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도모히코글
일본의 에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이자 소설가이다. 1977년 도쿄에서 태어나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에 가서 연극을 공부했다. 2년간 해외를 방황하다가 1998년, 스튜디오 지브리에 입사했다. 전설의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에게 일을 배우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작품에 참여했다. 현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제작에 관여하고 있다. 이 책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양지연옮김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북한대학원에서 문화언론학을 전공했다. 공공기관에서 홍보와 출판 업무를 담당했고 지금은 좋은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하루 중 잠자기 전 아이와 함께 그림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엄마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는 《이게 정말 마음일까?》 《만약의 세계》 《보통이 아닌 날들》 《어이없는 진화》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왜 전쟁까지》 등이 있다.
차례
제1부 이별 그리고 모험의 시작
제1장 장인이 되고 싶은 아이 피피
제2장 수리 공방 방문객
제3장 톱니바퀴광장 갱
제4장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제5장 장인 수업 시작
제6장 서둘러야 하는 일일수록 천천히
제7장 미스의 시폰케이크
제8장 첫 심부름
제9장 꿈도 현실도 모두 진짜 세계
제10장 카를레온 개혁 프로젝트
제2부 장인 수업과 시련 그리고 세계 위기
제11장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기
제12장 검은 무리의 침략
제13장 프리츠의 목소리를 들어봐
제14장 장인시험
제3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제15장 귀향
제16장 아시토카 공작소의 최후
제17장 추억 수리 공장
에필로그
추억 수리 공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추억 수리 공장의 솜씨 좋은 장인들은
아프고 슬픈 추억을 수리해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드립니다.
친구가 없는 열 살 소녀 피피는 유일한 친구였던 할아버지가 남긴 로봇인형을 고치기 위해 신비한 추억 수리 공장에 들어갑니다.
수수께끼에 휩싸인 공장장 즈키, 흰 수염의 다정한 장인 지사마와 솜씨 좋은 직공들, 아침에는 소녀, 점심에는 어른, 밤에는 할머니가 되는 레이디·미스·미시즈·마담과 장난감 박물관장 에르네, 세계를 여행하는 곰인형 미샤,
그리고 외로운 소녀 피피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통해
세상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피피가 살던 세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돈으로 바꾸려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사람들에게서 추억을 빼앗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추억을 잃어갈 때마다
공장으로 운반되어 오는 추억도 점점 줄어듭니다.
그들은 정말 추억 수리 공장을 없애려는 걸까요…….
제1장
장인이 되고 싶은 아이 피피
고장 난 장난감이나 물건을 수리해드립니다.
카이저 슈미트 수리 공방
작은 공방 앞에 세워진 낡은 철제 간판이 흔들거립니다.
높은 벽돌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이 노을에 물들고 돌계단이 싸늘하게 식어갈 무렵,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초록색 코트를 입은 소녀가 공방 안으로 머리를 쑥 들이밉니다.
활처럼 휜 눈썹에 동그란 눈. 자그마한 얼굴에 걸맞지 않은 커다란 입에서 새어나온 하얀 입김이 주근깨 가득한 뺨에 어른거립니다.
등에는 가죽 책가방을 메고 양팔로는 상자를 안은 여자아이가 어깨로 문을 밀면서 조심스레 들어오더니 한숨을 돌립니다. 눈앞에는 여자아이 머리 높이의 카운터가, 카운터 뒤쪽에는 선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천장까지 꽉 채워진 선반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장난감과 이런저런 물건들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가 카운터 위에 상자를 놓고는 선반 틈새를 살핍니다. 안쪽은 작업실인 모양인데 부서진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칠이 벗겨진 양철 장난감, 작동을 멈춘 타자기, 가지 않는 벽시계가 보이고, 닳아 해진 가죽 가방과 구두가 축 늘어진 채 포개어 있습니다. 왠지 이 공방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합니다.
코트를 벗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공방으로 들어갔더니 나무 작업대가 보입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램프가 작업대 주위를 은은하게 비춥니다. 누군가 앉아 있는 듯한데 서류와 공구에 둘러싸여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칙칙칙…… 석유난로가 내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채웁니다.
여자아이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입을 막은 채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작업대 건너편에서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피피, 엄마한테는 말하고 왔니?”
여자아이는 움칫 어깨를 움츠립니다.
“할아버지, 내가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여자아이는 한숨을 쉬더니 작업대 뒤쪽으로 돌아갑니다.
“뭐 하고 있었어?”
단정히 빗어 넘긴 긴 은발에 한쪽 눈에는 확대경을 낀 키 큰 노인이 보입니다. 이 공방의 주인 카이저 슈미트입니다. 커다란 주머니가 대여섯 개나 달린 가죽조끼를 입고 닳아 해진 가죽의자에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습니다. 핀셋을 잡은 손이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피피의 눈이 반짝거리고 주근깨 가득한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작업대에는 양철로 만든 인형이 누워 있습니다. 어른 팔꿈치에서 손끝 길이 정도의 양철통 안으로 톱니바퀴가 엿보이는데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된 인형인 듯합니다.
“무슨 인형이야?”
“인형이라기보다는 로봇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구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피피도 할아버지를 흉내내듯 똑같이 팔짱을 낍니다.
“뭐 같니?”
달걀 모양 얼굴에 오른쪽 눈에는 초록색, 왼쪽 눈에는 파란색 돌이 박혀 있습니다. 두 눈 사이에 위치한 코뼈는 모래시계 속을 흐르는 모래 같고, 얇은 입술은 일직선으로 꽉 다물어져 있습니다.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합니다.
“아!”
피피가 한쪽 팔을 쭉 뻗습니다.
“광장 시계탑에 있던?”
“응. 시계탑에 있던 자동인형이란다.”
“선생님이 그러던데? 시계탑은 이제 낡아서 움직이지 않는대. 그래서 곧 철거한다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 시계는 몇백 년이 지나도 끄떡없게 만들어졌거든. 톱니바퀴를 손질하고 낡은 부품만 교체하면 다시 잘 돌아갈 거야.”
“정말?”
“벌써 어두워졌구나. 그런데 왜 왔니?”
“아! 할아버지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주름이 깊이 파인 할아버지의 눈꼬리에 흐뭇한 미소가 번집니다. 새파란 눈이 다정스레 피피를 바라봅니다.
“엄마한테 전화부터 하자.”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가 공방에 울려 퍼집니다.
그사이 피피는 양철 로봇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로봇은 램프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지만 표정은 왠지 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집에 못 가고 있구나. 불쌍해라.”
그 순간 로봇 머리가 까딱 움직이며 피피 쪽을 향합니다.
피피가 뒷걸음질치는데 바로 뒤에서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자, 집에 갈 때는 데려다주마. 보여주고 싶다는 게 뭐냐?”
“이리 와봐!”
피피는 할아버지 손을 잡아끌어 카운터로 향하더니 눈짓으로 상자를 가리킵니다. 그러고는 긴 의자에 털썩 앉아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봅니다.
“열어봐.”
할아버지가 손으로 상자를 더듬습니다. 굵고 거친 손가락과 두꺼운 손톱. 기름과 도료로 얼룩진 장인의 손입니다.
“오!”
커다래진 할아버지의 눈이 피피를 바라봅니다.
상자 뚜껑이 열리며 목재와 점토로 만든 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화지로 둘러싸인 정원에 세모꼴 집이 서 있고 점토로 만든 나무에는 곤돌라가 달렸습니다.
“오, 정말 근사한데!”
“공작 수업 시간에 만들었어. 요정을 만나는 집이야.”
“요정을 만나는 집이라. 허허. 정말 훌륭하구나.”
할아버지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집니다.
“그런데 다들 이상하대. 누가 이런 걸 갖고 싶겠냐면서.”
“난 그런 생각 안 드는데.”
“우리 반에선 리나가 칭찬을 제일 많이 받았어.”
“시장님 댁?”
“응.”
“리나는 뭘 만들었는데?”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인형. 태블릿으로 조종하는 거야.”
“그런 걸 다 만들 줄 아는구나.”
“아니, 가게에서 팔아. 엄청 비싸. 조립하는 걸 아빠가 도와줬대. 다들 깜짝 놀랐어.”
“흠, 피피는 혼자서 이걸 만들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피피가 만든 물건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물건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누군가라니 누구?”
“할아버지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친구들.”
피피가 고개를 떨굽니다.
“난 친구 없는데.”
“리나는? 어릴 적엔 여기 자주 놀러왔잖아.”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나랑 안 놀아.”
“왜?”
“다들 내가 이상하대.”
“흠.”
잠시 생각에 잠기던 할아버지는 작업실에서 양철 로봇을 가지고 나와 카운터에 눕힙니다.
“피피, 이 아이 얼굴이 어때 보이니?”
할아버지는 피피 옆에 앉아 피피의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피피가 인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합니다.
“슬퍼 보여.”
“그렇구나. 내가 보기엔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가? 내가 하는 말은 다들 이상하다고 하니까 할아버지 말처럼 웃고 있는 건지도 몰라.”
“흠. 피피가 보기에 우는 얼굴로 보인다면 그걸로 된 거야.”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습니다.
“이 아이 이름은 프리츠란다.”
“프리츠…….”
“피피, 언젠가 네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꼭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프리츠를 친구로 삼으면 어떨까? 속상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면 프리츠에게 말하렴.”
“할아버지에게 말하면 안 돼?”
“물론 그래도 되지. 하지만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때는 프리츠에게 말하면 된단다. 피피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를 만날 때까지 말이야.”
피피가 고개를 살짝 끄덕입니다.
“있잖아,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도 속상하거나 슬픈 일 있어?”
“물론 있지.”
“그럴 땐 어떻게 해?”
“상처받은 추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를 기다린다고 해야 할까?”
“얼마나 기다려야 해?”
“그건 모른단다. 몇 년, 또는 몇십 년이 걸리기도 하니까.”
“그렇게나 오래?”
피피의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집니다. 피피는 다시 고개를 푹 숙입니다.
“나쁜 일이나 슬픈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할아버지가 피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선반에 놓인 인형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오는 물건들은 모두 상처를 입었거나 망가진 것들이지. 이런 물건들이 하나하나 고쳐져 다시 태어나듯이 상처 입은 추억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뀔 수가 있단다.”
“하지만 슬픈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잊으려 애쓸 필요는 없단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계속 떠올리다 보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그 시간이 짧을 때도 있지만 정말 긴 시간이 걸릴 때도 있어. 하지만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추억은 아름답게 닦이는 법이야.”
“할아버지가 시간을 들여 고친 물건들처럼?”
“그럼.”
“있잖아, 할아버지.”
“응?”
“어른이 되면 나도 할아버지처럼 장인이 될 거야.”
할아버지가 살포시 웃습니다.
“그럼, 그럼. 나중에 피피가 이 공방에서 많은 추억을 되살려주렴.”
“응.”
피피는 할아버지에게 어깨를 기대며 얼굴을 붉힙니다.
◇
피피는 카를레온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카를레온은 오래전부터 이어내려온 공업도시로, 장인들의 솜씨가 뛰어나 카를레온 수제품은 전 세계 누구나 인정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카를레온은 성문이 있던 곳에서 길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는데 아주 먼 옛날에는 수많은 사람과 말이 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선이 몇 개나 되는 간선도로가 좀 더 큰 도시와 도시를 곧바로 이어주어서 카를레온은 그 사이의 한 지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강물의 남쪽에는 구시가지가 미로처럼 뒤얽혀 있는데, 봄이 되면 꽃가게들이 쳐 놓은 차양이 거리를 알록달록 수놓습니다.
강 북쪽은 신시가지로 회색 빌딩들이 높이 치솟아 있습니다. 줄지어 늘어선 오피스빌딩과 쇼핑센터가 사람들을 조급하게 빨아들였다 내뱉기를 반복합니다. 카를레온은 강을 경계로 거울을 비추듯 과거와 현재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피피의 할아버지 카이저 슈미트는 고장 난 장난감이나 물건을 수리하는 장인으로 직공들이 무척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카를레온은 물건을 만드는 일 못지않게 고치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피피는 으레 할아버지의 공방으로 달려갑니다. 할아버지는 고장 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의 부품을 조합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한밤중에 냉장고까지 살금살금 갈 수 있도록 바닥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슬리퍼, 태양열로 달걀을 삶을 수 있는 그릇, 바닥이 이중이어서 밤중에 엄마 몰래 주스를 마실 수 있는 컵. 할아버지 손을 거치면 고장 난 물건이 마법처럼 생명을 얻어 새로 태어납니다.
할아버지는 오전 일을 마치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시계탑광장으로 산책을 갑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에는 피피도 함께 걷습니다.
낡은 교회와 시청사로 둘러싸인 광장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다리의 구시가지 쪽 바로 옆에 있는데 주말이 되면 사람들로 늘 북적입니다.
교회 꼭대기에는 카를레온의 상징인 시계탑이 뾰족하게 솟아 있습니다. 태양 모양을 한 시계 위에는 낮과 밤을 나타내는 천구의가 반짝거립니다. 정오가 되면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지고 문이 열리면서 자동인형이 나타납니다. 오르간 소리와 함께 성인과 천사인형이 빙글빙글 돌며 행진합니다.
서둘러 광장을 오가던 사람들도 자동인형이 나타나면 발길을 멈추고 시계탑을 올려다봅니다. 정신없던 도시가 그때만은 잠시 멈춰 숨을 고릅니다.
성인들의 행진이 끝나면 어릿광대와 곰인형이 등장해 경쾌한 리듬을 울립니다. 어른도 아이도 미소 띤 얼굴로 인형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뭇머뭇 따라가는 작은 양철로봇에 시선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양철로봇이 바로 프리츠입니다.
반년쯤 전, 봄바람이 유난히 심하게 불던 날입니다. 광장의 시계는 11시 59분을 가리킨 채 멈췄습니다. 그 후로 카를레온에서는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시계가 고장 났다는 걸 알았을 때 피피는 할아버지를 따라 시계탑광장으로 향했습니다. 광장에서는 리나의 아빠인 물라노 카를레온 시장이 확성기를 손에 쥔 채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이 오래된 시계탑을 고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듭니다. 재정 위기 속에서 여러분의 소중한 세금을 관리하는 저로서는 하루속히 후원자를 찾아 최신식 시계로 바꾸어 귀중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계탑은 박물관에 기증해서…….”
리나의 아빠가 소리칠 때마다 확성기가 비명을 질러대며 피피의 귀를 찌릅니다. 할아버지는 시장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가만히 시계탑만 올려다봅니다.
◇
피피가 할아버지에게서 프리츠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피피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 말로는 피피도 그때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기억을 떠올리려고만 하면 머리가 빙빙 돌고 눈이 따끔거리며 뭔가가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피피의 기억 속엔 너무 많이 울어 딸꾹질이 멎지 않아 장례식 내내 혼자 집에 있던 일만 남아 있습니다.
◇
하굣길, 피피의 발걸음이 시계탑광장으로 향합니다.
교회가 돌바닥에 커다랗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사된 빛이 돌 위에 얼룩덜룩 그림을 그립니다. 코트 깃을 세운 채 광장을 걷는 사람들은 아무도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계탑을 올려다보니 반쯤 열린 문 안쪽으로 하루에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던 인형들이 보입니다. 들이치는 비바람을 맞아 마치 눈물을 흘린 뒤처럼 얼룩지고 더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시계탑에는 신경쓰지 않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광장을 지나갑니다.
“피피, 오늘은 혼자 왔니?”
뒤돌아보자 베레모를 쓴 왜소한 남자가 긴 빗자루를 든 채 서 있습니다. 열 살인 피피보다는 분명 키가 클 텐데, 허리가 굽어서 마치 무릎 위에 머리가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모리 할아버지.”
“카이저는 어디 갔나? 요새 통 보이지 않네.”
모리는 교회 관리인입니다.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리를 꺼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할아버지는 모리 덕분에 광장이 늘 깨끗하고 빛이 난다며 만날 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식탁 수리를 맡겼는데 찾으러 가야겠구나.”
모리는 물건을 소중히 다루었고 뭔가 고칠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의 수리 공방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충분히 쓸 만하다거나 이건 꽤나 복잡하다고 고장 난 물건에 말을 걸며 순식간에 원래대로 고쳐놓았습니다. 그럴 때면 모리는 소년 같은 눈빛으로 할아버지의 굵고 거친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식탁 수리는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모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럼 또 보자. 카이저한테도 안부 전해주렴.”
모리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탑을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립니다.
“언제쯤 고쳐지려나…….”
교회 뒤쪽 관리실로 걸어가는 모리의 뒷모습을 보며 피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힙니다.
부옇게 된 눈이 초점을 되찾자 광장에 접한 시청사 앞에 새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 셋이 서 있는 게 보입니다. 세 사람 모두 검은색 가방을 들고 끝이 뾰족하고 번쩍거리는 검은 구두를 신었습니다.
가운데 남자는 파란빛을 내는 사각형 손목시계에 대고 뭔가 말을 합니다. 오른쪽 남자는 손에 쥔 카메라로 주위를 찍고, 왼쪽 남자는 태블릿 피시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지?”
피피는 발끝이 얼어붙는 듯했습니다.
남자들은 한동안 시청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붐비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제2장
수리 공방 방문객
피피의 엄마는 늘 공방에 처박혀 일만 하는 할아버지를 싫어했습니다. 어렸을 적 아빠가 놀아주지 않아 외로웠던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난 할아버지처럼 장인이 되고 싶어.”
이 말을 듣던 엄마의 얼굴이 잊히지 않습니다.
엄마는 슬픔에 찬 얼굴로 말했습니다.
“피피, 여자아이는 장인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그 후 피피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됐습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는 정반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바로 지금의 피피 아빠입니다. 엄마는 외동딸이었는데 아빠가 아내 성을 따라 가족 모두 슈미트라는 성을 썼습니다.
아빠는 시청에 근무하는데 틈만 나면 자기는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에 태어났다고 자랑합니다.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늦잠을 잔다거나 아무 일도 안 하고 멍하니 있거나 지각하는 일은 당치않아. 아침마다 그날 할 일을 정하고 행동하면 하루하루 충실한 인생을 살 수 있어.”
아빠는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한결같은 동작으로 커피를 마시고 오믈렛을 먹습니다. 케첩을 뿌리는 방향도 정해져 있습니다. 가로로 일직선을 긋는 게 최단 거리라고 말합니다. 빙글빙글 돌리면서 뿌리면 더 맛있는데 말이죠!
한번은 피피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에 태어났다면 11초는 아빠의 머리가 나온 시각이야? 다리가 나온 시각이야?”
아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피피, 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 그런 거 생각할 시간 있으면 어떻게 해야 목표를 향해 계획적으로 살아갈지 생각하렴.”
“피피, 도대체 넌 누굴 닮은 거니? 할아버지처럼 되진 말자!”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전에는 엄마 아빠도 지금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습니다. 휴일이면 공원에 가거나 차를 타고 멀리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늘 초조하고 여유가 없어진 건 시계탑이 멈춰버린 무렵, 물라노 시장이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부터입니다.
개혁이 무슨 뜻인지 피피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아빠와 엄마는 말끝마다 일하는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거나 노동시간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피피는 지금까지 했던 것을 바꾸는 것이 개혁인가보다고 막연히 이해했습니다.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잔업시간을 아예 없애야 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담이 너무 커. 일하는 사람을 늘려서 노동시간을 제대로 관리해야 해.”
개혁을 하면 도시는 풍요로워지고 모두가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피피는 개혁이란 게 시작되고부터 엄마 아빠와 훌쩍 멀어져버린 것만 같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피피를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왠지 피피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로운 마음이 들 때면 피피는 프리츠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프리츠,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양철로봇이 슬픈 얼굴로 피피를 쳐다봅니다.
◇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가려고 시계탑광장을 지나가는 피피를 리나가 불러 세웁니다.
“피피, 잠깐만?”
리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피와는 다릅니다. 물라노 시장의 외동딸로 신시가지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삽니다. 얼굴도 예쁘고 몸가짐은 새치름하고 공부도 잘합니다. 언제나 새 인형과 게임을 가지고 다녀서 여자아이들은 모두 리나와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가방에 든 게 뭐야?”
리나는 피피의 책가방 위로 얼굴을 내민 프리츠를 가리켰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피는 프리츠를 가방에 넣어 늘 함께 다녔습니다.
“아무것도 아냐.”
피피는 고개를 숙이며 리나 옆을 지나가려 했습니다.
“이상한 인형이네. 그거 어디서 났어?”
리나를 따르던 여자아이들이 피피를 둘러쌉니다.
“피피, 너 요즘 우리랑 안 놀더라.”
“그러게? 맨날 할아버지 공방에 가는 거 아냐?”
피피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논다고 거짓말을 하고 저녁까지 할아버지 공방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리나가 슬픈 표정을 꾸며내며 어른스런 말투로 말합니다.
“얘들아 잠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불쌍하잖아. 게다가 우리 할아버지랑 피피네 할아버지는 아는 사이야.”
“리나 할아버지와 피피 할아버지가?”
“응.”
“하지만 리나 할아버지는 장인 그만두지 않았어?”
“맞아.”
“선생님이 말했잖아. 장인이 하는 일은 이제 없어진다고.”
“아직도 물건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있나보네?”
“그러니 우리 마을이 바뀌지 않지.”
맞아, 맞아!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꽂힙니다.
리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본 뒤 피피의 책가방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잠깐 좀 보자.”
피피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뒤로 뻗어 책가방을 꽉 붙잡았습니다.
“뭐야? 그냥 잠깐 보는 것도 안 돼?”
리나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고 피피를 둘러싼 여자아이들의 표정도 험악해졌습니다.
몸집이 큰 건축사의 딸이 피피의 팔을 거세게 움켜쥡니다. 그때 아첨꾼 광고회사 사장 딸이 피피의 책가방에서 프리츠를 빼냅니다.
“이리 내!”
피피는 자기도 놀랄 만큼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리나 무리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칩니다.
“뭐야? 재수없어. 헐어빠진 인형 하나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리나가 도도한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나옵니다.
“어디 가져가보시지!”
광고회사 사장 딸이 계산 빠른 은행원 딸에게 프리츠를 던집니다. 피구를 하다 혼자 코트에 남겨진 아이처럼 피피는 오른쪽, 왼쪽으로 뛰어다니며 프리츠를 되찾으려고 발버둥칩니다. 프리츠가 리나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자, 돌려줄게!”
피피가 매달리자 리나는 프리츠를 하늘 높이 던졌습니다. 태양에 잡아먹힐 듯이 날아올라가는 프리츠를 쫓아 피피가 달려갑니다. 열린 책가방에서 필통이 덜컹덜컹 소리를 냅니다.
“앗!”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피피의 얼굴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힙니다. 코가 시큰하고 입속에 짭짜름한 피맛이 번집니다. 멀리서 프리츠가 콰당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땅을 울립니다.
“어머, 어쨌든 난 돌려줬어.”
“맞아! 네가 못 받은 거야!”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 후 시커먼 덩어리가 피피의 기억을 삼켜버린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할아버지와 나눈 추억이 담긴 프리츠가 산산이 부서져 돌바닥에 참혹하게 나뒹굴고 있습니다.
피피는 눈물을 흘리며 잔해를 하나하나 주워 모아 웃옷으로 감쌌습니다.
◇
피피는 상처투성이가 된 다리로 할아버지 공방까지 걸어갔습니다. 공방으로 향할 때면 늘 힘차고 당차던 발걸음이 오늘은 비틀거립니다.
주인 잃은 공방엔 덧문이 내려지고 자물쇠가 걸렸습니다. 피피는 웃옷을 현관 바닥에 두고 우편함에 팔을 집어넣습니다. 할아버지는 피피가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게 우편함에 이중 바닥을 만들어 열쇠를 숨겨두었습니다.
문을 밀자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지잉 소리와 함께 카운터에 불이 켜집니다. 선반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인형들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공방에는 할아버지가 남긴 도구와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피피는 프리츠를 감싼 웃옷을 작업대에 올려놓자마자 실이 뚝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꿈이었기를 바라며 눈을 감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펼칩니다. 맨 먼저 프리츠의 팔이 보입니다. 연결 부위가 끊어지고, 미끈한 곡선을 그렸던 몸통은 뒤틀리고, 태엽은 어떻게 아물려 있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듭니다. 머리는 몸통에서 떨어져나가고 오른쪽 초록색 눈은 사라졌습니다. 왼쪽에 파란 눈동자만 하나 남아 슬픈 눈빛으로 피피를 바라봅니다.
피피는 펜치를 손에 들고 구부러진 목의 연결 부분을 펴 보려 합니다. 하지만 단단한 양철판은 끄떡도 안 합니다.
피피의 뺨이 분노로 실룩이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프리츠, 미안…… 정말 미안.”
울다 지친 피피는 작업대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습니다.
◇
달달달달달…….
이상한 소리에 피피는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는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가 제일 먼저 보였습니다. 램프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는 마치 춤추는 눈송이 같습니다. 선반이란 선반은 다 덜덜덜 흔들립니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덜덜 흔들거리는 소리에 섞여 기묘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
“카이저는…….”
“정말 이 바쁜 와중에…….”
피피는 작업대에 고개를 모로 누인 채 오른손을 움직여봅니다. 달라붙은 김을 떼어내듯 검지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엄지손가락에 힘을 줍니다. 겨우 머리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기괴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사람이지만 사람 몸집보다는 훨씬 작고 그림책에서 본 도깨비 같습니다. 둥글게 휜 오다리에 가늘고 긴 팔다리, 볼록 튀어나온 배.
도깨비는 정리대 문을 열어 머리를 집어넣고는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달라…….’ 하고 중얼거리며 뭔가를 찾습니다. 가끔씩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달달 떠는데 그때마다 건물이 흔들렸습니다.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피피는 꿈을 자주 꾸어서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꿈이거나 꿈과 현실 사이 어디쯤에서 벌어지는 일이겠거니 했습니다.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날 겁니다. 하지만 도깨비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냅니다.
“어?”
도깨비가 우뚝 멈추더니 피피를 바라봅니다.
피피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도깨비의 키는 피피만 한데 얼굴은 남자 어른 얼굴입니다. 마늘같이 생긴 코 위에 둥근 안경을 걸치고 안경 너머로 큼직한 눈이 번득입니다. 미간 주름이 깊이 패여 마치 꽉 쥔 주먹 같습니다. 입꼬리는 오른쪽으로 솟아올라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합니다.
도깨비는 눈을 찡그리며 피피를 바라보다가 흠 콧소리를 내더니 다시 선반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저기.”
도깨비는 동작을 멈추고 머리만 빙글 뒤쪽으로 돌립니다.
“내가…… 보이니?”
그러고는 커다란 배를 돌리려는 순간,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웅크려 앉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도깨비는 왼손으로 허리를 누르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는 피피에게 오른손으로 손짓합니다.
“잠깐! 이리 좀 와봐.”
“네?”
“얼른!”
피피가 다가가자 도깨비는 허리를 쑥 내밀고는 끙끙댑니다.
“여기, 여기를 눌러.”
피피는 조심조심 엄지손가락으로 도깨비의 허리 부근을 눌렀습니다.
“아야! 아야, 아야! 아, 좀 더 오른쪽, 아니 왼쪽인가? 아, 거기, 거기.”
살집이 두툼해서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야! 아야야! 카이저를 만나러 왔는데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중이야.”
도깨비는 할아버지를 잘 아는 듯했습니다. 피피가 무심코 힘을 빼자 도깨비가 소리칩니다.
“계속 눌러. 더 세게! 카이저는 어딜 간 거야. 여행이라도 갔나? 수첩에도 답장이 없고!”
“할아버지는…….”
“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도깨비의 몸에서 스윽 힘이 빠집니다.
“그랬군. 그래서…….”
도깨비는 이제 괜찮다고 손짓하더니 일어나 허리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등을 펴고 멍한 눈으로 중얼거립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지.”
피피는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말을 하고 나자 가슴이 아렸습니다.
“카이저는 언제?”
“죄송해요. 기억이 안 나요.”
“왜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이 없어요.”
“기억이 없다고?”
“네.”
“넌 누구니? 나를 볼 수 있다는 건…….”
“전 피피예요. 카이저 슈미트는 우리 할아버지예요.”
“아.”
도깨비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습니다.
“그래, 넌 여기서 뭐 하니?”
“저는, 그러니까…….”
“뭐야! 꾸물대지 말고 얼른 말해.”
“이 로봇을 고치고 싶어서.”
“아! 이건 카이저가?”
도깨비가 프리츠를 내려다보며 팔짱을 낍니다.
“흠, 과연 훌륭해. 그런데 왜 이렇게?”
“망가졌어요.”
“흠,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지.”
“저기, 아저씨는 할아버지랑…….”
“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야. 유감이군. 뭐,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지.”
도깨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손을 휘휘 흔들며 공방 한구석으로 걸어갑니다.
“아, 이런! 일이 있는데. 그럼 난 간다. 안녕.”
“저기!”
“왜?”
도깨비는 두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목만 돌려 피피를 바라봅니다.
“할아버지를 아세요?”
“똑같은 질문은 질색이다.”
“아, 그러니까 할아버지 친구예요?”
“친구? 흥! 그렇게 단순한 관계가 아니야. 뭐, 굳이 말하자면 동지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아저씨도 장인이세요?”
“질문이 많구나. 너한테 일일이 설명하다간 해가 지고 말겠다. 난 장인이 아냐. 난 카이저랑 지사마가 고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해. 뭐, 말하자면 카이저랑 지사마랑 나는 공동사업자와 비슷하지. 비슷했다고 말해야겠군. 뭐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지.”
“지사마?”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지사마를 모르다니.”
도깨비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목을 꺾어 똑똑 소리를 내며 돌아섭니다.
“지사마는 아시토카 공작소 대표로 이쪽 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장인이야.”
“이쪽 세계요?”
“네가 보기에는 저쪽인가?”
“지사마라는 분은 장인인가요?”
“직공들을 지휘해 납기일 안에 일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지사마의 일이야. 물론 지사마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장인이기도 하지. 지사마와 어깨를 겨룰 만한 사람은 네 할아버지뿐이었어.”
공방이 덜덜덜덜 흔들립니다. 도깨비가 다시 다리를 떱니다. 선반에 놓인 도구와 부품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이름을 물을 때는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지.”
피피는 아까 말했는데 속으로 웅얼대면서 다시금 이름을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피피 슈미트예요.”
“또 사과하는군. 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다니면 정작 중요한 때에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없게 돼.”
피피는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또 튀어나올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내 이름은 즈키다. 카이저는 훌륭한 장인이었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뭐,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지.”
즈키는 팔짱을 낀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이어갑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지사마에겐 뭐라고 해야 하나? 납기일을 맞출 수 있을까?
피피는 작업대로 눈을 돌렸습니다. 램프 빛을 받으며 누워 있는 부서진 프리츠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즈키.”
“왜?”
“저 로봇인형은 할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저…….”
“뭐? 꾸물대지 말고 얼른 말해.”
“지사마라면 망가진 로봇인형도 고칠 수 있을까요?”
“그건 지사마가 결정할 일이야. 난 몰라.”
“네.”
피피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굽니다.
“저 인형을 어떻게든 고치고 싶은 거냐?”
“네.”
즈키가 피피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눈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피도 가만히 그 눈을 쳐다봅니다.
즈키가 씩 웃습니다.
“따라와라. 고치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하면 되지.”
즈키는 빙그르르 돌아서서 둥글게 휜 오다리로 뒤뚱뒤뚱 걸어갑니다.
“네? 아!”
피피는 서둘러 프리츠를 웃옷으로 감쌌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 걸까요? 눈앞에는 선반으로 꽉 찬 벽밖에 없습니다.
즈키는 선반 앞에 서더니 미간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않습니다.
“저기…….”
“쉿!”
즈키가 한쪽 손을 내밀어 피피의 말을 잘랐습니다.
“앗!”
피피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공방 모퉁이에 있던 선반 한가운데가 갈라지면서 길이 생겨났습니다.
“흠, 가자. 저쪽으로 가는 길이 떠오르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거든.”
즈키는 선반 사이로 미끄러지듯 몸을 밀어넣었습니다. 선반 저쪽에는 완만하고 긴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 즈키의 발끝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피피는 즈키를 따라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뒤돌아선 즈키가 불안으로 가득찬 피피의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립니다.
“뭐야, 처음 가보니?”
“네.”
“그렇군. 카이저가 이 길 얘기는 하지 않았나보군.”
즈키는 혼자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