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전진소녀 이아진
“나만의 꿈을 찾아 달려가겠어”라는 당찬 포부 하나로 학교를 자퇴하고 꿈 탐험가의 길에 들어선 전진소녀 이아진. 14살에 홀로 떠난 호주 유학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영어를 못해서, 아시아인이라서 놀림 받던 어린 소녀는 악착같은 노력으로 교내 인싸로 성장했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어떤 실패든 다른 성공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8살, 건축가가 되고자 했던 그녀는 ‘남들이 하니까’ 대학에 진학하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자퇴했다. 공간이 창조되는 가장 원초적인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건축을 느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빌더가 되었다. 좌충우돌하고,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4년차 목조주택 빌더(목수)로 일하고 있다.
아직 자랑할 정도로 이루어낸 결과물은 없다. 다만 인생의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며 스스로 세운 목표를 이뤄내는 중이다. 전 세계인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건축가를 꿈꾸며 매일 자신의 속도와 방법으로 달려가고 있다. 유튜브 <전진소녀의 성장일기>를 통해 누군가의 응원에 힘을 얻고, 또 다른 이의 꿈을 응원하는 크리에이터로도 활동 중이다.
아이엠
“너는 누구보다
강하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2016년 1월 10일이다. 14살의 내가 호주라는 타국의 땅을 밟은 첫날이기도 하다. 이때 나의 운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동화 같은 풍경을 가진 나라로 훌쩍 떠나와서도,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서도, 반짝거리는 꿈을 찾게 되어서도 아니다.
호주는 나에게 실패를 알려줬다. 실패했을 때 얼마나 참담한지, 어떤 좌절감이 나를 찾아오는지 배웠다. 보호장비 하나 갖추지 못한 채 공격당했고, 당연하게도 참 많이 아팠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그때부터 한동안 나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는 ‘실패’와 같은 의미였다. 처음은 항상 어긋났고, 그로 인해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처음’을 겪어냈다. 온몸으로 경험할수록 수많은 처음이, 실패로 끝나버린 일들이 결국 나의 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실패를 넘어서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취감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지만, 살게 하지는 못한다. 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꿈’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물론 꿈을 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의 편견과 잣대, 비교와 강요로 꿈을 꾸기도 전에 깊은 상처만 얻게 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호주에서 첫 실패를 겪으며 지금의 내가 되었듯, 18살에 한국으로 돌아와 상처를 겪으며 또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
‘여자애가 무슨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해?’
‘꿈이 아니라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학교를 자퇴했다던데 사고 쳐서 그만둔 거 아니야?’
‘일을 할 줄은 알아? 저렇게 일하고 돈도 버는 거야?’
사람들이 가진 수많은 편견과 날카로운 말을 맨몸으로 맞았고, 상처를 입었지만 원하는 게 있었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첫 도전에 성공하지 못해도 다음 기회, 그다음 기회를 노린다. 스스로 모든 걸 끝내겠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N번째 기회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목적지만 분명하다면 다시 해내는 것이 두렵지 않다. 꿈은 그래서 사람을 살게 하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명확한 꿈이 없을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씩 좋아하는 것, 관심이 가는 것, 해보고 싶은 것을 시도하면서 찾아가면 된다. 꿈은 직업도, 학교도, 직장 이름도 아니다.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이뤄내고 싶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는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중요한 조각이다. 이것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고, 포기하지 않고 다음 도전을 위해 용기를 내면 된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이제야 온전히 꿈을 묻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건축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사람들이 공간에서 치유받고, 하나가 되고,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렇기에 서로를 아프게 하기보다 서로를 치유해 주는 방향으로 함께 걷기를 바란다. 바람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해낼 것이다. 예술이라는 분야를 통해 나를 표현하고 싶었던 내가 건축을 선택하고 배우는 이유, 나의 꿈이 궁극적으로 ‘사람’인 이유다.
“너희 때는 안 꾸며도 예뻐.”
예전부터 어른들이 늘 하던 이야기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별로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얼굴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니 안 꾸며도 예쁘다는 표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믿음으로 가득한 눈부신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 빛은 어떤 꾸밈보다 사람을 더 반짝이게 해주는 요소다. 나는 그 빛을 스스로 꺼버리는 선택을 한 적도 있다.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믿지 않게 되었을 때, 사회의 틀에 나를 맞춰 넣기로 했을 때, 나 자신이 아닌 사회로 부터 인정받으려 했을 때 등 나를 잃어가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응원이, 누군가의 손길이 나를 살렸다. 다시 나만의 빛을 켜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이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자신만의 모험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아직 21살이기에 내가 지나온 여정에 성공 공식이 있거나 거창한 깨달음과 결론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결과물을 만든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아직은 ‘시작’ 단계이고 수확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내가 거쳐온 ‘시작’ 단계의 과정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서툴렀던 지난 시간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그것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닿아 큰 응원의 메시지가 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N포 세대라 부르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포기한 게 아니라 사회가 정해놓은 길과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사회의 기준에는 맞지 않겠지만 나의 기준에는 충분하다. 과거의 기준은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우리를 포기시킬 수 없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자신의 방향으로 끝까지 달려봤으면 좋겠다. 자신의 꿈을 향해 우리 함께 달리자.
CONTENTS
PROLOGUE “너는 누구보다 강하다는 걸 잊으면 안 돼”
Quest 1.
있는 그대로의 나 인정하기
“공장에서 나오는 기성품이 아닌, 세상 단 하나뿐인 원석”
01 물속에 기름 같은 아이
02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이 소중해
03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떠난 유학
04 투명 인간 벗어나기
05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마음
06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07 도움을 받아들일 용기
Quest 2.
평생의 친구인 나와 친해지기
“스트레스 받는 단점보다 자신감 주는 장점에 집중”
01 나를 가장 무시한 건, 사실 나였어
02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내기
03 가진 건 변하고 싶다는 의지 하나!
04 내가 좋아하는 게 이렇게 많은 아이였나?
05 더 나은 나를 꿈꾸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
Quest 3.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 살아가기
“오늘의 내가 즐겁지 않은데 미래의 나는 즐거울까?”
01 다수의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02 인생을 내 이야기로 채울 거야
03 하고 싶은 걸 선택하는 것의 무게
04 부딪쳐야만 알 수 있는 것들
05 목표가 있는 배움
06 그래서, 꿈이 뭐예요?
Quest 4.
나의 선택을 믿고 책임지기
“좌절은 해도 포기하고 후회하긴 싫어”
01 정말 잘못 생각한 걸까?
02 누구에게나 자신이 짊어질 짐이 있다
03 세상이 들을 때까지 소리칠 거야
04 손보다 못났다고 발을 자를 순 없는데…
05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 보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06 사람에 절망하지만 사람으로 위로 받는다
07 목표가 나를 천하무적으로 만든다
Quest 5.
거리낌 없이 도전하고, 언제나 꿈꾸기
“멈추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달려갈 거야”
01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02 편견 없는 경험으로 채운 인생의 한 페이지
03 하고 싶은 일이 하나일 필요는 없잖아
04 내가 선택한 예술, 사람
05 한 걸음씩, 일단 앞을 향해 걸어보자
06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집중하기
07 함께하는 것의 힘
08 배움에 자존심 부리지 마!
09 즐기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EPILOGUE “나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원초적인 꿈”
엄마의 편지 가장 소중한 친구, 진이에게
01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든지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한국에서 지내는 내내 주변 친구들과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일단 가정환경부터 달랐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즈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언제부터인지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있는 순간을 볼 수 없었고, 집에 가도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마음속 불안이 커졌고, 엄마와 차를 타고 가던 중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빠랑 헤어진 거 아니지? 아빠 잠깐 어디 간 거지?” 엄마는 꽤 긴 시간 동안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엄마랑 아빠는 헤어진 게 맞아.”
나는 큰 충격을 받아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창문을 바라봤지만,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던 그때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런 이유로 우리 집 구성원은 다른 아이들과 좀 달랐다. 엄마와 둘째 이모, 막내 이모가 함께 살았다.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는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했는데 몇 번이나 실패했고,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장이었던 엄마는 조금이라도 빨리 사업을 정상화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고, 어린 나는 엄마가 아닌 이모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혼자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초등학생이 되자 엄마뿐 아니라 이모들도 바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 일을 나간 집은 늘 비어있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없는 집은 실제보다 훨씬 넓게 느껴져 때로는 무섭기까지 했다. 열쇠를 잊어버려 누군가 올 때까지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고, 발걸음을 돌려 동네 놀이터나 도서관 또는 학교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늘어나자 학교가 끝나도 습관처럼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내게 집은 가족이 반겨주는 곳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외롭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오히려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친구가 있는 학교와 놀이터가 더욱 집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친구들을 따라다녔다.
친구들은 나와 시간을 보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친구의 조건은 시간이 많은 아이였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친구라면 같은 반이든 옆 반이든, 처음 보는 아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 가족이 함께해야 하는 모든 것을 친구와 나눴다. 가족보다 편안하고 나를 자주 웃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에게 더 의존했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불안정한 상황들을 이해하기에는 많이 어렸다는 걸 알고 있다. 결핍된 것을 스스로 채우기에는 아는 것도, 어른에게 무언가 받아본 것도 적었던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시 내가 느낀 또 한 가지는 주고받는 마음이 늘 동일한 양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친구들을 의지하고 많이 따랐지만, 모두가 나를 반가워하고 같은 마음을 보여줬던 건 아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수업 태도가 좋은 것도, 조용한 것도 아니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가장 큰소리로 떠드는 시끄러운 학생 중 하나. 교실이나 복도를 매일 뛰어다니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했는지 얌전히 걸어 다니는 게 힘들었다. 밝고 활발하다고 하기엔 이곳저곳 쏘다니며 노느라 정신 팔린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산만한 데다 성적까지 안 좋고 시끄러우니 몇몇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외롭지 않도록 친구들과 오래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 앞에서 무작정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학원 선생님에게 사정해 하루씩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 같이 놀 친구가 없어 12살이 되던 해 엄마에게 부탁해 처음으로 학원에 등록했다. ‘이제 나도 학원에 다니니까 숙제 이야기도 하고 공부가 싫다는 투정도 부리면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설렜다. 친구들과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많았던 나에게 드디어 같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처음 다니게 된 학원은 상상과 달랐다. 학교 수업을 제외하면 방과 후 수업밖에 들은 게 없어서, 학원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착각이었다. 학원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종류의 교재를 풀고 단어들을 외우고 시험을 봐야 했다. 몇 점 이상 점수를 받지 못하면 통과할 때까지 재시험이었고, 항상 많은 양의 숙제가 주어졌다. 학원에서 배우는 방식이 버거웠고, 뭘 배웠는지 머릿속에 전혀 남질 않았다. 그저 매일 스트레스만 받았다. 나는 학원 하나 다니는 것도 버겁고 힘든데 주변 친구들은 2~3개 이상의 학원에 다니며 과외도 받았다. 공부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없던 나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내가 적응해야 하는 것이 환경적인 부분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에게 학교는 놀이터였다. 방학 때도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 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나 수업을 들었다. 하다못해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학교에 갔다. 1년 내내 방학이 없는 아이에 가까웠다. 그런데 학원에 가기 시작하면서 체험활동이나 방과 후 활동을 좋아하고,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게 중요한 내가 주변 친구들과 얼마나 다른 생각, 다른 모습,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친구들이 얼마나 성적에 신경을 쓰는지, 점수 1~2점 차이에 얼마나 예민한지도 깨달았다.
차이를 발견하고, 다수와 다른 나를 느낄수록 ‘내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 목숨 걸지 않는 아이,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는 엄마까지 모두 이상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친구 부모님들은 성적 체크도 하고 교과서나 숙제 검사도 하는데 왜 우리 엄마는 나한테 아무 소리도 안 하지? 혹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생각하면서 엄마에게 혼자 서운해하는 지경이 됐다.
나는 높은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일이 더 많았는데, 엄마는 단 한 번도 점수를 가지고 야단친 적이 없다. 오히려 친구들보다 점수가 낮아 속상해하고 있으면 “진아,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속상해할 필요 없어”라며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점점 더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에서 학업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도 엄마는 늘 “학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약속을 배우고 경험하는 곳일 뿐, 학습 능력을 평가받는 곳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학교에서는 기본을 이해하고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다. 기본이 탄탄하면 훗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엄마의 설명이 당시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야기와 너무 달랐으니까.
이제는 안다. 학교나 사회에서 좋은 성적과 결과를 얻어야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해한 것, 느낀 것, 얻은 것들이다. 결과가 전부라는 사회의 기준과 시스템에 맞춰 훈련받으면 성능 좋은 로봇이 될 뿐이다. 그건 나뿐 아니라 누구여도 상관없는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을 피해 정말 나다운 사람이 되려면 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기본 규칙을 익히고, 타인과 함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나로서 남과 함께 사는 삶의 바탕을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저 즐겁게 놀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의 의미를 잘 찾지 못했다. 90점을 받아도 100점이 아니라며 서러워했다. 결과가 없으면 과정에서도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가 그려놓은 이상적인 기준 혹은 잘한다고 평가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유일무이한 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를 꿈꾸는 것이 좋은 점수보다 더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그때도 지금도 나를 좀 더 다른 아이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02
나를 설명할 때 중학교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의 나보다 더 용감하고 무식해 무엇이든 과감하게 달려들던 때였다. 중학교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1학년 때는 ‘자유학기제’였는데, 일반 교과 수업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외부 활동과 동아리 프로그램 등 진로 탐색을 우선으로 하는 학습 제도였다. 그렇기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제로에 가까웠다. 오히려 체육 관련 활동과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이 학교생활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이때는 동급생뿐 아니라 선생님부터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친구 같았다.
하지만 중학생 때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어쩌면 학교보다 더 당연하게 갔던 곳이 학원이었다. 결국 초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따라 학원에 가야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중학생의 학원 수업은 초등학생 때와는 또 달랐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꽤 오랜 시간 학원에 있어야 했다. 학교에서 매주 수행평가와 시험을 보고, 학원에서 10시까지 공부를 하는 게 죽을 만큼 싫었지만, 학원에 가지 않으면 하루를 같이 보낼 친구가 없었다.
학원을 다녀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수업하면서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해? 이런 거는 다 학원에서 진도 나가는 거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학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학교 수업을 반쯤 포기했다. 오로지 놀겠다는 생각 하나로 가장 친한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 등록했고 나름 꾸준히 다녔지만, 성적이 크게 오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노는 데에 더 집중해서 그런지 매번 인생 최악의 점수를 경신하곤 했다.
그러나 학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열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공부하지 않는 건 인생 낙오자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나처럼 학교를 재미있는 놀이터로 생각하는 아이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향으로 생각이 변했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수학 학원에 가서 선생님을 붙잡고 진지하게 “왜 이렇게 푸는 건가요?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 건가요? 답은 왜 이렇게 나와요?”라고 수없이 물었다. 공부를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 외워. 그게 빨라” 혹은 “이해하려 하지 마.”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00점을 맞는다고 해도 스스로 이해하고 푼 게 아니라면 0점을 맞는 것보다 창피하고 찝찝하지 않을까. 모두가 하라는 대로 답을 외워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마치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 같아서 떳떳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고 고집부렸던 것 같다. 결과만 보면 많은 이들에게 지는 나였지만, 과정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인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 집요함이 느껴졌는지, 한번은 학원 원장 선생님이 하루 종일 특별 수업을 해주셨다.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 주셨고, 계속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결국 모르던 문제를 풀 수 있게 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문제 풀이가 가능해졌고, 중학교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더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드디어 중간고사 전날, 학원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원장 선생님에게 “내일 수학 100점 맞을 거예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원장 선생님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선생님의 마음을 알기에 더 당당하게 굴었다.
대충 푸는 시늉만 하다가 그림 그리듯 답을 찍는 게 아니라 배운 대로 한 문제씩 차분히 풀었다. 학생이 된 후 열정적인 자세로 문제를 푼 시험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점수는 16점. 지금도 기억나는 시험 점수다. 동네를 돌아다니고 떡볶이와 빵을 사 먹고 놀이터에서 뛰어놀 시간을 모두 반납한 채, 밤 10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난생처음 문제집까지 풀었는데 16점이라니.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찍은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풀었는데 16점이라는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다. 심지어 시험과목 중 공부를 포기하고 찍은 한자는 24점을 맞았다. 공부도 안 하고 찍은 과목은 24점인데 땀 흘려 공격적으로 푼 과목은 16점이라니. 씁쓸하고 처참한 마음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너무 속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괴로워야 할 일이 아니라 당당하게 기뻐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누군가에 의해서, 강요로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 원했고, 직접 목표를 설정한 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그것을 위해 애쓴 과정 속의 내가 꽤 멋져 보였다.
학교에 다니며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어서 굳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특정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는 목표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선택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꿈을 찾고 싶었다. 해야만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그에 맞는 고등학교로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가슴 뛰는 일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가슴 뛰는 목표가 생기면 그것을 향해 질주할 자신이 있었다.
16점을 맞은 아이. 성적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 부모에게 모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쏟아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너 나중에 정말 어떡하려고 그러냐”라는 소리를 익숙하게 듣곤 했다. 진심 어린 걱정의 눈빛과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이 모두 있었다. 그들에게 언제나 그랬듯 걱정 없는 웃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내 미래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괜찮은 점수를 받겠다는 단기 목표를 위해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한순간도 지치지 않았다. 오로지 목표를 위해 직진했다.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즐거워하며 목표에만 몰입했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힘을 만들어내는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단 몇 시간, 며칠이 아니라 인생 전부를 던질 수 있는 가슴 뛰는 목표를 찾겠다고 다짐했다.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 집중해야 진짜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본능이 보낸 경고 사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03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바빴다. 인생의 멘토 같은 사람이지만 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이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나를 키우기 위해 일하느라 집에 계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참 외로웠다. 새벽까지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거나 아침에 눈을 떠 엄마나 이모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일도 잦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밤을 지새워보기도 했고, 배고플 땐 분식집 아주머니나 문방구 아저씨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분들이 나에게 더 엄마 같고 아빠 같았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이런 생활이 너무 외로웠고, 막연히 혼자라는 게 무서워 울던 날도 많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혼자가 익숙해졌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기억들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가족들을 밀어냈다. 친구들의 가족과 비교하면서 아빠와 헤어진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고, 친아빠 대신 다른 아저씨와 있는 엄마를 창피해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엄마 아빠와 같이한 추억을 이야기하면 나는 가지고 있는 추억이 없어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더 집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친구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했다. 내 사촌의 얼굴은 몰라도 친구들의 가족이나 친척은 누구보다 잘 알 정도였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즈음, 엄마는 본격적으로 유학 이야기를 꺼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아’라는 단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그때부터 엄청난 반항이 시작됐다. 가족들보다 더 가족 같은 친구들을 떠나라고 하니 마음속에 쌓인 분노와 서운함 등 여러 감정이 엄마를 향한 미움과 반항으로 표현됐다.
반대로 엄마 입장에서는 그런 내 모습이 충격이었다고 했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보내달라고 노래를 불렀던 건 나였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랬던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다며 반항하고 있으니 엄마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한국의 기준과 유행에 맞춰 변해갔다. 마른 몸과 하얀 피부가 부럽다며, 엄마에게 피부가 하얘지는 백옥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주변 사람들과 경쟁하며 숫자에 집착했다. 혼자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며 모두가 하는 대로 나를 바꿔갔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지옥 같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엄마가 나를 유학 보내야겠다고 다짐한 건 내가 초등학교 때였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 엄마한테 물어본 말이 원인이었다.
“엄마, 우리 집은 몇 평이야? 친구들이 나 몇 평 사냐고 물어봐.”
“엄마, 친구가 자기 가방은 캘빈클라인인데 나는 브랜드 가방 없는지 물어봐.”
무의식적으로 비교가 익숙해지는 아이,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는 아이로 만들어 상처받게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을 몰랐던 나는 지지 않았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신경전이 몇 주간 이어졌다. 큰 계획이나 이유가 있어서 유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중학생이 되고 새롭게 시작된 세상이 재미있었다. 그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기에 또 다른 변화는 원치 않았다.
유학 문제로 엄마와 다투고 반항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나 한국에서 계속 학교 다니고, 예고로 진학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내게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때의 엄마 모습은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나에게 격하게 소리치거나 화를 낸 적 없었던 엄마가 처음 내뱉은 말이라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작 생각해낸 게 예고 가겠다는 거야?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나중에 취업이 쉬울 거 같아? 지금 네 성적으로 그게 가능할 거 같아? 그렇게 사는 게 쉬울 거 같니? 도대체 머리에 든 게 없어!”
이 말을 들으면서 서럽고 화나는 마음에 오열했다. 한참을 울게 둔 후에 엄마는 조용히 나를 안고 물었다. “네가 한국에서 살면 지금 엄마가 한 말들을 계속 들어야 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대학에 입학해서도, 회사에 들어가서도 비교당하고 틀에 갇혀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자신 있어?”라고. 말하는 엄마도 가슴이 아프지만, 앞으로 겪어야 할 시간이 어떨지 너무 잘 알기에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엄마뿐 아니라 주변 어른, 선생님, 혹은 친구들에게까지 이런 말을 들으며 상처받을 딸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엄마의 진심 어린 말을 들으며 나 역시 그런 날들을 살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엄마와의 신경전은 나의 항복으로 마무리됐고, 중학교 1학년이 끝나면 바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고집을 버리고 유학을 결정하니 시험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고 알게 모르게 받던 학업 스트레스가 사라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구나.” 씁쓸하면서도 속이 시원했다.
조금씩 호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나름대로 영어도 배워보려고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공부했다. 그러나 큰 수확은 없었다. 호주로 떠나기 한 달 전, 2주 동안 1:1 영어 수업을 들었는데 이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재를 붙잡고 오래 본다고 입에서 영어가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법과 규칙 위주로 배우다 보니 영어가 머릿속에서 엉켜 말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내가 내뱉는 말들의 문법이 틀리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에 눈치도 보게 됐다.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다. 그렇기에 언어를 가지고 놀면서 의사 전달 용도로 활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언어에 겁을 먹으며 스스로를 숨기기 바빠졌다. 한번 잘못 생긴 습관은 고치는 데 더 오랜,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나 역시 언어에 대한 두려움에 꽤 오랜 시간 괴로워했다.
물론 현실로 닥치기 전까지는 호주에서 생활하면 영어는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동시에 호주에서의 생활이 지금보다 얼마나 자유로울지 상상하며 가슴 설렜다. 그렇게 내 앞에 어떤 날들이 펼쳐질 것인지 단 1퍼센트도 예상하지 못한 채 기대를 품고 호주로 떠났다.
04
2016년 1월, 13시간이 넘는 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호주는 얼굴도 제대로 못 들 만큼 눈이 부셨다. 해가 쨍쨍하고 하늘도 파랗고 맑았다. 마치 겨울에서 여름으로 순간이동한 느낌이었다. 더운 호주와 첫인사를 하며 설레었던 것 같다.
2월 입학 전까지 이모와 함께 시내 도서관, 쇼핑몰, 마트 등 온갖 곳들을 돌아다니며 호주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헬로, 마이 네임 이즈…”만 간신히 가능하던 시절이었기에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서는 데 30분이 걸리는 게 현실이었다. 평생을 검은색 머리와 검은색 눈을 가진 사람들밖에 보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에 떨어졌다. 그들과 아이 콘택트를 하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눈도 맞추고 말까지 해야 하는 주문이라니. 앉은 자리에서 핸드폰을 켜고 ‘영어로 햄버거 주문하는 법’을 미친 듯이 검색해 결국 내가 한 말은 “치즈 버거 플리즈”였다. 그 정도로 영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만큼 자신감도 쭉쭉 내려갔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고 드디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