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David Livingstone Smith
영국의 킹스칼리지런던 대학교에서 프로이트 정신 심리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 법학, 역사, 심리학, 인류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학제적 연구자로 비인간화, 인종, 거짓 선동과 관련된 주제를 관심 있게 연구한다. 저서와 학술 논문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2012년 G20 정상회의에서 ‘비인간화’와 ‘집단 폭력’을 주제로 연설했다.
뉴잉글랜드대학교 철학 교수로 일상에서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인간성을 위협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라고 굳게 믿으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힘쓰는 일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촉구한다.
저서로는 《괴물 만들기: 비인간화의 기괴한 힘Making Monsters: The Uncanny Power of Dehumanization》, 《인간성에 관하여On Humanity, Dehumani-zation and How to Resist It》, 《가장 위험한 동물The most dangerous animal》,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거짓말쟁이는 행복하다》,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등이 있다.
“우리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비인간화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와 지금보다 덜 끔찍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이하
LESS THAN HUMAN
Text Copyright © 2011 by David Livingstone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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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외국 인명, 지명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기와 동떨어진 경우 절충해 실용적 표기법을 따랐다.
• 국내에 소개된 작품명은 번역된 제목을 따랐고, 소개되지 않은 작품명은 우리말로 옮겼다.
• 책, 신문, 잡지는 겹꺽쇠(《》)로, 영화, 곡, 수필, 시는 홑꺽쇠(〈〉)로 묶었다.
로라 포레스터 뮐러 고모를 위하여
나는 더러운 노예들이 무엇이 되기를
당신이 원하는지 이해한다.
나는 당신의 야만인, 당신의 테러리스트,
당신의 괴물이다.
—알리 알리자데Ali Alizadeh, 〈당신의 테러리스트Your Terrorist〉
추천의 글
인류의 잔인한 본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편견과 차별, 폭력과 잔혹함의 뿌리를 파헤친 이 책은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권과 인간애를 끊임없이 외치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간만 못한 존재로 여기는 비인간화의 일상에 무시무시한 폭력이 숨어 있음을 폭로한다. 인간의 폭력성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사라진다고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폭력적이고 잔혹한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인가? 한나 아렌트는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 보통 사람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면, 스미스는 다른 사람을 종종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인 ‘비인간화’가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인권 사상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노예화하고, 말살하는 잔학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처럼 보인다고 모두 인간인 것이 아니라 하위 인간에게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한, 비인간화는 쉽게 일어난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개나 쥐와 같은 짐승, 바퀴벌레, 해충으로 부름으로써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잔혹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짧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쥐를 박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을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전쟁과 대량 학살에서 발견한다.
비인간화가 문화가 아니라 진화론적으로 발전한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스미스의 인식은 섬뜩하게 냉철하고 강렬하다. “정확히 누가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가?”라는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인간만 못한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매우 독창적이다. 비인간화는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공산주의자와 테러리스트처럼 우리가 악마시하는 괴물의 특성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비인간화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주체도 될 수 있다. 비인간화가 차별과 편견, 폭력과 잔혹함의 뿌리라는 점을 파헤친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시의적절한 이유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차례
추천의 글 인류의 잔인한 본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서문 어딘가 열등한 종족
1장 | 인간만 못한 존재 인종 청소 프로젝트의 비밀 대중매체에 나타난 비인간화 |
2장 | 비인간화 이론의 단계 존재의 대사슬에 자리한 두 인간 고전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 존재의 대사슬 | 중세 시대: 이슬람, 피코, 파라켈수스 | 계몽주의 시대: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 | 인류학의 부상: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 세계대전: 존 맥커디 | 정신분석학: 에릭 에릭슨 |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기원: 로렌츠, 아이블아이베스펠트, 구달 |
3장 | 칼리반의 후손들 외부자는 더럽고 폭력적이며 천하다 멋진 신세계에서 벌어진 죽음 |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 그리고 그 너머 | 인간의 정의 | 모조 인간 |
4장 | 적개심의 수사학 사회적 죽음이라는 족쇄 존재의 대사슬에 얽매여 | 흑과 백의 비인간화 | 도덕적 이탈 |
5장 | 집단 학살에서 얻은 교훈 가해자의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괴물이나 미치광이가 아니다 | 우치의 괴벨스 | 집단 학살 | 하위인간 | 준인간 종 | 외양과 실체 | 피의 신화: 불변성과 유전 |
6장 | 인종 흑인은 영원히 백인이 될 수 없다 인종의 수수께끼 | 무엇이 제니를 흑인으로 만들었나 | 이념을 넘어서 | 플라톤의 관절 | 본질적 차이 | 인종에서 종으로 | 유사종의 기원 |
7장 | 잔인한 동물 개미와 침팬지도 전쟁을 일으킨다는 착각 인간만이 전쟁을 벌이는가 | 잔인성 |
8장 | 양면성과 죄 살인에 대한 저항감을 뛰어넘는 동기 도덕적 상해 | 정보 폭발 | 포식자, 동물, 아니면 먹이 |
9장 | 비인간화 이론을 위한 논의 우리의 본성은 무엇인가 |
부록 I 심리학적 본질주의
부록 II 전쟁에서의 비인간화에 대한 폴 로스코의 이론
감수의 글 우리는 비인간화를 거듭할 것인가
주
서문
어딘가 열등한 종족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자명한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 창조주께서 모든 인간에게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사실, 그 권리 중에
생명과 자유를 누릴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토머스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서〉
많은 사람이 독립선언서의 이 대목을 경건한 마음을 담아 인용하고는 한다. 여기에 담긴 사상, 즉 모두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상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찬사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제퍼슨이 남긴 말은 의문 하나를 남긴다. 정확히 누가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어갈까?
제퍼슨이 살던 당시에는 그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1 계몽주의적 시각에 따르면 인간은 존엄한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노예제도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지 이기심을 채워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 노예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도덕적 딜레마를 무마했다. 교묘하게 머리를 굴린 결과 모든 인간이 신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노예제를 지지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개인 인권을 인정받으려 투쟁하고 신대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애쓴 계몽주의 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유색인들을 번번이 배제했다.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철학과 교수 찰스 밀스CharlesMills가 지적한 대로 18세기의 기라성 같은 위인들이 모든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투쟁했다는 생각은 사실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단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인식은 “최근 역사를 철저히 미화”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의심하고 반박”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를 나누는 사회정치학적 분류 체계가 실제 현실에 부합”할 것이다.2
흑인이 인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지식인뿐만이 아니었다. 철학자와 정치가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내놓은 이론적 관점은 여태껏 제대로 설명된 적 없을 뿐, 오래도록 대중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신념에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그렇기에 1760년에 어느 익명의 노예제 폐지론자가 출판한 《노예무역에 관한 두 개의 담론TwoDialoguesontheMan-Trade》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모호하고도 막연한 생각 하나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흑인이 백인이랑 같은 종족이기는커녕 어딘가 열등한 종족이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흑인 역시 영원불멸의 영혼을 지닌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백인의 마음속에 있는 인간성이 어떻게 그처럼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흑인을 대해도 된다고 느끼게 만드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3 이렇듯 사람들은 하위인간subhuman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별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결함이 있는 하위인간은 진정한 인간인 우리가 서로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노예가 되고 괴롭힘을 당하며 심지어 죽음에 직면한다. 같은 종족 구성원이라고 여겨진다면 결코 받아서는 안 될 대우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 부른다. 바로 이 비인간화 현상이 이 책에서 다룰 주제이다.
비인간화를 자세히 파고들기 전에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문제를 다루는 연구 문헌이 방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비인간화를 언급하는 저술물이 워낙 많다 보니 관련 연구 역시 충분히 진행되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비인간화를 다루는 자료를 찾으려고 애를 쓴 결과,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전쟁과 학살처럼 잔혹 행위에 비인간화 현상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반해 정작 그에 관한 연구 문헌은 충격적일 만큼 부족했다. 어느 문헌에서든 비인간화를 여기서 한 페이지, 저기서 한 단락 다루는 식으로 언급할 뿐이었다. 사회심리학자들이 게재한 논문 열댓 편을 제외하면 사실상 관련 문헌이 없다시피 했다.4 학계 주장대로 비인간화가 정말 중요한 문제라면 그 원리와 기제를 밝히는 일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오히려 방치되고 있다니. 중대한 문제인 만큼 당황스러움도 배가되었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도 결국 ‘비인간화’라는 화제를 양지로 드러내 여러 세기 지체된 담론에 불을 지피기 위함이다. 나는 역사, 심리학, 철학, 생물학, 인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를 참고해 비인간화란 무엇인지, 비인간화를 지탱하는 원동력과 원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애썼다.
일부 학자들은 비인간화 현상이 기껏해야 몇 세기 전에 생겨난 사회적 구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주장에 따르면 비인간화는 보편적 인권이 사회 신조로 자리를 잡은 결과물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도덕적, 정치적 표준이었던 보편적 인권 사상은 당시 유럽인들이 자행하던 잔혹한 식민지 활동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서두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론과 현실 사이의 부조화를 해결하려면 억압당하는 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로는 틀린 설명이 아니지만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설명은 타인을 비인간화하려는 인류의 욕망이 어떤 본성과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런 욕망은 유럽인들만의 것도 아니고 현대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도 아니다. 비인간화는 사회 구성주의 이론에서 전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널리 인류의 삶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비인간화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면 특정 시기에 발생한 일부 사건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
물론 타인을 비인간화하려는 욕망이 특정한 형태로 실현된다면 그 현상 자체는 어떤 시대나 문화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사회적 구조물이라 부를 수 있다. 18세기의 유럽 사람들 역시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욕망을 특정한 형태로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 사람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독일 사람들, 적을 똥파리나 도마뱀이나 지렁이 취급하는 뉴기니 고산지대의 부족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5
이 책에서는 비인간화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 인류의 문화, 인간의 인식 구조가 결합한 결과물임을 밝힐 것이다. 비인간화의 본성과 원리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요소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셋 중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왜곡된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인간화는 그 논의를 전문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제기한 쟁점들을 파고드는 동시에 이해하기 쉽고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무엇이든 소명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명확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원칙에 따라 나는 이 책을 학문적으로 세밀하면서도 누가 봐도 매력적인 책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반적으로 학술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불가피한 경우에는 덧붙였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일상적인 단어를 일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사람person과 인간human이라는 단어이다. 난해한 학술적 문제를 물고 늘어지려는 게 아니다. 일상적인 언어로 담아내기 어려운 사상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인간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인간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맥락에서만 사람과 인간이라는 단어를 이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용례를 따른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우선 비인간화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인간성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자, 이제 누군가를 떠올린 다음 그 사람에게서 인간성이 벗겨졌다고 상상해 보라.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흑인 노예를 비인간화했을 때 노예들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간성을 말살했을 때, 독일 나치가 유대인의 인간성을 말살했을 때 그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비인간화를 자행한 사람들의 눈에는 인간처럼 보이는 생물, 다시 말해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아닌 생물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비인간화란 어떤 존재가 인간처럼 보일 뿐 그 본질은 전혀 인간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나치는 유대인에게 운테르멘셴Untermenschen, 즉 ‘하위인간’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유대인이 어느 모로 보나 아리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면일 뿐, 그 가면 아래에는 역겨운 기생충이 숨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치가 유대인의 소매에 따로 딱지라도 붙여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훨씬 은밀한 차원에서 유대인을 하위인간으로 인식했다. 유대인은 기껏해야 표면적으로만 인간일 뿐이었다.
여기서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인간인 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어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학계의 유서 깊은 전통을 따르지도, 통상적인 언어 사용 표준을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사람이라는 단어는 인간처럼 보이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사람에 속한다. 드라큘라와 터미네이터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역시 사람이다.
반면 인간이라는 단어는 외모와는 관계없이 우리랑 같은 부류에 속하는 종족 구성원을 의미한다(물론 ‘우리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7장에 가서야 명확히 밝힐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인간이지만 드라큘라와 터미네이터는 설령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인간이 아니다. ‘엘리펀트 맨ElephantMan’이라 불린 조셉 메릭JosephMerrick은 설령 외모가 인간을 닮지 않았을지라도 분명 인간이다.
한편 이 책에는 중요한 논점 하나가 빠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바로 ‘비인간화가 여성을 억압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해줄 말이 거의 없다. 이 책에서 탐구하려는 유형의 비인간화는 여성에게 가해진 유형의 비인간화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래로 안드레아 드워킨AndreaDworkin, 캐서린 매키넌CatherineMacKinnon, 린다 르몬체크LindaLeMoncheck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이 대상화 과정을 통해 비인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로서, 인간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라 욕구를 해소할 살덩이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6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전쟁과 학살 등 집단적인 폭력 사태와 연관된 비인간화를 다룬다. 여성의 대상화는 이와는 다른 힘의 작용에 따라 발생하므로 그 원리를 분석하려면 이 책에서 채택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사회정치적 분위기 탓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심리적 원동력에 관해서는 여태까지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으며 학문 외적인 의도에서 비롯한 정신분석학적 억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물론 이 책에서 분석한 비인간화의 심리적 작동 원리가 여성의 대상화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대상화는 그 자체로 너무나 광범위한 주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려면 별도의 책에서 다루는 것이 마땅하다.
이 책에는 성 소수자(특히 동성애자), 이민자, 장애인, 소수민족 등 수차례 비인간화의 표적이 되어온 특정 집단들에 관한 이야기도 빠져 있다. 그 이유는 결코 그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비인간화라는 주제 자체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비인간화가 나타나는 양상을 일일이 논의하기에는 지면이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의 범위를 의도적으로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는 주로 유대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인간화에 초점을 맞춘다(물론 다른 집단 역시 종종 언급된다).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커서이다. 물론 인류 역사에 수많은 고난과 비극이 있었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행한 온갖 만행 중에서도 유대인을 몰살하려 박해한 일,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사고판 일,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을 파괴한 일만큼 끔찍한 일이 없다. 내가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자료가 방대하게 쌓여 있어서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인간화 과정의 핵심적인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교보재 역할을 한다. 이것으로부터 비인간화의 핵심 원리를 뽑아낼 수 있다면 다른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를 소개했고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지점도 짚어봤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 책이 전개될지 대략 알아보도록 하자.
1장에서는 비인간화를 탐구하는 것이 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알아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일들을 주요 사례로 살펴볼 것이다. 역사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나치가 유대인과 집시와 같은 특정 민족을 비인간화했다는 사실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연합군을 비롯해 전쟁에 관여한 모두가 상대를 비인간화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 사례를 충분히 본 다음에는 오늘날 비인간화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특히 언론이 중동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테러 단체와의 전쟁을 보도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비인간화가 대중매체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비인간화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사회심리학자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에는 후발주자였다. 실제 논의는 그보다 수 세기 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2장에서는 비인간화라는 개념이 여러 세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아본다. 비인간화 개념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에서 시작해 중세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론적 개념 하나가 등장하는데, 바로 본질 개념이다.
3장에서는 식민지로 전락한 신대륙의 원주민이 인간성을 말살당한 과정을 엿본다. 스페인 사람들이 카리브 지역에 당도한 이후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라는 의문이 수면 위로 스멀스멀 떠올랐다. 이 의문은 1550년,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deLasCasas가 스페인의 인본주의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GinésdeSepúlveda와 논쟁을 벌이면서 제대로 무르익었다(이 사건은 서양 정치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손꼽힌다).73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발판 삼아 1970년대 초 이래로 심리학자들이 제시해 온 비인간화 개념을 논의하고 평가한다. 더불어 2장에서 소개한 본질과 현상 개념을 간략히 정리해 볼 것이다.
4장에서는 노예제도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비인간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다. 사하라 사막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노예무역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이러한 역사 속에서 노예는 인간 이하의 짐승 취급을 받았다. 이 장에서는 인종과 인종차별이라는 주제 역시 다룬다(이는 6장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비인간화가 어떻게 도덕적 이탈 현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즉 비인간화가 어떻게 동료 인간을 잔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제약을 약화시키는지 알아볼 것이다.
5장에서는 비인간화가 집단 학살 과정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 본다. 대표적으로 여섯 건의 대규모 집단 학살 사태를 살펴볼 것이다. 바로 헤레로 대학살, 아르메니아 대학살,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대학살, 르완다 내전,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이다. 다음으로는 1940년대 나치 출판물 《하위인간TheSubhuman》을 근거 자료로 삼아 비인간화 과정의 핵심적인 특징 몇 가지를 밝힐 것이다. 이후에는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의 가닥을 이어 붙여 비인간화 원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종합적인 이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이 이론에 비춰보면 비인간화 현상은 문화적, 심리적, 그리고 생물학적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6장에서는 인종 개념에 관한 논의를 시작으로 인종주의와 비인간화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한다.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종 개념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사람들은 인종 구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사회 구성주의 이론가 역시 인종 개념을 하나의 이념적 범주로 여길 뿐, 그 이면에 깔린 심리적 기반은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인종 개념(그리고 인간이 인종이라는 인식 틀로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심리적 기제)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비인간화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비인간화는 인종주의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종 개념이 없다면 비인간화 역시 존재하기 어렵다.
흔히들 전쟁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개미와 침팬지 같은 생물도 서로 전투를 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7장에서는 이런 통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한 뒤 동물들 간의 동족 살해 행위가 전쟁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밝힐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침팬지 집단 간에 벌어지는 급습 행위와 아마존의 야노마뫼족이 벌이는 급습 행위를 비교하는 시간도 가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잔인함을 드러낼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제인 구달의 주장을 주의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잔인함이라는 개념을 자세히 뜯어보면 구달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비인간화가 도덕적 이탈을 유발하는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8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는 살인 행위를 향한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은 동족을 학살하는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존재인 동시에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위선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본성의 두 측면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중반부부터는 인간이라는 종이 어떻게 타자를 비인간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 탐구한다. 내 추리에 의하면 이는 다른 수많은 능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딸려 나온 부산물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는 능력이 있기에 내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타자를 비인간화함으로써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9장에서는 지금까지 다룬 비인간화 이론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뒤 비인간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살펴본다.
우리의 조국은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우리가 기르는 개라네.
—팔레스타인 동요
아랍인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짐승 중에서도 최악이죠.
—랍비 오바디아 요세프Ovadia Yosef, 《하아레츠Haaretz》1
“어서 와봐라, 개놈들아! 난민촌 개자식들, 다 어디로 내뺀 거냐? 개새끼들아! 창녀 새끼들아! 너희 엄마는 몸이나 팔고 다니지!” 철조망 너머의 이스라엘 영토에서 칸유니스 난민촌을 향해 모욕적인 아랍어 욕설이 울려 퍼졌다. 가자지구의 남쪽 끝, 고대 도시 칸유니스 바로 외곽에 있는 난민촌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난민이 된 약 100만 명의 아랍인 중 3만 5천 명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난민촌 인구가 배로 불어서 무려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13구획으로 나뉜 지저분한 시멘트 땅 위를 살아가고 있다.
철조망 너머에서 쏟아지는 욕지거리는 성이 난 무슬림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군용 지프차 위에 달린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난민촌을 방문한 《뉴욕타임스》 기자 크리스 헤지스ChrisHedges가 있었다. 헤지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소년들은 지프차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의미 없는 저항을 벌이고 있었다. 헤지스는 뒤이어 벌어진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섬광수류탄이 펑 하고 터졌다. 열 살 남짓 된 아이들이 혼비백산했다. 자갈길을 헤쳐 나아가느라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아이들 몸이 하나둘 풀썩하고 쓰러져 내 앞에 있던 모래 둔덕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군인들 총에 소음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M16 소총으로 발사한 총알이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날아와 아이들의 가냘픈 몸을 뚫고 떼굴떼굴 바닥을 굴렀다. 나중에 병원에 도착해서야 두 눈으로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손발이며 몸통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배 밖으로는 내장이 나와 있었다.2
총에 맞은 아이는 네 명이었다. 그중 세 명만 목숨을 건졌다. 아메드라는 소년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헤지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군인들이 확성기로 철조망 앞에 오면 초콜릿이랑 돈을 준다고 그랬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저희한테 욕을 퍼부었어요. 그다음에는 폭탄을 던지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뛰었어요. 하지만 알리는 등에 총을 맞았죠.”3
오래전부터 칸유니스는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의 요새였다. 2005년 가을에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지구에서 철수한 뒤로 칸유니스 난민촌의 시멘트 옥상에는 하마스의 밝은 녹색 깃발이 펄럭였다. 하마스는 자신들의 고토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이슬람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로 1987년 창설되었다. 물론 하마스는 학교와 병원, 갖가지 문화적 활동을 지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세간에서는 이스라엘 민간인을 대상으로 납치, 암살, 자살 폭탄 테러, 미사일 공격 등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칸유니스의 시장이자 하마스의 일원인 오사마 알파라OsamaAlfarra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통제권을 포기했을 때 기쁨에 찬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영국 신문사 《가디언》의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알파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자지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혹시 여우를 사냥하는 법을 아시나요? 일단 여우 굴을 파내 여우를 밖으로 끄집어내야죠. 그러면 여우는 가자지구라는 굴에서 쫓겨나 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 지구)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저항운동 단체가 거기서도 굴을 파내 여우를 밖으로 끄집어낼 겁니다.”4
이 분쟁 속에서 소년들에게 총을 쏜 군인들과 오사마 알파라는 서로 반대 진영에 속했다. 그럼에도 양측의 태도는 기이할 만큼 닮아 있었다. 둘 다 서로를 인간만 못한 짐승으로 바라본 것이다. 군인들이 보기에 알리와 알리의 친구들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부정한 동물로 여겨지는 개나 다름없었다. 마찬가지로 오사마 알파라는 이스라엘을 여우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사냥하고 소탕해야 할 해로운 짐승 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과도한 탐욕과 교활한 술수의 상징인 여우에게는 유대인을 경멸하는 자들이 오래전부터 가졌던 고정관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13세기 무슬림 작가 알자우바리Al-Jaubari는 《신성한 비밀에 대해 선택받은 자가 내놓는 해답TheChosenOne’sUnmaskingofDivineMysteries》에서 유대인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들이 가장 교활한 생물, 사악하고 위선적이어서 믿어서는 안 될 생물임을 기억하라. 겉으로는 그렇게나 겸허하고 미천해 보일 수가 없으나 실상은 어떤 인간보다도 가장 악랄한 족속이다. 파렴치하고 가증하다는 게 바로 그런 거 아니겠는가. … 이들의 교활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행태를 보라. 이들이 어떻게 남의 돈을 빼앗고 남의 삶을 망치는지를 보라.
비교적 최근 하마스의 일원이자 이맘(이슬람 성직자—옮긴이)인 요지프 알자하르Yousifal-Zahar 역시 똑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은 믿어서는 안 될 족속이다. 역사를 되짚어 봐라. 어떤 약속을 맺든 그들은 늘 배신을 저질렀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한다.”5
이스라엘 군용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비인간화했다. 마찬가지로 오사마 알파라와 그의 동료들은 이스라엘 사람을 비인간화했다. 양쪽 사례에서(계속해 다룰 그 외의 수많은 사례에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전부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는 극심한 폭력의 전주곡이자 배경음 같은 역할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다른 집단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그저 빈말에 불과하다고, 모멸적인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한참 잘못되었다고 본다. 비인간화는 그저 수사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심지어, 슬프게도 우리 모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비인간화는 지난 수천 년 동안은 물론 지금도 인류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이는 마치 심리적 윤활유와 같아서 혐오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막고 파괴적인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 결과 우리는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짓들을 저지른다.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사고방식이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어째서 우리의 머릿속을 그처럼 쉽게 장악하는지 최선을 다해 설명할 것이다.
비인간화의 원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사례를 들어 밝히고 싶다. 따라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파멸적인 사건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비인간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은 7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그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전투 중에 사망한 군인도 수백만에 달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소이탄에 의해, 종국에는 핵폭탄에 의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산 채로 녹아 없어졌다. 조직적인 학살 과정에서 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핵심적인 이유 하나는 바로 비인간화였다.
사건의 결말부터 되짚어 보자. 독일과 일본이 패전한 후에 독일에서는 총 열두 차례의 군사재판이 열렸는데, 그중 첫 번째 재판이 1946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이었다. 20명의 의사와 세 명의 행정가(22명이 남성, 단 한 명이 여성)가 전쟁 범죄와 비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들은 히틀러가 지시한 안락사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인간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 20만 명을 가스실에 보내 사살했다) 유대인과 러시아인, 집시, 폴란드인 수감자 수천 명을 대상으로 악랄한 의료 실험을 감행했다.
텔포드 테일러TelfordTaylor 부장검사는 엄중하게 모두진술을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피고인들은 의학 연구라는 명목하에 살인과 고문을 비롯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해자는 그 수가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그중 소수만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생존자 중 일부는 이번 법정에도 증인으로 참석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피해자 대다수는 노골적인 학살의 희생양이 되거나 고문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 이 살인범들은 가련한 피해자들을 개별 인간으로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도매금으로 묶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습니다.6
뒤이어 테일러는 전범들이 자행한 실험 내용을 자세히 나열했다. 그들은 인간을 대형 기니피그처럼 이용했다. 어떤 실험에서는 고공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상황을 재현하겠다며 실험 대상자에게서 산소를 차단했다. 신체를 얼리거나 말라리아원충을 체내에 주입하거나 머스터드 가스를 들이마시게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실험에서는 부상을 재현하기 위해 실험 대상자의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낸 뒤 거기에 유리 조각이나 대팻밥을 집어넣었다. 괴저를 유발하기 위해 혈관을 동여맨 뒤 박테리아를 주입하기도 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소금물을 마셨고 티푸스를 비롯한 치명적 질병에 노출되었으며 독극물을 주입받았고 백린탄에 몸이 지져져야 했다. 의료인들은 실험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격렬히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성실히 기록으로 남겼다.
묘사하는 장면들이 너무나 끔찍하다 보니 테일러가 던진 중요한 말 한마디를 사소한 미사여구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쉽다. 바로 “그들은 피해자들을…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심오하고도 중대한 의문 한 가지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인간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 집단을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취급하게 만드는 요인은 대체 무엇일까?
대략적인 해답은 비교적 쉽게 내놓을 수 있다. 바로 생각이 행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만 못한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잔혹한 행동을 일으킨다. 나치는 그들이 피해자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지 명확히 밝혔다. 그들은 피해자를 운테르멘셴, 즉 하위인간으로 인식했다. 하위인간은 인간을 ‘인간’이라는 범주로 묶는 도덕 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쥐를 죽이는 것은 허용 가능한 일이다. 나치가 보기에 유대인과 집시를 비롯한 인간 집단은 사실상 쥐나 다름없었다. 위험한 질병을 옮기고 다니는 쥐 말이다.
나치가 벌인 인종 청소 프로젝트의 주된 희생양은 유대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활동 초기부터 유대인이 인류의 고귀한 품성과 활동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다고 확신했다. 나치가 바라보는 종말이란 유대인이라는 사회 기생충(병균을 옮기는 벼룩이자 이이자 박테리아)이 인류 문명을 좀먹는 모습이었다. 1943년에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날 전 세계 유대 민족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세계 곳곳의 민족과 나라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바이러스를 박멸할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세계는 계속 병들 것입니다.” 나치는 이 치명적 역병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의 형무소를 만들고, 형무소의 가스실은 해충을 제거하는 방역소를 본떴다. 그리고 독일군 뒤를 따라 동부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인종 말살을 자행한 준군사 조직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을 파견했다.7
때때로 나치는 상대를 해충으로 바라보는 대신 피에 굶주린 사악한 맹수로 바라보기도 했다. 독일이 점령한 소련 일부 지역에서 별동대가 독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자 독일군 총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ervonReichenau는 “유대계 하위인간 족속들에게 가혹하지만 정당한 응징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치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이라면 모두 ‘전 세계 유대 민족’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유대인들이 러시아, 영국, 미국 정부를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고 확신했다. 군사 역사학자 메리 하벡MaryR. Habeck의 말에 따르면 “독일의 군인과 장교들은 러시아인과 유대인을 박멸해야 할 ‘짐승’으로 여겼다. 이렇듯 적들을 비인간화한 덕분에 그들은 나치가 새롭게 제시한 전쟁관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으며 결과적으로 일말의 자비도 없이 소련을 공격”했다.8
이 시기 비인간화가 초래한 폐해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끔찍하기가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럼에도 끔찍한 참상에만 집중하는 것은 묘하게 위안이 된다.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옮긴이)이 인류가 벌인 기이한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신 나간 이념 집단이 정권을 쥐고 나라를 마음대로 흔들기 위해 집단 광기를 불러일으킨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일인이 유독 악랄하고 잔인한 민족이었다고(혹은 민족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나치가 일으킨 참극에서 가장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나치가 광인이나 괴물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 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비인간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적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긴 것은 독일인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최종적 해결(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프로젝트—옮긴이)’을 고안한 설계자들이 인종 청소 계획을 어떻게 실행으로 옮길지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 동안 러시아계 유대인 시인이자 소설가 일리야 에렌부르크IlyaEhrenburg는 스탈린의 적색군에게 배포할 선전물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었다. 이런 선전물에는 상대를 인간만도 못한 존재로 깎아내리는 문구가 여기저기 들끓었다. 예컨대 에렌부르크는 “독일 짐승들이 내뿜는 입 냄새”를 언급하거나 독일인을 “전쟁 기술을 연마한 두 발 달린 짐승” 내지는 모조리 척살해야 할 “짝퉁 인간”으로 묘사했다.9 또한 ‘독일인은 인간이 아니’라며 이렇게 부추겼다. “만약 당신이 독일인을 하나 죽였다면 하나 더 죽여라. 독일인 시체가 수북이 쌓인 광경만큼 보기 좋은 모습이 없다.”
며칠이 흘렀는지, 얼마를 걸었는지 세어보지 마라. 오직 당신이 독일인을 얼마나 죽였는지 세어라. 독일인을 학살하라. 그것이 당신의 노모가 두 손 모아 소망하는 일이다. 독일인을 학살하라. 그것이 당신의 자녀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독일인을 학살하라. 그것이 당신의 고토 러시아가 부르짖는 일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마음 약해지지 마라. 죽여라.10
이는 빈말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 베어마흐트Wehrmacht는 이미 2천 300만 명에 달하는 소련 국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심지어 그중 절반은 민간인이었다. 마침내 전쟁의 판도가 뒤집히자 러시아군이 동쪽에서부터 독일을 향해 물밀듯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거침없이 진군해 나아가면서 강간과 살인을 일삼았다. 저술가 자일스 맥도노그GilesMacDonogh는 “그들은 에렌부르크를 비롯한 소련 선동가들의 프로파간다에 자극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라며 이렇게 서술한다.
적색군이 휩쓸고 지나간 첫 독일 점령지는 동프로이센이었다. … 적색군은 하룻밤 사이에 여성 72명과 남성 한 명을 죽였다. 여성 대다수는 강간을 당했으며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성은 84세였다. 일부 피해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 간신히 서쪽으로 달아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마을에서는 전차 부대원 전체가 가여운 소녀 하나를 두고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돌아가며 강간했다고 한다. 총에 맞아 사망한 남자는 돼지들에게 먹이로 던져졌다.11
그러는 동안 지구 반대편 아시아에서도 전쟁이 터지고 있었다. 동맹국인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은 자신들이 가장 고등한 형태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이외의 적들은 기껏해야 열등한 인간이거나 심하게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보았다. 일본인의 눈에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관자놀이에 뿔이 솟아 있고 꼬리, 발톱, 송곳니가 자라 있는 괴물로 그려졌다. 일본인은 적들에게 귀신(오니), 귀축(기치쿠), 악귀(아키 혹은 아쿠마), 괴물(카이부츠)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코가 비뚤어진 털 달린 야만인”이라 불렀다. 미국인에게는 영어와 발음이 비슷한 ‘메이리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길 잃은 개’를 뜻한다.12
일본은 잔혹하면서도 뻔뻔한 방식으로 군사적인 목표를 달성해 나갔다. 예컨대 일본이 1937년 12월에 중국 난징을 점령한 뒤 체계적으로 벌인 학살극을 생각해 보자. 일본군은 6주에 걸쳐 중국 시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고문했다. 그 참상이 혼다 가츠이치HondaKatsuichi의 책 《난징 대학살TheNanjingMassacre》에 자세히 나온다. 증언을 수집하던 가츠이치에게 전쟁 당시 부사관을 지낸 어느 남성은 “군인들이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가르고 여성의 음부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터뜨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어느 부사관은 당시에 자신이 갓난아기 엄마를 강간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시끄럽게 울자 짜증이 난 나머지 “이제 갓 옹알이를 시작한 무고한 아기를 들어다 끓는 물에 집어던졌다”고 자백했다.13 머릿속에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일이다. 어떻게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전쟁에 참전했던 또 다른 군인 요시오 츠키야YoshioTshuchiya는 그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저희는 중국인을 가리켜 ‘찬코로’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벌레나 짐승처럼 인간만 못한 존재라는 뜻이었죠. 중국인은 인간 범주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보기에는 그랬죠.”14 츠키야는 무장하지도 않은 중국인 민간인을 총검으로 찔러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이 그 명령에 순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제가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짓을 못 했겠죠. 하지만 저는 그들을 인간 이하의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여한 아즈마 시로AzumaShiro 역시 자신이 여성들을 강간할 때는 그들을 인간이라 여겼을지 모르나 학살할 때만큼은 돼지쯤으로 여겼다고 진술했다.15
그렇다면 미국과 영어권 국가들은 어땠을까? 아마 정의를 수호한 쪽은 이들이었겠지라고 기대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합국 일원들 역시 적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다. 예컨대 어느 군인은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인간을 죽이는 건 아주 그릇된 일이지. 하지만 망할 나치 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개새끼일 뿐이지.” 그나마 독일인은 일본인보다 비인간화를 덜 당한 편이다. 어쨌든 독일인은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어느 농장에서 자랐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파란 눈을 가진 자신들과 같은 앵글로색슨계 민족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본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실제로 당시 여론조사에서 일본군을 기꺼이 죽이겠다는 미군은 44퍼센트에 달했으나 독일인을 기꺼이 죽이겠다는 미군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16
연합군은 ‘왜놈’을 짐승이라 생각했으며 대개 원숭이, 침팬지, 쥐 같은 동물로 묘사했다. 이따금 벌레처럼 바라볼 때도 있었다. 일례로 허먼 오크HermanWouk의 소설 《케인호의 반란TheCaineMutiny》에서는 연합국 군인들이 일본군을 “무장한 거대 개미”로 묘사한다. 호주 장군 토머스 블래미ThomasBlamey가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앞에 두고 진행한 연설에서도 인종 혐오적인 열의가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제군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참으로 특이한 종족이다. 인간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종족이랄까. …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목숨을 지키려면 이 해로운 짐승들을 모조리 박멸해야만 한다.” 수백 종류의 신문을 통한 스스럼없는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종군기자 어니 파일ErniePyle은 이런 태도가 지휘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개 보병들 사이에도 만연해 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파일은 이렇게 보도했다. “일본인은 바퀴벌레나 쥐처럼 인간만 못한 역겨운 무언가로 여겨졌다.” 전장 멀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평범한 시민들 역시 이에 동조했다. 예컨대 1942년 뉴욕시에서 종일 이어진 퍼레이드에서는 노란 쥐 떼에게 폭격을 쏟아붓는 장면을 담은 꽃차 행렬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는 “도쿄야, 우리가 가고 있다”라는 문구가 붙었다.17
일본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은 일본인의 시신을 훼손하고 시신 일부를 전리품처럼 챙겨가는 관행에도 기여했을지 모른다.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Lindbergh가 전시 중에 기록한 일기에 따르면 미군은 쓰러진 일본군의 넙다리뼈를 깎아서 펜대와 종이칼을 만들었으며 부패 중인 일본군 시신을 파내 금니를 뽑고 귀나 코, 치아, 두개골을 전쟁 기념품으로 챙겼다. 유럽 전장에서는 시신 일부를 전리품으로 챙겨가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군사 역사가 존 다우어JohnDower가 지적하는 대로, 연합국 군인이 일본군 시신에 하듯이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 시신을 훼손했다면 이는 어마어마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18
군인들은 시체만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항복한 적군 포로를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때로는 고문도 자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철학자 글렌 그레이J. GlennGray는 이와 관련된 충격적인 일화 하나를 이렇게 밝힌다.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어느 참전 용사가 내 동기에게 말해 주기를… 자기 부대가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은신처에 숨어 있던 일본군 하나를 우연히 맞닥뜨려 ‘소탕’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비교적 미숙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그 부대는 웃고 떠들면서 전장에 파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웬 적국 군인 하나를 발견했는데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부대원들은 소총을 들고는 그를 살아 있는 표적 삼아 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안전한 곳으로 숨으려고 개활지 곳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부대원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어찌나 격렬히 웃었던지 그 가련한 일본군의 운명을 빨리 끝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결국 부대원들은 그를 사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이 일을 가지고 며칠을 웃고 떠들면서 서로 사기를 북돋았다.
그레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인다.
참전 용사는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 일본군이 짐승이나 다름없었음을 강조했다. 일본군을 마주친 미군 중 누구도 그가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19
미국인이 일본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바라본 가장 섬뜩한 예시 하나를 미 해군이 발행한 잡지 《레더넥Leatherneck》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사 자체는 굉장히 짧으며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 상단에 새겨진 삽화에는 애벌레 같은 몸에 기괴한 일본인 얼굴을 한 혐오스러운 짐승 한 마리가 나오며, 거기에는 라우세우스 재패니쿠스Louseusjapanicus라는 학명이 붙어 있다. 하단의 기사에서는 “역병의 근원이자 해충의 번식지인 도쿄 전역”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이 불결한 생물을 박멸하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가 발표된 것은 1945년 3월이었다. 바로 그 달에 미 공군은 도쿄 상공에서 소이탄을 퍼부어 1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산 채로 불태웠다. 이후 오 개월에 걸쳐 일본 도시 67개가 소이탄 폭격으로 불타올랐다. 커티스 르메이CurtisLeMay 장군의 말을 빌리자면 그 과정에서 약 50만 명의 민간인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타오르는 불에 삶고 구워져” 죽음에 이르렀다. 뒤이어 같은 해 8월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평평한 황무지로 변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20
대중매체에 나타난 비인간화
제 눈앞에는 벌거벗은 재소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채 입을 벌리고 있으면
다른 한 명이 거기다 대고 자위를 하고 있었죠.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프레데릭 하사가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짐승 놈들은 잠깐만 내버려 둬도 이런다니까.”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미 육군 상병 매슈 윌슨Matthew Wilson의 증언21
프로파간다는 비인간화를 자극하고 심화하며 그렇게 자라난 혐오는 또 다른 프로파간다로 이어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르완다 정부는 1994년 대학살이 발생하기 전후로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투치족을 바퀴벌레 같은 집단으로 몰아세웠고, 나치 정부는 선전기구를 활용해 유대인과 그 밖의 민중의 적을 끔찍한 존재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러시아 정치 예술가들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를 비롯한 추축국 일원들을 쥐, 뱀, 돼지, 개, 원숭이 같은 짐승으로 그려냈다. 설령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더라도 뾰족한 귀와 송곳니, 이질적인 피부색 등 인간 같지 않은 특징을 지닌 것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처럼 전형적인 선전물이 악명이 높은 것에 반해,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수단으로서 대중매체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22
오래전부터 대중매체는 사람들 사이에 거짓된 정보를 퍼뜨려 여론을 조종해 왔다. 그 과정에서 군사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비인간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의 물결이 거세지던 1936년, 올더스 헉슬리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 연단에 서서 프로파간다의 주된 기능이 비인간화임을 이렇게 역설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은 선뜻 고문하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인간이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 사악한 본질의 구현체로 여겨진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습니다. … 국가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 프로파간다는 모두 한 가지 목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상대 집단의 사람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설득함으로써, 그들을 강탈하고 속이고 괴롭히고 죽여도 괜찮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지요.23
20세기의 정치 포스터를 모아놓고 보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소련, 한국 등 어느 나라에서든 시각적 선전물을 사용해 ‘적’을 인간이 아닌 위협적인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4 하지만 대중매체에 드러나는 비인간화의 사례를 찾기 위해 꼭 역사 기록 보관소를 뒤질 필요는 없다. 그저 신문을 펼치거나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된다.
2007년 9월 4일 자 오하이오주 일간지 《콜럼버스 디스패치ColumbusDispatch》를 보면 이란을 바퀴벌레 떼를 쏟아내는 하수관으로 그려낸 풍자화가 나온다. 그림에 담긴 함의는 꽤 노골적이었다. 독자들은 신문사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독자는 이렇게 반응했다. “르완다의 후투족 신문에서도 다른 인간들을 박멸해야 할 바퀴벌레처럼 묘사하는 풍자화를 내놓고는 했습니다. 그게 결국 학살로 이어졌죠. 귀 신문사도 똑같은 길을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심히 불편합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독자도 있었다. “이란 사람들을 하수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처럼 묘사한 것은 악질적인 비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이런 식의 풍자화는 이란을 상대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신보수주의적 외침을 더 크게 울려 퍼지도록 만들 뿐입니다.”25
이로부터 3년 전인 2004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스캔들이 세간에 알려졌을 때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RushLimbaugh는 미군으로부터 모욕과 고문, 강간, 살해를 당한 재소자들을 인간만 못한 존재로 묘사했다. 림보는 “구역질 나는 건 오히려 그들”이라며 열을 내서 말했다.
타락한 건 오히려 그들입니다. 위험한 건 오히려 그들이지요. 인간만도 못한 존재, 인간 찌꺼기 같은 존재는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 미국이나 미군들이 아니라요.26
재소자 학대에 가담한 이들을 비롯해 미군 수뇌부 역시 림보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총책임자 재니스 카핀스키JanisKarpinski 준장은 제프리 밀러GeoffreyMiller 육군 소장이 재소자들을 짐승처럼 대할 것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카핀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밀러는 재소자들이 개나 다름없으며 한순간이라도 그들이 자신들을 개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할 여지를 준다면 지휘자로서 통제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밀러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사용된 고문 기법을 토대로 이라크에서 사용할 군 심문 기법을 ‘개혁’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카핀스키가 해임을 당한 뒤 밀러는 이라크 억류 작전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7
마이클 앨런 위너MichaelAlanWeiner 역시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로 림보가 그랬던 것처럼 교도소 재소자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거나 해로운 짐승이라고 깎아내렸으며, 그들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로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라디오 방송인 닐 부츠NealBoortz가 이슬람 사람들을 묘사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면 묘하게도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서슴없이 했던 비방이 겹쳐 들린다. 부츠는 이슬람이 유럽과 아메리카에 퍼지고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같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둘러 백신을 개발해야만 합니다.”28
림보와 위너, 그리고 부츠는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지닌 청중을 대상으로 방송을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따금 상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내리는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화법은 대중에 영합하려는 극우 인사들만 사용하는 화법이 아니다. 주류 언론을 보면 어떤 정치적 색채를 가진 집단이든 종종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태도를 드러내고는 한다. 심지어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MaureenDowd 역시 2003년에 작성한 어느 칼럼에서 무슬림 테러리스트를 가리켜 “바퀴벌레처럼 수를 불려 우리에게 덤벼들고 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29 비인간화를 이용하는 면에서는 좌나 우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표현은 신문 기사 제목에도 넘쳐난다. 애초에 헤드라인의 목적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기사를 읽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인간을 피에 굶주린 짐승과 위험천만한 해충으로 묘사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그런 표현들이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사법은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게 하고 마음을 닫게 만든다. 다른 국가와 갈등이 있을 때 상대가 인간만 못한 사악한 짐승이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더 이상의 분석은 필요하지 않다.
프로파간다를 연구하는 에린 스튜터ErinSteuter와 데버라 윌스DeborahWills는 이렇게 지적한다.
9·11 테러 이후 언론 매체가 사용하는 상징어를 분석하면 뚜렷한 패턴이 나타난다. 테러 용의자부터 시작해 반대 세력의 군인이나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반대 세력 민족 전체가 동물, 특히 사냥감으로 비유된다는 점이다. 이런 양상은 국가 내의 갈등은 물론 국가 간의 갈등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미국, 유럽, 호주를 비롯해 어느 지역에서든 정치적 색채를 띤 신문을 펼쳐 헤드라인을 살펴보면 상대를 사냥해야 할 짐승으로 규정하는 태도가 놀라울 만큼 일관적이게 나타난다.30
예컨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은 이따금 사냥 활동으로 묘사된다(‘영국군이 도시 바스라를 에워싸자 이라크군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다’, ‘테러 사냥꾼들이 25명의 테러리스트를 덫으로 포획하다’, ‘빈 라덴을 향한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다’). 적군 기지는 짐승이 기거하는 둥지처럼 그려진다(‘오사마를 숨길 굴을 포기한 파키스탄군’, ‘팔루자에 있는 테러리스트들의 보금자리에 공격이 개시되다’). 물론 사냥감은 그 둥지에서 몰아내야 한다(‘어떤 공격으로도 빈 라덴을 보금자리 밖으로 나오게 만들 수 없는 이유’, ‘미국은 어떻게 빈 라덴을 굴 밖으로 끌어낼 것인가’). 그러려면 일단 덫을 놓아야 한다(‘탈레반 우두머리를 덫으로 포획할 가능성이 열리다’, ‘FBI가 놓은 함정에 이슬람 수뇌부가 걸려들다’). 다음으로는 사냥감을 철장에 가둬야 한다(‘사담 후세인이 철장에 갇힌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위협’). 반대로 적이 게걸스러운 포식자(‘족쇄를 채운 맹수 사담 후세인, 법정에 가다’)나 괴물(‘괴물 같은 테러리스트’, ‘괴물과 무슬림에 관하여’)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적을 성가신 쥐(‘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의 쥐 소굴을 말끔히 쓸어 버리다’), 독사(‘똬리를 틀고 기다리는 독사’), 곤충(‘이라크군이 팔루자에 벌집을 틀다’), 병균(‘바이러스처럼 변이를 일으키는 알카에다’)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드러난다. 어느 경우든 적들은 무서운 속도로 증식한다(‘점점 더 늘어나는 이라크의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31
혹시 내가 별것도 아닌 사례들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가. 어쩌면 이런 표현들은 한낱 비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말과 글을 다채롭게 꾸미는 방식일 뿐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규정하는 표현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스튜터와 윌스도 이런 표현들을 ‘비유’라고 못 박았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이런 부류의 언어 표현이 비유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저 비유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인간을 쥐나 바퀴벌레로 일컫는 행위에는 비유하고자 하는 의도보다 훨씬 강력하고 위험한 무언가,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반영되어 있다. 바로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타인을 인간만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욕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욕설의 목적은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모욕감을 주는 것이다. 언어를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사고방식에는 다른 사람이 인간만 못하다는 판단이 수반된다. 다시 말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비인간화는 현실을 부정하는 일, 일종의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우리가 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그들이 인간만 못한 짐승이 아니라 엄연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사례는 비교적 최신 역사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하지만 비인간화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하다. 비인간화는 세계 곳곳의 문화에서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어쩌면 그 역사가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선진국의 문명인에게서도 아마존 외지의 원시 부족에게서도 비인간화를 찾아볼 수 있다. 비인간화의 자취는 고대의 쐐기문자판에도 현대의 뉴스 헤드라인에도 묻어 있다. 비인간화는 나치,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유대인, 무슬림 등 각 시대와 지역의 잔혹한 괴물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비인간화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비인간화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비인간화는 모두가 마주한 문제이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불행한 건 단지 악행과 속임수 때문만이 아니다.
혼동과 오해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이 생겨난다.
—이언 매큐언, 《속죄》
비인간화라는 단어는 19세기 초반에 영어에 등장했다. 이 단어는 처음부터 여러 의미로 쓰였으며 지금도 그 용례가 다양하다. 예컨대 뉴스 기사와 학계 논문을 보면 공항의 자동발권기가 고객을 ‘가축’ 취급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라거나, 포르노가 여성을 비인간화한다거나, 철인 3종 경기가 체육인을 비인간적으로 혹사한다거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교육 환경이 비인간적으로 변화한다거나, 교도소에서 죄수를 관리하는 방식이 비인간적이라는 등의 말을 찾아볼 수 있다. 비인간화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사례는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1
이렇듯 다양한 의미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비인간화를 연구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비인간화를 제대로 논의하려면 일단 비인간화가 무엇인지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비인간화란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정의에는 크게 두 요소가 들어 있다.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인간화할 때 그 사람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그 사람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내가 제시한 비인간화 개념을 흔히 사용되는 다른 비인간화 개념들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개별 존재로 인식되지 못할 때 비인간화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비인간화란 다른 인간을 독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단순한 수치, 관료주의 사회의 부품, 특정 인종, 국가 또는 민족 집단의 사례로 취급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내가 말하는 비인간화는 아니다. 개인의 독자성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과는 다르다. 개성을 잃은 인간도 어쨌든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비인간화가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컨대 여성주의 사상가 린다 르몬체크의 저서 《여성의 비인간화DehumanizingWomen》에는 대놓고 ‘성적 대상물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2 페미니스트 학계에서 사용하는 대상화라는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캐서린 맥키넌과 안드레아 드워킨이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설명을 참조해 발전시킨 개념이다. 드워킨은 대상화라는 표현을 이렇게 정의한다.
대상화란 특정한 사회적 수단을 이용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사고팔 수 있는 사물이나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대상화를 당한 사람은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사회적 환경에서나 개인적 환경에서나 개성과 완전성을 잃어버린다. 대상화는 본질적으로 차별에 기반을 둔 공격이나 다름없다. 온전한 인간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물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의 인간성에는 무시로 인한 상처가 생긴다.3
대상화를 당하는 여성들은 인간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다는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에게 주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그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못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의사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의 인간성을 경시할 수는 있다. 환자를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졌을 뿐 수리가 필요한 기계로서 바라볼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환자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른 인간에게 경멸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두고 비인간화의 사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인간성을 부정해야만 상대방을 깎아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상대를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바라보는 대신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열등한 인간도 결국은 인간이다.
마지막으로 비인간화가 다른 사람을 잔인하거나 모멸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거나 누군가를 체계적으로 따돌리는 것이 곧 비인간화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선후 관계의 착각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폭력을 당한다고 해서 그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한다면 많은 경우에 폭력과 모욕이 뒤따른다. 결국 기억해야 할 점은 비인간화가 심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비인간화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일종의 태도, 즉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일종의 행동, 다시 말해 생각이 아니라 행위이다.
다른 사람을 비인간화한다는 것은 그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바로 이런 용례를 과거 에이브러햄 링컨이 스티븐 더글러스와 마지막으로 벌인 논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링컨과 더글러스가 벌인 논쟁의 핵심 화제는 노예제도였다. 더글러스는 과거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간의 평등을 말할 때 열등하거나 타락한 인종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 이에 링컨은 더글러스가 다른 사람을 탈인간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에게서 인간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응대했다. 링컨의 담화문을 게재한 《뉴욕 트리뷴》 편집자는 탈인간화dishumanize라는 말이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좀 더 자연스러운 비인간화dehumanize로 대체했다.5
내가 정의한 비인간화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여러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의문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누군가를 인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인간인 것이 인간처럼 보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겉모습만으로 충분하다면 스티븐 더글러스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온전한 인간이라고 인정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성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일 것이다. 인간인 것이 인간처럼 보이는 것과 다르다면 분명 오감으로 감지하기 힘든 미묘한 무언가가 인간성을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는 자연스럽게 다음 의문으로 이어진다. 비인간화를 당한 사람들에게 결핍된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어떤 유형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일까?
한편 비인간화는 인간의 심리 작용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인간 본성에 어떤 성질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을까? 비인간화는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까? 비인간화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기능을 수행할까? 다른 사람을 비인간화하려는 욕구는 인류 보편적일까, 아니면 특정 문화나 역사에 한정될까? 이런 욕구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된 결과일까?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사고방식에 공통적인 패턴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왜 그런 패턴이 나타날까?
제대로 된 비인간화 이론이라면 이런 의문들을 전부 다룰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그렇게 하겠지만 해답을 점진적으로 쌓아가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인간화라는 개념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누구도 다룬 적이 없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리라 약속한다.
고전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야만인이 없는 지금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떤 점에서는 그들이 해결책이었는데.
—콘스탄티노스 카바피Constantine Cavafy,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6
비인간화 역사는 아주 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문헌 중 비인간화를 다루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불과 2600년 전에 고대 그리스에서 기록되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다른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했으며 이는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출신 고전 연구가 벤저민 아이작BenjaminH. Isaac 역시 고대 문헌 가운데 동물을 문학적 장치로 사용하는 문학 전통을 풍부하게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학적 장치가 수사적 효과만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아이작은 “인간을 동물로 묘사하는 문학 글귀를 전부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해서 경고한다.
그중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의도한 경우도 있다. … 동물 비유는 일종의 마음 상태를 반영했다. 자기 자신을 이민족과 구별하는 사고방식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 덕분에 그들은 아무런 도덕적 제약 없이 제국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7
기원전 7세기 세모니데스(시인으로 아모르고스 식민지 건설을 이끌었기 때문에 흔히 ‘아모르고스의 세모니데스’라고 불린다)는 자신의 시에서 대놓고 여성을 인간 이하의 생물로 묘사한다. 이 시에서 여성은 열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각각의 범주는 서로 다른 동물을 나타낸다. 세모니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신께서는 여성의 정신을 따로 구분해 만드셨다. 한 부류의 여성은 털이 긴 암퇘지를 본떠 만드셨다. 그런 여자의 집에는 모든 것이 진흙이 묻은 채 바닥 위를 어지럽게 굴러다닌다. 여자 또한 몸을 씻지 않고 옷을 빨지 않으며 살만 뒤룩뒤룩 찐 채 똥 무더기 옆에 앉아 있다. 또 어떤 부류의 여성은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는 악랄한 암캐를 본떠 만드셨다.8
세모니데스는 암퇘지와 암캐 외에도 여우, 당나귀, 족제비, 노새, 원숭이 같은 동물에 빗대어 여성을 묘사한다. 21세기의 독자에게는 말장난 같아 보일지도 모르나 세모니데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작의 주장에 따르면 세모니데스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이 정말로 특정한 동물에게서 나왔다”고 믿었다. “암퇘지에게서 나온 여성은 정말로 암퇘지인 것”이다.9 이 시에서 우리는 원시적인 형태의 비인간화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인간 하위의 생물이 섞여 있으며 하위인간성은 그들의 기원이 된 동물의 본질에서 나왔다는 이론이다. 반면 가장 고등한 형태의 인간은 자생적autochthonous(고향 땅의 흙에서 나옴)이라고 여겨졌다. 약 1세기 후에 그리스 노예 이솝의 《이솝 우화》에서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이번에는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동물을 만들었다. 제우스는 동물이 인간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보고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일부 동물을 인간으로 바꿔 동물의 수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는 지시에 따랐고 그 결과 본래 동물이었던 사람들이 동물의 영혼을 간직한 채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다.10
아마 이것이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속에는 동물의 영혼을 지녔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담은 가장 오래된 기록물일 것이다. 물론 이런 기록들도 흥미롭지만 비인간화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에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두 범주로 분류했다. 그들 자신과 그들 이외의 모두로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류 문명의 귀감이라 생각했으며 자신들 이외의 이민족은 모두 바르바로이barbaroi(야만인)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비인간화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이방인을 향한 그리스인의 반감에 지적 허울을 덧입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야만인이 노예로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는 ‘생물학적 목적’이라는 특별한 개념이 깔려 있었다. 그는 우리 몸에 있는 각각의 기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을, 즉 목적이 있음을 인식했다. 예컨대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심장은 피를 펌프질하기 위해 존재하며 보호색은 포식자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고 날개는 공중을 날기 위해 존재한다. 이때 주목할 점은 서로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두 존재가 같은 목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새의 날개, 곤충의 날개, 박쥐의 날개는 서로 굉장히 다르다. 새와 박쥐의 날개는 둘 다 앞발이 변화한 결과물이지만 새의 날개가 비교적 날개로서 고정된 반면에 박쥐의 날개는 공기를 ‘잡기’도 하는 손에 가깝다. 나비의 날개는 애초부터 앞발과는 상관이 없다. 이렇듯 각각의 날개는 해부학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진화해 온 역사 역시 상이하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진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이 예는 내가 제시하는 것으로, 그럼에도 이것들을 전부 날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전부 같은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누구의 날개든 비행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날개로 만드는 것은 비행이라는 목적이다.11
아리스토텔레스는 똑같은 추론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에도 틀림없이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행이라는 목적이 무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