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의 결심
만복사저포기
-양생,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하다
첫 수업
이생규장전
-이생, 담 안을 엿보다
두 번째 수업
취유부벽정기
-홍생, 흥에 취해 부벽정에서 노닐다
세 번째 수업
남염부주지
-박생, 염라대왕과 독대하다
네 번째 수업
용궁부연록
-한생, 용궁잔치에 초대되다
마지막 수업
작가의 말
매월당 김시습 연보
매화나무 위쪽 하늘에 초저녁달이 둥실 떠올라 마당이 달빛으로 환했다. 선행은 마당 숯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약을 달이고 있었다. 잽싸게 부채질을 하자 발그레한 숯불에서 불티가 날아올랐다.
‘약은 모름지기 정성으로 달이는 법. 보약은 특히 그렇지.’
선행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부디 이 보약이 효험이 있어서 설잠 스님이 예전처럼 기력을 되찾게 되기를 빌었다. 그래야 선행도 마음 편히 이곳 금오산실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손으로는 계속 부채질을 하며 선행은 금오산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불빛이 일렁이는 방문에 서안 앞에 앉은 스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금오산실은 지난해 가을부터 용장사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선행이 설잠 스님과 함께 지은 초가삼간이었다. 꼬박 이태 동안 용장사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올봄에 마침내 집을 다 지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지. 비록 정지(부엌)에 스님 방과 선행의 방, 말 그대로 방이 세 칸뿐인 소박한 초막이었지만 스님과 선행에게는 그 어떤 큰 사찰보다 흡족한 처소였다. 스님은 이곳을 금오산실이라 이름 지었고, 선행은 여기서 오래오래 스님에게 시(詩)를 배우고 불도를 닦으며 살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스님을 만나 이곳 경주에 온 지 삼 년 만에, 금오산실에 둥지를 튼 지 고작 일곱 달 만에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고 스님한테는 조만간 말을 꺼낼 것이지만 아무튼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스님이 한양에 가 있던 지난 다섯 달 동안 홀로 금오산실을 지키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돌이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 끝에 굳힌 결심이었으니 마음이 뒤바뀔 일은 없을 터였다.
불가에서는 가는 사람 말리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법이니 선행이 간다고 해도 스님은 알았다, 하면서 고개 한 번만 끄덕이면 그만일 터였다. 그래서 스님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즉시 자신의 결심을 알릴 작정이었는데, 보름 전 휘적휘적 허깨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스님은 이튿날부터 자리에 드러누워 끙끙 앓기 시작했다.
스님의 그런 모습은 처음인지라 선행은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부지런히 탕약을 달여 가며 스님을 보살폈다. 스님은 열흘을 꼬박 앓고 나서야 나흘 전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예전처럼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하지만 기력은 아직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한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기가 다 빠지셨을까.’
경주에 정착하기 전에는 스물셋부터 스물여덟까지의 창창한 젊은 날을 조선 땅 곳곳을 방랑하며 보낸 스님이었다. 열다섯 사미승이었던 선행이 스님을 만난 것은 그 방랑이 끝났을 무렵이었는데 그때 스님의 몸은 방랑으로 다져져 강건하고 탄탄했다. 뿐만 아니라 이태 전 가을에도 한 달 동안 한양에 머물다 왔는데, 스님은 잠깐 아랫마을에 다녀온 것처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체 어찌된 일인 것일까. 이번에 한양으로 간 것은 사월 초파일 원각사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지난 다섯 달 동안 한양에 머무는 사이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괴팍하고 별난 스님 속을 확 뒤집어 놓을 만한 그런 고약한 일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해 보던 선행은 고개를 저어 잡다한 생각들을 털어 버렸다.
‘아냐. 하나도 안 궁금해. 내가 할 일은 오직 약이나 잘 달여서 스님이 기력 찾으신 다음에 떠나는 일뿐이라고.’
얼마 뒤 선행은 약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서안 앞에 앉아 책을 읽던 스님이 약그릇을 내려놓는 선행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제 다 나았는데, 또 무슨 약이냐?”
“이건 보약이에요. 아까 낮에 선재 스님이 식량이랑 찬거리랑 같이 갖다 주셨어요. 용장사 주지스님이 특별히 보내신 건데, 한 제(劑)나 돼요. 하루에 한 첩씩 꼬박 스무 날을 드시면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실 거랍니다. 제가 날마다 정성껏 달여 드릴 테니까 스님은 부지런히 드시고 예전처럼 강건해지시기만 하면 되세요.”
출가하기 전 학문이 뛰어난 유학자였던 스님에게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후원자들 및 벗들이 여럿 있었다. 경주 부윤, 용장사 주지스님, 생원들이며 승려들. 금상의 친형이며 승려인 효령대군도 스님을 아낀다고 들었다. 이태 전과 올해 설잠 스님이 한양에 올라간 것도 효령대군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마운 일이로구나.”
선행은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대답하는 스님을 새삼 찬찬히 살펴보았다. 살이 빠져 뺨이 홀쭉했고 이마의 주름살도 깊어진 듯했다. 서른한 살이 아니라 마흔 살도 훌쩍 넘어 보여 선행은 마음 한 구석이 짠했다. 그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문득 금오산실을 떠나기가 아쉽다는 마음이 불쑥 솟구쳤다. 선행은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하여 그 마음을 내리눌러 버렸다.
‘일단 결심을 했으면 망설이지 말고 실행해야지. 사나이 대장부가.’
비록 머리를 깎았어도 대장부인 건 틀림없다. 올해 열여덟이니 어른이, 대장부가 되어야 마땅한 나이였다. 하니 이제 곧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놓아야 할 터였다.
“식기 전에 어서 죽 들이키세요.”
스님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보약을 조용히 마시고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행이 속으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막 말을 꺼냈을 때였다.
“저기,”
“이거,”
스님이 선행과 동시에 말하면서 서안 아래쪽에 놓인 얇은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있기는 한데 스님 먼저 하십시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
“허, 그놈 참. 안 보는 사이에 철이 좀 들었구나.”
스님이 얼굴을 부드럽게 펴면서 선행 앞으로 책을 내밀었다.
“당분간은 시 공부 대신 이야기 공부를 하자꾸나.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 이야기를 한 편 써 봤다. 앞으로 몇 편 더 써서 한 권으로 묶을 작정인데, 이 책이 첫째 편이다.”
선행은 입술을 부루퉁 내밀며 스님을 쳐다보았다.
“저는 시 공부를 하려고 스님을 따라온 거지 이야기는 아닌데요. 이야기는 아녀자들이나 좋아하는 거잖습니까. 사나이 대장부가 시로써 포부를 논하고 이상을 논해야지, 이야기라니요.”
“너는 여태까지 이야기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전등신화’도 안 읽어 봤어? 명나라 사람 구우가 쓴 그 책 말이다. 아녀자들이 아니라 주로 선비들이 앞다투어 읽었지. 물론 한문을 아는 아녀자들도 많이들 읽었고.”
“헤, 저도 해인사에 있을 때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책이라고 소문이 나서 몰래 책을 구해 읽는 스님들이 많았지요. 게다가 ‘전등신화’에는 시도 많고, 구우가 원래 명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라니까….”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도 ‘전등신화’와 비슷한 류(類)다. 기이하고 슬픈 이야기에다 시도 아주 많이 들어 있지.”
선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차피 떠날 거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당연히 무슨 공부든 해야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전등신화’처럼 시도 많이 들어 있다니, 이야기 공부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야기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스님 시나 좋은 옛 시를 감상하고, 제가 쓴 시를 스님께서 비평해 주시는 것이 시 공부였잖습니까.”
“이야기 공부도 비슷하다. 네가 책을 다 읽고 나서 감상을 이야기하면, 나는 이야기를 지은 사람으로서 네 감상에 대해 평을 해 주는 것이지. 너는 이 이야기책을 읽고 느낀 점, 또는 질문하고 싶은 점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아라. 그 사이에 나는 두 번째 이야기를 쓸 테니. 하여 둘째 권이 다 지어지면 그때 첫 수업을 하고, 그 이야기를 다음 과제로 내주마. 알겠느냐?”
“네.”
선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님이 쓴 이야기책을 받아들었다.
“이제 네가 하고픈 말을 해 보아라. 뭐냐?”
선행은 머뭇거렸다. 새 과제를 받자마자 떠난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어차피 스님이 보약을 다 드시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에 떠날 작정이었으니, 굳이 지금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왕이면 이번 과제까지 다 마친 후에 제 결심을 알리는 것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을 것 같다. 진정한 대장부는 부여받은 임무를 반드시 완수한다. 그래야 깔끔하다.
“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좀….”
“싱거운 놈.”
“근데 스님, 왜 갑자기 이야기를 쓰신 겁니까? 스님은 세 살적부터 주야장천 시를 써 오셨잖습니까? 스님이 세 살 때 쓰신 시까지도 저는 다 외우고 있는데요.”
“너는 밥만 먹고 사니? 사람이 때로는 떡도 먹고 싶고 곡주도 마시고 싶고 그러는 거지.”
그럼 이야기가 떡이라는 얘긴가? 하지만 캐물었다가는 비유도 못 알아듣는 머리 나쁜 놈이라는 지청구만 들을 것 같아서 애써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나가 봐라. 고단하구나. 나도 좀 쉬어야겠다.”
선행은 약그릇을 정지에 갖다놓고 제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켜고 스님의 이야기책을 살펴보았다. 겉장에 ‘萬福寺樗蒲記’라고 씌어 있었다.
“‘만복사저포기’. 흠. 만복사란 절에서 저포놀이를 하는 이야기인 모양이네.”
기억에도 없는 부모가 어렸을 때 절에 맡긴 뒤로, 지금까지 절에서만 죽 살아온 선행인지라 절이 배경인 이야기는 일단 익숙하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선행은 겉장을 펼치고 첫 문장을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었다.
“남원유양생자(南原有梁生者). 남원 땅에 양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남원 땅에 양생(梁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혼인도 못한 채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방 밖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바야흐로 봄이 되어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모양이 마치 옥구슬 같기도 하고 은덩이 같기도 했다.
양생은 달빛 그윽한 밤이면 늘 그 배나무 아래를 거닐곤 했는데, 어느 날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한 그루 배꽃나무 외로움을 함께하누나.
가여워라, 달 밝은 이 밤 헛되이 보내니
젊은이 혼자 누운 외로운 창가로
어디서 아름다운 님이 퉁소를 불어 보내나.
물총새 쌍을 이루지 못해 외로이 날고
원앙도 짝을 잃고 맑은 물에 멱을 감네.
누구네 집에 약속 있나 바둑 두는 저 사람
한밤에 등잔불 점을 치며 창에 기대 시름하네.
시를 다 읊었을 때 홀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아름다운 배필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까 근심하리오?”
양생은 누가 그 말을 한 것인지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다음날은 마침 삼월 스무나흗날이었다. 이 고장에는 이날이면 만복사에 등불을 켜 달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그날도 많은 남녀가 만복사에 모여들어 제각기 소원을 빌었다.
날이 저물고 범패도 끝나자 인적이 드물어졌다. 양생은 법당으로 들어가 불상 앞에 섰다. 그러고는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어 앞으로 던지며 부처를 우러러보았다.
“제가 오늘 부처님과 더불어 저포놀이를 한판 하려고 합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법연을 베풀어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하고 싶은 제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합니다.”
양생은 축원을 마치고 저포를 던졌다. 결과는 양생의 승리였다. 그는 즉시 불상 앞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제가 이겼으니 꼭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양생은 그렇게 다짐을 둔 뒤, 불상을 모셔 놓은 자리 아래 숨어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한 규수가 나타났다. 나이는 열대여섯쯤 되었을까.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리고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하늘의 선녀처럼 아름답고 단아한 규수였다.
규수는 기름병을 들어 등잔에 기름을 부은 후 향을 꽂았다. 이어 부처 앞에 세 번 절을 올린 후 꿇어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팔자가 어찌 이리 사납고 박복할까?”
규수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 들고 웅얼웅얼 낮은 소리로 축원을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뒤 축원을 마친 규수는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글을 내던지고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양생은 틈새를 통해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불쑥 뛰쳐나가 말을 건넸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리 슬피 우시오? 이 축원문을 내가 읽어봐도 되겠소?”
규수는 양생을 보고 놀란 듯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눈물을 씻으며 축원문을 주워 내밀었다. 양생은 축원문을 받아 읽어 보았다.
아무 고을 아무 곳에 사는 아무개가 부처님께 아룁니다. 예전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칼날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봉화가 해마다 피어올랐습니다.
왜구들이 집들을 불살라 버리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니 사람들은 동서로 달아나 숨고 사방으로 도망가기 바빴으며 친척과 하인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소녀는 냇버들처럼 연약한 몸으로 멀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규방 깊숙이 숨어 끝까지 정절을 지키고 깨끗한 행실을 보전하여, 난리 중에서도 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딸자식이 정절을 지켜낸 것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한적한 곳으로 피신시켜 임시로 초야에 묻혀 살게 하셨습니다. 그게 이미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안전하다고는 해도 저는 외톨이입니다. 가을 달밤과 꽃피는 봄날을 정처 없는 구름이나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며 하릴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따름입니다.
인적 없는 빈 골짜기에서 쓸쓸히 지내면서 복 없는 한 평생을 한탄했습니다. 또 맑게 갠 밤을 홀로 지새우면서 짝 잃은 새의 울음소리에 함께 울었습니다.
이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외로움에 혼백이 상해 가고 여름 낮 겨울밤에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하니, 부처님께서는 부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시옵소서.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전생의 업보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저에게 부여된 운명의 인연이 있다면 어서 빨리 만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비옵나이다.
축원문을 다 읽은 양생은 규수 또한 자신처럼 인연을 찾고 있음을 알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양씨 성의 선비, 양생이라 하오. 나 또한 부처님께 축원을 드리며 인연을 찾고 있던 참이었소. 그대는 어디 사는 뉘시오?”
“저 또한 사람이니,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셔요. 선비님 또한 아름다운 배필만 얻으면 그만이지 굳이 제가 누군지 물어보실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양생은 규수의 대답을 배필이 되겠다는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역시 부처님이 약속을 지킨 것이라 생각한 양생은 환하게 웃으며 규수를 바라보았다.
이때 만복사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승려들은 절 한구석에 머물고 있었다. 법당 앞에는 행랑채만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고 행랑이 끝나는 곳에는 아주 작은 마루방이 있었다.
양생이 규수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향하자, 규수도 다소곳이 따라왔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 위로 떠올랐다. 달그림자가 창살에 어른거리는데 갑자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규수가 물었다.
“게 누구냐? 오월이냐?”
“예, 저예요. 평소에 아가씨께서는 중문 바깥에 나가시는 일이 없고 산책도 몇 걸음 떼지 않으셨는데, 어제 저녁에는 어쩐 일인지 나가신 후 돌아오지 않으셔서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답니다. 아가씨는 어찌 이곳까지 오셨어요?”
규수가 대답했다.
“오늘 일은 우연이 아니다. 하늘이 돕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마침내 이곳에서 고운 님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단다.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혼인을 한 것은 비록 예법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서로 즐겁게 맞이하게 된 것은 분명 평생의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게야. 너는 집에 가서 돗자리와 주과를 가져오너라.”
시녀는 명을 받들어 뜰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1)이나 되었다. 차려놓은 방석과 주안상은 소박하여 아무 꾸밈이 없었지만 술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코 인간 세상의 맛이 아니었다.
1)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
양생은 순간 의아하고 괴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규수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맑고 고왔으며 얼굴과 몸가짐도 점잖고 조신했다. 분명 귀한 집 처자가 담을 넘어 나온 것이라 여기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규수가 양생에게 술잔을 올렸다. 그리고 시녀에게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라고 시키면서 양생을 돌아보았다.
“이 아이는 분명 옛 곡을 그대로 부를 거예요. 제가 새 노래 가사를 하나 지어 흥을 보태면 어떨까요?”
양생이 흔쾌히 응낙하자 규수는 만강홍(萬江紅)2) 가락에 맞추어 한 곡을 지은 후 시녀에게 부르게 했다.
2) 중국 남송의 명장 악비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노래.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이 얇구나.
몇 번이나 애태웠던가, 향로에 불 식어 가니.
저문 산은 검푸르게 엉겨 있고
저녁 구름은 우산처럼 펼쳐져 있네.
비단 장막 원앙 이불 함께 할 님이 없어
금비녀 비껴 꽂고 퉁소를 불어 보네.
애달파라 세월은 빨라
마음속엔 번민만 가득.
등불은 사위어 가고 병풍은 나지막한데
홀로 눈물 훔친들 누가 위로해 줄까.
즐거워라, 오늘밤은
옛 피리 한 곡조가 봄날을 되돌려
무덤 속 천고의 한 깨뜨리니
고운 노래 가락에 술잔을 기울인다.
후회스럽구나, 지난날 한을 품고
눈썹 찡그린 채 외로이 잠들었던 것이.
노래가 끝나자 규수가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양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은 한없이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인연이 닿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은혜가 아니겠어요? 낭군께서 너무 늦은 인연이라 하여 저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이 인연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영원히 헤어져야 합니다.”
양생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의심을 얼른 털어버리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인연에 이르고 늦은 게 어디 있겠소. 어떤 인연이든 하늘이 맺어 주신 인연은 소중한 법이오. 나는 우리의 인연이 부디 오래 계속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러나 아무래도 규수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 양생은 유심히 그 행동을 살펴보았다.
이때 달이 서산 봉우리에 걸리고 닭 울음소리가 외진 마을에 울려 퍼졌다.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이내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규수가 시녀를 둘러보았다.
“얘야, 자리를 거두어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을 하자마자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규수가 다시 양생에게 눈길을 주며 손을 내밀었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저와 함께 손을 잡고 가시지요.”
양생은 규수가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고는 규수의 손을 잡았다. 둘은 여염집들을 지나치며 계속 걸어갔다. 개들이 울타리 너머에서 짖고 사람들이 길거리를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양생이 규수와 함께 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물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어디를 다녀오는 겐가?”
양생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술이 취해 만복사에 누워 있다가 옛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아침녘이 되었을 무렵 규수는 양생을 이끌고 무성한 풀숲 사이로 들어갔다. 이슬이 흠뻑 내려 있었는데 따라갈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양생이 의아한 눈빛으로 규수를 보았다.
“어찌 거처하는 곳이 이리 험하오?”
“홀로 사는 여인의 거처란 원래 이렇답니다.”
규수는 또 농을 담아 ‘시경(詩經)’ 한 구절을 외웠다.
촉촉이 젖은 이슬길
어찌 이른 밤에 다니지 않나?
길에 이슬이 많기 때문이라네.
양생도 즉시 화답하여 시경 한 구절을 읊었다.
어슬렁어슬렁 저 여우
저 냇물 다리 위를 어정거리네.
넓은 마을길은 평탄하여
아름다운 아가씨 오락가락 노니네.
두 사람은 번갈아 시를 읊고 나서 한바탕 웃었다.
드디어 규수의 집이 있는 개령동(開寧洞)에 다다랐다. 쑥대가 들판을 뒤덮고 가시덤불이 하늘을 찌를 듯 무성했는데 그 가운데 집 한 채가 있었다. 작지만 매우 정갈한 집이었다.
규수가 양생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방 안에는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 정돈되어 있는데 그 광경이 어젯밤과 비슷했다.
양생은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누린 즐거움은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시녀가 어여쁘면서도 수더분하고, 그릇이 깨끗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하지만 양생은 규수와 정이 깊이 들어서 더 이상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규수가 양생에게 말했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삼 년과 마찬가지입니다. 낭군님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을 돌보셔야지요.”
양생은 깜짝 놀라고 한편으로는 서글퍼하며 말했다.
“우리의 인연이 벌써 다했단 말이오? 어찌 이별이 이다지도 빠른 것이오?”
“언젠가 다시 만나 평생의 소원을 다 풀게 될 거예요. 오늘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시게 된 것도 반드시 지난날의 인연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 이웃 친지들을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양생은 그러마고 대답했다. 규수는 곧 시녀에게 사방의 이웃들을 모셔 오라고 시켰다. 그중 첫 번째는 장씨, 두 번째는 오씨, 세 번째는 김씨, 네 번째는 유씨였는데, 모두 문벌 높은 집 따님들이었다. 규수와는 한마을에 사는 친척이면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들이었다.
모두 성품이 온화하고, 풍류와 운치가 범상치 않았다. 게다가 총명하고 문자를 알아 능히 시부(詩賦)를 지을 줄 알았다. 이웃들은 모두 칠언절구 네 편씩을 지어 양생에게 이별 선물로 주었다.
첫 번째인 정씨는 태도에 풍류가 있고, 구름 같이 틀어 올린 머리채가 귀밑머리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읊기 시작했다.
봄밤에 꽃과 달이 어우러져 곱고 또 고운데
오래도록 봄 시름에 잠겨 세월 가는 줄 몰랐네.
한스러워라, 비익조3)처럼
푸른 하늘에서 쌍쌍이 춤추며 노닐지 못하는 것이.
3)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어서 암수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새.
무덤 속 등불엔 불꽃도 없으니 이 밤을 어이하리.
북두칠성 가로눕고 달도 반쯤 기울었네.
서러워라, 무덤에는 찾아오는 이 없이
푸른 적삼 구겨지고 귀밑머리만 헝클어졌네.
매화꽃 지고 나니 정다운 약속도 속절없네.
봄바람도 지나가니 일이 이미 글렀구나.
베갯머리 눈물 자국 얼마나 찍혀 있나.
뜨락 가득 산(山) 비가 배꽃을 떨구네.
한봄 심사가 너무도 무료한데
적막한 빈산에서 며칠 밤을 보냈던가.
남교4) 지나는 나그네는 보이지 않으니
어느 해에나 배항이 운교를 만나려나.
4) 중국 섬서성 남계에 있던 다리. 당나라 때 배항이 선녀였던 운교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오씨는 가냘프면서도 아리따웠는데 그녀 역시 한스러운 정에 사로잡혀 정씨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만복사에 향 피우고 돌아오던 길
남몰래 던진 저포 누가 인연 맺어 주었나.
봄꽃 가을 달 아래 그지없던 그 한을
술동이에 담긴 한 잔 술로 녹여 보리라.
함빡 내린 새벽이슬 복사꽃 같은 뺨 적시고
그윽한 골짜기에 봄 깊어도 나비 올 줄 모르네.
반가워라, 오랜 벗이 인연을 만났으니
새 곡조 노래 부르며 황금 술잔에 술 따르리.
해마다 제비는 봄바람에 춤추건만
애끊는 봄 심사, 모든 일이 헛되도다.
부러워라, 연꽃은 꽃받침이 붙어 있어
밤 깊으면 한 연못에서 둘이 함께 목욕하네.
다락 하나 푸른 산속에 서 있고
연리지 가지 끝엔 꽃이 한창 붉었구나.
한스러워라, 이내 인생은 나무만도 못하여
박명한 이 청춘 눈물만 맺히누나.
김씨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로 붓을 적시더니 앞에 읊은 시들이 너무 정숙하지 못하다고 나무랐다.
“오늘 일은 여러 말이 필요 없어요. 그저 이 자리의 광경만 읊으면 되지요. 어찌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펼쳐 놓아 절도를 잃고 우리들 속마음을 인간 세상에 전하려고 합니까?”
그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두견새는 오경에 바람결에 울고
희미한 은하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네.
다시는 옥퉁소 불지 마오.
우리 사연을 세상 사람이 알까 두려우니.
향긋한 술 금 술잔에 가득 부어
많다고 사양 말고 취하도록 마시세.
내일 아침 동풍이 사납게 불어오면
한 조각 봄꿈을 어이한단 말인가.
푸른 깁 소맷자락 나른하게 드리우고
악기 소리 들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네.
맑은 흥취 다하기 전 돌아가지 못하리라.
다시 새 시어(詩語)로 새 노래를 지으리.
몇 해던가, 흙먼지가 구름 같은 머리채에 붙은 것이.
오늘에야 님을 만나 얼굴 한번 펴 보았네.
고당(高唐)5)의 사랑 얘기 신기하다 자랑 마오.
풍류스런 우리 얘기 인간 세상에 퍼질지니.
5) 중국 호남성 동정호에 있던 누대 이름. 연인들이 몰래 만나는 장소를 뜻한다.
유씨는 엷게 화장을 하고 흰 옷을 입었는데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법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살짝 미소를 띠며 시를 읊었다.
그윽한 정절 굳게 지키며 몇 해를 지냈던가.
향기로운 넋과 옥 같은 뼈는 땅속에 묻혔지만
봄밤이면 언제나 항아를 벗 삼아
계수나무 꽃그늘 아래 외로운 잠 즐겼다네.
우습구나, 복사꽃과 오얏꽃 봄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나부끼다 인가에 떨어지네.
한평생 절개 지켜 쇠파리 꾀지 않으니
옥 같은 내 맘에 티끌 남지 않게 하리.
연지분도 안 바르고 머리는 쑥대머리
향갑에는 먼지 쌓이고 구리거울 녹슬었네.
오늘 아침 다행히 이웃집 잔치에 초대받아
붉은 꽃 머리에 꽂으니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라.
아가씨는 오늘 낭군과 짝했으니
하늘이 정한 인연 오래도록 향기로워라.
월하노인 붉은 실로 부부의 연 이어 주니
이제부터 서로 양홍과 맹광6)처럼 지내소서.
6) 후한 때 부부 양홍과 맹광은 사이가 아주 좋은 부부였다고 한다.
규수는 유씨가 읊은 시의 마지막 편에 감동하여 자리에서 물러나 나직하게 말했다.
“저 역시 대강 시를 알고 있으니 한 자락 읊어 볼게요.”
개령동 골짜기에서 봄 시름을 끌어안고
꽃 피고 질 때마다 온갖 근심 느꼈다네.
초나라 무산 구름 속에 그대를 볼 수 없어
소상강 대나무 그늘에서 눈물만 뿌렸네.
맑은 강 따스한 햇볕에 원앙이 짝을 짓고
푸른 하늘에 구름 걷히니 물총새가 노니네.
이제 아름답게 동심결을 맺었으니
가을날 부채처럼 이 몸 버리지 마소서.
양생 또한 시를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의 시가 맑고도 운치가 높은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예스러운 시를 지어 화답했다.
이 밤이 어인 밤이기에
이 같은 선녀를 만났던가.
꽃 같은 얼굴 어이 그리 고운지
붉은 입술은 앵두 같아라.
빼어난 글재주 더더욱 절묘하여
이안(易安)7)도 마땅히 입을 다물리라.
직녀가 베를 짜다 은하수에서 내려왔나.
항아가 방아 찧다 달나라를 떠났나.
7) 중국 송나라 때 뛰어난 여성 시인 이청조의 호.
곱게 단장하여 자리를 빛내 주니
오가는 술잔 속에 잔치가 흥겹구나.
운우의 정에는 익숙하지 못해도
술 마시고 노래하며 서로들 기뻐하네.
기쁘도다, 이제야 봉래산을 찾아와
신선 같은 풍류 벗들 만났으니
옥같이 맑은 술 술동이에 넘치고
용뇌향 은은하게 금향로에서 피어오르네.
백옥 침상 앞에 남은 향기 날아들고
실바람에 푸른 비단장막 흔들리는데
님을 만나 부부 술잔 합하니
오색구름 뭉게뭉게 서로 뒤얽히누나.
그대는 모르는가, 문소와 채란8)의 만남과
장석과 난향9)이 만난 이야기를.
인생사 서로 만나는 게 연분이 분명하니
모름지기 잔을 들어 거나하게 취해 보세.
8) 당나라 선비 문소가 하늘에서 쫓겨난 선녀 오채란을 만나 부부가 되었다는 이야기.
9) 한나라 때 신선 장석이 선녀 두난향과 부부가 되었다는 이야기.
낭자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