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의 침략에 맞선 조선민중의 항일투쟁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항일투쟁의 양상은 3·1운동으로 시작하여 임시정부, 의열투쟁, 사회주의운동, 대중운동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일제의 군대와 직접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무장독립투쟁은 우리 민족의 자존감과 의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진행된 독립운동사 연구는 무장독립투쟁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많은 선구적 업적들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무장독립투쟁의 전 면모가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다.
1918년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일제에 맞서서 무장독립투쟁에 올곧게 헌신하였던 김홍일의 생애와 독립운동 역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정밀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한 부분이다. 김홍일의 생애와 무장투쟁에 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단지 연해주 대한의용군, 윤봉길의 의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한국광복군 등 김홍일이 관계했던 단체와 활동에 대한 연구에서 간헐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이러한 단체와 활동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명되지 못했던 까닭은 아마도 그가 줄곧 중국국민당의 장교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홍일은 중국 국민혁명군과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귀주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뒤에 연해주로 가서 연해주 대한의용군을 이끌고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중국 관내로 돌아와서는 중국국민당의 국민혁명군으로 활동하면서 북벌과 중일전쟁에 참가하여 활동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서 윤봉길의 의거를 지원하였으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조선의용대 창설에 깊이 관여하였고, 광복군에서는 참모장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중국 동북 지역의 동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김홍일의 활동을 살펴보는 일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의 혁명 활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12월
윤 상 원
글을 시작하며
• 출생과 성장과정
• 중국 망명과 귀주육군강무학교 졸업
• 군비단 군사부와 함께 연해주로 가다
• 대한의용군사의회와 대한의용군
• 원동해방전쟁에 참여하다
• 다시 만주로 향하다
• 국민혁명군의 참모가 되어 북벌전에 참여하다
• 한인애국단의 의거를 지원하다
• 중앙군의 소장으로 중일전쟁에 참여하다
•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의 참모장
• 해방 후 동북 지역으로
• 그립던 조국으로 가다
글을 마치며
김홍일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김홍일은 1898년 9월 23일에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오송리五松里에서 김진건金振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초명은 홍일弘日이며 호는 일서逸曙였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왕웅王雄, 왕일서王逸曙, 왕복고王復高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김홍일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꽤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 시기에는 그의 집을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번갈아 사령부로 이용할 정도로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김홍일의 집안은 필연적으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끼치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김홍일은 어린 시절에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기울어가는 나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체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건은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풍곡재楓谷齋라는 이름의 서재를 근대식 소학교로 고쳐 운영하였다. 풍곡재는 이 무렵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개량서당 중 하나로, 기존의 한문교육뿐 아니라 산술과 한글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한일병합을 전후해 만주로 넘어가 봉천奉天 신민둔新民屯 부근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고향에서 32호의 농가를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기도 하였다. 김진건은 싱가포르에서 1918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그는 독립운동과 개인사업을 목적으로 만주와 홍콩 등지를 다니다가 싱가포르에 체류중이었다. 또한 그의 장남이자 김홍일의 형인 김홍익金弘翊은 만주 장춘長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김홍일의 집안은 당시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던 지방 유지였다고 할 수 있다.
김홍일이 태어난 곳은 양시楊市라고 불리는 소읍이었다. 양시는 압록강 하류의 접경 도시인 신의주와 용암포 사이에 자리 잡은 장터로 교통이 편리하여 많은 사람과 문물이 모였고, 인근에 있는 신의주와 용암포를 통해 나라 밖의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러일전쟁 시기에는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교차로 주둔하기도 하였다.
양시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항일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안창호,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등이 창건위원이 되어 1907년 2월에 결성한 신민회는 민족산업운동의 하나로 사업장을 만들어 실업가의 경영방법을 지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양시에 무역상사 겸 도매상사인 상무동사商務同事를 설립하였다. 용천 출신으로 상무동사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송자현宋子賢과 이기당李基唐은 일제가 1911년에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8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가던 1909년에는 양시에서 소위 ‘백일세百一稅’ 사건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났다. 통감부는 1909년 4월에 법률 제12호로 지방세법에 시장세市場稅를 신설하여 시장에서 상인들이 매출한 매상고의 100분의 1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순이익의 100분의 1도 과중한데 매상고의 100분의 1을 징수하는 것은 엄청난 수탈 행위였다.
이에 따라 시장세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양시에서도 1909년 12월 18일 장날에 송자현, 황국보, 김계형, 김계종, 장죽섭, 김청달, 김영일, 안봉국, 한영걸, 정승록, 조봉국, 이근혁, 이성학, 이세한 등이 주동하여 시장세 징수를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장날에 운집한 많은 상인들과 농민들이 일본인 세금징수원에게 항거하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가혹한 진압을 함으로써 더욱 확대되었다. 경찰은 주모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14명을 체포하여 용암포헌병경찰분소에 수감하였다. 이에 격분한 용천군민 수백 명이 경찰분소 앞으로 몰려가 수감된 이들을 석방하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군수가 3일 내로 모두 방면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결국 수감된 이들은 모두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이때 체포되었던 한영걸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으며, 안봉국도 출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다. 또 다른 주동자인 황국보와 송자현은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봉천의 옛 시가 모습
그리고 김홍일이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용천군의 3·1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용천군의 만세운동은 양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3월 4일 밤에 600여 명이 참가하고, 이튿날인 5일에는 500여 명이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주모자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용천군에서는 총 28회에 걸쳐 27,6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중에서 2명이 사망하고, 27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554명이 체포되어 11명이 옥살이를 하였다.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벌어진 이러한 항일운동을 직접 목격했던 김홍일은 당시 부친이 운영하던 풍곡재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쳤다. 소학교에서 『유년필독 幼年必讀』, 『월남망국사 越南亡國史』, 『파란망국사 波蘭亡國史』, 『이태리삼걸전伊太利三傑傳』, 『미국독립사美國獨立史』 등과 같은 교재로 공부하면서 독립의식을 함양하였다. 이후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부친의 권고에 따라 좀 더 폭넓은 공부를 위해 1913년에 봉천奉天(현재 중국 심양)으로 건너가 소서변문외양등학교小西邊門外兩等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중국인들의 민족적 차별과 멸시로 인해 한 학기만을 마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홍일은 나라가 없는 망국민에 대한 대우가 어떠한 것인지를 16살의 나이에 중국 땅에서 느꼈다.
오산학교 졸업식(1917)
김홍일은 귀국한 후에 당시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던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1907년 12월에 세운 교육기관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평북 지역의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김홍일이 편입할 당시인 1915년에는 조만식이 교장이었다. 김홍일은 이승훈과 조만식의 고매한 인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산학교의 순박하고 검소한 교풍과 민족적인 긍지와 사명감을 세워주는 교육을 통해 독립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1918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김홍일은 오산학교의 제4대 총동창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원래 김홍일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홍콩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업차 홍콩에 있던 부친의 권고였다. 그러나 부친이 졸업을 앞두고 싱가포르에서 작고했다는 부고를 받았다. 김홍일은 집으로 돌아와 시체도 없는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이승훈으로부터 빨리 평양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조만식으로부터 집안 사정을 들은 이승훈은 김홍일에게 황해도 신천에 위치한 경신학교의 교사직을 알선해 주었다.
경신학교는 황해도 신천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였다. 김홍일은 여기에서 그동안 배운 근대적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김홍일은 경신학교에 부임하고 처음으로 맞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황해도 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녔다. 그러나 마침 황해도 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을 주시하고 있던 일제 경찰은 김홍일을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하였다. 오산동문회를 반일 비밀결사로 몰아서 조만식에게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우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없는 죄가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김홍일은 3일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서 심문을 받았지만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경신학교의 교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일제 경찰이 언급한 인물들과의 서신교환도 금지되었다. 또한 거주지에서 30리 이상을 벗어날 경우 인근 주재소에 행선지와 사유를 보고해야 했다. 김홍일은 이러한 일제 경찰의 탄압 때문에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김홍일의 딱한 사정을 본 맏형 김홍익이 중국으로 갈 것을 권했다. 김홍일 역시 이번 기회에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상해로 가서 중국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선진군사기술을 배워 일제와 싸우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김홍익과 오산학교 동창 김승척金承倜이 그에게 30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김홍일은 이렇듯 주변의 도움으로 마련된 망명자금을 가지고 1918년 9월에 신의주를 거쳐 안동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향하였다.
한인 청년들의 중국군관학교 입학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한인청년들이 중국 각지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교하였다.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사장 등으로 활동한 김승학은 1910년대 초반에 봉천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수학했으며, 이관구는 1912년 무렵에 절강성 항주군사학교抗州軍事學校 속성과 速成科를 졸업하였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입교는 1910년대 후반 이후에 중국 군벌정권의 군사학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신해혁명을 배반한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의 사망 이후 중국 전역에 할거한 군벌들은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군사적 기반 확보를 위해 독자적인 군사교육기관을 운영하였다. 산서 군벌 염석산閻錫山의 산서군관학교, 운남 군벌 당계요唐繼堯의 운남육군강무당과 귀주육군강무학교, 낙양 군벌 오패부吳佩孚의 낙양군관학교, 사천 군벌의 사천육군군관학당, 북경정부 육군총감 휘하의 보정군관학교 등이 대표적인 군벌들의 군사교육기관이었다. 많은 한인 청년들이 이러한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독립투쟁의 전선에 나서고자 하였다.
이들의 입교는 중국의 군벌정권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신규식申圭植, 민필호閔弼鎬, 여운형呂運亨, 박찬익朴贊翊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신규식이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중국 관내 지역의 활동기반 형성과 독립운동 활성화를 목표로 1912년에 동제사를 조직한 것은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이 더욱 더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동제사는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면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한인청년들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군사교육활동은 동제사가 가장 중점을 둔 사안이었다. 이후 김홍일의 귀주강무학교 입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황개민黃介民도 한중혁명동지의 연합조직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의 일원으로 동제사와 관련이 있었다.
3·1운동 이전 시기부터 운남 군벌 당계요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신규식은 1920년 전후한 시기에 한인 청년들의 운남강무학교 입학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이범석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는 1915년 여름에 잠시 국내로 들어온 여운형과의 만남을 계기로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할 결심을 하고, 그해 겨울에 봉천을 경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범석은 1916년에 군관예비학교의 성격을 띤 항주체육학교를 6개월간 다닌 후 신규식의 주선으로 1916년 가을에 운남강무학교 기병과 1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그와 함께 입교한 한인 청년들은 배달무裵達武, 김정金鼎, 김세준金世俊, 최진崔震 등이었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였다.
운남강무학교 15기생으로는 3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입교하였으며, 16기생으로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한 김훈金勛이 대표적이다. 후일 중국공산당에서 양림楊林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김훈은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 부대가 노령으로 이동할 때 ‘군사지식의 습득’을 위해 상해로 출발하였다. 그는 1921년 초에 운남강무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17기생에는 최용건崔庸健, 이계동李啓東, 김형동金瀅東 등이 알려져 있고, 18기생으로는 김종진金宗鎭과 김노원金魯源, 한철韓哲, 마일용馬一龍 등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입교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관오金冠五, 이준식李俊植, 오명吳明, 이검운李檢雲, 문일민文逸民, 김창림金昌林, 정인제 등이 1920년대 초반 운남강무학교에 입교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한인 청년들이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은 신규식과 같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의 주선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로 인해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시험이 요구되었지만, 한인 입교생들의 경우에는 무시험 특별입학이 허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패부 군벌의 낙양군관학교에는 1921년 4월에 김유신金攸信이 입교하였고, 1923년 여름에는 한국노병회 특별 회원 채원개蔡元凱, 최천호崔天浩, 박희곤朴熙坤이 입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1924년에는 한인 청년 50여 명이 입교하였다. 이 중 김유신은 3·1운동 이후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는 한편, 고향인 평북 의주에서 대한청년결사대와 대한독립보합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할 급선무가 군사지식의 습득임을 인식하고, 1920년 12월 말에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서 여운형의 소개를 받고, 광동으로 가서 손문孫文(쑨원) 등 광동정부 요인과 면담하였다. 그리고 광동정부 사법부장 서겸의 소개장을 가지고 군사학교 입교를 위해 하남성의 군벌 풍옥상馮玉祥을 찾아갔다. 하지만 풍옥상은 군사학교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유신은 다시 낙양으로 가서 오패부에게 간청하여 1921년 4월에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이외에도 절강성浙江省의 항주군관학교에는 헤이그밀사 이준의 아들로, 1920년대 러시아 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이용李鏞과 채영蔡英, 한운용韓雲龍, 이보민李輔民 등이 수학하였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사건으로 유명한 나석주羅錫疇는 하남성河南省 소재 한단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은 사천성 소재 노주군관학교에 1922년 당시 21명의 한인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후일 중국군에서 사단장의 지위에까지 이르는 송호성宋虎聲과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하고 1940년대에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이 된 무정武亭은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 군벌들의 군사학교 외에도 항공학교, 군의학교, 군수학교 등의 각급 군사교육기관에도 다수의 한인 청년들이 입교하였다. 최용덕崔用德과 서왈보徐曰甫는 단기서段祺瑞 군벌이 운영하던 북경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였고, 운남육군항공학교에는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그리고 최초의 한인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權基玉이 다녔다. 광동육군항공학교에는 1921년 가을에 박태하朴泰河, 김진일金震一이 입교하였는데, 두 사람은 재학 중에 허숭지許崇智 북벌군 소속으로 복건福建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신건식申健植은 1912년에 항주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항주군의학교 외과주임으로 재직하였으며, 황운용黃雲龍은 1922년 5월에 북경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처럼 많은 한인 청년들이 1920년을 전후하여 군벌정권의 각급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군사지식을 쌓았다. 이들은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의 역량 확충에 기여하였다. 물론 당시 군벌들 사이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에 그들의 처지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또한 군사학교가 위치한 지역이 항일투쟁의 주전장인 만주나 상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군사학교에서 수학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역경이었다. 하지만 한인 청년들은 중국 군벌의 군사학교 수학을 통해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의 강화에 일익을 담당함과 동시에 한중연합의 국제적 연대 형성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귀주육군강무학교 졸업과 북벌전 참여
고국을 떠나 김홍일이 찾아간 곳은 상해였다. 당시 상해는 명실상부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南京條約에 따라 이듬해인 1843년에 개항한 상해는 이후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의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이후 상해에는 중국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지역 외에 중국의 행정 사범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조계지 두 곳이 설정되었다. 그중 하나는 프랑스 조계지였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동조계지였다. 상해는 조계지가 설정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중국의 혁명세력과 약소민족 혁명가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되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김홍일은 먼저 여운형을 통해 중국군관학교로의 입교를 알아보았다. 당시 중국에는 각 지역의 군벌들이 경쟁적으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군관학교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찾아갈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중국 군벌들의 상쟁 기간 동안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보정保定, 절강浙江, 광동廣東, 사천四川, 남경南京, 낙양洛陽,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지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이수하였다. 김홍일도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항일 전장에 나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관학교 입교는 여의치 않았다. 여운형은 대신 대학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이에 김홍일은 상해대학 입학 시험까지 보았으나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그는 다시 군관학교 입교를 알아보던 중에 지인의 소개를 통해 군관학교 인사와 접촉하게 되었다.
김홍일은 상해에서 군관학교로의 입교 방법을 찾으면서 반일단체인 구국단救國團에 자주 드나들었다. 구국단에서 발행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에 조동호가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구국단의 단장이면서 구국일보사 사장인 황개민黃介民이라는 인물과 알게 되었다. 황개민은 강한 반일 의식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10월 3일 개천절 기념식 만찬장에서 우연히 김홍일과 한 탁자에 앉게 된 황개민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는 김홍일의 결의를 듣고 귀주 독군의 아들인 유강오劉剛吾를 소개해 주었다.
김홍일은 유강오를 통해 귀주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홍일이 귀주로 떠나기 직전 황개민은 그에게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아시아 전역에 걸쳐 조직망을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비밀결사인 흥아사興亞社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흥아사의 취지가 아시아의 부활을 목표로 아시아 각 약소민족이 단합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김홍일은 흔쾌히 승낙하고 가입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중국식 이름인 왕웅王雄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중국국민당군에서 활동하면서 김홍일의 공식 이름은 왕웅이 되었다.
김홍일은 1918년 11월에 상해를 떠나서 홍콩과 광동廣東을 거쳐 서안西安까지 가서 닷새를 걸어 귀주성의 성도인 귀양貴陽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귀주 독군을 찾아갔다. 김홍일을 따뜻하게 맞아준 귀주 독군은 그가 귀주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귀주육군강무학교는 운남의 군벌 당계요가 1912년에 귀양貴陽을 점령하고 세운 군사학교이다. 귀주육군강무당을 전신으로 하기 때문에 귀주육군강무학교의 주요 간부 대부분이 운남육군강무학교 출신이었다. 1907년 곤명昆明에 세워진 운남강무학교는 교관의 대부분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교육과정 또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같았다. 교육 내용은 전술학, 축성학, 병기학, 지형학, 교통학, 마학馬學, 측회학側繪學 등의 학과 교육과 보병교련, 야외근무, 사격교범, 진중요무령 등의 훈련 교육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운남강무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 양성된 간부들 중 일부는 귀주육군강무학교의 교관으로 파견되었다. 이렇게 파견된 교관들이 귀주육군강무학교에서 실시한 교육은 운남강무학교와 유사했을 것이다.
김홍일이 귀주육군강무학교에 입교할 당시의 교육과정은 입오생入伍生 훈련과 사관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오생 훈련은 6개월 과정이었고, 사관 교육은 1년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귀양에 도착한 1918년 12월에는 입오생 훈련기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따라서 김홍일에게는 입오생 과정을 거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