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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본명:Norma Jeane Mortenson

성별:여성

국적:아메리카 > 북아메리카 > 미국

출생:1926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쌍둥이자리)

사망:1962년

직업:배우

기타:밴나이스 고등학교

최근작
2023년 8월 <[수입] Marilyn Monroe - Norma Jeane [180g 핑크 컬러반 LP]>

본명은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 제과점을 하는 아버지인 에드워드 모텐슨과 글래디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29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멕시코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어머니 글래디스는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한 여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딸을 버리고 가출을 해 버렸고, 여생의 대부분을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고아원에서 나온 먼로는 이후 이집 저집에서 양녀로 떠돌면서 살아야 했다. 배우로서의 꿈을 갖고 학교 연극반에서 활동을 하던 먼로는 16세때 학생회 간부인 제임스 도거티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가 2년여만에 헤어졌다. 그 사이에 낙하산 공장에 취직했다가, 육군 홍보 사진이 잡지에 실려 일약 주목을 받게 되어 모델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때 갈색이었던 머리 색깔을 금발로 물들이게 된다.

1948년, 20세기 폭스사와 주급 125달러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예명 마릴린 몬로도 이때 만들어졌다. 폭스에서는 연기 교습을 거쳐서 1948년에 영화 〈Scudda-Hoo! Scudda-Hay!〉로 데뷔하였지만 잠깐 지나가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서 출연한 〈The Dangerous Years〉에서도 단역이자 결국 계약은 1년만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49년 〈Ladies Of The Chorus〉라는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이것은 그녀의 제대로 된 첫 출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콜럼비아와의 계약이 끝나자, 다시 모델로 일을 계속했는데, 이때 찍은 사진들 중 하나가 나중에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캘린더용 누드 사진도 있었다.

슬랩스틱 코메디의 대가 마르크스 형제들의 마지막 영화인 〈Love Happy〉(49)에 출연했고, 명장 죤 휴스턴(John Huston) 감독의 범죄 영화 〈The Asphalt Jungle〉(50)에서 비록 작은 역이지만 이름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여성 영화의 거장 조셉 L.맨키위츠 감독의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50) 또한 비록 작은 조연이지만 당대의 스타들과 공연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출연한 B급 영화에는 약간 모자라는 듯한 금발여자 역할들이었다. 1953년, 헨리 해서웨이 감독의 〈나이아가라(Niagara)〉에 바람난 유부녀 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주연인 조셉 코튼과 진 피터스를 압도했고,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에 대담한 노출의 의상, 뇌살적인 유혹의 포즈, 그리고 독특하게 엉덩이를 흔드는 이른바 '몬로 워크(Monroe Walk)'를 선보여 전세계 남성들의 간장을 녹여놓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서 같은 해에 출연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londes)〉는 그녀의 배우 생활에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작품이 된다. 또 코메디인 〈백만 장자와 결혼하는 법(How To Marry A Millionaire)〉에서는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성공작이었다.

해를 넘겨 54년에는,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에서 뮤지칼의 여왕 에텔 머만(Ethel Merman)을 비롯한 여러 관록파 뮤지칼 스타들과 손색없이 공연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부 영화인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에 출연하여, 단순한 섹스 어필만이 아닌 연기자로서의 진지한 자세에 도전함으로써 만능의 재주꾼임과 함께 컬러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도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입증했다.

54년에 그녀는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Joe DiMaggio)를 만나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야구와 포커에만 신경을 쓰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고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그들은 같은 해에 불과 9개월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55년에는 그녀의 영화 인생에 있어서 전반기를 결산한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에 출연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다시 한번 일으켰다. 로맨틱 코메디의 거장인 빌리 와일더 감독은 당시 최고 인기의 코메디안 이었던 톰 이웰(Tom Ewell)과 그녀를 짝지워서 그녀의 매력을 한껏 살린 작품을 만들었다.

1950년 〈이브의 모든 것〉으로 만난 극작가 아서 밀러와 195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여행을 겸해서 갔던 영국에서 그녀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왕자와 무희(The Prince And The Showgirl)〉(57)를 찍었다. 그리고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59)는 비평가들의 격찬과 함께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배우로서의 대성공과는 달리 그녀의 사생활에는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매우 심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던 그녀는 매스컴의 집요한 추적, 밀러의 지성에 대해서 느끼는 열등감, 우수한 연기자가 되려는 강박 관념 등이 시종 그녀를 괴롭혔고,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로 겨우겨우 버텨나가게 되었다. 잠을 이루기 위해서 수면제로 거의 일상적으로 복용하여 정신적 파탄을 초래했다. 밀러와의 사이는 벌어졌는 데다가, 60년작 〈사랑을 합시다(Let's Make Love)〉는 평판도 신통치 못한 데다가 공연한 이브 몽땅(Yves Montand)과 염문까지 일으켜 다시 한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61년에는 밀러가 그녀를 위해서 대본을 써 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녀가 헐리우드의 제왕 클라크 게이블, 당대의 최고 미남 스타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공연하여 화제의 작품이었으나 비평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 영화의 개봉을 1주일 앞두고 밀러와 몬로는 마침내 이혼을 발표했다. 이것이 61년 1월로써 그들의 결혼은 5년만에 끝이 났고, 몬로는 정신적으로 더욱 피폐해져갔다.

다음 작품인 〈Something's Got To Give〉는 전라의 수영씬을 촬영하는 등 재기를 위한 의욕을 한때 불태웠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그녀로 인한 촬영 차질이 계속되자, 마침내 제작자는 그녀에게 지불한 거액의 출연료까지 포기하고는 제작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완성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1962년 8월 5일 저녁 7시경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음날 아침 죽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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