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비극의 탄생》(187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 《바그너의 경우》(1888) 그리고 1889년에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저작을 남겼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잘리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 생전에 출간된 위의 저작들 이외에 철학적 저작들의 바탕이 되었거나 구상 중이었던 많은 분량과 유고들이 현재까지도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몬티나리Mazzino Montinari, 콜리Giorgio Colli, 페스탈로치Karl Pertalozzi, 뮐러-라우터Müller-Lauter 등의 니체 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KGW)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883~1885)
■니체전집 편집위원
정동호
이진우
김정현
백승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독일에서 출간된 《니체전집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VI 1》(Walter de Gruyter Verlag, 1968)을 완역했다.
2. 원서에서 글자 간 간격을 달리하여 강조한 단어나 표현은 고딕체로 표기했다.
3. 원서에 사용된 그침표(:), 머무름표(;), 말바꿈표(—) 등은 몇 편의 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생략했고 인용부호가 생략된 부분은 정확하게 부호를 달았다. 그러나 짧은 하이픈(-)으로 이어가며 만든 낱말은 니체 나름의 의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대부분 바꾸지 않았다.
4. 이 책에 사용된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는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한글 맞춤법규정>과 《문교부 편수자료》에 따랐다.
차례
1.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자신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보내기를 십 년, 그런데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여기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주었다. 내가,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더라면 너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으리라.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의 그 차고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이고는 그에 감사하여 너를 축복해왔다.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나 있다. 이제는 그 지혜를 갈구하여 내민 손들이 있어야겠다.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부유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네가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줄 때 그리하듯, 너 넘치도록 부유한 천체여!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저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내리막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Untergang : untergehen (지다, 가라앉다)의 명사형으로 하강을 의미하기도 하고 몰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내리막”, “내리막길” 또는 “몰락”으로 옮겨쓰고자 한다.
한없이 큰 행복조차도 시샘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너, 조용한 눈동자여, 그러니 나를 축복하라!
바야흐로 넘쳐흐르려는 이 잔을 축복하라. 이 잔으로부터 물이 황금빛으로 흘러넘치도록, 그리하여 온 누리에 너의 환희를 되비추어주도록!
보라! 잔은 다시 비워지고자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고자 하니.”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
* *
2.
차라투스트라는 혼자서 산을 내려왔다. 그 누구도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숲속에 들어서자 노인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숲속에서 풀뿌리를 캐기 위해 자신의 신성한 오두막집을 떠난 자였다. 노인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이 나그네, 낯설지가 않구나. 여러 해 전에 이곳을 지나간 일이 있지. 차라투스트라라고 했지. 그러나 그도 변했구나.
그때 그대는 그대의 재를 산으로 날랐었지. 그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 아래로 나르려는가? 불을 지르고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렇다, 틀림없이 차라투스트라야. 눈은 맑고 입에는 역겨움이 서려 있지 않으니. 그리하여 춤추는 자처럼 걷고 있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변했구나.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잠에서 깨어난 자다. 이제 그대는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지?
바다 속에서 그리하듯 그대는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런 그대를 바다가 떠받쳐주었지. 저런, 이제 뭍에 오르려는가? 저런, 또다시 그대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 다니려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나 사람들을 사랑하노라.”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숲속으로 그리고 광야로 갔던 것이지?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제 신을 사랑하노라. 사람은 사랑하지 않노라. 내게 사람은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리라.”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내가 사랑에 대해 무슨말을 했던 것이지! 나 사람들에게 선물을 가져가고 있거늘.”
성자가 말했다. “저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 차라리 저들에게서 얼마를 빼앗아 그것을 저들과 나누어 짊어지도록 하라. 저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없이 기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대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된다면야!
그리고 저들에게 뭔가를 줄 생각이라면 적선 말고는 따로 줄 것이 없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그것을 위해 구걸케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아니지. 나 적선 따위는 하지 않지. 나 그 정도로 구차한 것도 아니고.”
성자는 빈정대듯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눈여겨 살펴보시라. 저들이 그대의 보물을 받아들일지를! 저들은 은자들을 미심쩍어하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온다고 믿지를 않지.
골목길을 지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저들에게 너무나도 쓸쓸하게 울린다. 그리하여 동이 트려면 아직도 먼 한밤중에 잠자리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리하듯 저들은 물을 것이다. ‘도둑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하고.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숲속에 머물도록 하라! 차라리 짐승들에게나 갈 노릇이다! 그대는 왜 나처럼 곰 가운데 한 마리의 곰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새 가운데 한 마리의 새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성자께서 숲속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지?” 차라투스트라가 물었다.
성자가 대답했다. “노래를 짓고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노래를 지으면서 웃고 울며 중얼거리지. 나 이렇게 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지.
노래하고 울고 웃고 중얼거림으로써 나 나의 신인 그 신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일세. 그건 그렇고 그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가져왔는가?”
이 말을 듣자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내게 있겠는가! 나로 하여금 서둘러 가던 길을 가도록 하게나. 내가 그대에게서 그 어떤 것도 빼앗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성자와 사내는 마치 두 사내아이가 웃듯 웃으면서 헤어졌다.
홀로 남게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자신의 숲속에 파묻혀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나보다!”
*
* *
3.
숲 가장자리에 있는 첫 도시에 들어선 차라투스트라는 그곳 시장터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줄타는 광대가 곡예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반역사적 퇴행의 길을 가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 니체가 제시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니체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인 이 땅 위에서의 삶에 등을 돌리도록 부추기는가 하면 한낱 가정에 불과한 저편의 초월적 세계에 삶의 의미를 두도록 사주해온 플라톤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이원론을 생(生)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규정, 뿌리쳤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 위에서의 삶을 하찮은 것으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폄훼하도록 만들어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같은 초월적 이상의 그늘 속에서 인간은 자기 부인과 비하를 몸에 익혀왔으며, 그 결과 왜소하고 구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냥 둘 경우 인간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비관했다. 어떤 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즉 왜소해진, 그리하여 고작 생존에나 집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대중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이 출현하여 그릇된 과거를 청산하고 건강한 미래를 열어야 한다. 니체는 머릿속에 그와 같은 인간을 그렸고, 그를 가리켜 위버멘쉬라 했다. 위버멘쉬는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구현, 달성되어야 할 현세적 이상이자 목표다. 결코 초월적 신격이나 인격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일본의 예를 따라 그것을 초인(超人)으로 옮겨왔다. 그럴 경우 위버멘쉬는 니체의 의도와는 반대로 초월적 인격으로 잘못 해석될 소지가 있다. 그렇다고 니체 자신의 철학 속에서나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이 위버멘쉬를 달리 우리말로 옮길 길도 없다.
Übermensch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권에서도 superman 또는 overman으로 번역해오다가 그럴 경우 그릇 이해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그냥 Übermensch로 쓰고 있는 추세다. 이번 니체 전집 편집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고심 끝에 Übermensch를 음역하여 ‘위버멘쉬’로 하고 필요할 경우 설명을 붙여 그릇 받아들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로 했다.
참고로, 위버멘쉬는 어떤 특정한 인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그것도 자력으로 달성해야 할 개인적 이상이자 목표다. 니체는 지금까지는 위버멘쉬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는 무수히 많이 출현해야 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바람직한 것은 모든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너희는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는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는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원숭이다운 원숭이다.
너희 가운데 더없이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역시 식물과 유령의 분열이자 튀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나 너희에게 유령이나 식물이 되라고 분부하고 있는 것인가?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고 있는 자들이자 독에 중독된 자들인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 지쳐 있다. 그러니 저들이 저 하늘나라로 떠나만 준다면!
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가장 큰 불경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그와 더불어 이들 불경을 저지른 자들도 죽어 없다.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이 없는 것의 오장육부를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그럼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 이 영혼 자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었으니. 그리고 잔혹함이 이들 영혼이 누린 쾌락이었으니!
그러나 형제들이여, 너희 또한 내게 말해보아라. 너희의 신체는 너희의 영혼에 대해 무엇을 일러주고 있지? 너희 영혼이야말로 궁핍함이요, 더러움이며 가엾은 자기만족이 아니냐?
진정, 사람은 더러운 강물이렷다.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야말로 너희의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바다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체험 가운데 더없이 위대한 것은 무엇이지? 그것은 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렷다. 너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질 때 말이다.
그것은 너희가 이렇게 말하게 되는 때렷다. ‘나의 행복이란 것이 뭐란 말이냐! 그것은 궁핍함이요 더러움이며 가엾은 자기만족일 뿐이거늘. 나의 행복은 생존 그 자체를 정당화해야 하거늘!’
그것은 너희가 이렇게 말하게 되는 때렷다. ‘나의 이성이란 것이 뭐란 말이냐! 마치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 그것은 앎을 갈구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궁핍함이요 더러움이며 가엾은 자기만족일 뿐이거늘!’
그것은 너희가 이렇게 말하게 되는 때렷다. ‘나의 덕이란 것이 뭐란 말이냐! 그것은 아직까지 나를 열광시키지 못했다. 나 나의 선과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가! 이 모든 것이 궁핍함이요 더러움이며 가엾은 자기만족일 뿐이거늘!
그것은 너희가 이렇게 말하게 되는 때렷다. ‘나의 정의라는 것이 뭐란 말이냐! 나 작열하는 불꽃도 숯도 아니거늘. 그러나 정의롭다는 자는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 아닌가!’
그것은 너희가 이렇게 말하게 되는 때렷다. ‘나의 연민의 정이란 것이 뭐란 말이냐! 연민이란 사람을 사랑했던 그가 못박혀 죽은 그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연민의 정은 결코 십자가형이 아니다.’
일찍이 이와 같이 말해본 일이 있는가? 일찍이 이와 같이 부르짖어본 일이 있는가? 아, 너희가 이와 같이 부르짖어대는 것을 나 들었더라면!
신성에 대한 너희의 항거가 아니라, 너희의 겸허함이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항거하는 일에 있어서의 너희의 인색함이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으니!
너희를 혀로 핥을 번갯불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에게 접종했어야 할 광기는 어디에 있고?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그가 바로 번갯불이요 광기렷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자 군중 속에서 어떤 자가 소리쳤다. “줄타는 광대 이야기라면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 그러니 이제 그 모습을 보여달라!” 이 말에 군중 모두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다. 그러자 자기를 두고 군중이 이 말을 한 것이라고 믿은 광대는 곡예를 시작했다.
*
* *
4.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바라보고는 의아해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랑받을 만한 것은 그가 하나의 오르막이요 내리막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대한 경멸자들을 사랑하노라.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위대한 숭배자요 저기 다른 편의 물가를 향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왜 몰락해야 하며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먼저 별들 뒤편에서 찾는 대신 언젠가 이 대지가 위버멘쉬의 것이 되도록 이 대지에 헌신하는 자를.
나는 사랑하노라.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 위버멘쉬를 출현시키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위버멘쉬가 머무를 집을 짓고, 그를 위해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할 생각에서 수고하고 궁리하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를. 덕이야말로 몰락하려는 의지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한 방울의 정신조차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의 덕의 정신이 되고자 하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정신으로서 저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그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과 운명을 만들어내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덕을 위해 살고 죽으려 하니.
나는 사랑하노라. 너무 많은 덕을 바라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개의 덕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드리워져 있는 그 이상의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자를. 누군가가 그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고 되갚지도 않을 자를. 그런 자야말로 베풀기만 할 뿐,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주사위놀이에서 행운을 잡았을 때 부끄러워하며 ‘나 사기 도박사가 아닐까?’ 하고 묻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파멸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행동하기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을 던지고 언제나 자신이 약속한 것 이상을 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자신의 몰락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다가올 세대를 정당한 것으로 맞이하고 지난날의 세대를 구제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세대를 위해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신을 응징하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그 신의 노여움을 사 파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상처를 입고도 그 영혼이 심오하며,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기꺼이 저 교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을 만큼, 그리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그럼으로써 만물은 그에게 멸망의 계기가 되리니.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그런 자의 머리는 심장에 깃들여 있는 오장육부일 뿐이고, 그의 심장이 그를 몰락으로 내몰 터이니.
나는 사랑하노라. 사람들 위에 걸쳐 있는 먹구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자 모두를. 그런 자들은 번갯불이 닥칠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예고하는 자로서 파멸해가고 있으니.
보라, 나는 번갯불이 내려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번갯불, 이름하여 위버멘쉬렷다.”
*
* *
5.
이쯤에서 말을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한번 군중을 바라보더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저렇게 서 있을 뿐이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웃고들 있구나.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 이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저들이 눈으로라도 들을 수 있도록 먼저 저들의 귀를 때려 부숴야 하는가? 북과 속죄 설교자들처럼 요란을 떨어야만 하는가? 혹 저들은 말더듬이만을 믿는 것일까?
저들은 저들 나름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지? 교양이라고 부르지. 그런 것이 있기에 저들은 염소치기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지. 그렇다면 나 저들의 자부심에다 대고 말하련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말종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자신의 목표를 세울 때가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최고 희망의 싹을 틔울 때다.
토양은 아직도 그러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옥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도 척박해져 지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큰 나무도 이 땅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슬픈 일이로다! 사람이 더 이상 사람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울릴 줄도 모르는 때가 오고 말 것이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는 아직 그러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
슬픈 일이로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로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박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저들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저들은 살기 힘든 고장을 버리고 떠나갔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댄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이 저들에게는 죄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주 조심조심 걷는다. 아직도 돌에 걸리거나 사람에 부딪혀 비틀거리는 자는 바보다!
때때로 마시는 얼마간의 독, 그것은 단꿈을 꾸도록 한다. 그리고 끝내 많은 독을 마심으로써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일에 매달린다. 일 자체가 즐거운 소일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소일거리로 인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 들지 않는다.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도 귀찮고 힘든 일이니. 누가 아직도 다스리려 하는가? 누가 아직도 따르고 있는가?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도 귀찮고 힘든 일이거늘.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가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며 실제 평등하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세상이 온통 미쳐 있었지.’ 더없이 명민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사람들은 총명하여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는 조소에 끝이 없을 수밖에. 사람들도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자신들의 조촐한 환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이쯤에서 사람들이 “머리말”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이야기는 끝나고 말았다. 대중의 고함과 환성이 그의 말을 막았던 것이다. 저들은 외쳐댔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인간말종을 내놓아라. 우리로 하여금 인간말종이 되도록 하라!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으니!” 군중은 이렇게 환호하고는 혀를 차댔다. 차라투스트라는 서글퍼졌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 이와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보다.
나 너무 오랫동안 산 속에서 살아왔나보다. 시냇물소리와 나무들의 속삭임을 너무 많이 들어왔나보다.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 저들에게 말하고 있으니.
내 영혼은 흔들리지 않으며 오전의 산줄기처럼 환하다. 그런데도 저들은 나를 냉혹한, 끔찍한 농담이나 하는 조소자쯤으로 여기고 있구나.
나를 바라보고는 웃고들 있구나. 웃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미워하는구나. 저들의 웃음은 얼음처럼 차디차구나.”
*
* *
6.
바로 그때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모든 사람의 눈을 얼어붙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줄타는 광대가 곡예를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작은 문에서 나와 두 개의 탑을 잇고 있는, 시장과 군중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줄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다시 한번 그 작은 문이 열리더니 익살꾼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자가 뛰어나와 아주 잰 걸음으로 먼저 사람을 뒤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어서 앞으로. 이 절름발이야.” 그자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어서 앞으로. 이 느림보, 밀매업자, 핏기 없는 화상아! 내가 발꿈치로 너를 간질여주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여기 두 탑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있을 곳은 저 탑 속이 아니더냐. 누군가가 너를 그 속에 가두었어야 했는데. 너는 지금 너보다 뛰어난 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단 말이야!” 한 마디 한 마디 하면서 그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고작 한 걸음 정도를 남겨두었을 때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눈을 얼어붙게 한 바로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자가 악마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길을 막고 있는 사내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앞서 가던 사내는 그의 적수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보자 그만 넋을 잃고 허둥대다 밧줄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만 장대를 놓쳤는데, 그는 장대보다 더 빨리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장터와 그곳에 모여 있던 군중은 마치 폭풍에 휘말린 바다와도 같았다. 저들은 모두 뿔뿔이 그리고 뒤범벅이 되어 달아났는데, 어느 곳보다도 그 사내의 몸이 떨어지도록 되어 있던 그 지점에서 그랬다.
차라투스트라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사내가 떨어졌는데 크게 다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상처투성이가 된 사내는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를 바라보았다. “예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 오래전부터 그 악마가 발을 걸어 나를 넘어뜨릴 줄 알고 있었지. 이제 저자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구나. 그대가 막아주지 않으시겠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벗이여,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거니와 네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너의 영혼은 너의 신체보다 더 빨리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그대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로서는 비록 생명을 잃는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오. 나야 사람들이 매질을 하고, 변변치 못한 먹이를 미끼로 줘가며 춤을 추도록 훈련시킨 짐승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니.”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만하라. 너는 위험을 너의 천직으로 삼아왔다. 조금도 경멸할 일이 아니지. 이제 너는 너의 천직으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 너를 손수 묻어줄 생각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지만 죽어가던 그 사내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감사하는 마음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손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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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그러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고, 시장터에도 어둠이 깔렸다. 호기심과 전율에도 피곤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자 옆, 땅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내 밤이 되고 한 가닥 찬바람이 이 고독한 사람 위로 불어왔다. 차라투스트라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말했다.
“진정 차라투스트라가 오늘 멋진 고기잡이를 했구나! 사람은 낚지 못했지만 그래도 송장 하나는 낚았으니.
섬뜩한 것이 사람이란 존재로 그것에는 아직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그리하여 익살꾼조차도 그에게는 재난이 되는구나.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그러나 나 아직도 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나의 마음은 저들의 마음에 닿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나 아직도 어릿광대와 송장 사이에 있는 얼치기일 뿐이다.
밤은 어둡고 차라투스트라가 갈 길 또한 어둡다. 자, 떠나자, 너 차디차게 굳어버린 길동무여! 나 손수 너를 묻어주겠거니와, 그곳으로 너를 지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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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차라투스트라는 송장을 등에 지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백 발짝도 채 가지 못해서였다. 어떤 자가 슬며시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보라! 탑에서 나왔던 바로 그 익살꾼이었으니. 그자가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이 도시를 떠나시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대를 미워하고 있으니. 선하다는 자와 의롭다는 자들도 그대를 미워하여 그대를 자신들의 적이자 자기들을 경멸하는 자로 부르고 있소. 참신앙을 갖고 있다는 신앙인들도 그대를 미워하여 대중의 위험이라고 부르고 있고. 사람들이 그대를 두고 그 정도로 비웃고 만 것을 천만다행으로 아시라. 그대는 진정 익살꾼처럼 이야기했소. 그대가 죽은 개를 벗삼았으니, 천만다행인 줄 아시라. 그토록 자신을 낮추었기에 그나마 그대는 오늘 그대 자신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오. 하지만 이제는 이 도시를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내가 그대를, 산 자 하나가 죽은 자 하나를 뛰어넘게 될 터이니.” 그자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두운 골목길을 더 갔다.
성문에 이르러 그는 무덤 파는 인부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횃불로 그의 얼굴을 비추어보더니 차라투스트라임을 알아보고는 몹시 빈정댔다. “차라투스트라가 죽은 개를 짊어지고 가는구나. 그가 무덤 파는 인부가 되다니, 잘된 일이야! 이 구운 고깃덩어리를 만지기에는 우리의 손이 너무나도 깨끗하지. 차라투스트라는 악마에게서 먹이를 훔쳐내려는 것일까? 좋다! 맛있게 먹으렴! 악마가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지독한 도둑이 아니라면 말이다! 오히려 악마가 이들 둘을 훔쳐내어, 둘을 먹어치울걸!”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은 히히덕거리더니 머리를 맞대고 뭔가 수군댔다.
차라투스트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숲과 늪을 지나 두 시간쯤 걸어가자 굶주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그에게도 허기가 엄습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외딴 집 앞에 멈춰 섰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마치 도둑이 덮치듯이 허기가 나를 덮치고 있구나. 하필이면 숲과 늪에서. 그것도 이 한밤중에.
나의 허기는 꽤 별스럽구나. 흔히 식후가 되어서야 찾아오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기별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이지?”
말을 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두드렸다.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손에는 등을 들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누구지?”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산 사람 하나와 죽은 사람 하나요. 먹고 마실 것을 좀 주시오.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일을 잊고 있었으니.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성현의 말이 있지 않소.”
노인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돌아와서는 차라투스트라 앞에 빵과 포도주를 내놓았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몹쓸 곳이야. 그래서 나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지. 짐승과 사람들이 은자인 내게 온다네. 그대의 길동무도 뭘 좀 먹고 마시도록 하게나. 그대보다 더 지쳐 있는 듯하니 말일세.” 노인이 말했다. 이에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내 길동무는 죽었소. 그를 설득하여 그리하도록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자 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 내 집을 두드리는 자는 내가 주는 것을 받아야 해. 그러니 같이 먹고 편히들 가시기를!”
차라투스트라는 길과 별빛에 의지하여 두 시간쯤 더 걸어갔다. 그는 밤길에 익숙해 있었고 잠든 사람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얼굴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던 터였다. 그러나 동이 틀 무렵 그는 깊은 숲속에 와 있었고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송장을 속이 텅 빈 나무 속, 그의 머리맡에 눕혔다. 늑대들로부터 그 송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에, 이끼 위에 누웠다. 그러고 나서 곧 잠에 빠졌다. 몸은 지쳐 있었는데도 영혼은 마냥 평온했다.
*
* *
9.
차라투스트라는 오랜 시간 잤다.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란 듯이 숲과 숲속에 감도는 적막을 들여다보았다. 놀란 듯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그는 홀연히 뭍을 발견한 뱃사람이라도 되는 양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환호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동무들이, 내 어디를 가든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죽어 있는 길동무나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동무들이 있어야겠다.
스스로가 원하여 내가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그런 길동무가.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이 아니라 그의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 차라투스트라가 고작 가축의 무리나 돌보는 목자나 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가축의 무리로부터 많은 가축을 꾀어내기 위해 왔다. 군중과 가축무리는 내게 화를 내리라. 차라투스트라는 목자들로부터 도둑이라 불리기를 바라노라.
나는 목자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 나는 목자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저들 자신을 바른 신앙의 신도라고 부른다.
저들 선하다는 자들과 의롭다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지? 저들이 떠받들어온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을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지.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저들 온갖 신앙의 신도들을 보라! 저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지? 저들이 떠받들어온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을 파괴하는 사람, 바로 파괴자, 범죄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같은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인 것을.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송장이 아니라 길동무다. 짐승의 무리도 신자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서판에 써넣을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들을 그리고 더불어 추수할 자들을 찾는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삭을 손으로 뽑아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들을, 그리고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자들을 찾는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절멸자, 선과 악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그런 자들이야말로 추수하는 자요 축제를 벌이는 자인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더불어 창조할 자들을, 더불어 추수하고 더불어 축제를 벌일 자들을 찾고 있다. 가축의 무리와 목자 그리고 송장과 더불어 그가 무엇을 도모하랴!
그리고 너, 나의 첫 길동무여, 고이 잠들라! 나 너를 네가 있을 텅 빈 나무 속에 잘 묻어두었으니. 늑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때가 되었으니 이쯤에서 헤어지자. 아침놀과 아침놀 사이에 내게 새로운 진리가 찾아왔으니.
나 고작 가축의 무리나 돌보는 목자가 되어서 안 되며 무덤이나 파는 인부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군중과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죽은 자에게 말하는 것도 이것으로써 끝이다.
나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나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위버멘쉬에 이르는 층계 모두를 남김없이 보여주리라.
혼자서 숨어 사는 자들에게, 그리고 둘이서 숨어 사는 자들에게 나 나의 노래를 불러주리라. 그리고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들을 귀를 아직 갖고 있는 자의 가슴을 나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리라.
나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미적미적거리고 있는 자들을 뛰어넘어 가리라. 내가 가는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기를!”
*
* *
10.
이것은 해가 그의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마음을 향해 한 말이었다. 그때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서 나는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라! 독수리 한 마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고 있고 뱀 한 마리가 거기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먹이가 아니라 벗인 듯했다. 목을 감은 채, 뱀이 독수리에 의지하고 있었으니.
“내 짐승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하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저 태양 아래서 가장 긍지 높은 짐승과 저 태양 아래서 가장 영리한 짐승이다.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나타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를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진정, 나 아직 살아 있는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짐승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임을 나 깨달았노라. 그런데도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짐승들이 나를 인도해주기를!”
말을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숲속의 성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 더욱 영리해지고 싶다! 나의 뱀처럼 철저하게 영리해지고 싶다!
그러나 나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 나의 긍지에게 나의 영리함과 늘 동행하기를 청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의 영리함이 나를 떠나버린다면. 아, 영리함은 달아나기를 좋아하지! 그렇게 되면 나의 긍지 또한 나의 어리석음과 함께 날아가버리기를!”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너희 영웅들이여, 내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써 나의 강인함에 기쁨을 느끼게 될 저 더없이 무거운 것, 그것은 무엇이지?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묻는다.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에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닌가? 자신의 지혜를 비웃어줄 생각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가 도모한 일이 크게 잘되었을 때 그 일에서 손을 떼는 일인가?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해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인가?
아니면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살아가며,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으로 고뇌하는 일인가?
아니면 병으로 누워 문병 오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벗하는 일인가?
아니면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고 차디찬 개구리와 뜨거운 두꺼비조차 물리치지 않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할 때 오히려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인가?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예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저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그리고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비늘 짐승인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정신이 가는 길을 금빛을 번쩍이며 가로막는다.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이 금빛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들 비늘에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치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용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그 용은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찬란하게 빛난다”고 거들먹거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 창조된 일체의 가치, 내가 바로 그것이다. 진정, ‘나는 하고자 한다’는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용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에게 사자가 필요한가? 짐을 질 수 있는, 단념하는 마음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 쟁취, 그것은 짐을 무던히도 지는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정신에게는 더없이 대단한 소득이 된다. 진정 그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신도 한때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더없이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더없이 신성한 것에서조차 미망과 자의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아이는 해낼 수 있는 것이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
* *
차라투스트라는 잠과 덕에 관하여 유익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어느 이름 높은 현자의 명성을 들었다. 그 현자는 많은 존경에 사례까지 받고 있으며, 그리하여 천하의 젊은이들이 그의 강좌 앞에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도 그를 찾아가 천하의 젊은이들 틈에 끼어 그의 강좌 앞에 앉았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잠에 대한 경의와 겸허! 이것이 으뜸가는 일이다! 그러니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사람 모두를 멀리하라!
도둑조차도 잠 앞에서는 겸허하다. 그리하여 밤길을 걸을 때는 언제나 발소리를 죽인다. 뻔뻔스러운 것은 야경꾼들이다. 뻔뻔스럽게도 뿔나팔을 불고 다니니 말이다.
잠을 잔다는 것은 하잘것없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낮 동안 너는 열 번 너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은 적당한 피로를 가져온다. 영혼에게는 그것이 양귀비다.
너는 열 번 너 자신과 거듭 화해해야 한다. 극복이란 것은 쓰디쓴 것이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자는 단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낮 동안 너는 열 개의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이 되어서도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되며, 너의 영혼은 허기에 시달리게 될 터이니.
낮에 너는 열 번 웃어야 하며 열 번 유쾌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에 비애의 아버지인 위장이 너를 괴롭힐 터이니.
단잠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덕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내가 거짓 증언이라도 하게 된다면? 간음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웃의 하녀에게 음욕을 품게 되기라도 한다면? 이러한 짓거리들은 모두 단잠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설혹 덕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경우라 하더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이들 덕으로 하여금 제때에 잠자리에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얌전한 여인네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너 불행한 자여, 더욱이 너를 두고!
신과 화평해야 하며 이웃과도 화평해야 한다. 그래야 단잠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네 이웃의 악마와도 화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밤중에 네 주변을 어슬렁거릴 터이니.
관헌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 비록 그들이 비뚤어진 관헌이라 하더라도! 그래야 단잠을 이룰 수 있으니. 설혹 권력이 비뚤어진 다리로 걷기를 즐겨한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신의 양 떼를 더없이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는 자를 나 더없이 선한 목자라고 부른다. 단잠과 잘 어울리는 일이다.
나는 많은 명예도 대단한 재물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것이 비장에 염증을 일으키니. 그러나 좋은 평판과 얼마간의 재물이 없다면 그나마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나는 고약한 모임보다는 조촐한 모임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적당한 때라는 것이 있다. 그래야 단잠과 잘 어울릴 수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도 썩 내 맘에 든다. 잠을 재촉하고들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자들은 행복하다. 특히 사람들이 어느 때고 그들을 인정해주기만 하면.
덕이 있는 사람에게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밤이 오면 나는 잠을 부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덕의 주인인 잠은 부름받기를 원치 않으니!
그 대신 나는 내가 낮 동안에 한 일과 생각했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참을성 많은 암소처럼 되새김해가며 나는 묻는다. 네가 극복한 열 개는 무엇무엇이었지?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한 열 차례의 화해와 열 개의 진리 그리고 열 번의 웃음은 무엇무엇이었고?
그같은 것들을 헤아려보고 마흔 개나 되는 생각에 뒤흔들리다보면 잠이, 부르지도 않은 덕의 주인이 한순간에 나를 덮친다.
잠은 나의 눈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면 눈은 무거워진다. 잠은 내 입을 어루만진다. 그러면 입이 열린다.
진정, 도둑 가운데 가장 귀여운 도둑인 잠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내게 다가와서는 나의 생각들을 살며시 훔쳐간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 이 강좌처럼 멍하니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 있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이내 눕고 만다.”
현자가 이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한 가닥 빛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마흔 개나 되는 사상을 갖고 있는 이 현자는 바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잠만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이 현자를 이웃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리라! 그런 잠은 옮기 쉬우며 두꺼운 벽을 뚫고서까지 옮기 마련이니.
그의 강좌에도 어떤 마력이 깃들어 있다. 젊은이들이 이 덕의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지혜는 이것이니,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생에 아무 의미가 없어서 무의미라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선택할 가치가 있는 무의미가 되리라.
덕의 교사를 찾아간 사람들이 무엇을 특별히 구했는지, 그것을 나 이제 분명히 알겠다. 깊은 잠을 그리고 거기에다 양귀비꽃과 같은 덕을 구했던 것이다!
명성이 자자했던 이들 강좌의 모든 현자에게 지혜란 꿈 한 번 꾸지 않는 잠이렷다. 생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의미를 저들은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기 덕의 설교자와 같은 자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토록 솔직하지는 않다. 저들의 시대도 지나간 것이다. 저들은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한다. 벌써 누워 있지 않는가.
여기 잠이 쏟아지고 있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곧 꾸벅꾸벅 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 모두가 그리하듯이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 세계는 고뇌와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신의 작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 세계는 한낱 꿈으로, 어떤 신이 꾸며낸 허구로 보였다. 불만에 찬 신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로 보였던 것이다.
선과 악, 즐거움과 고뇌 그리고 나와 너. 그런 것들도 창조자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려니 했다. 창조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려 했고, 바로 그때 이 세계를 창조했던 것이다.
자신의 고뇌를 외면함으로써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고뇌하고 있는 자에게는 도취적 즐거움이다. 도취적 즐거움과 자기 상실, 세계는 한때 그렇게 생각되었다.
영원히 불완전한, 영원한 모순의 모사, 그것도 불완전한 모사인 이 세계. 그것을 창조한 불완전한 창조자에게 있어서의 도취적 즐거움. 세계는 한때 그렇게 생각되었다.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 모두가 그리하듯이 나 또한 이렇듯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 인간 저편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신이 모두 그리하듯이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이자 광기였다!
그는 사람이었고, 사람과 자아의 빈약한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이 유령이 그 자신의 재와 불길로부터 내게 온 것이지, 진정! 저편의 세계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아는가? 나 고뇌하고 있는 나 자신을 극복한 것이다. 나 나 자신의 재를 산으로 날랐으며, 한층 밝은 불꽃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보라! 그러자 저 유령이 내게서 달아나지 않던가!
저와 같은 유령을 믿는 것, 그것은 이제 병에서 건강을 되찾고 있는 내게는 고뇌가 되고 번민이 되리라. 이제 그것은 내게 고뇌가 되고 굴욕이 되리라.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나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
배후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은 고뇌와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하게 고뇌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행복에 대한 저 덧없는 망상이었다.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그와 같은 것이 온갖 신과 배후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이다.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으라! 신체에 절망한 것, 그것은 바로 그 신체였다. 그 신체가 얼빠진 정신의 손가락으로 그 마지막 벽을 더듬었던 것이다.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으라! 이 대지에 절망한 것, 그것은 바로 그 신체렷다. 신체가 존재의 배〔腹〕 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머리로, 머리만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벽을 돌파하여 “저편의 세계”로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편의 세계”, 탈인간화된 비인간적인 그 세계는 일종의 천상의 무(無)로서 사람들로부터 잘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존재의 배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면 인간에게 결코 말을 건네지 않는다.
진정, 모든 존재를 증명하고 그 존재들로 하여금 입을 열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형제들이여, 말하라. 모든 사물 가운데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가장 명백하게 증명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 자아와 자아의 모순과 혼란이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정직하게 말해주고 있다. 사물의 척도이자 가치인, 창조하며 의욕하고 평가하는 자아가 말이다.
그리고 이 가장 정직한 존재, 자아, 그것은 신체 운운하며, 이야기를 꾸며대고, 요란을 떨며 부러진 날개를 퍼덕일 때조차도 신체를 원한다.
자아는 점점 더 정직하게 말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아는 신체와 이 대지를 찬미하게 되며 그것들에게 보다 많은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나의 자아가 내게 새로운 긍지를 가르쳤다. 나 지금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노니, 더 이상 머리를 천상의 사물이라는 모래에 파묻지 말고 당당히 들라는 것이다. 이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상의 머리를 말이다!
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다짐을 가르치노라. 지금까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걸어온 이 길을 의욕할 것을, 이 길을 반길 것을, 그리하여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처럼 더 이상 이 길에서 벗어나 몰래 달아나지 말 것을!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신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의 존재라는 것과 구원의 핏방울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자들이다. 그러나 이 감미롭고 음울한 독조차도 저들은 바로 신체와 대지로부터 얻어냈으니!
저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던 비참에서 벗어나보려 했지만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러자 저들은 탄식했지. “다른 존재와 행복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천상의 길이라도 있다면!” 하고. 그때 저들은 도망갈 샛길과 한 모금의 피라는 것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이 배은망덕한 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났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이 탈주의 경련과 환희를 누구에게 감사했던가? 저들의 신체와 이 대지에게였지.
차라투스트라는 병든 자들에게 너그럽다. 진정, 그는 저들 나름의 위로와 배은망덕을 두고 노여워하지 않는다. 다만 저들이 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는 자, 자신을 극복하는 자가 되어 보다 높은 신체를 창조하기를 바랄 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가 감상적으로 그 자신의 망상을 돌이켜보고, 깊은 밤에 그의 신의 무덤 주변을 남몰래 배회할지라도 그 때문에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의 눈물조차 내게는 여전히 병이며 병든 신체일 뿐이다.
뭔가를 꾸며내는, 그리고 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 가운데는 언제나 병든 민중이 허다했다. 그런 자들은 깨달음에 이른 자와, 덕 가운데서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성”이라는 것을 미친 듯이 미워한다.
저들은 허구한 날 어두운 옛 시절을 되돌아본다. 그때만 해도 망상과 신앙은 다른 것들이었다. 이성의 광란은 신을 닮아 그런 것이었으며 의심은 곧 죄였으니.
나 신을 닮았다는 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며, 의심이 곧 죄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그들 자신이 무엇을 가장 신앙하고 있는지, 그것 또한 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진정, 저들이 가장 신앙하고 있는 것은 배후 세계도 구원의 핏방울도 아니다. 그것은 신체렷다. 저들 자신의 신체가 바로 저들의 사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저들에게 있어서 신체는 병든 존재다. 그 때문에 저들은 즐겨 노발대발 성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음의 설교자들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도 배후 세계를 설교하는 것이다.
형제들이여, 차라리 건강한 신체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보다 정직하며 보다 순결한 음성은 그것이니.
건강한 신체, 완전하며 반듯한 신체가 더욱더 정직하며 순수하게 말을 하니. 그런 신체가 이 대지의 뜻을 말해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깨어난 자, 터득하고 있는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에 깃들어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의 무리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
너희들은 “자아Ich”* 운운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자아 운운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행한다.
* 의식활동의 중심을 가리킨다.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깨닫고 있는 것들은 결코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감각과 정신은 너를 설득하여 저들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의 목적임을 믿도록 설득하려 든다. 이처럼 허황된 것이 저들이다.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dasSelbst*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 이 자기 또한 감각의 눈으로 탐색하며 역시 정신의 귀로 경청하는 것이다.
* 자아의 의식활동에 무의식활동을 더한 전체 활동의 중심을 가리킨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며 파괴한다. 이 자기가 지배하는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너의 신체 속에는 너의 최고의 지혜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너의 신체가 무엇을 위해 너의 최고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를 누가 알 것인가?
너의 자기는 너의 자아를, 그리고 자아의 그 잘난 도약을 비웃는다. “이들 생각의 도약과 비상이라는 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 자기는 자신에게 말한다. “고작 내 목적에 이르는 에움길이 아닌가. 나야말로 자아를 끌고 가는 줄이요, 자아의 개념들을 암시해주는 자렷다.”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자,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고뇌하며 어떻게 하면 고뇌를 면할 수 있을까 궁리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머리를 써야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자, 즐거움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기뻐하며,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기뻐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머리를 써야 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한 마디 하련다. 저들이 하는 경멸도 실은 저들의 존경이 그리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그러면 저 존경과 경멸과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것은 무엇이지?
창조하는 저 자기가 존경과 경멸을, 즐거움과 아픔이란 것을 창조한 것이지. 창조하는 신체가 자신의 의지가 부릴 손 하나로서 정신이란 것을 창조한 것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아직도 너희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너희가 하는 경멸에서조차 이렇듯 너희의 자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자기 스스로가 이제 죽기를 원하여 생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가 무엇보다도 소망해온 것,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그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그의 전 열망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 때문에 너희의 자기는 몰락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자기는 몰락하고자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너희는 신체를 경멸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너희로서는 이제 더 이상 너희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생과 이 대지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너희 경멸의 사팔뜨기 눈길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시샘이 도사려 있고.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나 너희가 가고 있는 길을 가지 않으련다! 내게 너희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교량이 되지 못하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형제여, 만약 네게 어떤 덕이 있고, 그것이 네 것이라면 너는 그 덕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한다.
물론 너는 이름을 지어 그 덕을 부르고 어루만져주고 싶으리라. 그 덕의 귀를 살짝 잡아당겨가며 재미있어하고 싶으리라.
그러나 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이제 그 덕의 이름을 민중과 공유하게 되었으며 너의 덕과 더불어 민중이 되고 가축의 무리가 되고 말았으니!
너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나의 영혼을 번민에 잠기게도 하고 감미롭게도 하는 것, 그리고 아직 나의 오장육부의 굶주림이기도 한 그것은 발설할 수도 없고 이름도 없다”고.
이름을 불러 친숙해지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너의 덕은 자리해야 하리라. 그리고 네가 그 덕에 관해 말을 해야 한다면, 말을 더듬게 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라, 더듬더듬 말하라. “이것은 나의 선, 나 이것을 사랑한다. 전적으로 내 마음에 들며, 나 이러한 선만을 원한다.
나는 그것을 어떤 신의 율법으로서 원하지 않으며 사람의 규약이나 없어 안 될 것으로서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 세계 저편이나 천국이란 곳으로 오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내가 사랑하는 덕은 이 땅에서의 덕이다. 거기에는 재주는 적고, 만민의 이성이란 것도 최소한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는 내 곁에 둥지를 틀었다. 그 일로 나 그를 사랑하며 진심으로 반긴다. 그는 지금 내 곁에서 황금빛 알을 품고 있다.”
너는 이렇게 더듬더듬 말해야 하며, 너의 덕을 찬미해야 한다.
너는 일찍이 열정들을 지녔었고 그것들을 불러 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너 이제는 단지 네 자신의 여러 덕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도 너의 열정에서 자란 것들이지만.
너는 이들 열정의 심장부에 너의 최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 그것들은 너의 덕이 되고 환희가 되었던 것이다.
네가 성마른 족속 출신이거나 음탕한 족속, 아니면 광신자나 복수심에 불타는 족속 출신이라 할지라도,
결국 너의 열정은 모두 덕이 되었으며 너의 악마 또한 모두 천사가 되고 만 것이다.
너는 일찍이 너의 지하실에 사나운 들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결국 새가 되고 사랑스러운 가희로 변하고 말았지.
너는 너의 독에서 향유를 빚어냈다. 그리고 비애라고 하는 암소에게서 젖을 짜냈지. 이제 너 그 젖가슴에서 짜낸 감미로운 우유를 마시고 있구나.
앞으로는 너로부터 그 어떠한 악도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여러 덕 사이의 갈등에서 자라나는 악이 아니라면 말이다.
형제여, 만약 네가 행운을 잡았다면 너는 단 하나의 덕만을 갖고 있을 뿐 더 이상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너 좀 더 가볍게 저 다리를 건너갈 수 있을 터이니.
많은 덕을 겸비한다는 것이 돋보이는 일이지만 가혹한 운명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사막으로 갔지만, 여러 덕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되고 싸움터가 되는 것이 너무나도 힘에 부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
형제여, 전쟁과 싸움은 악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악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너의 덕 사이에서 생겨나는 시샘과 불신 그리고 중상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보라, 너의 덕 하나하나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들인지를. 저마다의 덕은 자신들의 전령으로 삼을 생각에서 너의 정신 전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너의 힘 전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의 덕은 한결같이 다른 덕을 질투한다. 질투란 끔찍한 것이다. 덕까지도 질투 속에서 파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자는 전갈처럼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독침을 겨냥하게 된다.
아, 형제여, 너는 자기 자신을 중상하고 찔러 죽이는 덕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가?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너는 너의 여러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들로 인하여 너 파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그대들 판관들이여, 그리고 제관들이여, 제물이 될 짐승이 머리를 끄덕이기 전에는 죽이려 하지 않는가? 보라, 저 창백한 범죄자, 머리를 끄덕였으니. 그의 눈에는 크나큰 경멸이 서려 있고.
그는 그런 눈으로 말하고 있다. “나의 자아,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내게 있어서 나의 자아는 사람에 대한 크나큰 경멸이니.”
그가 그 자신을 심판했다는 것, 그로서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 고매한 자를 다시 그의 비천한 상태로 되돌려보내지 말라!
이토록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고뇌하는 자에게는 빨리 죽는 것말고는 달리 구원이 없다.
판관들이여, 그런 자를 죽여주되 그것은 연민에서 우러나온 행위여야 한다. 앙갚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를 죽여주면서 너희 자신은 그럼으로써 생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너희가 죽여주고 있는 그자와 화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너희가 느끼는 비통한 심사로 하여금 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가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그 사실을 정당화하도록 하라!
“적”이라고 부를지언정 “악한”이라고는 부르지 말라. “병자”라고 부를지언정 “비열한 사람”이라고는 부르지 말라. “바보”라고 부를지언정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말라.
너 붉은 옷의 판관이여, 만약 네가 생각 속에서 자행한 일들을 남김없이 소리 높여 입 밖에 내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오물과 독충을 제거하라!”고 소리치게 되리라.
그러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표상은 별개의 것들이다. 이들 사이에는 인과의 바퀴가 돌지 않는다.
어떤 표상이 이 창백한 사람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자 그는 자신의 행동에 필적할 만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긴 다음에는 그 표상을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을 한 행동의 행위자로 간주해왔다. 나는 그것을 광기라 부른다. 그에게는 예외적인 것이 본질이 되고 만 것이다.
한 가닥의 금을 그어 암탉을 꼼짝 못하게 묶어둘 수 있다.* 그가 그은 금은 그 자신의 가련한 이성을 꼼짝 못하게 잡아둔다. 나는 이것을 행위 이후의 광기라고 부르노라.
* 17세기 독일 예수회 수도자 키르헤르A. Kircher를 통해 알려진 실험에 따르면, 닭 주위로 둥근 선을 그으면 닭은 누군가 손짓을 할 때까지 한동안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판관들이여, 들으라! 또다른 광기가 있으니. 행위 이전의 것이 그것이다. 아, 너희는 아직 그같은 영혼 속으로 충분하리만큼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구나!
붉은 옷의 판관은 말한다. “어찌하여 이 범죄자는 살인을 자행하고 말았지? 강탈이나 하려 했던 것인데.” 그러나 나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의 영혼이 원했던 것은 강탈이 아니라 피였다. 그는 비수의 행복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련한 이성은 이 광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는 말했다. “피가 다 뭐란 말이냐! 이 기회에 최소한 강탈이라도 하지 않으려느냐? 앙갚음이라도 하지 않으려느냐?”
그러자 그는 저 가련한 이성에 귀기울였다. 이성이 하는 말이 납처럼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그는 살인을 하면서 강탈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한번 죄책이라는 무거운 납이 그를 내리누르고 있고, 그러자 그의 가련한 이성은 다시금 몹시 굳어지고 몹시 마비되고, 몹시 무거워진다.
머리를 흔들 수만 있어도 그가 지고 있는 짐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 텐데. 그러나 누가 그의 머리를 흔들어줄 것인가?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지? 정신이란 것을 앞세워 이 세계에 손을 뻗치는 질병더미. 저기 질병들이 먹이를 찾아 나서고 있구나.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지? 좀처럼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한데 얼키설키 꼬여 있는 사나운 뱀의 무리. 저기 저들은 따로따로 빠져나와 세상에서 먹이를 찾고 있구나.
보라, 이 가련한 신체를! 그가 무엇으로 인해 고뇌했으며 무엇을 갈구했는지를 이 가련한 영혼이 자기 나름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을 살인의 즐거움으로, 또 비수의 행복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오늘날 병들게 될 자를 오늘날 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악이 덮친다. 그는 그 자신이 겪은 괴로움을 이용하여 남을 괴롭히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시대가 있었으며 이와는 다른 악과 선이 있었다.
한때는 의심이, 그리고 자기 지향적인 의지가 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만 해도 병든 자는 이단이 되고 마녀가 되었다. 그런 자는 이단과 마녀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