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전집』(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선별하여 엮되, 날짜는 Van Gogh Museum과 Het Huygens Instituut이 정리한 아카이브(vangoghletters.org)를 참고하였다.
* 그림 제목은 검색이 편리하도록 영어로 표기하였다.
들어가며
테오야, 우리 서로에게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자
의문의 총상 : 대체 그 밀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890년 7월 27일 일요일, 어둠이 완전히 내린 무렵 한 남자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라부 여관으로 들어왔다. 까마귀가 나는 광활한 밀밭에서 총을 맞고 기절해 있다가, 정신이 들자 인적 없는 시골길을 홀로 간신히 걸어온 참이었다. 3층의 장기 투숙객 빈센트 반 고흐였다. 깜짝 놀란 주인장 라부가 의사를 불렀고, 가셰 박사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응급 처치를 했고, 동생 테오가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급히 오베르로 내려왔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당사자는 태연하게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괜한 소란을 피웠나, 방문객이 오히려 머쓱해지는 월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둠이 내리며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더니 결국 7월 29일 밤 1시 반, 서른일곱 살의 가난한 네덜란드 화가는 눈을 감았다.
테오는 이튿날 급히 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참석해준 형의 지인들에게 형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그림들을 나눠 준 다음,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미완의 편지를 발견했다. “난 그림에 목숨을 걸고 그 대가로 존재의 절반이 무너져 내렸는데, 넌 어째서…….” 죽을 때 형의 품속에 있던 원망 가득한 편지, 수신인은 동생인 테오, 자신이었다.
‘직장(화랑)을 그만둘 생각이고,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여전히 거래가 어렵다’는 테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이미 1주일 전에 왔었다. 동생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진심은 원망과 불안이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뭔가 작품이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누군가 내 그림을 사주려고 하는데, ‘화가 공동체’의 꿈을 다시 펼치고 싶은데, 자꾸만 발작이 재발해서 건강과 정신을 잃어가는 현실이 갑갑했으리라. 게다가 유일한 후원자인 테오마저 부정적인 소식을 전해오자 서운했겠지. 다만, 보내지 않을 편지는 없앴으면 좋았을 것을, 원망 가득한 편지를 형의 유품으로 읽게 하다니 참 얄궂다. 공교롭게도 형을 보내고 6개월 만에 테오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기에(1891년 1월 25일) 괜시리 속상한 마음이 더 커진다.
고갱과의 두 달 : 대체 반 고흐는 왜 귀를 잘랐나?
특히나 테오는 2년 전의 ‘그 사건’ 후에 형을 요양원과 정신병원에 진짜 광인들과 함께 방치했다는 죄책감을 느껴왔던 터였다. 형이 파리로 가고 싶다고 계속 부탁했지만 못 들은 척했고, 그 사이 자신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고 아들도 태어난 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형의 부탁이긴 했지만) 고갱을 아를로 보낸 것이 테오 자신이었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를 꿈꿨다. 예술과 생계 사이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화가들을 위해, 동료 화가들이 모두 참여해서 공동으로 그림값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 생활비 전액을 동생에게 지원받는 처지에 대한 변명이었을까. 어쨌든 반 고흐는 아를에 ‘노란집’을 마련했고, 첫 번째 동료로 폴 고갱을 꼽았다. 하지만 이국적인 마르티니크 섬이나 화려한 파리로 돌아가고 싶었던 고갱에게 아를은 매력이 없었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테오가 고갱을 설득했던 것이다.
1888년 10월 23일 해뜰 무렵, 폴 고갱이 아를 역에 내렸다. 그가 드 라 가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갱의 자화상을 본 적이 있는 카페 주인 지누가 알아보고 노란집으로 안내했다. 고갱 방을 장식해 주고 싶어서 해바라기 그림을 엿새 만에 4점이나 그려가며 반 년째 고갱을 기다려 온 반 고흐는 환호했다. “이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 고갱처럼 멋진 동료와 함께 지내며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이야!”
그랬는데 정확히 두 달이 지난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밤에 빈센트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정확히 말하면 귓불이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어진 건 불 보듯 뻔한 일. 경찰이 노란집으로 출동했고, 고갱은 테오에게 얼른 아를로 오라고 전보를 보내고는 자신은 서둘러 아를을 떠나 버렸다. 크리스마스의 악몽 같은 사건이었다.
반 고흐는 대체 왜 귀를 잘랐을까? 우울증이 심했던 빈센트가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보고 ‘분명히 나인데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분노했다고도 하고, 테오의 결혼 소식에 외톨이가 될까 봐 두려웠다고도 하고…… 확실한 건, 고갱은 노란집에 오고 나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아를을 싫어했고 반 고흐가 이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고갱은 이 기분 좋은 마을 아를, 우리가 함께 지내는 노란집, 특히 나한테 실망한 것 같아.”
고흐는 절망했던 것 같다. 고갱과 함께 만들어 가려던 꿈이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는데, 이 꿈은 테오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해야 했다. 동생에게 후원을 받은 지 10년이 가까워지는데 제대로 그림 1점 팔지 못한 채 재료비만 쏟아붓는 중이었고, 하필이면 ‘몽티셀리처럼 물감을 반죽이라도 해놓은 듯 두텁게 칠하는’ 채색(임파스토 기법) 때문에 물감 값을 더 보내라고 끊임없이 독촉하는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 이런 상황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고갱이 그림을 팔아달라며 미술상인 자신에게 따로 쓴 편지에서, 형의 열정과는 대조적인 냉소와 비아냥을 읽었다. 그런데 동생 역시 형을 위해서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홀로 고군분투했다.
“우리 서로에게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자!”
테오는 형 빈센트를 사랑했다. 까탈스럽고 종잡을 수 없고 때론 공격적이지만, 미치광이 같은 행동 아래 감춰진 상처받은 영혼을 알았기에 안타까워했다. 유치할 정도로 거친 붓질 아래 숨겨진 천재성을 보았기에 형의 실패에 함께 아파했다. 하지만 너무나 극단적인 성향이어서 대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예민한 형에게는 조심스러운 격려 외에는 자유롭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적었다. 형은 단순한 조언조차도 때로는 왜곡하고 격분했으니까.
빈센트가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적당히 원만하게 사는 게 힘들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그저 여러 원인을 추측해 볼 뿐이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던 1살 위 형의 무덤이 창밖으로 보이는 집에서, 생일 때마다 축하가 아니라 어머니의 통곡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일까. 유달리 예민한 감수성 탓에 사소한 사회적 신호들을 무던하게 흡수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영 사회 밖으로 튕겨져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빈센트가 끊임없이 불화와 문제를 일으키는 내내, 테오는 형의 곁을 지켰다. 27세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무모한 선언을 응원했고, 팔릴 만한 예쁜 그림이 아니라 칙칙한 그림만 고집스럽게 그려도 이해했고, 수년째 발전이 없는 캔버스를 보고도 힐난의 말을 꾹 참았고, 그런데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소연과 비난과 요구도 묵묵히 들었다. 그렇게 10년째 외면받던 형의 그림이 드디어 1점(<붉은 포도밭>) 팔리고, 자신도 가족과 갓난아기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여름 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평화로운 일요일 밤, 형의 사고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1872년 9월, 열아홉 살의 형 빈센트와 열다섯 살의 동생 테오는 헤이그의 스헤베닝언 바닷가를 걷다가 풍차 앞에 멈춰서서 약속했다. “우리, 서로에게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자” 그렇게 시작된 편지 교환이 평생 이어졌다. 한때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인 줄 알았던 그림이 ‘테오도르 반 고흐’의 초상화였을 정도로 서로 닮은 형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한 통 한 통 읽다 보면,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며 치열하게 노력하고 실패했던 삶이 오롯이 느껴져, 한없이 기뻐지고 한없이 슬퍼진다.
네가 항상 그립구나
사랑하는 테오에게
편지 고맙게 받았어. 이번에도 네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구나. 떠난 첫날부터 네가 그립더니 오늘 오후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네 빈자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전하더라.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냈어, 그렇지? 비를 맞은 날도 있지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보았으니까 말이야.
이 끔찍한 날씨에 오이스테르베이크(학교)까지 오가야 하니 참 힘들겠구나. 어제 전시회를 기념하는 마차 경주가 열렸지만 궂은 날씨 탓에 점등식과 불꽃놀이는 미뤄졌어. 그걸 본다고 네가 계속 남지 않았던 게 다행이지. 하네베이크 씨와 로스 씨(하숙집) 가족이 네게 안부 전한다.
1872년 9월 29일 일요일, 헤이그
우리 형제가 같은 길을 걷게 되다니
사랑하는 테오에게
우리 형제가 이제 같은 일을, 그것도 같은 구필화랑에서 할 수 있게 됐다니 정말 기쁘구나. 앞으로는 편지를 자주 주고받아야겠다. 네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고! 만나면 할 이야기가 끝도 없겠어.
브뤼셀은 제법 괜찮은 도시지만 아마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또 편지해라. 잘 지내! 네가 보내 주는 소식이 얼마나 반가운지는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랄 거야. 행운을 빈다.
1872년 12월 13일 금요일, 헤이그
화가는 아름다움을 보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
사랑하는 테오에게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화랑에서 네 능력에 만족한다는 소식, 테르스테이흐 씨에게 전해 들었어. 네 편지를 보니 너도 예술에 열정을 가지게 된 모양이구나. 아주 좋은 일이다, 아우야. 네가 밀레, 자크, 슈라이어, 랑비네, 프란스 할스 같은 화가들을 좋아한다니 기쁘구나. 마우베 형님 말마따나 “바로 그거야!” 그래, 밀레의 〈만종〉, 바로 그거야! 풍부하고도 시적이지. 너와 예술을 논하는 게 정말 좋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간간이 편지로라도 자주 이야기를 이어가자. 아름다운 작품들을 최대한 많이 보고 느껴라. 사람들 대부분은 아름다움을 볼 줄도 모르거든.
항상 여기저기 거닐어 산책을 많이 하고, 자연을 한껏 사랑해라. 그게 바로 예술을 오롯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야.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지. 그리고 우리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줘.
게다가, 착하기만 하고 나쁜 일이라곤 전혀 못 하는 화가들이 있지. 일반인들 중에도 선행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들이 있듯이 말이야.
이곳이 마음에 든다. 숙소도 훌륭하고 런던이라는 도시는 물론 영국의 생활양식과 영국인의 생활상을 관찰하는 것도 대단히 즐거워. 거기다가 내게는 자연과 예술과 시도 있지. 이런 삶이 부족하다면, 도대체 뭐가 더 있어야 충분하니? 그렇다고 네덜란드를 잊고 지내는 건 아니야. 무엇보다 헤이그와 브라반트는 내 머릿속에 늘 떠올라.
1874년 1월 초, 런던
내 마음속 시인은 요절한 게 아니라 잠들었기를
사랑하는 테오에게
센트 큰아버지가 또 오셨어. 단둘이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꽤 많이 나눴다. 혹시 네가 여기 파리 지점으로 올 수 있을지 여쭤봤어. 처음엔 넌 헤이그에 있는 게 훨씬 낫다며 잘 듣지도 않으시더라. 하지만 내가 거듭 말을 꺼냈으니 생각은 해보실 게다.
센트 큰아버지는 무섭도록 총명한 분이지. 지난겨울, 내가 여기 파리에서 지낼 때 대화 도중에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내가 초자연적인 건 잘 모른다만, 자연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 정확한 말씀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랬어.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가 샤를 글레르의 〈부서진 환상〉이야.
생트 뵈브가 말했어. “무릇 사람들은 마음속에 요절한 시인을 묻고서 살아남았다.” 뮈세 말은 또 달라. “우리 마음속에는 젊고 활기찬 시인이 잠들어 있다.” 센트 큰아버지는 전자일 거야. 네가 어떤 양반을 상대하는 건지 잘 알고, 조심하라는 말이다! 네가 이곳 파리나 런던으로 가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려.
일전에 아버지가 편지에 쓰셨어. “‘비둘기처럼 솔직하라’고 말했던 입술로 곧바로 ‘뱀처럼 신중하라’고 말한다.” 너도 이 점을 항상 명심해라.
추신 : 혹시 화랑에 메소니에 작품의 사진들이 있니? 있다면 자주 들여다봐라. 주로 사람들을 그리는 작가지. 〈창가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과 〈점심 식사하는 청년〉 등은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거야.
1875년 7월 15일 목요일, 파리
나더러 화랑을 떠나라더라
사랑하는 테오에게
지난번에 만나고 아직 네게 편지를 못 썼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어.
부소 사장님(구필화랑을 부소 앤 발라동 화랑이 인수했다)을 다시 만났을 때, 혹시 존경하는 사장님께서 올해도 내가 이 화랑 직원으로 일하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어. 물론 사장님께서 나를 심하게 나무라신 적이 없다는 점도 분명히 상기시켜 드렸지.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존경하는 사장님께서 딱 내가 하려던 말을 가로채시지 뭐냐. 그러니까, 나더러 4월 1일 자로 화랑을 떠나라더라고. 그러면서 그간 회사에서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 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라더라.
사과가 익으면 산들바람에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지. 내 경우가 꼭 그래. 그동안 영 잘못된 일들도 해왔으니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어.
그래서 말인데, 아우야,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소 앞이 캄캄하다만, 그래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힘쓰려 한다.
이 편지는 테르스테이흐 씨께도 보여드리면 좋겠다. 존경하는 사장님도 곧 알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주면 좋을 것 같다.
1876년 1월 10일 월요일, 파리
날개도 없는데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담쟁이덩굴처럼
사랑하는 테오에게
어제 코르 큰아버지가 이 편지지와 비슷한 낡은 종이 뭉치를 얻어 주셨어. 연습장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할 일이 너무 많은데다가 쉬운 일들도 아니야. 하지만 끈기 있게 파고들면 해낼 수 있겠지. 담쟁이덩굴을 마음속에 담아둘 거야. ‘날개도 없는데 서서히 위로 뻗어 올라가서’ 벽을 뒤덮는 담쟁이덩굴처럼, 펜으로 종이를 뒤덮어야지.
매일 산책한다. 얼마 전에는 홀란츠허 스포르 역으로 가려고 바위텡칸트로 내려가다가 아주 근사한 동네를 지나갔어. 일꾼들이 모래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이에 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장면도 구경하고,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정원이 딸린 온갖 골목길도 돌아다녔지. 흡사 램스게이트에 온 기분이었어. 역 옆에서 풍차들이 서 있는 왼쪽으로 꺾어서 운하를 따라 느릅나무가 늘어선 길로 들어가니, 그곳 풍경은 꼭 렘브란트의 동판화 같았고.
조만간 스트레크푸스의 책으로 역사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야. 엄밀히 말하면 이미 시작했다고 해야겠지. 쉽지는 않을 거야.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하지만 한 단계씩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해나가면 언젠가는 분명히 성과를 내리라 믿어. 또 그러길 간절히 바라고. 하지만 시간은 걸릴 거야. 나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일이니까. 코로도 말했잖아. ‘고작 40년간 작업하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인 게 전부다.’ 아버지나 스트리커르 이모부를 비롯한 여러 분들도 지금의 결과를 얻기까지 무수히 연습해야 했을 텐데, 그림 그리는 일도 그래. 그런데 종종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1877년 5월 19일 토요일, 암스테르담
나는 새장 속의 새처럼 게으를 뿐이지
책과 그림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이다
◆ 빈센트는 거듭된 실패의 와중에 테오가 “그만두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편지를 뚝 끊었는데, 부모님에게 그동안 생활비를 지원해 준 사람이 테오였다는 말을 듣고서 다시 펜을 들었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네게 편지하는 일이 썩 내키지가 않아서 그간 소식을 끊었었다. 여러 이유가 있어. 네가 어느 정도 남처럼 느껴지고, 나도 네게 그런 존재 같다.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러니 이런 관계를 굳이 유지해 봐야 서로에게 좋을 게 없어.
네게 편지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안 들었어도, 또는 그럴 필요만 없었어도, 이 편지는 쓰지 않았을 게다. 에턴(당시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소식 줬다. 네가 내 앞으로 50프랑을 보냈다고. 뭐, 그래서 받았지. 마지못해서 우울한 마음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혼란스러운 처지라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펜을 들었어.
알고 있겠지만 난 보리나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에턴 근처에 있으라고 하시지만 내가 거절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다. 본의 아니게, 가족들에게 이미 난 골치 아픈 존재,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영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 가까이 있다 한들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어? 내가 집을 떠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게 모두에게 이롭고 가장 합리적인 최선의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새들이 깃털을 바꾸는 털갈이 시기가, 우리 인간에게는 시련과 불행을 겪는 역경의 시기야. 털갈이 도중에 멈춰 버릴 수도 있지만 새롭게 거듭나 그 과정을 박차고 나올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할 일은 아닌 게, 그리 즐겁고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드는 거야. 어쨌든 내 마음이 그렇다. 온 가족에게 잃었던 신뢰를 되찾는 건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편견 없는 신뢰를 회복하고 그에 맞먹는 명예나 품위와 관련된 자질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힘들겠지. 하지만 앞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회복될 거라는 믿음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진정한 관계 회복을 바란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너와의 관계도 나아지기를 바라고.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게 오해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않겠니.
나라는 사람은 열정적이어서, 엉뚱한 일을 벌이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좀 많다. 인내하며 차분히 기다리는 게 나을 때, 성급하게 말을 내뱉거나 행동에 옮기는 일도 잦고. 그런데 아마 나 말고도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경솔하게 행동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험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해야 할까? 내 생각은 달라. 오히려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열정을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해.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책에 대해서만큼은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끊임없이 지식을 쌓고 공부하고 싶어. 매일 빵을 먹고 싶은 것과 똑같아. 난 그림과 예술작품에 둘러싸여 지낼 때도, 그 작품에 열광적으로 빠져들었지. 그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그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지금도 여전히 그림 나라가 그리워.
너도 기억할 거야. 난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렘브란트와 밀레에 관해서라면 거의 모든 걸 알지. 쥘 뒤프레, 들라크루아, 밀레이, M. 마리스 등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런 환경에 있지 않으니) 영혼이라고 불리는 게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영원히 찾고 찾고 또 찾아다니더라. 그러니 향수병에 젖어 그리워하느니 차라리 어디나 다 내 고향이고 내 나라로 여기자 마음먹었어. 절망에 빠져드는 대신, 힘닿는 한 활동적으로 우울하게 지내는 길을 택했지. 생기 없고 정체된 채로 절망에 빠져드는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한 기운을 희망하고 갈망하고 찾아 나서는 쪽으로 활용했다는 뜻이야.
그래서 성경과 미슐레의 『프랑스 혁명』을 제법 진지하게 열독했어. 지난겨울에는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 비처 스토우 등을 읽었고, 최근에는 아이스킬로스 같은 고전과, 고전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명작에 가까운 작품들도 들여다봤어. 파브리티우스나 비다 등등.
이런 작품들에 심취한 사람은 남들 눈에는 충격적으로 비칠 수도 있어. 그래서 본의 아니게 특정 관습이나 예법, 사회상규에 어긋나는 죄를 범하게 될 때도 있고.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시선이 정말 유감스럽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옷차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잖아. 남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해. 하지만 그건 가난과 빈곤 때문만이 아니라, 심히 낙담한 마음 때문이야. 때로는 관심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데 필요한 자발적 고독을 확보하기 위해서기도 해.
그래, 내가 그럴듯한 직업도 없이 떠돌아다닌 게,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5년쯤 됐지. 이제 다들 나보고 이렇게 말해. 언제부턴가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시들시들해져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과연 그럴까? 간간이 밥벌이는 했어. 몇몇 친구들이 선의로 준 돈도 받았고. 근근이 먹고 살아온 게 사실이지. 또한 주변인들에게 신뢰를 잃은 것도, 호주머니 사정이 처참한 지경인 것도, 미래가 암담한 것도, 더 잘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밥벌이를 하겠다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그간 알량하게 했다는 공부도 서글프고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부족한 것투성이고, 어디가 끝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쇠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할 수 있냐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묻겠지. 그럼 왜 계속하지 않았느냐고. 다들 바랐던 것처럼 대학에 가지 그랬느냐고. 내 대답은 하나뿐이야. 학비가 너무 비쌌어. 그렇다고 그 미래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과 연결되는 미래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있어?
난 지금 이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찾아다니지도 않으면, 내 삶은 실패로 끝날 텐데 이런 불행이 또 있을까!
그러면 또 이렇게 묻겠지.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그건 차차 명확해질 거야.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마치 크로키가 데생이 되고, 데생이 그림이 되듯, 진지하게 파고들면 어렴풋하고 모호하던 생각이, 아이디어가 되어 뇌리를 스치고 결국 확실한 의견으로 굳어지는 거야.
전도사 생활이나 예술가 생활이나 사실 크게 다를 것도 없어. 옛 학파들은 낡은 구시대적 관습을 고집해. 이 ‘혐오스럽고 폭압적인 존재들’은 편견과 관례라는 철갑옷을 두르고 주도권을 손에 쥐면 관료주의 체제를 동원해 자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편애하는 자들의 뒤를 봐주느라 능력자들을 배제하지.
불평을 늘어놓자거나 내가 틀렸을 수도 있는 부분들을 변명하려는 게 아니야.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지난여름 네가 찾아왔을 때, ‘라 소르시에la sorcière(마녀)’라고 부르는 폐광 근처를 지나다가 예전에 레이스베이크의 오래된 운하와 풍차 주변을 거닐던 일을 떠올렸지. “전엔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같았는데, 언젠가부터 형과 달라졌어. 예전 같지 않아.” 천만의 말씀! 전혀 그렇지 않아.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땐 내 삶이 조금 덜 힘들었기에 내 미래가 덜 암울해 보였던 거야. 또 내면을 들여다봐도, 내 시선과 사고방식은 달라진 게 없고, 단지 그때 생각하고 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믿고 사랑한다는 것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렘브란트, 밀레,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야. 정반대거든. 다만, 믿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여럿으로 늘었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렘브란트적인 요소가 있고, 미슐레 속에 코레조가, 빅토르 위고 안에 들라크루아가 담겨 있어.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렘브란트의 일부가, 렘브란트의 그림에 복음서의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어. 결국, 모든 게 대부분 똑같다는 뜻이야. 있는 그대로 듣고 이해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하려 들지 않고, 원래 가지고 있는 개성을 깎아내리지 않고 비교 대상을 동등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버니언의 책에 마리스나 밀레가, 비처 스토의 책에 아리 쉐페르가 담겨 있는 거야.
그림을 너무 깊게 파고드는 열정을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다면, 책에 대한 사랑 역시 렘브란트에 대한 사랑만큼 신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거야. 나는 책과 그림, 두 분야에 대한 사랑이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이것도 저것도 다 부정한다고 생각해선 안 돼. 믿음을 버린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내면에 나만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난 여전히 같은 사람이야. 내 고민거리는 오직 이거 하나야. 나는 어디에 도움이 될까,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고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저런 지식을 더 많이, 더 깊이 알 수 있을까? 이런 고민거리가 끊임없이 날 괴롭히고 있어.
게다가 가난에 발목이 잡혀서, 이런저런 일에서 배척당하고, 꼭 필요한 것들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처지야. 그러니 우울할 수밖에 없고, 우정이나 고귀하고 진지한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함만 느껴지고, 사기를 통째로 꺾고 좀먹는 끔찍한 좌절감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운명은 애정이라는 본능에 장벽을 세워 가로막는 것만 같고, 역겨움에 구역질이 솟구치기만 해. 그래서 이렇게 외치곤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외부로도 표현될까? 마음속에는 커다란 화덕이 있는데 불을 쬐러 오는 이 아무도 없고, 지나가는 이들은 그저 굴뚝에서 나오는 작은 연기만 쳐다보다가 가던 길을 그대로 간다.
인간은 누구나 가끔은 멍한 순간을 겪는다. 그런데 간혹 남들보다 더 멍하게, 더 깊은 몽상에 빠지는 사람이 있어. 내가 그래. 내 잘못이지.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어. 이런저런 이유로 딴 데 정신이 팔렸거나 불안에 떨었던 거야. 하지만 다시 제대로 일어설 수 있어. 몽상가는 이따금 우물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 다시 밖으로 걸어 나온다고 하잖아.
멍해 보이는 사람도 일종의 보상처럼 순간순간, 정신이 또렷해질 때가 있어.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거든. 그걸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거나, 대부분 본의 아니게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지나치는 거지. 그런데 이 사람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오랜 세월을 견딘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게 돼. 쓸모없는 인간 같았고, 어느 자리에서도,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았던 사람인데,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는 언뜻 봤을 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능력을 펼쳐 보이는 거지. 솔직히, 지금 펜이 흘러가는 대로 이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네가 나를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 중에도 결이 다른 사람이 있거든.
천성이 비열하고 성격이 나태하고 무기력해서 게으른 사람이 있다. 네가 날 이렇게 여겨도 할 수 없지.
그런데 결이 다르게 게으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게으른 거야. 속으로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타들어 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왜냐하면, 형편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일종의 감옥 비슷한 환경에 고립돼 있으며, 생산적인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지 못한 데다, 운명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이야. 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본능적으로는 느껴. 나도 무언가는 잘하는 사람이다. 내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다! 나도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디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그것, 그게 과연 무얼까!
네가 나를 이렇게, 결이 다른 게으른 사람으로 여긴대도 상관없다.
새장에 갇힌 새도 봄이 찾아오면 자신이 잘하는 게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해야 할 일이 있음도 강렬히 느껴.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왜일까? 할 일이 기억나지 않고, 생각이 모호해지다가 이런 생각이 들거든. ‘다른 새들은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낳아 키우잖아.’ 그러고는 새장 창살에 머리를 들이받아. 하지만 새장은 멀쩡하고 새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 고통스럽지.
“이런 게으름뱅이가 있나.” 지나가던 다른 새가 한마디 던져. 돈이 많아 놀고먹는 녀석이라고. 그런데 새장에 갇힌 새는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거든. 그냥 건강히 지내고 햇살을 받으며 그럭저럭 즐겁게 지내는 거야. 다만 철새들이 이동하는 계절이 찾아오면 침울해지지. 새장 속의 새를 봐주는 아이들이 묻는 거야. 필요한 건 다 가지고 있지 않냐고. 새는 천둥 번개가 내리칠 것처럼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속으로는 운명에 맞서고 싶은 반항심을 느끼게 돼. “나는 새장에 있어, 새장 안에. 그러니 부족한 게 있을 리 있겠어, 이 멍청이들아! 내겐 없는 게 없다고! 다만 부디, 자비를 베풀어서 다른 새들처럼 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결이 다른 게으른 사람은 이 새장 속의 새 같은 사람이야.
사람들은 이따금 뭔지 모르지만 끔찍하고 소름 끼치고 아주 흉측한 감옥 같은 곳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해방의 시간 역시 찾아와. 뒤늦게라도 해방의 시간은 꼭 온다. 부당한 이유든 정당한 이유든 금 간 명성, 가난, 피할 수 없었던 운명, 불행, 이런 것들이 감옥의 죄수를 만들어내는 거야.
우리를 가두고, 가로막고, 묻어 버리려는 주체가 무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빗장, 철창, 벽은 여전히 느낄 수 있어.
이 모든 게 그저 상상의 산물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면 이렇게 자문하겠지. 주님, 이게 얼마나 오래 갈까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까요? 영원히 계속될까요?
이 감옥을 사라지게 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진지하고 깊은 사랑이야. 친구가 되는 것, 형제가 되는 것, 사랑하는 것, 그게 바로 전능한 힘으로, 강력한 마법으로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 사랑을 갖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죽음 안에 머무는 거지.
연민의 정이 태어나는 곳에 생명이 태어나는 거야.
그 감옥은 시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 편견, 오해, 이런저런 것에 대한 치명적인 무지, 불신, 왜곡된 수치심.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꺾이고 시들해지는 동안 넌 우뚝 일어섰다. 내가 연민을 잃었다면 넌 그걸 얻었고. 난 그래도 만족해. 진심이고, 앞으로도 계속 기뻐할 거야. 만약 네가 경솔하고 가벼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걱정했겠지. 기쁨의 날이 길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너는 분명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니 오래도록 기뻐하리라고 믿는다. 다만, 네가 이 형을 형편없는 게으름뱅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바라봐 준다면 마음도 편하겠구나.
그리고 혹시라도 형이 널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내가 네 도움을 받았듯, 너도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니, 어떤 식으로든 내가 도울 일이 있을 때 주저 말고 말해주면 좋겠다. 신뢰의 의미로 생각하마. 서로 떨어져 살았던 만큼 여러 면에서는 달리 보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서로 도울 일이 있을 거다.
1880년 6월 22일 화요일에서 24일 목요일 사이, 보리나주
일상의 풍경이 열 배쯤 더 좋아
사랑하는 테오에게
지난번 편지는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 썼다는 걸 네가 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리라 믿는다. 그림 실력은 늘지 않고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펜을 들었던 거야. 마음이 더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결국 네 눈에는 내가 편지 말미에 흉봤던 부류들이나 나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겠구나. 자신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생각 않고 경거망동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이것만 꼭 알아주면 좋겠다. 요 며칠 사이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 말이야. 적어도 데생을 12장 마무리했는데, 대부분 연필과 펜이었지만 내가 봐도 많이 나아진 것 같더라.
어렴풋이 랑송의 데생처럼도 보이고, 또 얼핏 영국식 목판화와도 비슷해. 물론 더 어색하고 서툴긴 하지. 잔심부름꾼, 광부, 눈 치우는 사람, 눈길 산책, 노부인들, 노신사(발자크의 『13인당 이야기』의 주인공 페라귀스) 등을 그려 넣었어. 작은 그림 2장은 동봉한다. 〈출발〉과 〈잉걸불 앞에서〉야. 아직은 그럴싸하다고 말하긴 이르지만, 그래도 괜찮아지기 시작했어. 거의 매일 같이 모델을 만날 수 있어. 나이 든 잔심부름꾼, 노동자, 혹은 꼬마가 자세를 취해줘. 다음 일요일에는 아마 군인 한두 명이 모델을 서줄 것 같다.
나쁜 기분이 가시고 나니 너는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 전체가 좋게 보이고, 달라 보인다. 풍경도 다시 데생으로 그려봤어. 황야를 배경으로 했는데 그려본 지 좀 오래됐더라고.
난 풍경을 좋아하는데 일상에 대한 관찰은 그보다 한 열 배쯤 더 좋아하지. 가끔은 두려울 정도로 정직한 내용이 담겨 있거든. 가바르니, 앙리 모니에, 도미에, 드 르뮈, 앙리 필, Th. 쉴레르, Ed. 모렝, G. 도레(〈런던〉), A. 랑송, 드 그루, 펠리시엥 롭스 등이 표현한 일상은 대단한 걸작들이야.
이 대가들처럼 되겠다고 큰소리치는 건 아니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노동자들을 계속 그려나가다 보면 머지않아 신문이나 책에 삽화 정도는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무엇보다 모델들에게 사례할 능력을 갖추게 되면, 여성을 포함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고, 그만큼 그림 실력도 월등해질 거야. 느낌이 온다니까.
어쩌면 초상화 그리는 법도 터득하게 될 것 같아. 물론 어마어마한 연습이 뒤따라야겠지. 단 하루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 선 하나 긋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어.
1881년 1월, 브뤼셀
농부의 삽질 동작만 다섯 번도 넘게 그렸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삽을 든 농부를 최소 5장은 넘게 그렸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삽질 동작을 포착한 거지. 씨 뿌리는 사람은 2장, 빗질하는 아가씨도 2장 그렸어. 흰 모자 쓴 아낙과, 양손을 머리에 얹고 팔꿈치를 무릎에 얹은 자세로 난로 앞 의자에 앉은 병든 노인도 1장씩. 물론 그게 다는 아니야. 먼저 다리를 건넌 양 두세 마리를 뒤따르는 양 떼도 그렸어. 삽질하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일하는 사람, 여자든 남자든 계속 그렸어. 전원생활과 관련된 모든 걸 연구하고 관찰하고 그려봤다. 다른 화가들도 다들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지금은 더 이상 예전처럼 자연 앞에서 나약한 존재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헤이그에 갔을 때 콩테랑 연필을 가져왔는데 지금 그걸 주로 사용하고 있어. 또 붓과 찰필도 쓰기 시작했어. 세피아(오징어 먹물로 만든 갈색 물감)도 좀 써봤고 먹물도 좀 써봤고 색깔 있는 물감도 써봤고. 요즘 그린 데생들은 확실히 예전 것들과 달라. 인물들이 『바르그의 목탄화 교본』 속 그림들과 거의 비슷해지고 있고. 그렇다고 풍경화 실력이 줄지도 않았고, 오히려 는 것 같다.
그루터기들이 남은 밭을 갈고 파종하는 장면이야. 폭우가 밀려들기 직전의 분위기를 담아 크게 그린 데생도 하나 있어.
작은 크기의 나머지 2장은 삽질하는 농부의 포즈야. 이런 걸 좀 더 많이 그릴 생각이야.
다른 하나는 씨가 담긴 바구니를 든 사람이고. 이런 바구니를 든 아낙들을 많이 그리고 싶어. 지난봄에 보여줬던 것처럼 작은 크기의 인물들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거든. 첫 번째 크로키 전경에 있는 인물들 있잖아.
아무튼 마우베 형님 표현대로 ‘공장 전체가 가동 중이다.’
1881년 9월 중순, 에턴
말괄량이(자연) 길들이기
사랑하는 테오에게
자연은 처음에 항상 그리는 사람에게 저항한다. 하지만 단호하게 그려나가면 자연의 적대감에 휘둘리지 않아. 오히려 힘이 실리지. 사실상 화가와 자연은 뜻을 같이하니까. 자연은 손으로 만져지는 대상이 아니나, 화가는 자연을 손으로 움켜쥐고 단단히 붙잡아야 해. 그렇게 한동안 씨름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나면, 자연이 유연해지고 고분고분해지지.
내가 그 경지에 다다랐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세상에, 어림도 없지. 다만 이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있어. 자연과의 싸움은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비슷한 것 같아(좋든 싫든, 저항에는 끈기로 대응하는 방식이 말이야). 어느 분야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데생만큼은 내버려두는 것보다 가까이 다가가 움켜쥐는 게 훨씬 나은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물 데생이 대단히 유용하고, 풍경화 데생에도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진다. 버드나무를 생명체(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체가 맞지)로 대하며 데생을 시작하면, 그 한 그루 나무에 오롯이 생명을 불어넣을 때까지 쉼 없이 작업하는 동안 자연스레 그 주변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야.
작은 크로키 몇 장 동봉한다. 요즘은 뢰르로 가는 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잦다. 가끔 수채화나 세피아 묵화를 시도하는데, 처음부터 잘될 리는 없잖아.
1881년 10월 12일 수요일에서 15일 토요일 사이, 에턴
케이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얘기를 털어놓고 싶다. 아마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새로울 것도 없겠지.
나는 올여름에 케이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되었다. ‘케이에게는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나에게는 케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어. 그래서 그렇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이제껏 살아온 과거처럼 미래에도 살아갈 것이기에 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하더라.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아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 그녀의 ‘아니, 싫어, 절대로’ 앞에서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끝난 일이라고 여기지 말고, 희망을 갖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난 포기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싫어, 절대로’라는 반응이 전부이지만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그 후로 당연히, 인생의 소소한 고통들을 수없이 감수하며 지내고 있다. 책에 쓰이면 읽는 이들에게 재미라도 전해 주지, 직접 겪으면 절대로 유쾌할 수 없는 불행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뻐. 포기나 ‘사랑하지 않을 방법’ 따위는 당신들이나 따르라고 하고, 조금 더 용기를 냈던 내 결정이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이런 경우에는 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아는 게 놀랍도록 어렵다. 그러나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성여야지.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이제껏 네게 침묵했던 이유는, 내 마음이 너무 애매하고 어중간해서 네게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모두에게 다 말했다. 케이는 물론이고 아버지, 어머니, 스트리커르 이모부와 이모, 센트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도. 그나마 호의적으로, 내가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조용히 말씀해 주신 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센트 큰아버지셨어. 내가 ‘아니, 싫어, 절대로’라고 말한 케이에게 화내지 않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모습이 좋으셨나 봐. 난 케이가 앵무새처럼 계속 내뱉는 말은 멈추길 바라지만, 항상 그녀의 행복을 바라거든. 마찬가지로 스트리커르 이모부의 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아. 내가 오랜 친분 관계들을 끊어서 망치고 있다고 했지만, 난 ‘오랜 친분들을 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옛 관계들을 새롭게 해서 더 돈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어쨌든 난 우울과 비관은 저 멀리 날려 버리고 계속 이 방향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야. 그동안에도 열심히 일했어. 케이를 만난 뒤로 그림이 훠씬 더 좋아졌다니까.
이제 상황은 좀 더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지. 케이는 여전히 ‘아니, 싫어, 절대로’라고 말하고 있고, 난 연로한 양반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리겠지. 그네들은 이미 다 끝난 옛일로 치부하면서, 나를 기어이 포기시키려들 테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신중하실 게다. 12월 이모부 생신 때까지는 내게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으며 어르겠지. 추문을 피하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그 후에는 날 떼어놓는 조치를 취하실 테니 걱정이야.
상황을 명확히 설명하려다 보니 다소 원색적인 표현을 쓰는 점은 미안하다. 요란한 색으로 굵고 진하게 선을 긋는 식으로 상황을 설명했어. 하지만 이래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서 겉돌고 있는지 네가 더 쉽게 이해하지. 그러니 어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날 나무라지는 말아라.
이 양반들은 내 뜻에 극구 반대할 거라는 것만 네가 명확히 알면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와 케이가, 만남은 고사하고 대화나 편지도 주고받지 못하게 할 거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면 케이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으니까. 참 이상하지. 케이는 자신의 의지는 결코 달라질 일 없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어른들은 케이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날 설득하면서도 그녀가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한다니까.
이 어른들의 생각은, 케이가 마음을 바꾼 때가 아니라, 내가 매년 최소 1,000플로린씩은 버는 사람이 되었을 때 바뀔 게다. 아마 테오 너도 내가 상황을 억지로 끌어가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들 들었겠지? 아니, 전혀 그런 게 아니야. 케이와 내가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알아보겠다는 건 지나친 요구도, 비상식적인 요구도 아니라고. 아마 내가 부자였다면 얘기가 달랐겠지.
‘그녀를 사랑할 거야.
결국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그녀가 사라질수록, 그녀는 또렷해지지.’
테오야, 너도 사랑에 빠져봤잖니? 제발 그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사랑에 따르는 이 소소한 고통은 겪을 가치가 있거든. 때로는 비탄에 빠지고, 지옥 같은 순간도 있지만, 훨씬 좋은 게 있으니까.
그래, 아우야, 살다가 언젠가 사랑에 빠지거든 내게 말해다오. 이 복잡한 상황들은 지적하지 말고, 그저 내 마음만 알아다오. 그녀가 ‘네’라고 대답해 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지금으로서는 ‘아니, 싫어, 절대로’만으로도 행복하단다. 정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가 있어. 늙은 현자들은 아무 의미 없다고 하더라만.
추신: 계속 나에게 이 문제를 거론하거나 편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데, 그렇게는 못 하겠다. 센트 큰아버지에게 이것만 확실히 해드렸어. 불시에 꼭 편지해야 할 형편이 아니라면, 당분간 스트리커르 이모부에게 편지하지 않겠다고. 종달새가 봄에 노래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는데 “아니, 싫어, 절대로”라는 대답을 듣게 되거든, 절대로 포기하지 마! 하지만 넌 항상 운이 따르는 아이니까, 네게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는다.
1881년 11월 3일 목요일, 에턴
<슬픔>, 텅 비어 있는 마음
사랑하는 테오에게
오늘 우편으로 데생 1점을 보냈어. 혹독한 지난겨울, 네가 보여준 호의에 대한 감사 표시다. 지난여름에 밀레의 〈양치기 소녀〉 대형 판화를 보여줬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어. ‘선 하나로 많은 걸 표현할 수 있구나!’ 물론 내가 밀레처럼 선 하나로만 그려 보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인물화에 내 감정을 담아 보려 애썼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또한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있는지도 알아주리라 믿는다. 일단 시작한 일이니까, 이 기회에 누드 습작을 30여 점쯤 그려보고 싶어.
모델을 직접 보고 그리긴 했는데, 이건 모델을 앞에 두고 습작한 건 아니야. 애초에 종이를 3장 겹쳐놨다가, 윤곽선을 제대로 살리려고 공들여 눌러 그렸고, 맨 위 종이를 걷어내니 아래 2장에 선이 고스란히 남아서 얼른 원본처럼 완성한 거야. 어떻게 보면 원본보다 새 그림인 거지.
이 데생을 보고 내가 이 편지를 쓴 이유를 알았을 거야. 테르스테이흐 씨한테 돈 갚는 건 좀 미뤘으면 해서. 내가 지금 그 돈이 정말 필요하거든. 모델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야. 모델료가 그리 비싸진 않다만, 수시로 들어가다 보니 꽤 되는구나. 어쨌든 이 일은 너 편한 대로 하되, 크게 무리가 아니라면 약속한 돈은 월초에 보내주면 좋겠다.
추신: 깔끔한 회색 액자에 넣으면 잘 어울릴 거야. 매번 이렇게 그리진 않지만, 이런 식의 영국식 데생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그래서 한 번 더 그려 보려고. 게다가 애초에 너 주려고 그려서, 미술을 잘 이해하는 너니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이런 걸 표현하고 싶었거든. 미슐레의 책 구절처럼
‘마음은 여전히 텅 비어 있고
아무것도 그 마음을 채울 수가 없네.’
1882년 4월 10일 월요일 추정, 헤이그
<슬픔>과 <뿌리>, 두 생명의 치열한 투쟁이 닮았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커다란 데생 2점을 마무리했어. 하나는 이전에 그렸던 〈슬픔〉을 더 크게 그린 건데, 배경 없이 인물만 그렸다. 포즈는 거의 안 바꿨다만, 머리카락은 뒤로 넘기지 않고 앞으로 늘어뜨렸고 부분적으로 땋은 머리를 그렸어. 그렇게 하니까 어깨, 목, 등이 보이더라고. 어쨌든 인물을 더 공들여 그렸다.
다른 하나는 〈뿌리〉인데, 모래 같은 땅에 박힌 나무의 뿌리야. 풍경을 마치 인물인 것처럼 생각하며 그린 거야.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심하게 뒤틀린 채 땅속에 박혀 있는 뿌리와, 비바람에 부분적으로 드러난 뿌리를 함께 표현하고 싶었어.
하얗고 마른 여성의 인물화나, 뒤틀리고 까칠까칠한 검은색 나무뿌리나 모두 삶에 투쟁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