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이주여성이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기본 권리를 보장받고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2001년에 한국 최초의 이주여성쉼터인 ‘여성이주노동자의 집’으로 출발했다. 2005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현재 전국에 6개 지부, 6개 이주여성쉼터와 2개 이주여성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를 쓰고 엮은이
김혜정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교육팀장
한가은(레티마이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
위라겸 전남여성플라자 정책연구팀 연구원
이지연 서울대학교 아동가족학과 박사 수료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
글쓴이(게재순)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
강혜숙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정선 법률사무소 재율 변호사
강성의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이사
최진영 서울이주여성쉼터 소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홍매화 서울이주여성쉼터 중국 상담원
고명숙 대구이주여성쉼터 소장
황정미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표지그림 조재석
들어가는 말
쉼터, 새 삶을 기획하는 공간
허오영숙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
오랫동안 가정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북어와 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말이 속담처럼 인정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시화되기 어렵다. 가정폭력을 피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일도 여성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시작되었다. 1987년에 여성운동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폭력 피해 여성을 보호하는 공간을 마련하면서 명명한 ‘쉼터’가 이제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주여성쉼터는 선주민(한국인) 여성폭력 피해 쉼터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이주여성의 특성까지 반영해서 만들어진 이주여성 보호시설이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전신인 여성이주노동자의 집은 2001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이주여성 전용 쉼터였다. 이주여성쉼터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 신분의 이주여성이 한국 여성들을 위한 쉼터에 입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법 체계는 기본적으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은 피해자라 해도 지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주여성운동은 선주민 여성운동과 함께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 여성폭력 관련 법률에 외국인을 포함한다는 내용을 일일이 삽입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주여성단체와 여러 여성단체들의 노력으로 2006년 9월 가정폭력방지법에 외국인 여성을 삽입하고 나서야 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 보호를 위한 이주여성쉼터가 제도화되었다.
외국인 여성 피해자를 포함하지 않는 제도에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주여성은 가정폭력을 경험한 선주민 여성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가정폭력 피해를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신고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중개업을 통해 속성으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신뢰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았으며, 서로의 문화적 차이와 불완전한 의사소통은 공고하지 못한 국제결혼 관계를 더 흔들었다.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부부 관계가 틀어졌다면 이혼을 하면 그만인데, 한국인 남편들은 외국인 아내가 이혼하고서 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외국인은 비자 연장을 통해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데, 비자마다 연장 조건이 다 다르다. 비자 연장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폭력 피해 이주여성이 순식간에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었다. 출신국, 종교, 한국어 구사 능력, 피해 사례에 따라 저마다 사정이 다른 이주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전문성이 필요했다. 이주여성 전용 쉼터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2016년 현재 폭력 피해 이주여성쉼터는 전국에 26개가 있다. 1년에 대략 700명 정도의 이주여성이 500명 정도의 자녀를 동반하고 쉼터를 거쳐간다. 쉼터 입소율은 90퍼센트를 넘는다. 전국의 이주여성쉼터가 포화 상태인 셈이다.
쉼터는 이주여성들에게 어떤 공간일까?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쉼터가 폭력을 피하는 공간인 동시에 새 삶을 기획하는 공간이길 바란다. 센터의 바람대로 쉼터가 이주여성들에게 폭력을 피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이주여성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주여성인권센터가 지부와 함께 운영 중인 쉼터에 입소한 이주여성들을 만나보기로 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폭력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왔지만 한국 땅에서 자립해야 할 이주여성들의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내보고 싶었다. 이주여성들이 마주한 상황이 녹록지 않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현실 그 자체이며 구체적인 현실을 보는 것이 대안을 만들 밑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이주여성인권센터는 수도권, 호남권, 경상권, 충청권에 있는 5개 쉼터에서 생활하는 이주여성 27명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폭력의 경험은 동일했지만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지점에서 울림을 주었다. 우리가 만났던 이주여성들 중 7명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7가지 사례는 쉼터 입소 이주여성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특성을 감안해 고른 것이다.
이 글들은 쉼터 이주여성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화자가 직접 말하듯이 1인칭으로 서술했다. 우리는 인터뷰로 인해 이주여성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또다시 헤집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쉼터에 방문하며 인터뷰에 참여할 사람들을 자원 활동가를 포함한 이주여성인권센터 활동가로 제한했다. 이주여성쉼터와 이주여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활동가들이 직접 인터뷰하고, 사례를 구성해 글로 썼다. 그리고 이주여성과 관련된 제도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의 이야기에 관련 분야 전문가의 해설을 함께 실었다. 접근이 쉽지 않은 이주여성쉼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위해 전국이주여성쉼터협의회 고명숙 님이 쉼터의 기능과 역할을 정리해주었다.
쉼터 이주여성의 사례와 해설 원고를 바탕으로 결혼이주와 폭력, 쉼터의 의미에 대하여 황정미 님이 종합적으로 검토해 글을 수록해주었다. 그는 폭력 피해 여성을 생존자로, 더 나아가 두려움과 결핍, 갈등과 위험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가 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전제조건으로 이주여성 피해자를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는 온정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정미 님이 염려하는 바와 같이 이 글들이 이주여성을 피해자로만 재현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주여성들 중에는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권을 침해당하는 이주여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당사자 활동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 역시 결혼이주한 당사자로서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당사자 활동가들의 존재와 활동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주여성 당사자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주여성의 다양한 모습과 현장의 역동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주여성쉼터와 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일하는 당사자 활동가 홍매화, 한가은(레티마이투)님의 글을 실었다.
이 책은 처음 기획에서 출간까지 3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 쉼터 입소 이주여성 인터뷰는 이주여성인권센터 경남, 부산, 대구, 전남, 전북, 충북 6개 지부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뤄졌다. 쉼터 입소 이주여성 인터뷰에 김율희, 김혜정, 이안지영, 이지연, 위라겸, 한가은(레티마이투), 허오영숙 님이 참여했으며, 통역은 니감시리 스리준, 레황바오쩜, 이유나, 팜티냐, 한가은(레티마이투), 한어진, 호티뚜완 님이 수고해주었다. 김영희, 김엘리, 문현아, 조이여울, 황정미 선생님의 자문은 책을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년 내내 기획단으로 참여해주신 위라겸, 이지연 선생님께도 특별히 감사드린다. 정지원, 김수진 활동가의 노력 또한 실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주여성만의 쉼터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셨던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염 전 대표님은 책의 기획과 출간의 전 과정에도 큰 조언을 해주셨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집필에 참여해주신 필진들께도 큰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드러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신 이주여성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캄보디아에서 꿈꾸던 행복
캄보디아에서 부모님 농사를 도우며 살다가 한국에 온 내 이름은 쏙카(가명)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는 남는 시간이 생기거나 방학이 되면 벼 농사도 짓고 망고 농장도 운영하셨다.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웠기 때문에 우리 집은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엄마는 내가 농사를 짓는 대신 엄마처럼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지만 몸이 약해서 자주 병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공부가 어려웠다. 그래서 중학교만 졸업하고는 집에서 오빠와 함께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렸다. 몸이 아파서 일을 많이 도와드리진 못했어도 일을 도우며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이나 그 밖에 돈이 생기면 저금해두었다. 은행에 따로 만든 통장은 없었어도 돼지 저금통에 돈을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곤 했다.
어느 날, 사촌언니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으로 갔다. 좋은 남편을 만나 언니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에서도 이만큼 잘 살아왔으니 한국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한국에 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내가 직접 중개업체를 알아보고 다녔다. 엄마는 너의 인생이니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 아빠도 별 말이 없으셨다. 정작 반대한 것은 친척들이었다. 한국으로 가기 한 달 전쯤의 일이었다. 이모를 비롯한 친척들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불편한 내색을 하셨다. 한국에 자식을 보내는 가족들은 자식이 대여섯씩이나 되는 집들이지만 우리 집은 나랑 오빠 딱 둘뿐인데 왜 한국에 보내느냐고 흉을 보셨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식 키울 능력도 충분한데 왜 딸을 한국에 시집보내느냐는 것이었다. 친척들의 싫은 소리에도 부모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너의 뜻대로 해라’라고 의연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래도 아마 속으로는 많이 걱정하셨겠지 싶다. 내가 떠나면 오빠만 부모님 곁에 남게 되니 가족들이 외로울까봐 나 스스로도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래도 이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남편과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 새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들이 슬슬 많아지던 2007년 무렵이었다.
일꾼으로 이 집에 온 거였구나
남편은 한국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캄보디아에는 포도 농사가 없었던지라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열심히 했다. 포도 농사는 일이 많았다. 봉지로 포도를 싸고 농약을 주고 포도를 따는 일들이 힘들었지만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먼저 한국에 와 있는 사촌언니들처럼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며, 나도 괜찮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형부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도 많이 했다. 형부는 이렇게 해주는데 당신은 왜 못해주냐고 비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거면 형부랑 같이 살라며 화를 내는 남편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싶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남편과 제대로 대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사촌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들의 통역을 받아가며 이야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편과 시어머니는 한국어는 배워서 뭐하냐며 반대했다. 당황스러웠다. 사촌언니들은 한국어를 배우러 학교도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한국에 가면 한국어부터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과 시어머니는 나의 다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시어머니는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데려왔다”며 한국어 배우러 다닐 시간에 농사일이나 하라고 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돈 주고 너를 데려왔는데, 공부는 무슨. 밭에서 일하라고 데려왔지”라며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나를 무시했다. 너무 답답했다. 한국어를 배워서 남편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고 남편이 외국인이라고 나를 무시해도 한국어를 알면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동서와 사촌언니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시어머니를 설득해주었다. 시어머니가 대학을 나온 동서 얘기는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식으로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곳에는 보내주지 않았다. 데려다줄 것도 아니면서 남편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 여는 한국어교실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 대신 결혼정보업체에서 가르쳐주는 한국어를 배우게 했다. 이제 막 한국에 온 여러 나라의 여자들이 방 하나에 모여 한국말을 배웠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이를 갖고 나서는 다니지 못하게 했다. 한국어 공부를 그만두고 너무 속상해하던 차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가서 신청만 하면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해 한국어를 가르쳐준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다. 한 번에 6개월씩 총 세 번을 신청했고 결국 공부를 끝까지 마쳤다. 여기까지가 남편이 허락해준 마지막이었다. 남편은 공부는 더 이상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말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TV를 많이 보면서 열심히 한국말을 연습하곤 했다.
캄보디아에서 중학교까지만 나온 것이 후회가 돼서 고등학교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는 이번에도 심하게 반대했다. 학교는 매일 가야 하니까 나도 포기했다.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려면 엄마인 내가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옛날에 사정상 공부를 하지 못했던 할머니들과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 번 가는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이주여성들에게 진학도 시켜주겠다고 했다. 주간반뿐만 아니라 야간반도 있는데다가 사정이 생겨 빠져도 봐주는 학교여서 좋았다. 일주일에 딱 두 번만 가면 되는 곳이었는데, 전화해서 못 간다고 할 때마다 다음엔 꼭 오라고 말해주는 담임선생님이 있어 정말 좋았는데 가족들의 끈질긴 반대로 결국 그만두었다.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엄마가 한국어를 모르면 아이도 무시를 당하거나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나에게 무언가 질문했을 때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나 시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시어머니는 “일을 시키려고 데려왔는데! 네가 뭔데! 공부하고 싶으면 집에서 나가! 공부하려면 필요 없다!” 하고 소리치곤 했다. 가족들은 툭하면 내게 나가란 소리를 했다. 나는 정말 일꾼으로 이 집에 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빈손으로 왔잖아, 네 것은 없어!
일꾼들은 돈이라도 받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었다. 받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남편과 같이 일을 했지만 남편이 주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처음부터 시어머니에게 “너는 빈손으로 왔잖아, 네 것은 없어!”라는 말을 매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그런 말을 들으니 이 집도, 이불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갖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은 “돈을 벌고 싶으면 네가 나가서 벌어와. 근데 넌 외국인인데 밖에서 벌 수 있겠냐? 누가 외국인을 쓰겠냐?”라며 비웃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돈이 필요해서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려고 하자 남편과 시어머니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농사지어 번 돈은 전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가 관리했다. 시어머니는 작은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거기에서 버는 돈도 시어머니 것, 남편이 농사지어서 번 돈도 시어머니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10만 원씩 시어머니에게 돈을 받았는데 그것도 몇 달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전기세나 수도세도 시어머니에게 받아서 냈다. 집안 살림이나 돈 관리는 모두 시어머니가 했다.
병원을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갈 때마다 만 원씩 받아서 병원비와 차비를 했다. 잔돈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남편이 남은 돈을 내놓으라고 닦달을 했다. 가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그냥 줘버렸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그때마다 남편이나 시어머니에게 얘기를 했고, 그러면 시어머니가 사오거나 같이 사러 가서 시어머니가 돈을 내곤 했다. 남편은 그마저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물건을 살 때마다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하냐며 따지고 들었다. 아이 물건을 많이 사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기껏해야 기저귀, 분유, 물티슈 등을 샀고 옷은 전부 동서 아이들 옷을 얻어다 입혔다. 정말로 필요한 물건들만 얘기하는데도 왜 필요하냐고 따지는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지만 매번 남편이나 시어머니에게 부탁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 지갑에는 천 원밖에 없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은 돈이 많이 들 거라며 아이도 낳지 말자고 했던 사람이다. 어린이집도 돈 많이 든다고 병설유치원이나 되면 보내라고 했다. 남편은 돈을 벌 생각도 관리할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전부 시어머니에게 줘버리면 그만이었다. 일이 없을 때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거나 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했다. 포도를 수확해서 버는 돈 2,000만 원이 1년 수입의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은행에 진 빚 갚고, 밀린 비료값과 농약값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1년 내내 빚지고 농사지어서 다시 갚고, 다시 1년 내내 빚내서 농사지은 다음 다시 갚고, 계속 그렇게 반복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남편은 적금도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라도 내 통장을 만들고 싶었지만 남편이 외국인에게는 통장을 안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남편 이름으로 된 통장이나 카드를 썼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다니고 나서야 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농협뿐만 아니라 다른 은행에서도 다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남편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어주었다. 분명 내 이름으로 된 통장임에도 남편은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내 통장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나는 몇 번이나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니 내가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네가 알아서 뭐할 건데!”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은행에 찾아가보니 외국인등록증만 가져오면 비밀번호를 바꿀 수 있다고 해서 바로 비밀번호를 바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욕을 하며 화를 냈지만 나는 내 통장이니 내 것이라고 맞섰다. 시어머니도 그게 왜 네 것이냐며 화를 내셨지만 동서가 도와줘서 겨우 내 통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통장에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2년 동안 들어왔던 기본 지원금이 조금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농사일을 같이 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돈은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캄보디아 고향집에 전화할 때도 전화기에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그냥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은 국적도 받고 싶었는데 한국에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한국 국적이 없다. 남편에게 받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나 혼자 국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남편이 안 해주니까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다가오자 국적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국 국적을 신청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겨우 국적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신청해놓고 몇 개월 만에 쉼터에 오고 말았다. 국적이 없어서 집을 나와도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나와버렸다. 3년간 나를 때렸던 남편은 내가 가출을 했다고 경찰에게 거짓말을 했고 국적 신청을 취소해버렸다.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때리고
남편이 나를 때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온 지 3년이 되어가던 즈음이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남편은 심한 욕을 하곤 했는데, 그래도 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같이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폭력이 시작됐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몸을 때리면 멍이 들고 쉽게 눈에 띄니까 몸 대신 머리만 계속해서 때렸다. 머리카락을 붙잡고 벽에다 나를 던지기도 했다. 하도 머리를 때려서 머리에 상처도 많이 났고 머리가 계속 아팠다. 몸도 점점 말라갔다. 아이가 커서 웬만한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이 앞에서 나를 계속 때렸다. 아이가 울면서 싸우지 말라고 하면 TV를 크게 틀어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놓고 때리기도 했다. 너무 서러워서 아이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 남편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남편에게 맞은 지 2년 정도 되던 어느 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선생님들에게 상담을 받으며 남편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말해봤자 늘 내가 참아야 한다는 말만 들어서 도움받길 포기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남편의 폭력을 신고할 수도 있고, 쉼터에서 지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참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