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 그녀는 조금 더 분별 있고 차분해 보였다. 그녀는 성이 랙스턴이라고 했다. 아버지 랙스턴 씨는 성당 참사위원*이고. 원래 포스메린의 벨뷰 호텔에 묵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늘 아침에 호텔을 나왔다고 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머물 방 두 개가 필요했다. 그녀가 여기서 방을 보는 동안 아버지는 언덕 위의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 주교에 의해 임명된 의전 사제단 또는 참의회에 속하는 성직자단을 가리킨다.
“제가 올라가서 아버님께 저희 호텔에 빈방이 있다고 말씀드리죠.” 제리가 제안했다. 그 불쌍한 아가씨에게 또다시 언덕을 오를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기가 직접, 그것도 혼자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벨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 놀랐는걸.” 시달 부인이 말했다. “아주 좋은 호텔인데. 이상한 사람들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제리가 제안했다.
“그래야겠다. 파킨스 부인에게 조용히 물어봐야지…… 뜻밖의 횡재이긴 해도……”
그녀가 벨뷰에 전화를 걸어 랙스턴이라는 이름을 대자마자 수화기 저편에서 성난 고함이 터져나왔다. 파킨스 부인은 랙스턴 부녀에 대해 할말이 산더미였다.
“뭐래요?” 통화가 끝난 후 제리가 물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는구나. 일주일 치 방값을 선불로 내고는 이틀밖에 묵지 않았대. 하지만 그 아버지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더라.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투고, 라운지에서 카드놀이와 댄스파티를 열지 말라고 했대. 직원에게도 아주 무례하고 굴고 말이야.”
“아, 어머니…… 안 되겠네요.”
“참사위원이면 존경받는 사람일 텐데. 그렇다고 우리가 방을 비워둘 형편도 못 되고……”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 호텔은 카드놀이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이 없잖니…… 역정낼 만한 직원도 별로 없고. 게다가 겨우 일주일인걸.”
“뜻밖의 횡재는 별로라면서요.”
“돈이 12기니야.”
밖에서 자동차 바퀴가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큰 승용차가 철쭉 덤불 사이로 마지막 모퉁이를 조심스레 돌고 있었다. 차는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딸이 운전하고 참사위원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이 두 사람의 상상과 너무도 들어맞아 시달 부인과 제리는 깜짝 놀랐다. 주먹코, 짙은 눈썹, 작고 붉은 기가 도는 눈, 자줏빛 얼굴색이며 튀어나온 아랫입술. 누가 봐도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사제복이 그를 한층 완고해 보이게 했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영원히 벌을 받을 듯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오, 맙소사……” 시달 부인이 속삭였다. “오, 맙소사. 이를 어째……”
그녀는 제리를 앞세우고 정문으로 갔다. 방이 없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차에서 내려 포치에 올라선 참사위원은 더없이 정중하고 친절했다. 그가 자신에게 화내는 기색이 아니자 시달 부인은 큰 은혜라도 입은 듯 고마워하며 당장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싹싹하게 구는 것을 엄청난 호의로 받아들였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없는 듯했다. 호텔에 아이들이 몇 명 있을 거라는 말에 반색했고, 작은 방을 거부하지도 않은데다 일주일 치 방값을 선불로 내겠다고 제안했다. 협상은 순조로이 끝났다. 유일하게 구름이 낀 순간은 짐을 어떻게 할지 묻는 제리에게 어수룩한 딸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입술에 경련을 일으키며 말을 더듬고 눈을 깜빡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지독히 혐오스러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내 딸이 팔푼이처럼 굴고 있으니 내가 직접 답할 수밖에 없군요, 미스터 시달. 그 작은 파란색 트렁크는 이 아이 것이오. 나머지 짐은 모두 내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며 딸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됐다, 이밴절린. 제대로 말하지 못하겠으면 아예 말을 하지 마라.”
여하튼 그를 화나게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날의 소풍을 위해 막 길을 나서던 페일리 부부와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느낀 사소한 불쾌감 외에는. 시달 부인이 양쪽을 소개하자 참사위원은 유쾌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부부는 고개만 조금 숙여 보이고 문을 빠져나갔다. 시달 부인은 그들의 습관적인 거만함과 인색한 미소에 익숙해진 터라 참사위원이 어떤 인상을 받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말문이 막힌 채 자리에 서서 부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저렇게 무례한 사람들이 있나. 누굽니까, 저 페일리라는 사람은?”
“건축가예요.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웨섹스대학을 설계했죠.”
“아? 그 사람이군요! 네. 들어봤습니다. 저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불쾌하게 행동합니까?”
“그게…… 저분들이 워낙 내성적이라서요.” 시달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군 건 아닐 거예요.”
“아, 그래요? 내가 보기엔 아닌데. 이런 푸대접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시달 부인이 2층으로 안내해 방을 보여주는 동안 그는 페일리 씨의 무례함에 대한 연설을 계속했다. 그리고 창밖으로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걷는 부부의 모습이 보이자 한동안 창가에 서서 유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페일리 씨에게 한두 마디 해야 할 것 같군요.”
시달 부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제리가 비난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리가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