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과 나의 균형을 찾아가는 경찰 에세이
혼자를 지키는 삶
ⓒ 김승혜, 2019
발행일 I 2019년 10월 7일
지은이 I 김승혜
펴낸이 I 이광재
책임편집 I 김미라
디자인 I 이창주
마케팅 I 정가현
영업 I 허남
펴낸곳 I 카멜북스
출판등록 I 제311-2012-000068호
주소 I 서울 마포구 성지길 25 보광빌딩 2층
전화 I 02-3144-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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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정가: 12,000원
전자책 정가: 7,200원
ISBN 978-89-98599-61-4 03810 (종이책)
ISBN 978-89-98599-62-1 05810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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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한글전용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관행적으로 굳어진 표현은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원어를 병기했다.
2. 대화문 중에 현장감과 사실감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 맞춤법에 어긋나거나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인용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3. 법률용어 및 죄명은 법 또는 판례에서 표기하는 바에 따랐다.
《혼자를 지키는 삶》에는 김누나(김승혜)의 일곱 해 경찰 인생이 담겼다. 엄마뻘 취객의 사랑 이야기 청취부터 들큼한 시체 썩는 냄새 추적까지……. 7년 차 경찰관 김누나는 경험하고 견뎌온 일이 참 많아 보였다. “퇴근하고 나면 모든 책임과 의무를 면하는 보통 시민이 되도록 해 주세요.”라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경찰관’이라는 직업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 년 반에 걸친 김누나의 글쓰기는 시민들을 지키느라 생채기 났던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책 속에는 김누나로 대표되는 동시대 청년 직장인들의 삶과 고민도 담겼다. 각자가 속한 위치와 처한 상황만 다를 뿐, 결국은 우리 모두가 김누나일 것이다.
이동휘(조선일보 기자)
작가 김승혜, 내게는 약간 어색한 호칭이다. 동국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여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여학생 5명만 선발하는 경찰간부후보생 제60기에 당당히 합격한 후 경위로 임관한 경찰 김승혜가 오히려 더 익숙하다.
책의 추천사를 부탁받고 나서야 그의 글재주가 보통 이상임을 알았다. 경찰에 입직하여 파출소와 지구대, 경찰서 수사과와 여성청소년과를 거쳐 현재 경찰청 대변인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찰생활 7년이 지나고 이제야 적성에 맞는 곳에 안착한 것 같기도 하다.
강력사건 담당 광역수사대의 활약을 그린 <베테랑>의 황정민, <범죄도시>에서 중국 조선족 조폭을 검거하는 마동석, <악인전>에서 경찰관으로 열연한 김무열 등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실제 경찰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경찰관도 역시 울고 싶으면 울고, 화가 날 땐 화도 내고, 위험한 상황은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과 똑같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그들도 제복을 벗으면 우리의 친근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얼마 전 그가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제출하러 온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혼자를 지키는 삶’이란 제목으로 엮은 글을 가져왔다. 논문은 안 쓰고 엉뚱한 것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는 내 생각도 달라졌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자 경찰관의 눈으로 본 세상살이가 담긴 이 책이 작게나마 경찰의 위상을 높여주길 바란다. 그게 오히려 석사학위 논문보다 국민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은 훨씬 클지도 모르니 말이다. 작가 김승혜의 후속작을 기대하면서 경찰공무원으로도 승승장구하기 바란다.
최응렬(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장·경찰사법대학장)
저의 직업에 대해 처음 쓴 글은 어느 책의 독후감이었습니다. 그 책은 한때 법조인이었던 작가가 쓴 추리 소설이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찰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경찰이 어느 집 똥강아지인 줄 아나.’ 주인공은 변호사였고 경찰이 그의 똘마니로 등장해서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했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상한 저는 여자 형사가 주인공인 이야기를지어내 독후감이랍시고 썼습니다. 그 주인공은 배우 하정우 씨와 똑 닮은 범죄자를 마주하고도 동요하지 않았고(저라면 손을 덜덜 떨고 말도 더듬었겠죠. 하정우 씨 팬이라서요), 누구에게도 자질구레한 일을 시키지 않고 혼자서 뚝딱 사건을 해결해 냈습니다. 일종의 패러디였던 셈이지요.
그 글은 당시 참여하던 독서 모임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추리 소설과 범죄 소설을 테마로 하는 모임이라 제가 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종종 있었지만, 제 글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가 일하며 겪은 일들이 흥미로운 글감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저는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나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일하면서 보고 겪은 사건이 모두 유쾌하고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범적인 공무원’ 또는 ‘열정적인 경찰관’의 표상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저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풀어놓았을 뿐이지만, 작은 욕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은 여러분들께서 경찰관이나 경찰관의 일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다정하게 바라봐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책은 제가 ‘김누나’라는 필명으로 일 년 반 동안 네이버 포스트에 연재한 ‘혼자를 지키는 삶’ 시리즈의 글을 엮어 만들었습니다. 모두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은 ‘지역경찰관서’인 지구대와 파출소에서, 제2장은 경찰서 수사과에서, 제3장은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일하며 겪은 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경찰관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경찰관으로 일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경찰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라도 이 책에 나타나는 별로 멋지지 않은 진짜 경찰관의 모습에 너무 실망하지는 않으시기를 바랍니다.제가 경험한 사건들은 세트장에서 벌어지지 않았고, 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도 조명판과 화장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이 책으로 인해 상처받을 분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만 혹시나 제가 미처 마음 쓰지 못한 부분에서 상처받는 분이 계신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지금껏 제가 이야기를 만들어 올 수 있게 도와주신 가족과 친구들,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친구들과 교수님들, 경찰 동료 여러분들과 선후배님들, 독서 모임 셜록, 그리고 제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카멜북스, 네이버 포스트, 코스모폴리탄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추천의 말
시작하며
제1장
당신의 이웃이에요
젊은 경찰관 H의 슬픔
출근길 지하철에서 초상권 주장하기
남자친구의 행방불명
이 구역의 망할 년은 나야
어느 날 한밤중의 알카에다
법 블레스 유
오늘도 무사히
잠들 수 없는 밤을 함께 지새우며
다정한 사람이 쭉 다정하도록
막내, 아주 칭찬해
제임스 킴, 잘 지내세요?
스위치를 끕니다
경찰관의 삶과 죽음을 함부로 하지 말 것
제2장
바늘 도둑이 소를 훔치겠니
함정수사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한밤중에 산 타는 사람들
C 경감과 나의 연결고리
순발력이 중요합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용서받지 못한 자
뿌린 대로 거두리라
불만 후기를 쓰는 일에 관하여
제3장
학생 L과 함께 나눈 이야기
학교 폭력은 마음의 교통사고
이러저러합니다
그건 좀 아니잖아요
어떻게 전해야 하나
대체 왜들 그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나 같은 사람하고 싸울 게 아니에요
부장님의 직업병
땅콩캐러멜의 행방
칼춤을 추리라
제4장
제가 어쩌다 경찰이 되었냐면요
납량 특집: 아홉 번째 동기
이 구역의 백수건달은 나야
친구들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만남과 이별은 반복되겠지요
화장실 변기에 앉아
W 오빠에게
거짓말 권하는 사회
내 감동 돌려줘
다모실 기담
바로 내가 경찰관, 진짜 경찰관
경찰관의 드레스 코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송별사 샘플
닭볶음탕, 한 번 먹어 보겠습니다
금요일 밤이라 센치해서 이러는 건 아니고요
가는 곳마다 힘내고 파이팅
마치며
“모르는 사람이 때렸어요!” 하는 신고에 출동했더니 술 냄새를 잔뜩 풍기는 두 사람이 아파트 현관에서 실랑이하고 있었다. 스물한둘이나 되었을 성싶은 젊은 남자와 쉰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각자 “이 아저씨가 어디에 사는지 확인해 달라!” “이놈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아느냐!”며 악다구니를 쓰는데, 떼놓고 신원을 확인해 보니 젊은 남자는 4층 6호, 중년의 남자는 같은 층 7호에 사는 사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이 어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나. 둘이 서로 노려보고 소리치고 삿대질하는 와중에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런 것이었다.
자정 지난 깊은 밤. 남자 6호와 남자 7호가 술기운이 올라 불콰해진 얼굴로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게 되었다. 서로 일면식 없는 상대방을 곁눈질로 살피던 중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둘은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느라 버튼도 누르지 않고 꼼짝없이 서 있기만 했다.
얼마간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 7호가 4층 버튼을 눌렀다. 그는 처음 보는 젊은이가 자신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고서는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만 보고 있는 모습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남자 6호는 자신이 4층에 산다는 사실을 낯선 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남자 7호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지만 남자 6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어도 두 사람은 상대방이 먼저 발을 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번에도 남자 7호가 먼저 움직였다. 남자 7호는 남자 6호를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두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남자 6호가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술 취한 젊은 놈이 뭘 하려는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저놈이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저러나? 아니면 패거리라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남자 7호는 남자 6호를 향해 몸을 돌려 일갈했다.
“나한테 볼 일 있냐?”
한편 남자 6호는 겁이 났다.
‘저놈은 누구지? 내가 몇 층에 사는지, 언제 집에 들어올지 미리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밤에는 나랑 엄마밖에 없는데, 집까지 쫓아오면 어쩌지? 저놈이 복도를 막고 서 있으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지? 무얼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원하는 대로 안 해 주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남자 6호는 불현듯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와 계단으로 내달렸고, 남자 7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벙쪄 있다가 층계참 어두운 곳에 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기를 오 분쯤. 남자 6호는 1층에서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 이쯤이면 놈도 포기하고 갔겠지 싶어 계단으로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그놈은 여전히 집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한편 다시 돌아온 6호를 본 남자 7호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놈이 역시 되돌아올 줄은 알았지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으니 일단 먼저 한 방 때려야겠다!’
“야, 이 새끼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술에 취하면 쓸데없는 기운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다지만 반대로 온갖 일들에 겁이 나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혼자일 때보다 둘이 걷는 밤길이 더 무서울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벌어지는 일들은 종종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부끄럽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처음 만난 이웃을 통성명시키는 일이 경찰관의 몫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나와 같은 파출소에 근무하던 H는 젊고 얼굴선이 굵은 남자 경찰관이었다. 그는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동네 골목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두 잔 테이크아웃 해 순찰차에 함께 탄 파트너와 나눠 마시곤 했는데, 뜻밖에 매번 스탬프를 적립하는 섬세함과 제 마음대로 메뉴를 통일해 버리지 않는 배려심을 갖추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과거형인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어느 여름날, 여느 때와 같이 H는 점심을 먹고서 카페로 향했다. 그날따라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리 덥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커피를 제안하던 그의 얼굴이 유난히 상기되어 있던 것이라고나 할까? 비장한 표정으로 순찰차에서 내린 H가 어쩐지 의기소침해져서 돌아왔기에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카페에서 일하는 긴 파마머리에 동그란 눈의 아가씨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드디어 물어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오호통재라! 그 아가씨는 “제 남자친구가 근처 지구대 직원인데, 알고서 일부러 저희 카페에 와 주시는 줄 알았어요.”라며 얼굴이 빨개지더란다.
이제 H는 밥을 먹고 나면 사무실 한쪽에서 파트너의 몫까지 인스턴트커피 두 잔을 만들어 순찰차에 들고 탄다. 그리고 슬픔 어린 표정으로 그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곤 한다.
그 일이 있고서 H는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과하게 마신 다음날이면 으레 배탈이 난다는 H를 순찰차에 태우고 화장실이 열린 건물을 한참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독거 총각 H는 하루가 다르게 피부가 거칠어지고 살이 빠져 갔다.
하루는 112 신고를 받고 나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긴 생머리에 짙은 쌍꺼풀이 있는 여자 간호사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날부터 H는 나날이 몸이 안 좋아진다고, 위 아니면 장이 아픈 것 같다며 속쓰림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두어 주쯤 그랬을까. 어느 야간근무 날 휴게시간에 H는 속이 너무 아파서 당장 링거라도 맞지 않으면 졸도할 것 같다며 순찰차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10분 거리인 대학병원까지 혼자 걸어갔다. 어쩐지 출근하던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고 머리카락에도 무얼 발랐는지 바짝 힘이 들어가 보이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한 시간 뒤 병원에서 돌아온 H는 어쩐 일인지 낯빛이 오히려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속이 쓰리고 아프다는 이야기를 딱 그친 걸 보면 링거의 효험이 아주 신통한 모양이었다.
이제 H는 대학병원에서 신고가 들어오면 풀죽은 표정으로 마스크를 꺼내 쓴다. 그리고 굳이 건물을 빙 돌아 주차장 출구 가까이에 순찰차를 주차하곤 하는데, 어쩐지 응급실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초겨울의 이른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혼자였다.
아침 출근, 다음날은 저녁 출근, 그리고 반나절과 온전한 하루를 쉬는 근무 패턴이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익숙해진다고 해 봤자 빠듯하게 출근 준비를 할 수 있을 시간에 눈을 뜨기가 조금 쉬워졌을 뿐, 출근과 퇴근 사이의 졸음 그리고 퇴근과 출근 사이의 아쉬움은 여전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서툰 탓도 있었겠지만, 매일같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하루하루 전쟁처럼 느껴졌다. 전선에 나서는 장수가 칼날을 벼리듯 나는 출근할 때마다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눈두덩을 시꺼멓게 칠하고 뾰족하게 깎은 눈썹연필로 날 선 눈썹을 그리고서 집을 나섰다. 바야흐로 눈썹 문신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고 나도 지금보다 한참은 더 부지런하던 때였다.
평소 아침에는 대방-신길-영등포역을 지나며 그날의 자장가 리스트를 선곡하고, 신도림부터 관악역까지 여섯 개 역을 지나는 동안 반쯤은 깨고 반쯤은 잠든 상태로 리드미컬한 지하철의 진동을 느끼다가, 안양-명학-금정역 구간에서 뜨는 해를 마주 보며 ‘오늘도 무사히!’를 다짐하는 것이 혼자만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요즘 말로 ‘멘탈 붕괴’ 상태였다. 소란스런 휴대전화 알람이 한바탕 지나간 뒤 잠에서 깨고 보니 세수하고 이를 겨우 닦을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뛰거나 걷지 말라는 방송을 귓전으로 흘리며 달려가 마침 문이 닫히기 직전이던 지하철에 간신히 올라탔다.
벌거벗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 눈썹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가방 속을 뒤적이던 다급한 손끝에 눈썹연필이 집혔다. 오른손에는 눈썹연필, 왼손에는 거울을 들자 열차가 역에 멈춰 섰다.
남자 역시 혼자였다. 그는 영등포역에서 3번 칸에 탄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남자는 안으로 들어서서 나와 마주보는 자리로 가 앉았다. 맞은편 왼쪽으로 고작 세 자리 떨어진 곳이었다.
뜻밖의 불청객이었다. 그렇더라도 입을 반쯤 벌리고 인중을 길게 늘여 파운데이션 퍼프를 두드리거나 립스틱을 바르는 게 아니라면 눈썹 그리는 것 정도야 크게 흉하지 않을 테지. 눈썹 그리던 손을 늦추고 거울 너머로 남자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왼쪽 눈썹을 다 그리고 눈썹연필을 오른쪽 눈썹에 갖다 댄 순간,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의 사진 촬영음. 나의 분주하지만 평온한 출근길에서 남자가 ‘금세 잊힐 행인 1’의 배역을 거부하고 악당이 되기를 자처하고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느새 휴대전화를 기울여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남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생각하고 그의 휴대전화 메모리 일부에 나를 저장한 것이다. 나는 양손에 든 것을 무릎에 내리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휴대전화 각도를 바로잡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화면을 톡톡 쳤다. 졸음이 싹 달아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나는 곁눈질로 남자를 보며 오른쪽 눈썹을 마저 그렸다.
신도림역에 멈춰 선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남자가 시야에서 가려졌다. 열차 안은 조용했으나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출근도 하기 전부터 시작이구나.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까 보냐.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호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지하철이 그토록 굼뜨게 느껴지던 적은 단연코 그날이 처음이었다. 명학역에서 출입문이 닫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던 그의 얼굴 앞에 공무원증을 내밀었다.
“아저씨. 아까 제 사진 찍었죠? 그거 어느 부위를 찍었는지에 따라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로 처벌될 수 있는 거 알아요? 휴대전화 제 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 봤고, 사진 촬영음도 들었으니까 아니라고 해 봤자예요. 제가 경찰이거든요? 저도 출근길이 바쁘고 아저씨도 창피할 테니까 여기서 확인하자고는 안 할게요. 당장 지우세요. 알았어요?”
내가 숨 한 번 안 쉬고 쏘아붙이는 동안 남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마른침만 삼켰다. 그는 폭탄이라도 되는 듯 휴대전화를 이 손 저 손으로 옮기며 들리지 않는 소리로 혼자서 웅얼거리다가, 때마침 열차 출입문이 열리자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때 남자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내게 용서를 구했던 것인지, 눈썹연필을 쥐고 거울을 들여다보던 내 사진을 지웠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일로 내가 알게 된 것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언급하며 누군가를 꾸짖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하철에서 눈썹을 그리는 것이 적절한 행동인지는 문제 삼지 말자.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누구도 그 남자가 나를 촬영한 일이 ‘감히 지하철에서 눈썹을 그리는 여자’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요란하게 사이렌이 울렸다. 코드 제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112 상황실에서는 우리 파출소와 B 파출소를 동시에 호출해 각각 관내에 있는 ‘A 타워’로 출동하라고 했다. 이 동네가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A 타워에 1동과 2동이 있는 줄을 모르기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막내 순경에게 부팀장님을 깨우도록 하고 녹취 파일을 재생했다.
“A 타워 앞인데요! 빨리 와 주세요! 남자친구랑 같이 있었는데요! 먹자골목에서 같이 술 마시고 차에서 깨 보니까 옆에 이상한 남자가 있었어요! 너무 놀라서 제가 진짜 막, 내리라고 소리치니까! 그래서 차 몰고 여기까지 왔거든요! A 타워에요, 빨리요!”
직감으로 알았다. 신고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B 파출소가 아닌 우리 파출소 순찰차이리라. 여자가 이야기하는 먹자골목에서 우리 관내에 있는 A 타워 1동까지는 차로 오 분이 채 안 걸리지만, B 파출소 관할인 A 타워 2동은 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역시나 A 타워 1동 앞에서 발견된 신고자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 냈다.
몇 시간 전까지 먹자골목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다. 집에 가려니 취기가 올라와 근처에 주차해 두었던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얼마 후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조수석에서 여자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당신 대체 누구냐고, 당장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낯선 남자는 진정하라고 한참을 달래다가 결국 밖으로 나가서 자동차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